2014년 9월호

려명黎明

7장 순미야 같이 가자

  • 이원호

    입력2014-08-20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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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려명黎明

    일러스트·박용인

    “그럼 어떻게 하죠?”

    정순미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전 정말 강계로 간다고요.”

    아직은 두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 이들이 위장한 보위부원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때 사내가 풀썩 웃었다.

    “우리가 보위부 정보원 같았으면 진즉 동무 데리고 갔지요. 안 그렇습니까?”



    “…”

    “이렇게 트럭에 숨어 타고 북행한 것만으로도 중죄지요. 가서 취조를 받으면 술술 자백하게 될 것이고.”

    “…”

    “우리가 참 답답해서 동무한테 말해준 겁니다. 놔두려다 이 사람이 우리도 좋은 일 한번 해보자고 해서요.”

    “두 분 아저씨 아주머니는 정말 강 넘어서 가세요?”

    “그래요.”

    이번에는 여자가 대답했다. 머리를 든 여자가 정순미를 보았다. 장터의 소음이 들려오고 있다. 오후 8시 15분이다. 8시가 넘으면서부터 손님이 모여드는 것이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옌지에 사는 친척이 차주 김씨하고 잘 압니다. 그래서 강계까지 태워다 주기로 친척하고 차주하고 거래가 된 것이라고요.”

    주위를 둘러본 여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차주는 우릴 어떻게 못해요, 하지만 아가씨는 위험해.”

    그때 정순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들거려서 차체를 잡고 겨우 섰다.

    “감사합니다, 은혜 잊지 않을게요.”

    “어디로 가시려고?”

    남자가 묻자 정순미는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목이 막혔기 때문이다. 갈 곳은 생각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 무작정 일어섰을 뿐이다. 그때 여자가 물었다.

    “강계에서 어떻게 할 작정이었수?”

    “거기서 만포를 거쳐 국경을 넘으려고….”

    “어이구!”

    혀를 찬 여자가 신음을 뱉으며 일어섰다. 허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여자가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지도만 보고 올라오다니, 정말 답답한 아가씨로구먼, 큰일 나겠어.”

    “이봐 어쩌려고 그래?”

    남자가 묻자 여자는 내쏘듯 대답했다.

    “그럼 가만두란 말야?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줘야지.”



    그 시간에 윤기철은 술잔을 들었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식당 안으로 신이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어?”

    하면서 술잔을 내려놓았더니 임승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불렀다.”

    “아유, 냄새.”

    하면서 신이영이 다가왔으므로 윤기철은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을 본 신이영이 옆쪽 자리에 앉으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아니, 그게….”

    “그면 왜 그케 똥 밟은 얼굴이야?”

    “이 여자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불렀다.”

    신이영의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임승근이 끼어들었다.

    “네가 늦으니까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말야.”

    “아, 됐어, 됐어.”

    술잔을 쥐면서 신이영이 두 남자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무슨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어? 내가 끼면 안 돼?”

    “안 될 거 없어, 바로 그대 이야긴데.”

    임승근이 능글능글한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뭐 임신과 중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거든.”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신이영이 윤기철을 보았는데 못 들은 표정을 짓고 있다. 노련한 반응이다. 그때 윤기철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더 이상 정순미의 이야기는 끝이다. 임승근은 그래서 신이영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동무, 어디까지 가시오?”

    여자가 묻자 트럭 운전사가 대답했다.

    “강계 가오.”

    “잘됐다.”

    반색한 여자가 트럭 운전사 쪽 받침대에 올라섰다. 정순미는 바짝 붙었고 여자가 운전사에게 서둘러 말했다.

    “동무, 내 동생 좀 강계로 먼저 데려다주오. 물론 차 삯은 내지.”

    “왜? 장터 일 다 봤소?”

    운전사가 여자와 정순미를 번갈아 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50대쯤으로 마른 얼굴, 작업복 차림이었는데 농장 트럭은 엔진 소음이 요란했다. 장터 위쪽의 갓길 주차장까지 나온 둘이 막 떠나려는 트럭을 잡은 것이다. 여자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강계 인민병원 앞까지 얼마 드릴까요?”

    “중국돈 있어요?”

    불쑥 운전사가 묻자 여자는 버럭 소리쳤다.

    “인민폐는 안 받소?”

    “장터 나온 분이니까 중국돈 있으면 주시오.”

    “얼마?”

    “70원.”

    “50원으로 갑시다. 난 30원에도 다녔소. 내 동생이 급해서 그래.”

    “누가 다쳤소?”

    “아, 글쎄.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해서 동생 먼저 보내려고.”

    “알겠습니다.”

    운전사가 선선히 승낙하자 여자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50위안 지폐를 꺼내 정순미에게 건네주었다.

    “자, 병원 앞에서 내려서 저 동무 줘라.”

    “나아, 참.”

    운전사가 쓴웃음을 짓더니 정순미에게 소리쳤다.

    “빨리 타시오!”

    정순미가 여자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물론 여자에게 20달러를 주고 중국돈 100위안을 받았다. 그것으로 여자는 흥정을 한 것이다. 정순미가 트럭에 오르자 여자는 차체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말했다.

