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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포커스

CJ 영화의 정치 상업주의

朴 때는 산업화 영화, 文 때는 민주화 영화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CJ 영화의 정치 상업주의

  • ● 모피아·미국 투기자본 겨눈 ‘국가부도의 날’
    ● CJ “IMF 비극 젊은 세대에 알리자는 취지 작품”
    ● ‘팩트 논란’에 영화적 상상력 알리바이 삼아
    ● CJ, 핵심인력 이탈에 부동의 1위 놓쳐
[네이버 영화 캡처]

[네이버 영화 캡처]

CJ ENM이 투자·배급한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에 시작된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를 다룬 첫 영화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국가부도의 날’의 누적 관객은 2019년 1월 12일 현재 375만 명을 넘었다. 매출액은 308억 원을 웃돈다. 손익분기점(260만 명)을 돌파한 지는 한 달이 넘었다. 개봉 시기가 극장업계 비수기로 꼽히는 11월 말~12월 초라는 점을 고려하면 ‘중박’ 이상의 흥행에 성공한 셈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2013년 저서 ‘증오상업주의’를 썼다. 강 교수는 명분, 영향력, 이익의 실현이나 확대를 위해 증오를 주요 콘텐츠로 삼는 행태를 증오상업주의라고 칭했다. 선의에서 비롯된 ‘정의로운 증오’도 상업주의의 포로가 될 수 있다. 의도보다 중요한 건 결과다. 이 분석틀을 빌리자면 정치와 분노를 콘텐츠의 원동력으로 삼는 건 정치 상업주의다. CJ의 영화 투자·배급전략은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국가부도의 날’은 딱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선과 악”

‘국가부도의 날’은 선과 악을 나눈 고전적 영화 문법을 충실히 뒤따른다. 영화 속 재정국 차관은 사악한 관료로 그려진다. 그는 영세 자영업자 구조조정 등 ‘체질 개선’을 명분 삼아 IMF 체제로의 이행(이하 IMF행)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끝까지 숨긴다. 재벌과는 밤에 만나 이 사실을 몰래 알리고 이득을 챙기는 데 도움을 준다. 서민은 이들에게 ‘속아’ 실업대란으로 쓸려 내려간다. 비주류 경제학계가 꾸준히 제기해온 ‘모피아(옛 재무부의 영문 이니셜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재벌’의 공식을 영화로 그려낸 셈이다.

반면 한시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은 절대선(絶對善)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IMF행이 경제주권을 넘기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 미국이 뒤에서 IMF와의 협상을 진두지휘하는 게 아닌지 의심도 한다. 차관에게는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일본과 미국 등에서 100억 달러를 빌리고 국가 자산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자고 주장한다. IMF 뒤에 미국의 거대 투기자본이 있었고 이들이 위기를 기회 삼아 한국경제를 집어삼키려 했다는 뉘앙스의 연출이다.

이 역시 비주류 경제학계가 1997년 당시부터 여러 문헌을 통해 쏟아낸 인식과 결이 통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한성대 교수로 일하던 1997년 12월 14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정세토론회에서 ‘IMF 구제금융과 한국 경제의 미래’라는 글을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IMF 체제는 창설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미국적 경제질서를 세계 경제질서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썼다. 또 “IMF의 (한국에 대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시장의 자유, 따라서 소수 기득권층의 자유(그것이 미국·일본의 초국적 자본이든 또는 국내의 재벌이든 간에)만을 확대하는 정책”이라고도 부연했다. 훗날 김 위원장은 경제개혁연대에서 활동하며 경제민주화의 기수가 된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 한 팀장 역시 공직을 그만두고 시민단체로 간다.


“실존 인물이 반발할 수밖에”

2016년 8월 7일 서울 강남의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걸린 영화

2016년 8월 7일 서울 강남의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걸린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CJ ENM이 박근혜 정부 때인 이때 '인천상륙작전' 투자배급에 나섰다. [뉴스1]

고증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서인지 영화는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기획재정부의 옛 이름)을 재정국으로, 한국은행 총재를 총장으로 칭한다. 실제로는 없었던 한은 통화정책팀장을 주연으로 내세운 까닭도 이런 목적으로 풀이된다. CJ ENM 측은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말로 비판을 피해간다.

CJ ENM 관계자는 “제작 취지는 IMF 사태에 대해 젊은 세대는 잘 모르니 과거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한은 팀장은 가상 인물”이라면서 “위기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최선을 다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영화 시작 전에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됐다는 점이 고지된다”고 말했다. 정작 한보·기아·대우 등 당시 부도로 쓰러진 기업 실명은 그대로 등장한다.

정부 산하기관에서 문화산업 분야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연구원은 “창작, 각색된 이야기라고 고지하면서도 영화에 IMF 위기 당시 부도가 난 기업이 그대로 등장하고, 당시 방송 뉴스 장면도 상당히 많이 인용했다. 영화 속 캐릭터 상당수가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할 만큼 흡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금 과한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 연구원은 “그 와중에 캐릭터 간 선과 악을 너무 명확하게 구분하는 식으로 연출했다. 그러니 당사자로 보이는 실존 인물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고, 팩트 논란이 더 커졌다. 그 정도 수준으로 역사적 사실을 가져와 써놓고 ‘영화적 상상력’을 알리바이로만 삼으려 하는 모습은 많이 아쉽다”고 부연했다.

CJ는 정치 콘텐츠를 미디어 비즈니스에 빈번히 활용하는 기업이다. 그러면서도 늘 ‘정치적 목적은 없다’고 선을 긋는 기업이기도 하다. ‘국가부도의 날’에 대해서도 CJ ENM 관계자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영화 기획·제작·투자·배급 프로세스에서 정치적 국면을 고려해 급히 개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CJ가 마치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는 건 잘못된 인식”이라고 말했다. 정작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온 건 CJ다.

