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이난영 ‘목포의 눈물’

  • 글 · 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 · 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입력2015-07-22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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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는 이난영으로 대표되고 기억된다. 한국인은 목포를 생각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목포의 눈물’을 떠올린다. 그래서 목포는 이난영 때문에 동경과 그리움의 항구가 된다. ‘목포의 눈물’은 좁은 한반도에서 악다구니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년시절 고향집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노래다.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순전히 개인적인 주장 또는 감상이다. 유년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클레멘타인’ 이다. 1960~1970년대에 꽤나 유명하던 노래다.

    “엄마 엄마 내 죽거든 뒷동산에 묻어줘/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줘….”

    어릴 적,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많이도 따라 부르던 구전 동요다. 고무줄, 공기놀이에 맞춰 불리던 이 노래가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에서 곡조를 따왔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영문과 여자 교생선생님이 칠판에 가사를 써놓고 우리더러 따라 부르게 했다. 교실 뒷자리에 앉은 짓궂은 친구들은 일부러 음정을 틀리게 불렀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교생선생님은 송골송골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열심히 가르쳤다.

    한국판 클레멘타인?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붉은 벽돌 교실 옆에는 요즘은 보기 드문 샐비어와 칸나 꽃이 흐드러지고, 그 향기가 창문을 넘어오던 어느 여름, 까까머리들은 교생선생님의 맨손 지휘에 맞춰 목청껏 이 노래를 불렀다. 장난기에서 시작했다가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로 이어지며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달할 때쯤이면, 싱숭생숭하던 꿈 많은 사춘기, 어떤 녀석들은 제풀에 눈시울도 조금 붉어졌다.

    그랬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애잔한 멜로디와 슬픈 노랫말 덕에 노래는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로 시작되는, 한국인의 정서에 딱 떨어지는 우리말 가사는 박태원이 번안해 보급했다. 그는 ‘오빠생각’으로 유명한 작곡가 박태준의 친형으로 이 노래를 ‘스와니 강’과 함께 3·1운동 직후 이 땅에 소개했다고 전한다.

    나는 애상적인 ‘클레멘타인’과 기막히게 딱 떨어지는 노래가 이 땅에도 하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목포의 눈물’이다. 왜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이 바다 건너 먼 나라 민요 ‘클레멘타인’처럼 여겨지는지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굳이 부연하자면, ‘클레멘타인’은 1800년대 중반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 열악한 환경에서 가혹한 삶을 살던 개척민의 슬픔이 밴 노래라 일제강점기 헐벗은 식민지 백성들이 목메어 부르던 노래의 정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결국 노래에 관한 나의 편향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을 배우기 훨씬 전,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내 유년시절, 어머니는 동구 밖 시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 왔다. 머리에 이고 온 젖은 옷을 말리려고 마당 한 곳의 빨랫줄 바지랑대가 낮아지고, 어머니는 거기에 빨래를 널면서 당신의 애창곡인 “사아아고오옹의 밴노오오래…”를 불렀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치마를 끌며 흉내 내기에 바빴다. 바지랑대에는 고추잠자리가 선명하고 텃밭의 과꽃이 오후 햇볕에 졸고 있던 어느 더운 여름날의 풍경이다.

    유년시절과 ‘중년 증상’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상하게도 어제 일은 생각나지 않는데 아득한 과거의 일이 어제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주변에선 이를 ‘중년 증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 시절 지겨울 만큼 부르던 ‘클레멘타인’은 이제 섭섭하게도 더 이상 이 땅에서 잘 들리지 않아 기억 속 노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끔 술자리에 이어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들을 때 불현듯 또렷하다 못해 어제 같은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노란 호박꽃이 담장 위에 무성하고, 밤이면 마당 구석에 피워놓은 매운 모깃불에 눈물짓던 그런 유년의 날들이다. 그래서 ‘목포의 눈물’을 듣는 순간 나는 예닐곱 살 소년으로 돌아가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그 옛날 시골집 아이가 돼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호남선 열차에 몸을 던져 서너 시간 달리다보면 목포역이 나온다. 기차가 플랫폼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노래. “사아아고오옹의 밴노오오래….” 그 옛날 이난영이 부른 이른바 오리지널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의 노래로, 나아가 전남의 애국가로, 이제 전설이 된 해태타이거즈의 공식 응원가로,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십팔번’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 노래다. 목포역장이 스스로 결정했는지, 아니면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 확인할 길 없지만, 열차가 오고 갈 때마다 목포역에는 늘 ‘사공의 뱃노래’가 흘러나왔다.