    “병원에서 기다려라 응?”

    “예, 언니.”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린 정순미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자 여자가 소리쳤다.

    “이년아!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벌써부터 울고 난리야!”



    오늘밤 신이영은 더 적극적이었다. 자세를 바꾸면서 끈질기게 엉켰다. 그런데 윤기철이 그럴수록 냉정하게 받아들이자 신이영의 반응은 더 격정적이 됐다. 이윽고 신이영이 터지면서 윤기철을 부둥켜안았다. 절정은 언제나 새롭지만 오늘밤은 특별했다. 밤 12시 반이 돼간다. 영등포역 근처 모텔이다. 식당에서 임승근과 헤어지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제는 서로의 몸에 익숙해져서 절정이 가라앉았을 때 어떤 자세가 자연스러운지도 안다. 몸이 떼어지자 둘은 서로 마주 보고 누웠다. 서로의 다리가 한쪽씩 엇갈려 꼬였고 신이영은 윤기철의 팔을 벤 자세다. 아직도 가쁜 숨결 때문에 신이영의 배가 윤기철의 배에 부딪힌다. 불을 환하게 켜놓아서 신이영의 이마에 밴 땀이 반짝였다. 신이영이 윤기철의 턱에 더운 숨결을 뿜으면서 물었다.

    “같이 근무하던 여직원이 탈북을 하고 있다면서?”

    순간 숨을 들이켰던 윤기철이 길게 숨을 뱉었다.

    “빌어먹을 자식.”

    “선배한테 그렇게 욕해도 돼?”

    “항상 그래, 그 자식은 저 혼자 뛰어본 적이 없어.”

    “무슨 말야?”

    “시끄러워.”

    그때 신이영이 손을 뻗쳐 윤기철의 낭심을 움켜쥐었다. 세게 움켜쥐었기 때문에 윤기철이 입을 딱 벌렸다.

    “아, 놔!”

    “형이 날 불러서 긴장을 풀어준 거야.”

    “안 놔?”

    “고맙다고 해야지,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지 모르잖아?”

    윤기철이 어깨를 늘어뜨렸고 신이영의 손에도 힘이 풀렸다.

    강계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시가 됐다. 50㎞도 안 되는 거리를 달리는 데 3시간이 걸린 셈인데 도중에 엔진이 고장 나서 한 시간쯤 멈춰 섰기 때문이다. 강계 인민병원은 정문에 불을 켜놓았지만 한산했다. 가끔 병원 근무자가 들락거리는 것은 강계에서 유일한 야간 근무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정문에는 경비원이 서 있었기 때문에 정순미는 병원에서 100m쯤 떨어진 길가의 골목 안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박씨라고만 알려준 그 여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2시까지는 오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한 시간 남았다.

    여자를 만나면 따라갈 작정이었다. 어떻게든 북조선, 내 조국을 빠져나간다. 그 생각뿐이다.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중국 땅에 닿고 나서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무릎 위에 턱을 고이고 두 손으로 다리를 감은 자세로 앉아 정순미는 윤기철을 떠올렸다. 개성에서 떠나기 전부터 틈만 나면 윤기철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기운을 내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무의식 중에 윤기철이 떠오른다. 가방 안에 든 윤기철의 휴대전화가 그 증거물이다. 정순미는 윤기철을 떠올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지쳤기 때문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갈 거야?”

    신이영이 묻자 윤기철은 머리만 끄덕였다. 둘은 그대로 알몸인 채 엉켜 있었는데 신이영이 시트로 하반신을 가렸다. 이맛살을 찌푸린 신이영이 짧게 입맛 다시는 소리를 냈다.

    “영화 스토리 같네.”

    “상관없어.”

    “회사는 휴가 냈다면서?”

    “응.”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

    “글쎄.”

    “잔다고 했다면서?”

    “누가?”

    “자기가.”

    잠깐 눈을 껌벅이던 윤기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임승근한테 한 말이다.

    “아, 그거야….”

    “그거야 뭐?”

    “한번 박으면 어색한 것도 없어지고, 또….”

    말을 멈춘 윤기철이 입을 딱 벌렸다. 신이영이 또 낭심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말을 꼭 그렇게 할래?”

    “안 놔?”

    윤기철이 눈을 부릅뜨고 성을 냈다.

    “놔, 혼나기 전에.”

    “어머, 성내는 것 좀 봐.”

    눈을 흘긴 신이영이 손을 놓았을 때 윤기철이 잇새로 말했다.

    “나도 어색해서 그런다. 왜?”

    신이영은 눈만 껌벅였고 윤기철의 말이 이어졌다.

    “황당하기도 하고, 이게 무슨 사랑 놀음인 줄 알아? 아냐, 그 계집애 맛도 별로 없을 거야, 하지만….”

    숨을 들이킨 윤기철이 길게 뱉고 나서 신이영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래, 딴 놈들은 다르겠지. 하지만 난 그냥 놔둘 수가 없어. 못 본 척할 수가 없단 말야.”



