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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과 베어 문 듯 사각사각 쇠울음 울리고

필사(筆寫)의 귀환, 만년필 예찬론

  • 박종진 | 만년필연구소장, ‘펜후드’ 회장 jj990509@hanmail.net

풋사과 베어 문 듯 사각사각 쇠울음 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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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족의 아날로그 취미로 필사(筆寫)가 새삼 각광 받으면서 만년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는 50, 60대가 주축인데 최근에는 20, 30대 여성의 가입이 부쩍 늘었다.
  • 펜후드 회장이자 국내 유일의 만년필연구소장인 필자는 “주인의 필기 습관에 맞게 조금씩 닳아가는 만년필은 피고 지는 꽃과 같은 생명체”라고 예찬한다.
풋사과  베어 문 듯 사각사각  쇠울음  울리고
문자가 고안된 이래 인류는 수천 년간 손으로 글씨를 써왔다. 중세에 활자(活字)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일상 속 기록의 주된 형태였다. 하지만 이젠 하루 종일 손으로 단 한 글자를 쓰지 않아도 생활에 별 불편이 없는 시대가 됐다. ‘전기글씨’가 주류이고 손글씨는 비주류다.

그런데 요즘 ‘편리한’ 디지털을 밀어내고 ‘불편한’ 아날로그 취미가 각광 받고 있다. 바로 필사(筆寫)다. 사실 디지털은 그리 재밌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편리할 뿐이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필사에는 편리한 것만 빼고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자동차는 편리하다. 하지만 걷기보다 건강하진 않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 순백의 종이에 사각사각 써내려 가는 글씨는 바쁜 일상에 한숨 돌리는 여유와 재미를 준다.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를 컴퓨터 키보드로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손으로 써내려 가보자.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즐거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필기감 좋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해 빈 잉크병이 여러 병 될 즈음, 주인공 서희가 잃은 땅을 되찾는 장면에 이른다. 필사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안겨준다.

만년필은 끈적끈적한 유성 잉크가 아니라 물처럼 잘 흐르고 종이에 잘 흡수되는 수성 잉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볼펜과 구별된다. 바로 이 ‘흡수되는’ 성질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

류현진, 김연아 神技 보는 듯

만년필을 오래 사용한 사람에게선 아름다운 글씨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간결한 동작이 보인다. 무림의 고수가 글씨를 써 초식(招式)을 이루는 듯 매우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것은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물 흐르듯 던지는 류현진 선수의 투구 폼이나 미끄러운 얼음판 위를 3회전 연속으로 도는 김연아 선수의 신기(神技)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류현진, 김연아 선수와 마찬가지로 만년필도 수많은 노력 끝에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상태로 다듬어졌다.

만년필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유적에선 금속의 첨단부를 가진 대롱이 발견됐는데, 바로 이 도구에 잉크를 채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잉크를 저장하고 휴대하는 시도는 계속됐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명 ‘바이온 펜(Bion Pen)’. 1700년대 초반 프랑스 루이14세 때 왕립 기술자인 니콜라스 바이온이 고안한 것이다.

1809년 영국의 발명가 프레드릭 B 홀슈(F¨οlschs)는 만년필 최초로 특허를 취득했고, 같은 해 조지프 브라마(Bramah)는 ‘샘’을 뜻하는 영어 단어 ‘fountain’에서 따와 ‘Fountain Pen’을 특허 등록했다. 이때부터 영미권은 만년필을 ‘fountain pen’으로 불렀다. 동아시아로 유입돼서는 이름 그대로 번역돼 천필(泉筆) 등으로 불리다가, 중의적 의미가 있고 물성(物性)에 더 적합한 이름인 ‘만년필(萬年筆)’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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