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호

동물萬事

쉿! 아시아에도 사자가 살아요

  •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입력2019-09-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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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구자라트에 523마리 살아남아

    • 이란 터키 등으로 서식처 넓혀야

    • 헤라클레스와 ‘네미아의 사자’

    • 2000년 전만 해도 스페인-프랑스-이란-아프간 잇는 초원에 서식 

    • 페르시아軍 낙타 잡아먹은 그리스 사자

    [인도 기르숲 국립공원 아시아 사자.]

    [인도 기르숲 국립공원 아시아 사자.]

    아프리카 야생의 제왕이 사자, 아시아 야생의 제왕이 호랑이라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상식이다. 그런데 2000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자가 유럽과 아시아에도 살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정복전쟁

    아케메네스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이하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땅에서 출발한 고대 제국이다. 전성기 시절, 중동 전역과 유럽 발칸반도 일부, 아프리카의 이집트 등 3개 대륙에 펼쳐진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페르시아의 전성기는 다리우스 1세(Dareios I) 치세(기원전 522~486)다. 다리우스 1세는 행정 조직 정비, 통화 시스템 개혁, 도로망 확충을 통해 제국의 내치 기반을 확실히 다졌다.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을 가진 샤한샤(Shahanshah)라고 불렸는데, 샤(Shah)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왕에게 붙인 호칭이다. 샤한샤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중국의 황제(皇帝)가 있다. 

    샤한샤 다리우스 1세가 생전 완수하지 못한 일은 그리스 정복이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를 정복하고자 발칸반도 남동에 위치한 트라키아(Thracia)부터 차지한다. 트라키아는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과 그리스 및 불가리아 일부를 다스린 고대 왕국이다. 페르시아의 압도적 군사력에 싸울 의욕을 상실한 마케도니아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고 만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와 달리 그리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리더 노릇을 하던 아테네(Athens)와 일부 동맹국은 다리우스 1세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아테네 등은 페르시아 영토이던 소아시아의 이오니아(Ionia)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기도 한다. 이오니아는 페르시아에 편입돼 있었으나 역사적으로나 혈연적으로나 그리스와 밀접했다.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0년 아테네와 그 동맹국인 에레트리아(Eretria)를 공격하고자 군사를 일으킨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에레트리아를 정복하고는 아테네로 향한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서 40㎞ 떨어진 마라톤(Marathon)에서 아테네 정예군과 마주친다. 만약 그 전투에서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패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나라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리스가 자랑한 중갑보병(重裝步兵) 호플리테스(hoplites)가 페르시아군의 진군을 막아냈다. 아테네 시민병인 호플리테스는 조국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상태였다. 그들은 머리와 몸을 투구와 갑옷으로 단단히 가리고 방패를 연결했다. 거북 등딱지인 귀갑(龜甲)처럼 밀집대형을 이뤘다. 그러곤 날카롭고 긴 창을 대열의 앞으로 쭉 빼 적에게 겨눴다. 도시와 가족을 지키고자 죽음을 불사한 호플리테스의 활약으로 페르시아는 마라톤전투에서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참패하고 만다. 

    마라톤에서 패전한 이후 다리우스 1세는 절치부심했으나 그의 시계는 그것으로 멈춘다, 하늘이 그에게 기회를 더는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리우스 1세의 죽음이 전쟁의 종료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샤한샤로 즉위한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the Great)가 부왕(父王)의 유업을 받아 그리스 정벌에 나선다. 

    마라톤전투가 발발한 지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170만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출발해 친정(親征)한다. 170만 병력은 지금도 동원하기 어려운 대군이다. 이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가 과장한 수치로 추정된다. 역사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Histories)’라는 책이 페르시아가 170만 대군을 동원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스파르타 결사대 ‘300’

    페르시아인과 싸우는 스파르타인(왼쪽). [셔터스톡]

    페르시아인과 싸우는 스파르타인(왼쪽). [셔터스톡]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목표는 단순명료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Sparta)를 포함한 전(全) 그리스를 정복하는 것이다. 그가 이끈 대군은 선왕인 다리우스 1세 때 복속시킨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을 경유해 그리스로 향했다. 현지에서 병력과 물품을 보급받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의 대군을 저지하고자 병목처럼 좁은 협곡에서 기다린 그리스 장수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국왕 레오니다스 1세(Leonidas I)다. 그는 불과 수백의 결사대를 이끌고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저지할 수 있는 테르모필레(Thermopylae) 협곡에 진을 친다. 

    페르시아는 전투 초반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잃었으나 전투 사흘째 일부 현지인이 제공한 정보를 이용해 레오니다스 1세를 포함한 스파르타 결사대를 전멸시키고 만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 순왜(順倭)와 같은 자들이 당시 그곳에도 있었다. 

    레오니다스 1세와 결사대의 영웅적 활약은 2500년 후 ‘300’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된다. 원작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의 대가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작품이다. 잭 스나이더(Zack Snyder) 감독의 손을 거쳐 탄생한 ‘300’은 흑백의 강렬한 대비, 자유로운 컷 등으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레오니다스 1세의 조상이 그리스의 신 중 가장 힘이 센 헤라클레스(Heracles)라는 전설이 있다. 헤라클레스는 신계(神界)의 샤한샤인 제우스(Zeus)의 아들이다. 헤라클레스는 네미아(Nemea)에서 악명을 떨친 사자를 죽인 후 그 가죽을 벗겨 마치 코트처럼 입고 다녔다. 

    네미아의 사자는 무기로는 죽일 수 없는 불사의 존재였기에 헤라클레스는 부득이 자신의 팔 근육을 이용해 사자를 죽인다. 일종의 교살(絞殺)인 셈이다. 제우스는 아들이 몹시 자랑스러워 하늘에 사자자리(Leo)라는 별자리까지 만들어 공적을 기념한다. 자식자랑하면 팔불출이라는데, 제우스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격이다. 