    문득 눈을 뜬 정순미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눈동자의 초점을 잡았을 때 시계가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소스라치며 일어서던 정순미가 다리가 꼬여 앞으로 뒹굴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골목을 나온 정순미는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병원 정문 앞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모여 있다. 환자가 들어온 것 같다. 병원 정문이 30m쯤 거리로 다가왔을 때다.

    “이봐.”

    뒤에서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에 정순미는 숨을 들이켰다. 멈춰 선 정순미가 몸을 돌리자 옆쪽 골목에서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여자의 남편이다. 남자의 뒤에는 박씨가 따르고 있다.

    “어디 있었던 거야?”

    꾸짖듯 물었지만 어둠 속에서 드러난 박씨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감돈다.

    “걱정했잖아? 보이지 않아서.”

    “여긴 불안해서 저쪽 골목 안에 숨어 있다가….”

    “우린 10분만 더 기다리다가 가려고 했어.”

    남자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리 둘도 힘들단 말야. 그러니까 속 썩이지 말라고.”

    그러고는 남자가 뒤쪽으로 발을 떼었다.

    오전 5시 반, 눈을 뜬 신이영이 옆자리를 보았다. 비어 있었으므로 머리를 돌린 신이영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윤기철을 보았다. 팬티 차림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윤기철과 시선이 마주쳤다.

    “뭐 해?”

    “걔가 지금쯤 어디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

    “일루 와.”

    신이영이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새벽이야, 한 번 더 해줘.”

    의자에서 일어선 윤기철이 순순히 다가오자 신이영이 웃었다.

    “옳지, 착하지.”

    “갈 데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북한을 도망쳐 나오는 거야.”

    윤기철이 옆에 눕자 신이영이 서둘러 팬티를 벗겼다. 신이영은 알몸이다.

    “내가 제 부모를 잡아넣은 북한 당국 욕을 했더니 제 조국을 욕하지 말래.”

    “벌써 섰네.”

    윤기철의 남성을 두 손으로 주무르던 신이영이 감탄했다.

    “불쌍하잖아?”

    “내가 위에서 해줄게.”

    신이영이 윤기철의 몸 위로 오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는 계속 걔 생각이나 해.”



    “김씨가 한참을 찾으러 다녔어.”

    박씨가 삶은 강냉이를 먹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어디 쪽으로 갔느냐? 무슨 말을 한 거 없느냐? 하고 여러 번 묻다가 의심하는 얼굴로 힐끗거리기도 하더구먼. 그러더니 30분이나 늦게 출발한 거야.”

    그러자 남편이 거들었다.

    “돈은 이미 받았겠다. 없어졌으면 잘됐다, 하고 떠나는 게 정상인데 그렇게 애타게 찾는 걸 보면 무슨 속셈이 있었던 거지.”

    “우리 아저씨가 그자하고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도 저질렀을 놈이야.”

    박씨가 맞장구를 쳤을 때 남편이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곳은 강계 동북방으로 화평군 가산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산기슭의 민가에 들어온 셋은 삶은 강냉이로 아침을 먹는 중이다. 오전 7시 반, 강계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트럭을 얻어 타고 온 것이다.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몸을 세운 남자가 정순미를 똑바로 보았다.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마른 체격에 피부는 검다. 키가 크고 눈매가 날카로워서 군인 같다.

    “우린 넉 달 전부터 탈북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야. 지금까지 모두 계획대로 온 셈이지. 다만 한 가지만 빼고.”

    사내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한 가지란 바로 정순미라는 표시다. 그때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헛기침 소리가 났다.

    “계시오?”

    남자가 방문을 열자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지요?”

    “어서오세요.”

    그때 사내 하나가 들어섰는데 방 안을 휘둘러보던 시선이 정순미에게 멈췄다.

    “셋이라고 해서 좀 이상했는데.”

    방 윗목에 앉은 사내가 박씨 남편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오다가 만났는데.”

    박씨 남편이 대답했을 때 박씨가 거들었다.

    “개성에서부터 같이 왔어요. 안돼 보여서 데려왔는데 도와주세요.”

    사내는 안내원이었다. 숨을 죽이던 정순미도 입을 열었다.

    “저기, 국경만 넘게 해주시면 은혜 갚을게요.”

    “동무, 얼마 있소?”

    불쑥 사내가 물었으므로 정순미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사내는 50대쯤 돼 보였는데 피부가 붉고 건장한 체격이다. 잘 먹는 중국 사람 같다. 세 쌍의 시선을 받은 정순미가 사내에게 되물었다.

    “얼마 드리면 되죠?”

    “여기서 국경 넘게 해주는 데 중국돈 4000원은 받아야 돼.”

    숨을 들이켠 정순미가 머리를 내저었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중국돈 없는데요.”

    “그럼 달라가 있어?”

    “예, 조금.”

    “달라면 500달러, 이 동무들도 다 그렇게 계산했어.”

    “그렇게는 없는데요.”

    “안 돼, 그럼. 동무는 여기 남아.”

    그때 박씨가 정순미에게 물었다.

    “얼마 있어?”

    “200달러요.”

    그때 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덮였다.

    려명黎明
    “윤기철이 무슨 일이야?”

