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호

‘뉴트로(New-tro)’의 공습

새로운 복고가 몰려온다

  • 김은향 자유기고가

    woocuma29@gmail.com

    입력2019-01-06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복고의 재해석, 뉴트로

    • 밀레니얼 세대들이 뉴트로에 빠져든 이유

    • 패션, 가전, 식품…분야 막론하고 복고 열풍

    • 아날로그 감성에 첨단 기술은 덤!

    • 뉴트로 열풍, 미래에 대한 불안감·체념의 표현이기도

    2018년 10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18 F/W 헤라서울패션위크’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출시된 지 30년이 지난 운동화가 새삼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디자이너 박환성이 이끄는 디앤티도트가 패션 브랜드 휠라와 협업해, 복고풍 운동화 ‘디스럽터2’를 선보인 것. 배경음악 또한 1990년대 유행한 올드 힙합의 대부,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흘러나왔다. 이후 ‘디스럽터2’는 50만 켤레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꾸준히 팔리고 있다.

    허름한 철물점과 오래된 제지 공장이 늘어선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현대적 감성의 카페와 주점이 자리 잡은 서울의 을지로는 어떤가. 오래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곳이지만, 밤마다 젊은이들로 물결을 이룬다. 이처럼 30·40·50대가 유년 시절에 신던 추억의 운동화가 다시금 가장 핫한 패션 아이템이 되고,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힌 촌스러운 티셔츠가 10대들 사이에서 사랑받는 지금의 현상을 우리는 ‘뉴트로’라 명한다.

    뉴트로(New-tro)는 새롭다는 의미의 뉴(New)와 복고의 레트로(Retro)가 합성된 말로 단순한 복고가 아닌 새로운 외향과 기능을 갖춘 새로운 복고를 의미한다. 출시된 지 30년이 다 돼가는 음료가 새삼 인기를 얻고, 1950년대 영화에 등장할 법한 복고풍 디자인의 가전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 또한 뉴트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강력한 소비 트렌드를 이끄는 주력 세대가 젊은 층이라는 점이다. 복고라는 트렌드는 수시로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하지만, 이번의 복고 트렌드는 1020세대를 공략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향은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는 뉴트로를 ‘젊은 세대의 새로운 놀 거리’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기존의 복고 트렌드는 해당 문화 코드를 누린 중장년층이 주 소비층이었다. 그들의 향수에 소구하는 것”이라며 “지금의 10대 20대는 과거의 문화 코드를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과거에 유행한 물건이나 콘텐츠를 찾는 것은 그것들이 주는 색다름과 신선함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한눈에 봐도 촌스럽고 오래돼 보이는 물건을 오히려 ‘레어템’으로 분류해 가치를 높이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브랜드 히스토리를 찾아내 새로운 문화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1020세대에게 복고는 더 이상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옛것’이다.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참신함은 젊은 세대에게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콘텐츠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30·40년 만에 소환된 그때 그 제품들

    프로스펙스 ‘헤리티지’ 시리즈 포스터.

    프로스펙스 ‘헤리티지’ 시리즈 포스터.

    뉴트로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은 역시 SNS다. 요즘 사람들이 주목하고 좋아하는 것들의 총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SNS에는 트렌드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인증샷’이 하루에도 수천 장씩 올라온다. 그중 상당수가 뉴트로 사진이다.

    대학생 김경연(여·21) 씨는 물병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압구정의 한 분식집을 찾았다. ‘델몬트 주스’를 연상시키는 사각형 유리 물병과 옛날 콜라병 ‘인증샷’을 찍기 위해서다. 김씨는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식당 중 60~70%는 복고풍이다. 전체적인 인테리어와 식기는 물론 소품과 맛까지 옛 감성을 그대로 살린 곳이라 재미있다”고 말했다.

    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정민규(남·28) 씨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패션 아이템은 노란색과 파란색이 선명하게 프린트된 스포츠 웨어다. 패션 브랜드 폴로 랄프로렌에서 선보인 컬렉션으로 1992년 국제 요트대회에서 미국 국가대표팀이 입었던 유니폼을 해당 브랜드에서 이듬해 정식 발매한 제품이다. 정씨는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과 익스트림 스포츠를 향한 브랜드의 열정이 제대로 느껴진다. 가격이 다소 비싸긴 하지만 매장에서 물건을 보자마자 바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복각 열풍은 럭셔리 시계 시장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복각’이란 원형을 모방해 다시 판각한 것을 뜻하는 말로, 예전 제품을 재현하는 작업을 말한다. 소비자에게 ‘기념비적인’ 모델을 소유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유서 깊은 시계 브랜드 브레게는 무려 1794년에 완성한 회중시계 ‘No.5’를 복각했고, 파일럿 워치로 유명한 IWC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IWC의 최초 손목시계인 폴베버의 150주년 에디션을 복각판으로 선보였다. 최첨단 기술이 탑재된 스마트 기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100년 전 만들어진 전통 시계가 다시금 주목받는 것이다. 절정의 아날로그 감수성과 첨단의 공존, 이것은 뉴트로가 지닌 또 하나의 의미다.


    별뽀빠이·치토스·갈배…식품업계 복고 열풍

    갈아만든 배 사이다와 별뽀빠이(오른쪽).

    갈아만든 배 사이다와 별뽀빠이(오른쪽).

