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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반짝이는 등대 불빛을 찾는 밤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멀리서 반짝이는 등대 불빛을 찾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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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반짝이는 등대 불빛을 찾는 밤
무언가를 향해 완전한 사랑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신념, 일, 가족, 연인, 친구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상을 향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열정은 야망에 도달하기 위한 엔진이 아니라 순수 혹은 순정을 향한 기나긴 투쟁이다. 상대가 아무리 속을 썩여도 심지어 뼈아픈 배신을 해도, 변함없는 사랑과 우정을 바치는 사람들, 자신이 지켜온 신념이 공격받을 때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에 더욱 찾기 어려워졌지만, 어느 시대에나 자신만의 빛을 간직한다. 윌리엄스 소설의 주인공 스토너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본래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란 그가 꿈꾸던 세상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잘 돕는 것, 언젠가 자신도 농장을 물려받아 성실한 농부로 살아가는 것.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처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쇠를 손에 쥐여준다. 농사일을 더 잘 도울 수 있도록, 농경대에 진학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기에 미주리대에 입학해 열심히 농경대 수업을 듣지만, 농업 기술보다 그를 더욱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영문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자신도 모르게 문학청년이 돼버린 스토너의 재능을 알아본 단 한 사람,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슬론 교수였다.

은밀한 배움의 열정

슬론은 가족도 연인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지만 오직 문학만은 그에게 변함없는 열정의 대상이었고, 자신의 재능과 전혀 상관없는 농경대에서 헤매는 스토너를 ‘문학의 강물’에 밀어넣는다. 슬론은 그에게 전공을 문학으로 바꿀 것을 권유하고, 석·박사 과정까지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스토너는 망망대해를 홀로 표류하는 외로운 돛단배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멀리서만 반짝이던 등대의 불빛이 바로 자신을 비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등대가 가리키는 대로 조금씩 노를 저어가면, 언젠가는 자신이 꿈꾸는 바로 그곳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스토너는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스토너가 아버지의 명령을 처음으로 거역하고 몰래 전공을 바꿔 박사과정까지 마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나 또한 그 은밀한 배움의 열정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배울 수만 있다면. 소설과 시와 평론을 매일 읽을 수만 있다면, 나는 좋았다.

슬론 교수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주는 순간, 스토너는 자기 안의 무언가가 꿈틀,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것을 느낀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은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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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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