    박도영이 묻자 이인수는 어깨를 조금 올렸다가 내렸다. 2년간 LA총영사관에서 근무하고 나서 붙은 버릇이다.

    “정기휴가입니다. 좀 쉬려는 것 같습니다.”

    “자주 나오면서 휴가까지 추가해?”

    소공동 사무실 안이다. 벽시계가 오전 10시 반을 가리킨다.

    “일주일 휴가를 냈다니까 그럼 앞으로 일요일까지 끼어서 열흘 동안 노는군.”

    혼잣소리로 계산한 박도영이 입맛을 다셨다.

    “수당까지 받았으니 잘 쓰겠다.”

    바쁜 일은 없기 때문에 윤기철을 빨리 돌려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시간에 윤기철은 집에서 어머니 이정옥과 마주 앉았다. 아버지 윤덕수는 일 나갔고 동생 윤영철은 도서관에 가 있어서 집 안에는 둘뿐이다.

    “너, 고민 있냐?”

    주방 식탁에 턱을 고이고 앉은 윤기철에게 이정옥이 묻고 나서 바로 말했다.

    “그, 가구회사 다닌다는 애, 내키지 않으면 놔둬. 신경 쓸 거 없어.”

    “나, 신경 안 써.”

    “어젠 승근이하고 같이 있었냐?”

    “응.”

    “너, 여자 없어?”

    이정옥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때 윤기철이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 나 내일 중국에 좀 갔다올게.”

    “중국에?”

    “응.”

    “출장이야?”

    순간 시선을 든 윤기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출장 생각은 안 했다. 머리가 꽉 막힌 것 같아서 그냥 중국에 간다는 말만 하려고 했다. 집에는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내일 몇 시에 출발이냐?”

    “오늘 비자 받고 비행기표 끊어야 해.”

    “언제 오는데?”

    “사오일 걸릴 건데, 내가 전화할게.”

    “전화기를 잃어버렸으면 전화기만 새로 사면 되지 왜 번호까지 바꾸냐?”

    이정옥이 불평했지만 곧 화제를 바꿨다.

    “글쎄, 느 아버지가 차를 바꾼단다. 3년밖에 안 됐는데 왜 또 바꾸는지 모르겠다….”

    윤기철은 소리 죽여 숨을 내뱉었다. 지금 정순미 이야기를 꺼내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우선 자신부터 그렇게 살았으니까. 내일 중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직장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막말로 잘나가던 인생 조지는 수가 있다. 윤기철이 이정옥을 물끄러미 보았다. 양념통에 조미료를 넣고 있던 이정옥이 머리를 들고 윤기철을 보았다.

    “왜? 엄마한테 할 말 있어?”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봐?”

    “그냥.”

    자리에서 일어선 윤기철이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가 돼간다. 말 않고 떠나는 것이 낫겠다.



    “비자 받았고 내일 오전 10시 반 비행기입니다.”

    수화기에서 여행사 직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여권 가지러 오시지요. 티켓도 준비해놓겠습니다.”

    “한 시간 안에 도착하지요.”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윤기철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전에는 택시 탈 때마다 아버지를 만날까봐 초조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택시를 탄 지 10여 년 됐지만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택시가 여행사 근처의 역삼동 길가에 멈춰 섰을 때였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신이영이다.

    “뭔 일인데?”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고 대뜸 물었더니 신이영이 되물었다.

    “지금 어디야?”

    “여권 찾으려고 여행사 앞에 도착.”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또 자게?”

    “응.”

    “차라리 애 데리고 와라. 내가 가슴 아파서 못 보겠다.”

    “그럴게. 같이 저녁 먹자.”

    숨을 들이켠 윤기철에게 신이영이 말을 이었다.

    “마침 잘 생각했어. 6시 반에 우리 집 근처 한식당에서 만나. 애 데리고 갈게.”

    노 선생이 담배를 입에 물더니 라이터를 켜고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정순미가 쪼그리고 앉아서 노 선생의 옆모습을 본다. 오후 3시 반, 이곳은 양강도 김형직군의 외진 마을이다. 이곳까지 트럭을 얻어 타고 한 시간, 걸어서 두 시간이 걸렸는데 이제 국경까지는 5㎞가 남았다고 했다. 노 선생으로 불린 사내는 이 근처에 사는 당원 같았다. 오면서 만난 여러 명이 먼저 인사를 했고, 보위부 초소도 일행 셋을 이끌고 거침없이 통과했기 때문이다. 초소 경비원은 노 선생을 보더니 경례까지 올려붙였다.

    정순미는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노 선생한테는 미화 200달러를 주고 합의를 했다. 일행에 낀 셈이 될 것이다. 500달러를 불렀지만 박씨 부부가 그렇게 주었는지 알 수 없고 200달러를 내놓았더니 한참이나 궁시렁대다 마지못한 척 집어넣었다. 박씨가 거들지 않았다면 더 오래 불평했을 것이다. 담배 연기를 뱉고 난 노 선생이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왔지만 앞으로가 문제요. 저녁 7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12시까지는 국경에 닿아야 한단 말이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은 셋은 잠자코 시선만 준다. 박씨 부부도 긴장한 듯 노 선생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8월 중순이었지만 북방의 날씨는 서늘하다. 정순미가 숨을 죽이고 노 선생을 응시했다.

