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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조선 화가 최북傳

사랑이라면 도톤보리 운하에서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조선 화가 최북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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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년 조선통신사의 에도 시내 행렬도.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1748년 조선통신사의 에도 시내 행렬도.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그림에도 운명이란 게 있을까? 조선의 떠돌이 화가 최북(崔北)은 오사카 도톤보리(道頓堀) 운하 옆 유곽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해가 지며 켜지기 시작한 청등과 홍등들로 물빛이 화려하게 번져갈 무렵, 포근한 4월의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사방에 벚꽃 잎이 휘날려 떨어져 내렸다. 그가 쓸쓸히 속삭였다. 

“사쿠라잎 천지를 채우는데 이름 없는 애꾸눈 화사는 운하 위에 정을 띄우네.” 

갑자기 그의 등 뒤에서 유창한 조선어로 읊조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도강(淀川) 위의 조선 사신이었을까? 돌아온다는 약속 없이 에도로 떠나신 분.” 

최북이 급히 뒤돌아보자 대형 유곽을 대표하는 유녀(遊女)인 오이란(花魁) 한 명이 견습 유녀인 가무로(禿) 두 명과 경호대원 한 명의 보호를 받으며 서있었다. 오이란 등급의 고급 유녀가 함부로 외출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화려한 금실 문양이 수놓인 은빛 우치카게(打ち掛け)를 걸치고 멋들어진 비녀인 간자시로 머리를 장식한 그녀는 갸름한 얼굴을 부채로 가리며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말했다. 

“조선의 사신들을 모시러 마쓰시마(松島) 유곽 연회장으로 가는 중 우연히 뵙는군요. 신마치(新町) 유곽의 하나오기(花扇)입니다.”


조선 화가와 일본 유녀의 만남

마쓰시마 유곽은 오랜 해로 여정을 마친 조선통신사 일행이 육로로 접어들어 공식숙소인 교토 니시혼간지(西本願寺)로 이동할 즈음 잠시 쉬어가는 오사카의 숙소 지쿠린지(竹林寺) 인근에 있었다. 처음엔 정사(正使)가 이끄는 본진을 먼저 보낸 실무진이 여독을 푸는 작은 주점이었다가 사절단 소속 제술관이나 화사들과 교류하려는 오사카 문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자 유명세를 타며 점점 몸집을 불린 대형 유곽이었다. 최북이 물었다. 

“연회는 벌써 시작됐을 텐데, 늦게 참가하려는 이유는?” 

하나오기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부채 사이로 살짝 드러내며 대답했다. 

“조선어 할 줄 아는 선배 오이란들이 모조리 에도의 요시와라 유곽으로 옮겨가서. 물론 하나오기가 조선인들과 마음을 나누기 좋아하는 품성이기도 하고.” 

상대의 순수한 마음과 친절에 감동한 최북은 그녀와 함께 마쓰시마 유곽까지 걸어주기로 했다. 운하를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는 대로에 접어들자 오른쪽 멀리 오사카성이 보였다. 하나오기가 어깨를 바싹 붙이며 명랑하게 말했다. 

“하나오기는 이제 열여덟 살. 엄마가 조선인. 아빠는 일찍 죽었어요. 화사님은?” 

고개를 끄덕인 최북이 하나오기의 길게 늘어뜨린 귀밑머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서른 넘은 가난한 조선 화사. 세상이 싫어 눈 하나를 버렸지. 실은 통신사 공식 화사는 아니고 뇌물을 넣어 따라붙은 별화사(別畫師)라네. 그림은 그리지 않을 셈이니 기대는 말고.” 

“에도막부를 정탐하려는 분? 아니면 천하를 다 보고 남은 눈까지 찌르려는 분?” 

상념에 잠긴 최북이 한참 지나 대답했다. 

“사흘 뒤 요도강을 거슬러 교토를 지나 에도로 갈 사람. 그리고 사쿠라 진 6월 오사카를 다시 지나갈 사람.” 

문득 걸음을 멈춘 하나오기가 슬픈 표정으로 최북을 쏘아봤다. 그녀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버림으로써 수행하던 가무로들을 애타게 했다. 의아한 표정의 최북을 향해 하나오기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지나간다는 말은 싫어요. 어느 누구도 삶을 그저 지나가진 않으니까. 그리고 하나오기의 아빠도 화공이었어요. 제 마음속엔 그의 그림들이 늘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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