    목포항도 마찬가지다. 까마득한 대학시절 홍도, 흑산도를 다녀오던 길에 이용한 목포항 연안부두 선착장에서도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불과 얼마 전에 찾아갔을 때도 ‘목포의 눈물’은 구성지게도 흘러나왔다. 목포에는 눈물이 그칠 날이 없나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애달픈 정조’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울린 노래 ‘목포의 눈물’은, 그러나 격변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정치적인 노래로 탈바꿈한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특별히 호남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 제목을 두고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호남의 눈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노래는 1930년대 ‘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1950년대 ‘비 내리는 호남선’을 거쳐 1980년대 김수희의 ‘남행열차’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호남선 트리오’를 이루게 된다.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호남선 노래는 왜 슬픈가

    소주에 낙지 탕탕이 ‘난영의 슬픔’ 아는 나
    “목이 멘 이별가를 불러야 옳은가,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로 시작되는 ‘비 내리는 호남선’은 이승만 시대에 한 많은 한국인들을 울렸다. 박춘석 작곡, 손로원 작사에 손인호가 부른 노래다. 박춘석은 평생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이 노래로 한동안 고초를 겪었다. 경찰은 이 노래가 1956년 5월 3대 대통령선거 유세 중 공교롭게도 호남선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한 야당 대통령 후보자 신익희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작곡자와 작사자를 몰아붙였다. 결국 신익희 선생이 타계하기 3개월 전에 만들어진 사실이 드러나 이들은 풀려났지만 괴로움을 많이 당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19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는 ‘남행열차’가 등장했다.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라는 노랫말은 억압받던 시절의 슬픔을 노래했다. 야구장에서는 호남을 연고로 한 기아타이거즈의 공식 응원가로, 그리고 대학 MT와 직장인들의 회식 후 노래방 회동에서 ‘떼창곡’으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고 보니 호남선 열차를 배경으로 한 노래에는 모두 눈물이 녹아 있다. ‘호남선 노래’ 관련 노래에는 왜 이다지도 눈물이 많은가. 호사가들은 호남선 열차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많은 노래에 구슬픈 곡조와 비감 어린 노랫말이 많은 것은 조선시대 이후 영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전라도 사람들의 슬픔이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목포의 눈물’은 호남인의 노래라기보다는 한 많은 이 땅 모든 민초의 노래였고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부른 설움의 노래였다.

    노래가 탄생한 역사도 슬프다. ‘목포의 눈물’은 1934년 ‘조선일보’가 문화사업의 하나로 신민요 가사를 공모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목포 출신의 시인 문일석 씨의 작품이 당선됐고, 이 시에다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난영의 본명은 이옥례다. 당연히 목포 출생. 15세 때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태양극단에 입단해 단역가수로서 노래하다가 ‘목포의 눈물’로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목포의 눈물’은 의미도 많고 사연도 많다.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슬픔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호응을 이끌었고, 오늘날까지 묵직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대중음악 장르인 ‘엔카’풍인 탓에 한때는 눈총도 받았지만, 애절한 곡조와 아름다운 가사에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이 곡조의 유장함을 더해 일본인들에게서도 사랑을 받게 된다. 이 노래는 ‘해조곡’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이난영의 대표곡이 됐고 이제는 ‘목포의 애국가’라고 불린다. 워낙 오래된 노래이지만 지금의 젊은 층도 잘 부를 줄은 모를지언정 들으면 누구나 아는 ‘한국인의 노래’가 됐다.