    “지난주에 비가 많이 내려 강이 깊어지고 폭이 넓어져서 헤엄쳐 건너야 됩니다. 내가 튜브를 준비해놓았으니까 꽉 잡고 있으면 조금 떠내려갔다가 중국 쪽에 닿을 수 있을 거요.”

    “중국 쪽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박씨가 묻자 노 선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도 이상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중국 측 안내원을 말하는 것이다. 노 선생의 시선이 정순미에게로 옮겨졌다.

    “하나 더 추가됐다는 말도 했어요. 계산은 그쪽에서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정순미가 얼굴을 굳혔지만 말을 받지는 않았다. 당연히 중국 측 안내원도 안내비를 내라고 할 것이다. 그때 박씨가 또 거들어주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상의하는 거지. 지금은 강 건너는 게 가장 문제야.”



    빈말인 줄 알았더니 신이영이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한정식 식당의 방 안이다.

    “왜? 놀랐어?”

    웃음 띤 얼굴로 물은 신이영이 아이에게 말했다.

    “동우야. 아저씨한테 인사해. 엄마 친구야.”

    “안녕하세요.”

    귀엽게 생긴 아이가 두 손을 배에 붙이더니 스튜어디스처럼 인사했다.

    “어이구, 그래.”

    윤기철이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지갑을 꺼내 5만 원권 한 장을 빼 내밀었다.

    “아나, 과자 사 먹어.”

    아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먼저 신이영 눈치를 보았다.

    “응, 동우야. 받아. 엄마도 받았단다.”

    신이영이 정색하고 말하자 아이는 돈을 받더니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냐.”

    자리에 앉았을 때 종업원 둘이 교자상을 받쳐 들고 왔다. 그야말로 한식 정식상이다. 상을 훑어본 윤기철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거 다 먹고 오늘밤도 열심히 해줄게.”

    윤기철의 시선이 동우에게 옮겨졌다.

    “동우도 같이 데리고 가자. 재우고 나서 뛰면 되지 뭐.”



    노 선생이 앞장을 섰고 그다음이 정순미, 박씨, 그리고 박씨 남편이다. 횡대로 선 일행은 산비탈을 돌아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산을 넘어 다시 황무지로 나온다. 오후 8시 40분. 7시에 마을 변두리의 민가를 떠나 두 시간째 걷고 있지만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걸은 거리로만 치면 8㎞ 가깝게 걸은 것 같은데 국경은 아직 먼 모양이다. 이제 주위는 짙은 어둠에 잠겼고 습기에 찬 바람결에 피부가 끈적였다. 두 번째 낮은 산을 겨우 올랐을 때 앞서가던 노 선생이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쉽시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셋이 쓰러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때 나뭇가지를 잡고 선 채 노 선생이 말했다.

    “검문소를 피해 오느라고 좀 돌았소. 이제 1㎞ 남았소.”

    긴장한 셋이 어둠 속에 선 노선생을 보았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노 선생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비가 오시는군. 비가 오시면 국경 경비대가 귀찮아서 순찰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아.”

    나무둥치에 기대앉으면서 노 선생이 정순미한테 물었다.

    “중국 측 안내원한테 안내비 낼 돈은 있어?”

    “얼마 줘야 하는데요?”

    “차로 움직여야 할 테니까 찻값을 받아야겠지. 거긴 여기처럼 걸어서 오고가는 데가 아냐.”

    정순미가 입을 다물었다. 수중에는 이제 230달러쯤 남았다. 575달러 중에서 그렇게 남은 것이다.

    한정식 반찬을 안주로 소주를 세 병 마셨는데 안주가 좋았기 때문인지 술을 마신 것 같지도 않았다.

    “한 병 더 마실까?”

    빈 술병을 눈으로 가리킨 윤기철이 말했다.

    “난 술을 많이 마실수록 잘하잖아? 그러니까 딴 걱정 말고.”

    어느덧 동우는 잠이 들어서 요처럼 깔아놓은 방석 위에 눕혀졌다. 그때 신이영이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묵직했는데 언뜻 보아도 돈뭉치다.

    “자, 받아.”

    “뭔데?”

    긴장한 윤기철이 묻자 신이영이 봉투를 흔들었다.

    “돈이 필요할 거야. 그래서 달러로 1만 달러 가져왔어.”

    “…”

    “자기는 가진 돈 중국돈으로 바꿔 갖고 가. 현지에서 필요할 테니.”

    신이영이 윤기철의 술잔 옆에 봉투를 내려놓더니 웃었다.

    “그리고 다녀와서 한번 잘 해주라. 기회가 있다면 말야.”



    어둠에 덮인 강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점점 커지더니 지금은 후드득거리며 옷과 배낭 위로 떨어졌다.

    “자, 정신 바짝 차리고.”

    노 선생의 목소리가 커졌다.

    “튜브를 서로 묶었으니까 떠내려가도 같이 떠내려갈 거요.”

