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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손편지 그 온기를 찾아서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잃어버린 손편지 그 온기를 찾아서

잃어버린 손편지 그 온기를 찾아서
편지는 언제나 불멸의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친구의 육체 없이 마음만 있는 것이니까요.

-에밀리 디킨슨

우체통을 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 예쁜 편지지나 엽서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여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쓸쓸히 돌아선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혹은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순간적으로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과 달리 편지의 언어는 정갈하고 정성스럽다. 편지에는 행간의 침묵에서 더 많은 말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다. 편지는 말하기에서는 담아낼 수 없는 수많은 망설임의 여백을 담아낸다.

정성스레 손으로 눌러쓴 편지는 누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래오래 살아남아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언하고 일깨워주며 매순간 새롭게 다시 읽힌다. 이 책의 지은이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편지 속에 숨은 절절한 사연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오늘 우리가 손편지를 써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자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온기에 대한 가장 뜨거운 기록이 바로 편지임을 절절히 느껴본 사람이다. 세상 누구보다도 가깝던 언니를 암으로 일찍 떠나보낸 후, 그 어찌할 수 없는 상실감을 오래오래 앓는 동안, 언니와 나눈 편지는 그녀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줬다. 언니는 때론 다정하게, 때론 간절하게 자기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을 동생에게 실어보냈다. “이 엽서를 받을 때쯤에는 진짜 변호사가 되어 있겠구나. 축하해.” “너무 피곤해서 극장 밖에서 기절했어.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살아남은 동생은 하루하루 나이가 들어가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언니는 아직도 소녀 같은 모습으로 이제는 중년이 된 동생의 외로움을 다독거려준다. “언니가 보내준 엽서들과 거기에 적힌 글과 그림의 실체감은 우리가 자매이자 친구였다는 것을 손으로 직접 만지고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보낼 수 없는 편지

때로는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모여 살아남은 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패배를 예감하는 병사들의 마지막 소원을 담은 편지 속 사연을 일깨워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 치달을 무렵, 일본 병사들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모든 절절한 사연이 병사들의 ‘보낼 수 없는 편지’에 담겨 있었다.

한 어린 병사는 어머니에게 돈을 남기며 이런 편지를 쓴다. “어머니, 이 돈이 도움이 됐으면 해요. 왜냐면 이게 제게 남은 전부거든요. 저는 이제부턴 이 돈이 하나도 필요 없을 거 같아요.” 돈이 필요 없는 세계로 영원히 떠나며 여전히 돈이 필요한 세계에 엄마를 남겨두는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 아들의 절절한 편지를 전해 받지도 못한 어머니의 마음은 누가 위로해줄 수 있겠는가.

영화 속의 한 젊은이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땅을 파.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가 서 있을 수 있는 참호를 파는 거지.” “참호의 크기는 우리가 겨우 서 있을 정도야. 폭이 넓지 않아 전진도 후진도 불가능하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남아 싸우라는 거야. 이제 나는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어.” 그러나 이 병사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장병들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땅속에 묻어준다. 그가 땅속 깊숙이 묻은 편지들은 수십 년이 지난 뒤 전쟁 유물로 발굴된다. 병사들은 영원히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편지만은 살아남아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다정한 협박, 비장한 각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아버지의 걱정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괜찮다. 운전할 때만 아니라면.” “열여섯 살에 우리가 ‘속도위반’이라 불렀던 소녀들은 결혼할 나이가 됐을 때 누구든 결혼만 해준다면 아무나하고 결혼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단다.”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다정한 협박과 촌철살인의 유머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걱정과 훈계만 늘어놓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딸에게 이렇게 쓴다. “너는 부모에 대한 아주 나쁜 두 가지 예를 보았다. 그냥 우리가 하지 않은 모든 것을 하려무나. 그러면 너는 온전히 안전할 것이다.” ‘딸아, 엄마 아빠를 본받지 마렴. 우리처럼만 살지 않으면 된단다’고 말하는 아빠, 위대한 작가였지만 부모로서는 실패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아버지, 어쩐지 짠하면서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편지는 다정한 메시지만 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평생 노예로 살았지만 이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독립한 흑인 남자 조단이, 자신을 다시 불러들여 노예로 부려먹으려는 옛 주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다.

“우리에게 연체된 임금을 보내준다면 과거의 해묵은 원한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며, 앞으로 주인님이 우리를 공정하게 친구로 대하리라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32년을, 그리고 아내 맨디는 20년간 주인님을 충직하게 섬겼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피복비와 내가 세 번 의사의 진료를 받은 것, 맨디가 발치 치료를 받은 비용을 제하면 우리가 공정하게 받아야 할 금액이 될 것입니다.”

자유인이 된 조단은 노예제의 그늘 아래 자행된 그 어떤 폭력도 가족을 해치지 못하도록 가족을 보호하겠다고 주인에게 결연히 선언한다. “이제 다 자란 처녀가 된 어여쁜 밀리와 제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말씀해주십시오. 불쌍한 마틸다와 캐서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주인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내 딸들이 젊은 주인들의 폭력과 사악함에 치욕을 당하게 하기보다는 여기에 남아 굶는 것-그리고 만약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죽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당신의 노예로 살다가 자신의 딸들이 주인집 남자들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굶어 죽는 것을 택하겠다는 조단. 그는 30년 넘게 노예로 살았지만, 영혼만은 결코 노예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가도 편지는 남아

고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그리고 편지들을 보내줘서.

-조지아 오키프

죽은 사람이 산 자에게 남긴 편지도 흥미롭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 보낸 편지들은 더욱 재미있다. 한 남자는 죽은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당신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사악하게 구는 거요? 나는 젊었을 때 당신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당신과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 지난 3년간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집에 있는 아가씨들에 대해서도,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얼마나 한이 쌓였으면, 이미 죽어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이런 기나긴 항의의 편지를 쓴 걸까. 옛사람에게 죽음은 ‘또 하나의 권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산 자들의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산 자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죽은 자들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글을 직접 읽거나 쓸 수는 없었지만 편지는 보냈다고 한다. 전문 필경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수천 년에 걸친 이집트 왕조의 거의 전 시대를 망라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지난 100여 년 동안 꾸준히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에서 편지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편지를 보자. 한 전문 필경사가 어린 수습생에게 보낸 것이다.

“이 고귀한 직업에 전념하거라. 이 일이 유용함을 알게 될 것이다. 글 쓰는 것을 사랑하고 춤추는 것은 멀리해라. 그러면 훌륭한 관리가 될 것이다. 종이 두루마리와 팔레트를 친구로 삼아라. 그것이 포도주보다도 더 큰 기쁨을 준다. 글을 쓰는 것이 그 어떤 직업보다 낫다. 그것은 빵과 맥주보다도, 옷과 연고보다도 더 큰 기쁨을 준다. 또한 그것은 이집트에서 유산을 상속받는 것보다도, 나일 강 서안의 무덤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나는 글쓰기가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이 편지로 인해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내가 가진 힘을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걸까’ 하는 걱정에 쏟아부을 게 아니라 더 깊이 있고 단단한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쓰고 싶어졌다. 수천 년 전 꼬맹이 수습생에게 보낸 이집트 필경사의 아름다운 당부 편지는 지금도 나를 울린다.

신동아 2015년 12월 호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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