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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시인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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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출근하자마자 열어본 메일, 첨부된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부산한 아침 기운 속에서도 고요에 빠져들었다. 여일한 아침 사무실 풍경, 일과 관련된 수런대는 사무적인 언어들과 해내야 할 과업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했다. 나무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간한 저자가 선물로 보내준 사진. 한 해에 사흘만 피는, 그것도 밤에만 피는 ‘아마조니카빅토리아’ 수련의 우아한 모습은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을 일깨웠다.

메일에는 이제나저제나 연꽃 필 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던 저자가 한밤중 달려가서 수련을 만나고 왔다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아마조니카빅토리아’ 수련이 있는 충청도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의 “오늘 밤이다”는 암호문 같은 전갈을 받고 망설임 없이 밤길 떠나는 모습은 떠올릴수록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감동한 마음에 글로 덧붙일 말을 찾기가 좀 구차스러울 정도였다.

사흘 밤만 꽃피우는 그 수련의 운명도 절박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 운명을 만나기 위해 밤길 떠나는 중년 사내의 모습도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읽혔다. 어떤 비즈니스 성과도, 어떤 경제적 이익도, 어떤 세속적 목적도 없이 연꽃을 만나러 먼 길 떠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목적 없는 순수한 예술적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에 고양되는 존재인 것이다.

문득 내가 매일같이 만드는 문학·예술 책들이 아름다움에 고양되는 인간을 위한 작업이란 각성이 찾아들었고, 본연의 일상 업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세상살이, 밥벌이의 어려움으로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읽는 미당 서정주의 시다. ‘아마조니카빅토리아’ 수련 사진을 본 날, 다시 한 번 읊조린 서정주의 시는 업무로 다소 연약해진 마음의 벽을 쳤다.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이 어디 연꽃을 소유했다고, 연꽃과 만난 시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하겠다 하겠는가. 그저 만났을 뿐인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했을 뿐이다.

수련은 무슨 말을 저렇게 낮게 속삭이고 있을까

몇 달 전 만났던 수련 그림도 떠오른다. 일본 나오시마 지추미술관에서 본 클로드 모네의 수련. 가로 폭이 6m나 되는 모네 그림을 보기 위해서 신발을 벗고 하얀 미술관 바닥을 맨발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네의 수련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 수련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수련이 내게 조금씩조금씩 다가오는 형상이었다. 가까이 가니 수련의 형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추상적인 물감덩어리가 보일 뿐이었다. 뒷걸음질치면 선명하게 빛이 되어 반짝이는 수련이 보였다. 클로드 모네가 백내장을 앓게 된 이후 그린 이 수련 그림을 “종교적인 무엇을 뛰어넘는 개념의, 만다라와 같은 상징”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미술관 소유주의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수련은 무슨 말을 저렇게 낮게 속삭이고 있을까?// 다채색의 빛으로 흩뿌려지는/ 수련의 말을 듣고 모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공기 중에/ 꽃불처럼 터지는 그 말들을/ 화폭에 그려 나갔다” (채호기, ‘모네의 수련 1’ 중에서)

시인은 모네 그림에서 수련의 말들을 들어보려 한다. 나도 수련이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모네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으니 어쩌면 무슨 말인가를 들었던 것도 같다.

산업화로 버려진 작은 섬, 나오시마에 문제적인 미술관을 세우고,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환상적인 일이지만 버려진 폐가를 이용해 집의 특성을 살리는 작품으로 한 채 한 채가 미술관 역할을 하는 것은 경이로웠다.

무엇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나지막한 베네세 호텔 침대에 누웠을 때, 유리창으로만 된 한쪽 벽면에 가득 찬 바깥 풍경은 흔하게 보던 하늘과 바다, 나무와 풀, 꽃이었을 뿐인데 어느 미술작품 못지않은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보려고 하니 보인 것이다. 내가 나오시마의 모든 것을 보고 마음에 새기려 작정하니 한 송이 꽃도 한 그루의 나무도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 유리창 벽을 열어젖히자 날던 새가 베란다까지 그대로 들어와 앉아 울었다. 나만을 위해 나오시마가 편집해준 자연 풍경과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그저 풍경이지만, 마음에 새기니 아름다움이 되었다. 몇 달이 흘러도 눈 감으면 나오시마에서 본 모네의 수련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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