앞서 밝혔듯 ‘국가부도의 날’은 진보진영과 결이 통하는 작품이다. 반면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CJ ENM은 당시 여권(보수진영)과 결이 통하는 ‘인천상륙작전’을 투자·배급했다. 박 전 대통령은 직접 서울시내 한 영화관을 찾아 이 영화를 관람했다.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여당 지도부도 단체관람했다. 제작자인 정태원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는 개봉 기자회견에서 “우리 부모님·조부모님 세대가 겪은 참상을 통해 우리 젊은이들이 강한 안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곗바늘을 더 뒤로 돌려보자. CJ ENM은 박근혜 정부 2년 차인 2014년 ‘명량’을 투자·배급했다. 애국주의 정서가 매우 짙게 깔린 작품이다. ‘명량’은 누적 1760만 관객을 모으며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CJ ENM은 같은 해 말 ‘국제시장’을 배급했다. 국제시장은 베트남전, 독일 광부 파견 등을 다루며 박정희 정권 시기를 미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제시장’도 극장에서 관람했다.


탈(脫)박근혜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2014년 6월 14일부터 2015년 1월 9일까지 청와대서 근무한 기록을 남긴 비망록에도 두 작품이 등장한다. 2014년 12월 26일 메모에는 ‘영화 국제시장-보수, 애국’, 같은 달 28일 메모에는 ‘국제시장 제작 과정 투자자 구득난, 문제 있어, 장악, 관장 기관이 있어야’라는 대목이 연이어 나온다. 두 작품을 두고 ‘고무’라는 표현도 쓰였다.

정권의 일방적인 구애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CJ그룹 수뇌부도 영화를 매개 고리 삼아 정권과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했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2016년 11월 13일 박영수 특검 조사에서 “(2014년 11월 독대 때) 대통령께서 ‘CJ그룹에서 하는 영화 및 방송 사업이 정치적으로 조금 편향돼 있다’는 취지로 말씀했다. 그래서 ‘CJ그룹이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 중에 편향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제가 이번에 모두 정리했다. 앞으로 방향이 바뀔 것이다’라는 취지로 말씀드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손 회장은 “제 기억으로는 (박 전 대통령이) CJ가 좌파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취지의 말씀을 주로 해서 제가 몇 번이나 사과하고 ‘명량’ 등과 같이 국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화도 제작한다고 말씀드렸다”고 덧붙였다. 그룹 수뇌부가 영화의 투자·배급 기조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그랬던 CJ는 2017년 들어 ‘탈(脫)박근혜 행보’를 보였다. 촛불대선을 한 달여 앞둔 2017년 4월 3일에는 6월 민주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 영화 촬영 개시 소식을 알렸다. 당시 CJ는 “장편 상업영화로 6월 민주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건 이번 영화가 처음”이라고 홍보했다.

이에 대해 CJ ENM 관계자는 “지주사가 영화의 투자배급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반면 CJ그룹 사정을 아는 재계 관계자는 “민감한 작품에 대해서는 그룹 최고경영진에서도 관심을 갖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선제적·구체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는다”면서 “CJ그룹 안에서도 ‘국가부도의 날’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돌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진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산업에서 투자배급사의 역할은 매우 크다. 영화를 기획하고 찍을 제작사는 많다. 정작 영화에 투자하고 배급해줄 회사를 구하지 못하면 별 의미가 없다. 영화계에서는 메인 투자사들이 제작비의 30% 안팎을 투자하는 게 관례다. 100억 원대 작품이면 30억 원 넘게 쏟아붓는 식이다. ‘갑’이 돼 영화를 고르는 주체는 투자배급사라는 뜻이다.

2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영화제작자는 “정치적으로도 시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나. 좋게 보면 CJ가 시대 흐름을 잘 파악해 영화를 픽(pick)한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달리 해석하면 영화계에 일종의 게이트키핑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영화 시장의 유력 지배자가 무엇을 골라내 시장에 내놓는지는 업계에서 늘 초미의 관심사다. 


“3위 추락”

CJ ENM은 2003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5년간 국내 영화 시장에서 1위를 수성한 바 있다. 지난해 사정은 다르다. 영화진흥위원회 ‘산업결산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1~11월 사이 CJ ENM의 시장점유율(전체 영화 기준)은 12.5%로 3위였다. 정작 2018년 1위는 18.3% 점유율을 기록한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다. 범위를 한국영화로만 좁혀도 CJ의 점유율은 23.5%로 롯데(28.3%)에 뒤졌다. 12월까지 포함한 연간 집계 결과는 1월 말~2월 초에 공개된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시장 환경은 더 치열해졌다. 중국 화이브라더스 자본으로 설립된 메리크리스마스, 셀트리온이 설립한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가 시장에 뛰어들었다. 행남사, 에이스 메이커 무비웍스도 새로 진입했다. 여기에 폭스, 워너브러더스 등 해외 자본도 한국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인력 이탈 이슈도 CJ가 직면한 현실이다. 앞선 영화제작자는 “CJ ENM 영화사업부문의 경우 임원급에서 핵심 실무자까지 조직 이탈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창업사가 늘어) 갈 곳이 많아진 점도 요인”이라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CJ ENM 관계자는 “여러 신생 회사가 기존 업계 인력을 영입하는 데 매진할 테고, 그러니 자연스레 (업계에서) 인력 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면서 “역으로 말하면 CJ가 (영화계) 인재 산실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답했다.




신동아 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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