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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불같은 40년 사랑 저 동백처럼 붉었다

가왕(歌王)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故 권태균 | 前 신구대 교수

불같은 40년 사랑 저 동백처럼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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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합대회 끝자리에서, 대학 MT에서, 직장 회식에서 흥이 최고조에 달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한 노래. 수많은 아줌마 부대를 공연장에 불러내 ‘오빠!’를 외치게 한 노래. 한국 대중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한국인의 생필품’ 같은 노래….
불같은 40년 사랑 저 동백처럼 붉었다

‘가왕(歌王)’ 조용필의 공연 광경.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1970년대 끝자락, 지금은 전설 속 과거가 된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안이었을 게다. TV를 켜주는 요즘과 달리 그때 고속버스는 음악을 나지막하게 들려주곤 했다. 선잠에 떨어진 내 귓가에 빠빠빠빰 빠빠빰 빠빠빰 빠 빠빠밤… 기타음이 들려왔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전주 부분이었다. 형, 누나들이 즐겨 듣던, 이른바 ‘세시봉 세대’들의 감미로운 통기타 음악에 길들어 있던 나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강렬한 비트 사운드에 놀랐다. 도대체 이 가수가 누굴까.

그것이 ‘가왕(歌王)’ 조용필의 등장을 알리는 전주였음을 눈치챈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지금은 장년 세대를 ‘한 큐’에 이어주는 만인의 노래가 됐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개개인에겐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왔다. 지금이야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자타가 공인하는 ‘단군 이래 최고 가수’지만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내던 조용필에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를 한국인에게 각인 시킨 노래다.

한국인 인기가요 압도적 1위

이 노래는 1970년대 말 대중에게 알려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발표된 해는 1972년이다. 황선우가 작사, 작곡했다. 그러나 작곡 부분은 원곡 가수 김해일의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일부 수정한 것으로, 1990년 저작권 소송에 휘말려 일부 금액을 배상하고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탄생 과정이 어찌됐건 이 노래는 지난 세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요’ 설문에서 압도적 1위에 올랐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한국인의 생필품 같은 노래’라 일컫는다.

이 노래는 한국인에게 부산의 ‘지리 정보’를 확실하게 각인하는 기능도 했다. 이 노래 덕분에 동백섬도 알았고, 오륙도라는 바위섬이 시각에 따라 5개 또는 6개 섬으로 보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더 나아가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남녘 항구도시로의 여행을 꿈꾸게 된다.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도 있다. 1974년 남북공동성명으로 조성된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1976년에 러시를 이룬 조총련 재일동포 모국 방문 시점과 묘하게 맞물렸다는 등의 정치적 해석이다.

단합대회 끝자리 합창 단골곡이 되면서 대학 MT에서도, 졸업 후 직장 회식에서도 흥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이면 등장하는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1970년대 말부터 어느덧 40년 가까운 세월의 이끼가 끼었지만 그 위력은 절대지존. ‘불후의 명곡’을 단 한 곡만 꼽는다면 바로 이 노래가 아닐까. 또한 이 땅의 수많은 ‘아줌마 부대’를 공연장에 불러내 ‘오빠!’라고 고함치게 한 최초의 노래였다. 그래서 1970년대, 지금 기성세대의 감성을 지배하던 폴 모리아 악단은 내한공연에서 이 곡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하기도했다. 당시 타이틀은 ‘Please Return To Pusan Port’였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재일동포 귀국 행렬, ‘동백섬’ ‘부산항’ ‘오륙도’와 같은 토속 지명으로 대중의 감정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음의 전개가 혁신적인 트로트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 노래는 가수 조용필을 국가적인 인물로 자리매김시켰다. ‘국가 기간 통신사’인 연합통신이 1995년 광복 50년을 맞아 ‘반세기 한국 사회를 움직인 대표인물 50명’을 선정했는데, 가수로는 유일하게 그가 포함됐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등장해 한국 대중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게 선정 이유다.

불같은 40년 사랑 저 동백처럼 붉었다

여행객들이 카메라에 풍경을 담기 바쁘다. 유람선에선 ‘돌아와요 부산항에’ 딱 한 곡만 반복해서 들려줬다.

情恨의 꽃, 동백

노래를 관통하는 단어는 첫머리에 등장하는 ‘꽃피는 동백섬’이다. 노래가 원인을 제공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공교롭게도 부산의 상징 꽃은 동백꽃, 상징나무는 동백나무다. 그래서 부산에 가면 동백꽃 상호가 곧잘 눈에 띈다. 해운대 바닷가에 우뚝 선 웨스틴 조선호텔의 커피숍도 동백이라는 뜻의 ‘카멜리아(Camellia)’다. 1980년대 초까지는 ‘동백’이었는데 촌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틈에 영어 이름으로 갈아치웠다.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부관페리 이름도 ‘카멜리아호’이고, 카멜리아 아파트도 있다.

요즘에야 대접을 제법 받지만 동백꽃은 오랫동안 억울한 시절을 겪었다. 동백은 울릉도, 제주도 등 남부지방, 서해 대청도에 걸쳐 자생하는데, 한때 왜색(倭色)이 짙다는 등 일본을 상징하는 식물로 오해받기도 했다. 1964년 무려 35주 동안 가요순위 1위를 차지하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오래도록 금지곡이 된 데는 동백나무 자생지가 일본이라는 무지(無知)가 톡톡히 한몫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비단 이미자와 조용필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동백꽃은 한국인의 꽃이다. 시간을 거슬러 봐도 한국인의 동백꽃 사랑은 흘러넘친다. “아우라지 뱃사공이 오기도 전에 싸리골 동백이 다 떨어진다”는 ‘정선아리랑’도 있고,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옛날”이 그립다는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도 있다. 동백은 한국인에게 더없이 애틋한 꽃이지만, 꽃 중에서는 구석에 있는 변두리 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더욱 많은 한국인이 이 꽃을 주인공으로 기쁨보다는 슬픔과 비련의 노래와 시를 읊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동백꽃을 두고 “한국인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정한(情恨)의 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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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故 권태균 | 前 신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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