    빗방울이 강에 떨어지는 소리가 컸다. 옆에 나란히 선 박씨 부부도 강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는다. 노 선생 말로는 강폭이 40m 정도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20m로 깊이가 남자 가슴 정도였는데 지금은 중심 부근이 키가 넘을 것이라고만 한다. 노 선생은 같이 강을 건너지 않는 것이다. 밤 11시 5분. 10시 30분에 도착해서 저쪽 안내원을 찾고 준비하는 데 30분 넘게 걸렸다. 그때 강 건너편에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였다. 딱 한 번, 지금이 세 번째라는데 이번은 정순미도 보았다.

    “자, 출발!”

    노 선생이 손바닥으로 먼저 박씨 남편의 등을 쳤다.

    “이게 마지막 불빛이야! 지금 가야 돼!”

    그러고는 이어서 박씨의 등을, 맨 나중에는 정순미의 배낭을 치는 게 아니라 밀었다. 그때 박씨 남편이 강물로 뛰어들었고 정순미가, 박씨가 따라 뛰어들었다. 강가에서 강물로 뛰어든 순간 정순미는 숨을 들이켰다. 강물이 금방 가슴께까지 찬 것이다. 강물의 유속은 빠르다. 튜브를 두 손으로 단단히 감아 안고 있지만 사정없이 떠내려간다. 몸이 박씨에게 부딪혔고 물살에 휩쓸려 빙글 돌았다. 이제 발은 강바닥에 닿지 않는다. 빗방울이 얼굴을 세차게 때렸고 강물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컸다.

    “아이구 엄마.”

    갑자기 튜브가 당겨지면서 앞쪽에서 박씨의 비명이 들렸다. 튜브끼리 나일론 끈으로 묶여졌고 거리는 2m 정도다. 그런데 박씨가 보이지 않는다.

    “날 꽉 잡아!”

    박씨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물살에 휩쓸린 튜브가 빙글 돌면서 정순미는 물속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물을 삼킨 정순미가 머리를 들었을 때 몸은 빠르게 흘러오는 중이다. 다행히 튜브는 놓치지 않았다.



    소주 한 병을 더 마시고 났더니 그냥 갈 것 같았던 신이영이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잠이 든 동우를 윤기철이 업고, 신이영이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뭐, 동우 데리고 들어오니깐 더 자연스럽다, 야.”

    동우를 침대 위에 눕히면서 신이영이 말했다.

    “나도 미쳤지. 정상이 아냐.”

    궁시렁대면서 동우 옷을 벗기는 신이영에게 윤기철이 말했다.

    “나 이번에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래도 회사 그만두게 될 것 같아.”

    신이영은 잠자코 동우의 옷을 벗겼고 윤기철의 말이 이어졌다.

    “일이 잘 되었건 안 되었건 간에 말야. 내가 정순미하고 남북한 비밀 연락원 노릇을 하고 있었거든.”

    “…”

    “국정원에서 언짢게 생각할 거야.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이지. 하지만 말해주었다면 북한 측에 정보를 줄 가능성이 있었어.”

    “…”

    “내가 정순미를 도와준 것이 곧 드러날 테니 난 개성에 못 가. 그렇다고 본사 근무가 제대로 될 리도 없고.”

    그때 신이영이 몸을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두 눈이 번들거린다.

    “너 나하고 같이 살래? 동우하고 셋이.”

    숨만 들이켠 윤기철에게 신이영이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혼자 돌아왔을 때지. 그 기집애 하고 같이 온다면 하는 수 없지. 숨어서 가끔 짜장면 노릇을 하는 수밖에.”

    “…”

    “혼자 돌아왔을 땐 내 빌딩 관리인이라도 시켜줄게. 밥 걱정은 마.”

    그러더니 답답한 듯 재킷을 벗어 의자 위로 던졌다.

    “하지만 둘이 왔을 땐 못해. 내가 미쳤냐? 네 밥까지 먹여주게?”

    밤 12시가 돼간다.

    “아줌마! 아줌마!”

    장대같은 비를 맞으며 강가를 헤매던 정순미가 지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쪽은 자갈땅이다. 그리고 짙은 어둠 속인 데다가 빗발마저 거칠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강을 건너온 것은 맞다. 물을 다섯 번도 더 들이켰을 것이다. 잡았던 튜브를 놓치고 기를 쓰고 강가로 빠져나온 후 기진해서 누워 있다가 일어난 것이다. 얼마나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손목시계를 보았더니 어둠속에서 야광침이 12시 반을 가리킨다. 30분쯤은 박씨를 찾으려고 헤맸다고 쳐도 강에 빠져서 30분도 더 허우적거린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곳은 어디쯤이란 말인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 정순미가 발을 떼었다. 이제 더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야 한다. 국경에서 벗어나야 사는 것이다.



    오전 9시 50분, 인천공항의 게이트 앞에 앉아 있던 윤기철이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제 10분 후면 옌지행 비행기의 탑승이 시작된다. 버튼을 누르자 곧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전원을 꺼놓았기 때문에….”버튼을 누른 윤기철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자신이 정순미한테 준 휴대전화에 남긴 메시지다.

