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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셀러’와 책의 굴욕

TV에 떠야 팔린다?

  • 정해윤│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미디어셀러’와 책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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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판매량 급감 이어 영상매체 종속
  • ● TV의 부록 혹은 파생상품으로 전락
  • ● 독자가 ‘매개물’ 없이 책 만나야
‘미디어셀러’와 책의 굴욕
최근 출판시장의 키워드는 TV나 영화 같은 미디어의 홍보효과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일컫는 ‘미디어셀러’다. 일각에선 ‘TV셀러’, ‘스크린셀러’라고도 한다. 교보문고가 집계한 2014년 종합베스트셀러 1, 2위에 오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미 비포 유’도 여기에 해당한다.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5위 안에도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꾸뻬씨의 행복여행’‘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두근두근 내 인생’ 등 6종의 미디어셀러가 포함돼 있다. 지난해 말 드라마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만화 ‘미생’은 누적 판매부수 200만 부를 돌파했다. 역시 미디어셀러 약진의 대표사례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젠 완연히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미디어 효과가 일시적 판매 신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0주 이상 이어진다. 책의 영상 및 인터넷 종속 현상이 가시화한 셈이다.

‘오발탄’에서 ‘국제시장’으로

미디어셀러가 베스트셀러가 된 사연은 제각각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나 ‘미생’은 원작을 영상화한 뒤에 비로소 원작이 뜬 경우다. ‘창문 넘어…’는 2013년 출간 직후 잠시 반짝하다 곧 집계 순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2014년 영화의 개봉과 함께 되살아나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정상을 차지했다. ‘미생’은 웹툰(인터넷 웹에 게재되는 만화)으로 시작했다. 이어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가 뜨자 만화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미 비포 유’는 출간되고는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4월 ‘TV 책을 보다’에 소개된 후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미국에서도 TV ‘오프라 윈프리 쇼’에 소개된 책이 종종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우리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다 죽어가던 책들의 운명을 반전시킨 이러한 사례들은 영상 미디어의 강력함, 그리고 책의 미약함을 입증한다.

최근엔 간접광고 방식인 PPL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10년 전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모모’라는 책이 등장했다. 이 책은 그해 베스트셀러가 된 후 스테디셀러가 되어 2010년 밀리언셀러에까지 등극했다. 2010년 TV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이 소개된 뒤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지난해 TV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선 ‘에드워드 툴레인의 이상한 여행’이 화면에 비쳤다.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출판업계 인사는 “출판계로선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웃픈’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출판업계 인사는 “영상 미디어의 발달과 인터넷·스마트폰의 일상화로 세계적으로 책의 판매량이 줄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판매량 감소세가 너무 가파르다. 급기야 영상매체에 종속되는 ‘책의 굴욕’을 맞고 있다”고 했다.

미디어셀러는 출판가에 양날의 검이다. 지난해 영화 ‘인터스텔라’가 국내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러자 ‘코스모스’ 같은 우주과학서 판매가 늘었다. 이는 영상 미디어와 책의 선순환 사례다. 그러나 대부분의 PPL은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출판사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다. 출판인들이 무엇보다 걱정하는 것은 활자 텍스트와 영상 텍스트의 헤게모니가 역전됐다는 점이다.

TV가 보급되기 전, 한국 영화의 전성기엔 문학작품을 영상화한 이른바 문예영화가 유행했다.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소설가 이범선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런 전통은 TV시대에도 이어졌다. 1980년대 KBS의 ‘TV문학관’이 대표적 사례다. 이 시기 콘텐츠의 핵심은 단연 종이책이었다. 영상물은 책의 파생상품이었을 뿐이다. 예술적 성취의 근원이 책이라는 점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관계가 완전히 역전돼 영상으로 성공한 콘텐츠가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변호인’ ‘명량’ ‘국제시장’처럼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나 ‘응답하라 1994’와 같은 인기 드라마가 속속 소설로 재탄생한다.

한국문학의 위기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2014년은 ‘소설의 해’라고 불린다.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0위권 내에 소설이 6권이나 포진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소설은 조정래의 ‘정글만리’가 유일하게 턱걸이했을 뿐이다. 소설 분야 통계에서도 상위 15위권 내에 한국 소설은 ‘정글만리’에 김진명의 ‘싸드’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추가된 게 전부다. 한국 작가가 쓴 문학 책은 안 팔리고, 안 팔리니 창작열이 식기 마련이고, 그러니 더 안 팔리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2004년 일본의 지한파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에 관한 논쟁이 촉발됐다. 일부 문학인들은 한국에서 일본 소설이 득세하고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는 점을 들어 한국이 근대문학의 정점에 도달한 적도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곧장 영상과의 융합이 시도되는 것은 근대가 여물기도 전에 이를 허물고 탈근대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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