    목포는 이난영이다

    서너 해 전의 일이다. 내가 몸담은 대학의 석사과정 학생들과 작당해 조그마한 아카펠라 그룹을 만들었다. 연말로 예정된 송년의 밤 행사의 피날레를 근사하게 장식하고 싶어서였다. 레퍼토리 선정은 당연히 젊은 그들에게 양보하고, 앙코르곡은 내가 고르기로 했다. 대학원생들이 골라온 노래는 때가 때인 만큼 캐럴 몇 곡과 널리 알려진 클래식 팝송으로 무난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앙코르곡으로 ‘목포의 눈물’을 고르자 그들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차인표가 나오는 영화 ‘목포는 항구다’는 알아도 ‘목포의 눈물’을 모르는 그들은 차마 눈앞에서 드러내진 못했지만 영 못마땅하고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피아노 반주를 부탁하고 즉석에서 내 딴에는 구성지게(?) 이 노래를 불렀고, 그들은 그제야 “노래 제목은 몰랐지만 곡조는 알고 있었다”고들 했다. 내가 그네들의 교수라는 위치가 얼마간 감안됐겠지만, ‘목포의 눈물’은 만장일치 앙코르곡으로 정해졌다.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마음이 짠해오던 연말 송년회 저녁, 예정된 (어느 정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겠지만) 앙코르곡을 부를 순서가 오자 아홉 명의 아카펠라 그룹이 열심히 “사아아공의 배앤 노오오래…”를 불렀다. 20대부터 50대까지 함께 부르는 노래는 차가운 겨울 하늘로 퍼져 나가고 별이 되고 있음을 나는 그날 밤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남쪽 어느 산골의 철부지 아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목포의 눈물’은 그런 노래다. 좁은 한반도에서 악다구니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년시절 고향집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노래다.

    목포는 이난영으로 대표되고 또 기억된다. 한국인은 목포를 생각하는 순간 ‘목포의 눈물’을 반사적으로 떠올린다. 이난영으로 인해 목포는 동경과 그리움의 항구가 된다. 그래서 목포를 찾는 이방인은 도시 곳곳에 있는 난영의 정취를 보고 목포인들의 어마어마한 이난영 사랑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난영 공원도 있고, 이난영 나무도 있고, 이난영 거리도 있다. 유달산 곳곳에서 이난영이 흘러나온다.

    깊은 여름, 깊은 슬픔

    그 선두에 있는 것이 ‘목포의 눈물 노래비’다. 1966년 목포시 죽교동 유달산 등산로 중턱에 세워진 노래비는 한국 최초의 노래비로 인정된다. 당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목포지부가 앞장서 대형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래비는, 조형미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촌스러운 돌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목포의 눈물’을 둘러싼 지난한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 볼품없는 두툼한 화강암 비석 뒤편에 숨은 스피커에서는 난영의 애상 어린 노래가 시시각각 흘러나온다.

    삼학도는 유달산과 함께 ‘목포의 눈물’에 등장하는데, 목포항을 상징하는 두 축에 해당한다. 개발시대 때 섬과 목포항을 연결해 오랫동안 ‘이름만 섬’인 삼학도에 머물렀지만, 행정당국의 결정에 따라 거대한 공사 끝에 다시 예전의 모습인 아담한 사이즈의 섬으로 최근 돌아왔다.

    먹을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목포의 세발낙지를 떠올리게 된다. ‘쓰러져가는 소에게 낙지 서너 마리를 먹이면 벌떡 일어선다’는,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 설명에서 엿볼 수 있듯 낙지는 한국인의 술안주로 단연 인기다. 널리 알려진 식당에서 낙지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지지직’ 불협화음과 함께 낡은 스피커에서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삶의 신산함을 겪은 뒤에 녹음한 것으로 짐작되는, 지독히도 청승맞은 그 노래다. 예전에,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도 ‘목포의 눈물’을 무척 좋아하던 곰 같은 대식가 선배가 말했다. “이난영의 노래는 그가 삶에 찌들려 가혹한 고통을 겪은 뒤에 녹음한 노래가 가장 이난영답다”고. 이제 나는 그 말에 조금은 공감하는 나이가 됐다. ‘낙지 탕탕이’를 안주로 소주를 들이켜는 목포의 여름은 깊을 대로 깊어 가고, 이제 나는 이 비감 어린 노래가 주는 깊은 슬픔을 아는 나이가 됐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연 원앙풍은(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2절 첫 부분의 ‘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은’은 원래 ‘삼백년 원한품은’이었으나 일제가 가사의 내용을 문제 삼자 작곡가 손목인 등이 둘러댄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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