    식품 업계에서도 뉴트로는 중요한 화두다. 삼양식품은 1972년 처음 선보인 국민 과자 ‘별뽀빠이’ 47주년을 기념해 한정판 레트로 제품을 출시했다. ‘레트로 별뽀빠이’가 그것이다. 과거 패키지 디자인에 사용한 삼양식품 로고와 서체를 그대로 활용해 레트로한 느낌을 살린 게 특징이다. 또한 ‘추억의 요요’ 등 장난감과 패키지로 판매해 1시간 만에 1000개 한정 수량을 완판했다.

    롯데제과는 새롭게 출시한 ‘치토스 콘스프맛’ 포장에 1990년 판매 당시 사용한 포장 디자인을 그대로 적용했다. “언젠간 먹고 말거야”란 유행어를 낳기도 한 치토스는 1990년대 치토스를 떠올리는 파란색 패키지에 친근한 호랑이 캐릭터 ‘체스터’를 넣어 치토스의 전통성을 강조했다. 오리온 역시 ‘태양의 맛 썬 오리지널’을 재출시해 한 달 만에 200만 봉을 팔았다.

    1996년 등장한 해태 음료 ‘갈아만든 배(이하 갈배)’는 ‘숙취 해소 효과’가 입증되면서 레트로 상품에 이름을 올렸다. ‘갈배’가 숙취에 좋다는 입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2015년 ‘호주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실험을 통해 ‘갈배’가 두통 완화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새롭게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2018년 3월에는 탄산이 추가된 ‘갈배 사이다’로 진일보하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2018년 4월 신세계백화점 죽전점에서 ‘대우 위니아 레트로 대전’이 열렸다.

    2018년 4월 신세계백화점 죽전점에서 ‘대우 위니아 레트로 대전’이 열렸다.

    복고 열풍은 가전제품 시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가전제품 분야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다 2006년 파산 이후 사명을 상실한 ‘대우전자’는 2018년 대유그룹에 인수되면서 이름을 되찾았다. 또한 ‘더 클래식’ 시리즈의 소형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대우전자의 대표 레트로 제품으로 꼽힌다. 120ℓ, 80ℓ급 소형 인테리어 냉장고는 크림화이트, 민트그린 두 가지 색상으로 라운드형 도어와 프레임이 복고 분위기를 풍긴다. 동급 대비 약 30% 비싸지만 감각적인 레트로 디자인 덕분에 2018년 월평균 판매량 1500대를 기록했다.

    전자레인지 또한 크림화이트 색상에 은색 손잡이와 조그 다이얼, 라운드형 디스플레이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우전자 관계자는 “1인 가구와 개념 소비를 원하는 이가 늘면서 소형 레트로 가전제품이 인기”라며 “레트로 디자인에 프리미엄 기능을 추가한 제품을 계속 개발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피로감으로부터 해방

    LP 레코드의 매출 상승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 인터넷 쇼핑몰 판매 집계에 따르면 2018년 5월 말 기준 LP와 턴테이블 판매량은 전년 대비 286%나 늘었다. LP 시장의 연간 성장률도 20%를 웃돈다. ‘LP바’를 찾는 사람도 덩달아 늘고 있다.

    한편 복고의 유행은 불경기 현상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반적인 경제지표가 좋지 않을 때, 현실에서 별다른 탈출구를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이다. 이향은 교수는 이를 심리학의 ‘회고 절정’에 빗대 설명한다. 이 교수는 “회고 절정이란 한 사람이 자기 생애를 회고했을 때 청소년기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현상을 말한다. 그걸 트렌드로 연결하면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때를 떠올리며 그때를 상징하는 콘텐츠나 소품을 소비하며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성장 시대에 살고 있는 1020세대의 경우 지금보다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체념이 내면 깊은 곳에 깔려 있다”고 부연했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통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뉴트로는 디지털 피로감을 탈피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디지털 기술은 다양한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게 하는 반면, 역설적으로 이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인간의 싫증을 부추긴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싫증은 지루함이 아닌 ‘싫은 느낌’ 그 자체라는 점을 볼 때, 뉴트로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이기도 하다.


    뉴트로는 재현이 아닌 해석

    영국 얼스터 대학의 스티븐 브라운 교수는 저서 ‘포스트모던 마케팅’에서 “앞으로 마케팅은 철저히 고객에게 맞추는 방법 대신 고객을 괴롭히는 괴짜 같은 구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뉴트로 마케팅은 이러한 포스트모던 마케팅의 일부를 담당한다. 제한적인 공급으로 인한 한정성, 과거의 이야기 속에 숨은 비밀스러움,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하는 증폭성, 마음을 사로잡고 흥을 돋우는 재미와 유쾌한 사기를 당하고 싶어 하는 고객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속임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독 유행에 민감하고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한국에서도 뉴트로 열풍은 다양하게 변주되며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브랜드는 이러한 소비자의 의식 수준을 따라가기 위해 브랜드에서 헤리티지, 즉 전통성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뉴트로의 중심에 선 브랜드들도 잠시 예전의 명성에서 멀어진 적이 있지만 자신만의 독자성을 발굴하고 그 명맥을 이어온 덕분에 다시 주목받게 된 경우가 많다.

    뉴트로 열풍은 김난도 교수를 비롯해 10여 명의 소비자 트렌드 분석가가 공동 저자로 참석한 ‘2019 트렌드 코리아’에도 등장한다. 책에서 전문가들은 젊은 소비자들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출시된 브랜드를 존중하고 경외심을 갖는 현상에 대해 ‘뉴트로 제품들 안에는 당시의 문화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따라서 기업의 헤리티지(Heritage)는 돈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트렌드 전문가들은 뉴트로가 재현이 아닌 ‘해석’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