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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감사하지 않는 죄에 대하여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인생에 감사하지 않는 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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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감사하지 않는 죄에 대하여

예브게니 오네긴
알렉산드르 푸슈킨 지음,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젊은 시절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저 사람이 저토록 멋진 사람이었나’ 싶게 변한 경우가 있다. 그때 사람들은 젊은 시절 자신의 안목 없음을 한탄한다. 하지만 변한 것이 오직 상대방뿐일까. 더 많이 변한 것은 어쩌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닐까.

젊을 때는 화려한 겉모습과 대단한 조건에 시선을 빼앗기던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면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삶을 멋들어지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더 깊고 더 오래가는 가치에 눈을 뜨는 것이다. 좀 더 성숙해진 우리 자신의 눈에 비친 상대방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 사람의 외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본래 지닌 미덕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야말로 성숙한 관계의 시작이 아닐까.

푸슈킨의 소설로 시작돼 오페라나 연극을 통해 전 세계에 불멸의 인물이 된 예브게니 오네긴. 그가 바로 이 ‘뒤늦은 눈뜸’의 주인공이다. 오네긴은 젊은 시절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하지만 그 우울증은 좌절된 꿈이나 견딜 수 없는 고난 때문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권태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었다. 재산도, 여인도, 명성도. 오네긴은 그 무엇에서도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화려한 외모와 엄청난 재산, 천부적인 재능까지 갖춘 매력 만점의 남자였다. 무엇을 더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오네긴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여인의 구애를 받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할 만한 여자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타찌야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네긴은 갑자기 사망한 친척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시골마을로 내려온다. 그는 이제 소란스러운 사교계에도 시큰둥해지고, 여인들의 미소에도 괘념치 않으며, 유혹하는 일에도 넌더리가 났고, 친구들과의 우정까지도 지겨워한다. 결투나 총, 칼 등 당시 러시아 남성들을 사로잡은 자극적이고 열정적이며 치기어린 젊음의 상징들에도, 오네긴은 흥미를 잃어버린다.

순수와 열정의 화신, 타찌야나

도시 청년이던 오네긴이 시골에 내려오자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인다. 사람들도 바뀌었고, 풍경도 바뀌었고, 풍습도 바뀌니, 그는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그마저 싫증을 내고,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열정적인 문학청년 렌스키다. 오네긴은 렌스키가 결혼 상대로 생각하던 올가와 그녀의 언니 타찌야나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고, 순진한 처녀 타찌야나는 오네긴에게 반하게 된다.

남자들에게 적당히 ‘밀당’을 할 줄 아는 새침데기 올가와 달리, 타찌야나는 연애의 비법 따위는 전혀 모른다.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 다가오는 사랑의 불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철없는 염세주의자 오네긴에게 푹 빠져버린 타찌야나는 아무 꾸밈없이 자신의 감정을 남김없이 고백해버린다.



당신은 사람을 싫어하신다더군요. 이런 촌구석에서는 모든 게 지루할 테지요.

그러나 저희는… 저희는 내놓을 게 없어요.

순진하게 당신을 반기는 일 외에는.

(…) 당신은 왜 이곳에 오셨나요?

안 오셨다면, 이 잊혀진 쓸쓸한 시골에서

저는 영원히 당신을 모른 채,

이런 끔찍한 고통도 모른 채 살았을 텐데요.

어수룩한 마음의 동요도

시간이 가면 가라앉아 (미래는 모르는 법이죠?)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아

정숙한 아내가 되고

후덕한 어머니가 되었을 텐데요.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타찌야나는 스스로의 전 생애를 던져 사랑의 불길에 뛰어든다. 그는 오네긴을 유혹하기는커녕, 오네긴에게 먼저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써서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고백해버린다. 편지는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영혼의 해맑은 순수를 눈부시게 증언한다. 하지만 오네긴은 그녀의 순정을 받아주지 않는다. 타찌야나는 올가와 달리 어여쁜 얼굴도, 장밋빛 뺨도, 관능적인 미소도 지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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