    “이 번호로 연락을 해. 내 새 휴대전화 번호야. 나 11시 반쯤 옌지에 도착할 거야, 기철.”

    정순미가 전원을 켜기만 하면 이 메시지와 통화를 시도했던 기록이 주르르 휴대전화에 입력될 것이었다. 그때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렸으므로 윤기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에는 관광객이 많아서 표 끊기가 어려웠다고 했는데 지금은 탑승객이 별로 많지 않다. 20여 명의 중년 남녀 관광단이 떠들썩할 뿐이다.



    “10시 30분발 옌지행입니다.”

    이인수가 말하자 박도영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본부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소공동 사무실에 나왔을 때는 담배를 피운다. 이인수도 같이 피우기 때문에 이곳이 흡연실인 셈이다.

    “휴가 내고 놀러 가는 거야?”

    건성으로 물은 박도영이 다시 신문을 넘겼을 때 이인수가 앞쪽에 앉았다. 벽시계가 10시 40분을 가리킨다. 윤기철이 탄 비행기가 막 이륙했을 시간이다.

    “근데 윤기철의 휴대전화 말입니다.”이인수도 신문을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분실했다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두고 새 휴대전화를 다른 번호로 구입했더라고요.”

    “…”

    “분실했다면 다 취소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냥 놔두었습니다.”

    “…”

    “이상해서 통화를 시도해보았더니 전원이 꺼져 있더라고요.”

    윤기철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인 것이다. 보호 차원에서 관리를 해야 한다. 따라서 휴대전화 상황이 체크된 것은 기본 과정에 속한다. 머리를 든 박도영이 담배 연기를 뱉고 나서 물었다.

    “그럼 윤기철이 휴대전화를 두 개 들고 다닌단 말인가?”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근데 왜 휴대전화를 잊어버렸다고 해놓고 다른 번호를 알려준 이유가 궁금하단 말이지?”

    “모르고 취소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새 휴대전화 구매 시 그것부터 확인하니까요.”

    “옛날 휴대전화는 갖고 다녀?”

    “그걸 조사해야겠습니다.”

    “해봐.”

    절차는 간단하다. 오늘 오후에는 옛 휴대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밝혀질 것이다. 물론 고의로 소멸했을 때도 마지막 위치가 나온다.



    누운 채로 정순미는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꿈을 꾼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잔다. 정순미는 그런 경험이 많다.

    “그래, 가자.”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시간이 됐다, 순미야.”

    집 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외출복 차림이었는데 밝은 표정이다. 그리고 손에 번쩍이는 롤렉스 시계를 찼다. 윤기철이 가져온 시계다.

    “난 윤기철 씨 기다려야 돼.”

    정순미가 말했지만 가슴이 미어졌다. 부모를 따라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가서 기다려요. 내가 윤기철 씨하고 같이 갈게.”

    “순미야, 우리하고 같이 가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런 놈 기다릴 것 없다. 우리하고 장군님께 가자.”

    “어머니.”

    마침내 정순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꿈이다. 둘이 꿈에서 부른다.

    “미안해, 어머니. 미안해, 아버지.”

    “잘 살아라, 내 딸.”

    아버지가 이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딸 순미야.”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했을 때 정순미는 눈을 떴다. 방 안이다. 중국식 나무 침대 위에 자신이 누워 있다. 벽에 어수선하게 걸려 있는 옷가지. 창밖은 환하다. 비가 그쳤는가? 정순미의 머릿속에 어젯밤 일이 조금 전에 꾼 꿈처럼 떠오른다. 강가에서 빠져나와 두 시간쯤 걸었을 때 민가가 나왔다. 무서워서 그 민가도 피하고 더 걷다가 마침내 지쳐서 길가의 빈 사당 처마 밑에 앉았다. 시계를 보았더니 오전 4시 반. 30분 정도 쉬었을 때 비도 그쳤다. 그때 인기척이 나면서 앞에서 할머니가 다가왔다. 손에 괭이를 든 할머니다. 사당 앞을 지나던 할머니가 정순미를 보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냐?”

    중국어다. 중국어를 배워서 기본 회화는 할 수 있었던 터라 정순미가 자리에서 힘들게 일어나면서 말했다.

    “하루만 쉬게 해주시면 대가를 드릴게요.”

    정순미가 등에 멘 배낭을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미화 10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몇 시간만 쉬고 떠나게 해주세요.”

    “국경 넘어왔어?”

    할머니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셋이 강을 건넜는데 둘은 물에 떠내려갔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저런.”

    혀를 찬 노인이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몇 시간만 쉬었다가 가. 당국이 알면 나도 봉변당해.”

