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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김광희 ‘세노야’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故 권태균 | 사진작가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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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봄, 고은과 서정주가 해군 함정을 타고 남쪽바다로 나갔다.
  • 서늘한 새벽바람, 멸치잡이 배에서 “세노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은은 귀를 세운다.
  • 그해 겨울, 종로의 막걸릿집에서 취한 고은이 타령조 한 구절을 읊조린다.
  • “세에노야, 세에에에노야~ 싸안과 바다에에 우리가 싸알고….”
  • 서울대 음대생 김광희가 재빨리 오선지를 채우고, 친구 최양숙이 처음 노래를 뽑았다.
멸치잡이 어부의 장단이 고은의 詩로, 클래식 포크로
“미당(未堂)이 사고를 쳤지, 작은 배 하나 내놓으라고. 그런데 부두에 다가가니 정말 해군 함정 한 척이 턱하니 버티고 있더군. 그 배를 타고 남해안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밤새 술을 마셨지. 취하면 자다가, 술이 깨면 다시 마시고. 시간이 많이 흘렀고, 어느 순간 새벽바람이 서늘하더군.

그런데 저 멀리서 구슬픈 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세야, 노야, 세노야, 세노야…. 언뜻 들으면 무슨 민요 같기도 하고…. 가까이 가보니 멸치잡이 배에서 흘러나오더군. 뱃사람들이 멸치잡이 그물을 당겨 올리며 구성지게 부르던 후렴구, 세야, 노야…애잔한 선율에 순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고, 오랫동안 그 곡조가 잊히지 않더군.”

미당, 소동파, 적벽부

1968년 봄, 시인 고은과 미당 서정주는 진해 육군대학 초청으로 문학 강연에 나선다. 당시 고은은 불면증과 심각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자신의 이름 앞에 ‘聖(성)’ 자를 붙이는 등 스스로를 사회적 파산 상태로 만드는 자폭행위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저술활동은 왕성하게 한 것으로 추측된다. 널리 알려진 에세이집 ‘G선상의 노을’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이 같은 해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주로 신구문화사 편집실에 기거하며 최인훈, 염무웅, 신동문과 어울려 술 마시기에 열중하던 그는 용돈이 궁했고, 따라서 육군대학 초청은 요즘 말로 ‘당근’이었던 셈이다. 당시 육군대학 총장은 문학을 좀 아는 분인지라 고급장교를 대상으로 한 교양강좌에 파격적으로 미당과 고은을 함께 초대했다.

강연 후 저녁 자리에서 술이 몇 순배 돌자 미당이 총장더러 ‘미당스럽게’ 파격적인 생떼를 부린다. 한려수도를 만끽하고 싶으니 옆 부대 해군에 부탁해 작은 함정을 하나 내달라는 것. 이 대목에서 미당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상상했다고 전한다.

적벽부. 만고의 명문 아니던가. 인생무상을 느낄 때마다 술과 함께 서로서로를 위로하던 산문시. 동파가 달 밝은 적벽에 지인들과 배를 띄우고 놀다가 인생의 유한함을 절감하는 내용이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니 천지에 하루살이가 붙어 있는 것과 같고 망망대해에 한 알의 좁쌀처럼 보잘것없다는 그 시절 동파의 마음과 미당의 마음이 겹치는 대목이다.

배가 준비됐다. 요즘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아직은 모든 게 어수룩하던 시절, 멋쟁이 장군이던 육군대학 총장은 고민 끝에 해군에 부탁해 두 시인을 위한 소형 함정을 준비한 것이다. 기쁨에 들뜬 시인은 술과 안주를 함정에 가득 싣고 바다로 산보를 떠나게 된다. 멀리 보이는 진해 고절산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괴짜 시인을 태운 배는 물 맑은 봄바다를 미끄러져 나갔다.

그 봄 새벽녘 아득한 물안개를 뚫고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귓바퀴에 손을 모으고 집중한 고은의 귀에 청승맞은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세에에~ 노오야~ 세에에~ 노오오야~” 소리는 남해안 인근 바다에서, 어부들의 입에서, 손끝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물을 당겨 올릴 때 지르는 일종의 장단 맞추기 또는 흥얼거리는 후렴구였다.

뱃사람들의 후렴구

함정이 가까이 다가서자 멸치 잡는 풍경이 한껏 펼쳐졌다. 파도는 굴곡진 뱃전에 포말을 만들고, 고기 잡는 어부들의 동작 또한 또렷했다. 미당은 술에 취해 나가 떨어진 지 오래. 혼자 남은 고은이 흥얼거렸다.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임에게 주리~” 이렇게 흥얼거리며 기억된 시구는 뒷날 절창의 노랫말로 쓰이게 된다.

발표 이래 수십여 년 동안 클래식 반열에 올라 한국인을 위무해온 ‘세노야’의 노랫말은 이렇게 탄생한다. 그러나 노래로 등장하기까지는 반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노래 ‘세노야’의 탄생 장소는 남해가 아니라 서울 동숭동 언저리 선술집이다. 노래는 술김에, 그것도 아주 우연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1968년, 겨울이 깊을 대로 깊은 12월이었다. 아직은 서울대학교가 건재하던 동숭동 입구 종로5가 선술집 한구석에서 주거니받거니 마시기 시작한 술자리가 이미 자정을 넘긴 채 새벽이 가까워왔다. 이른바 낭만시대.

“어이 땡중! 노래 한 곡 불러보슈,시인입네,허무주의자입네,완전한 예술지상주의자입네 떠벌리지 말고 노래나 한 곡 불러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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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故 권태균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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