    이렇게 된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알게 된 관광객 인솔자가 윤기철을 옌지 시내 호텔까지 버스로 데려다주었다. 물론 관광객이 묵는 호텔이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국제호텔’은 한국인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방을 잡고 들어섰을 때는 오후 12시 20분, 윤기철은 옷도 벗지 않고 침대 끝에 앉아 휴대전화 버튼을 눌렀다. 정순미가 휴대전화를 켰다면 바로 전화를 했을 것이므로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신호음이 두 번, 세 번, 네 번째 울리고 나면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멘트가 나온다. 그런데 신호음이 다섯 번, 여섯 번 울렸으므로 윤기철은 숨을 죽였다. 눈을 치켜뜨고 앞을 보았지만 초점이 멀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났을 때 부르르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으므로 정순미는 깜짝 놀랐다. 민가의 방 안이다. 오후 12시 20분, 이제 젖은 옷을 말리는 참이어서 내복만 걸쳤다. 심장박동이 거칠어졌으므로 정순미는 옆에 내려놓은 휴대전화를 봤다. 발신자 번호판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다. 진동음이 방 안에 가득 덮이는 것 같다. 이윽고 정순미는 휴대전화를 집고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소리치듯 응답하는 목소리는 윤기철이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 정순미가 주먹을 입에 붙이고 짧게 흐느꼈다.

    “여보세요? 순미? 순미야?”

    그새를 못 참고 윤기철이 다그치듯 불러댄다. 정순미는 숨을 고르고 나서 대답했다.

    “네, 저예요. 순미요.”

    “그래, 알아. 근데 거기 어디야? 나왔구나? 그렇지?”

    “네. 어젯밤에 강 건넜어요.”

    정순미가 그 순간 딸꾹질을 했으므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야?”

    놀란 윤기철이 소리쳐 묻자 정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녜요. 아무것도.”

    “지금 어디야?”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중국사람 집인데 쉬고 있어요.”

    “거기가 어딘지 물어봐. 내가 바로 갈 테니까.”

    “네, 10분쯤 후에 다시 전화 걸어주실래요?”

    “그러지.”그래놓고 자기는 서두르면서 정순미한테 당부했다.

    “조심해.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여기가 어디죠?”

    정순미가 묻자 할머니가 대답했다.

    “운더야.”

    “지도 있어요?”

    “지도를 뭣하러 갖고 있어? 여기는 양무현 운더라고.”

    “양무현 운더. 버스 정류장은요?”

    “여기서 산길을 따라 5리(2.5km)쯤 가야 나와.”

    “어디 가는 버스인데요?”

    “퉁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 이름은요?”

    “미관.”

    “양무현인가요?”

    “맞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정순미가 숨을 골랐을 때 할머니가 지그시 시선을 주었다. 70대쯤 됐을까? 집은 기역자(ㄱ) 모양으로 지어졌고 뒤쪽에 창고까지 세워져 있었지만 노인 혼자 사는 것 같다.

    “버스 정류장에 공안이 있어.”

    놀란 정순미가 시선만 주었을 때 노인이 말을 이었다.

    “거기서 버스 타면 안 돼. 여기서 탈북자들 많이 잡혀갔어.”

    정순미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이야기를 마친 정순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기 배터리가 다 돼가요.”

    “응?”

    놀란 윤기철이 앞쪽을 쏘아보았다. 이건 전원이 꺼진 상태보다도 더 나쁘다.

    “그럼 거기 할머니 전화번호라도 알려줘. 우리가 사례를 한다고.”

    그랬다가 윤기철은 그것이 무리한 부탁임을 깨달았다. 심호흡을 한 윤기철이 휴대전화를 고쳐 쥐었다.

    “내가 갈게.”

    “잠깐만요. 할머니 전화번호 물어보고 올게요.”

    정순미가 다급하게 말하더니 5분쯤 지난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집 전화번호가 있어요.”

    “됐어. 불러줘.”

    윤기철은 정순미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적으면서 온몸에 찬 기운이 스치고 지나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정순미는 매달리고 있다.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그 상황에 맞춰줘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윤기철이 어금니를 물고 나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양무현 미관요?”

    이맛살을 찌푸린 안내원이 머리를 기울이더니 지린성의 60만분의 1 지도를 폈다. 그러고는 투덜거리며 찾기 시작했다.

    “국경 근처라는데 도대체 어디야?”

    국제호텔의 로비 안은 더 시끄러워져 있다. 조금 전 관광객 한 무리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 소란통에 윤기철이 조선족 안내원 하나를 골라 일당 50달러로 계약을 한 것이다.

    “아, 여기 있다.”

    사내가 찾았는지 지도 위에 얼굴을 붙이고 소리쳤다.

    “여깁니다.”

    윤기철은 사내의 손끝이 짚은 곳을 보았다. 국경에서 5㎞쯤 떨어진 마을이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윤기철은 미관 아래쪽에 작은 점처럼 찍힌 곳에 ‘운더’라고 적힌 것을 보았다. 바로 저곳에 정순미가 있다. 숨을 들이켠 윤기철이 허리를 펴고 안내원을 보았다. 30대쯤의 안내원은 이제 윤기철의 눈치를 살핀다. 그때 윤기철이 말했다.

    “승합차 한 대 빌립시다.”

    “승합차를요? 그거 비쌀 텐데요.”

    심호흡을 한 윤기철이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서둘면 안 된다. 머릿속에서 자꾸 그 말이 맴돌았지만 심장은 거칠게 박동한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떨었다. 서둘러 꺼내 보았더니 발신자가 이인수다. 국정원이 웬일인가?

    이원호

    려명黎明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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