    물론 헤라클레스와 네미아의 사자 이야기는 신화지만 네미아는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실제로 존재한 도시다. 네미아의 사자 이야기에는 상상과 현실이 뒤섞였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곰이 한반도에 산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 사자가 실존했음을 나타낸다.

    침략군의 낙타를 노린 그리스 사자들

    페르시아 포병대의 낙타 [위키피디아]

    페르시아 포병대의 낙타 [위키피디아]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끌던 그리스 연합군을 전멸시킨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군은 아테네와 아티카(Attica), 보이오티아(Boeotia)를 차례로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린다. 선왕(先王)이 아테네에 대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전공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가 다였다. 

    페르시아군은 이후 그리스 연합군에 연이어 대패하고 만다. 패전의 서막은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아테네가 주도한 연합함대의 유인 전술에 말려들어 200척 넘는 전선을 잃는다. 그것은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이 수장된 것을 뜻했다. 전의를 잃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남은 전함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스에 여전히 남아 있던 페르시아 육군 30만은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전투(Battle of Plataea)에서 그리스 연합군에 대패한다. 그리스 연합군 병력은 4만이었는데, 주력은 레오니다스 1세를 향해 복수를 외치던 스파르타의 호플리테스 1만이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30만 병력을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생존한 페르시아 병력은 10만도 되지 않았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대규모 전투는 사실상 종결된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에서 예상치 못한 의외의 복병을 만난다. 헤로도투스는 사자가 페르시아군의 낙타를 공격했다고 기록한다. 이 기록은 현대 건축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의 명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후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로 응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디테일(detail)은 한국어로 상세(詳細)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상세라는 어색한 번역보다는 영어 단어 그대로 사용하는 게 피부에 더 와닿는 것 같다. 헤로도투스의 기록 속에 담긴 디테일 덕분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그리스의 야생에 사자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자 습격으로 병참 타격 입어

    페르시아는 고대 그리스인이 동방(Orient·東方)이라고 일컬은 곳에 위치했다. 고대 오리엔트 군대의 특징 중 하나는 사막에서 바다의 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낙타를 잘 활용했다는 점이다. 오리엔트의 군대는 이동할 때 장비와 식량을 낙타의 등에 실었다. 이러한 병참은 페르시아뿐 아니라 파르티아(Parthia) 등 후대의 동방국가에 고스란히 계승된다. 

    그리스의 사자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평소에는 구경하지 못한 사냥감을 만나게 된다. 낙타는 소보다도 덩치가 큰 동물이다. 성체 기준 700㎏이나 나간다. 사자 처지에서는 한 마리만 잡아도 무리(pride) 전체가 포식할 수 있는 양이다. 사자가 낙타를 먹잇감으로 노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칼과 화살로 상대를 살상하는 고대의 전쟁과 전투기나 미사일로 상대를 제압하는 현대의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다. 물자를 지속적으로 전장에 공급할 수 있는 쪽이 승리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보급에 문제가 생기면 병력이 많아도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스 사자들의 습격은 현지 지형에 익숙하지 않던 페르시아군의 보급에 타격을 줬다. 

    페르시아와 달리 고대 유럽 문명은 소를 이용해 군수품을 운송했다. 군수품을 운반하는 소와 식량으로 사용할 양을 보호하고자 마스티프(Mastiff)라는 덩치 큰 개도 종군시켰다. 개들은 소와 양만 지킨 게 아니라 불침번(不寢番) 노릇도 했다. 맹수의 습격이나 적의 기습이 예상되면 맹렬히 짖어 병사와 가축을 깨웠다. 로마군에 종군한 마스티프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군견(軍犬)이지만 양을 치는 목양견(牧羊犬)과 집을 지키는 경비견 역할을 겸했다. 

    로마군의 군견으로 활동한 마스티프 중에는 현존하는 개들의 선조가 된 종도 있다. 로트와일러(Rottweiler)라는 독일 대형견은 로마군을 따라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트바일(Rottweil)로 이동한 마스티프들의 후손이다. 로트바일은 독일 남부 지역의 소도시로 로마인 정착지가 있던 곳이다. 스위스 베른(Bern) 인근에 정착한 마스티프들은 현존하는 마운틴 도그(Mountain Dog)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듣는 버니즈 마운틴 도그(Bernese Mountain Dog)의 선조다. 이 두 종류의 마스티프 계열 대형견은 로마군을 따라 독일과 스위스로 이동했다가, 그곳에 남아 개량 과정을 거친 후 해당 국가와 도시를 대표하는 대형견으로 거듭났다. 

    2000여 년 전만 해도 사자는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 곳곳에 존재했다. 사자의 주요 서식지는 비교적 기온이 따뜻한 현재의 그리스, 스페인, 프랑스 지역 등이다. 사자들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초원에도 살았다.

    기르숲의 아시아 사자들

    1880년 발행된 ‘존슨의 가정용 자연백과’에 실린 아프리카 사자(위), 아시아 사자(아래) 일러스트. [Johnson’s Household Book of Nature]

    1880년 발행된 ‘존슨의 가정용 자연백과’에 실린 아프리카 사자(위), 아시아 사자(아래) 일러스트. [Johnson’s Household Book of Nature]

    유라시아의 들판에는 사자가 더는 활개 치지 않는다. 서식지 파괴와 남획, 먹잇감 부족이 사자가 초원에서 사라진 이유로 추정된다. 그런데 남부 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의 야생을 지배하던 사자가 완전히 멸종된 것은 아니다. ‘아시아 사자(Asiatic lion)’, 이 신비한 동물이 인도에서 지금껏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사자는 인도에서도 구자라트(Gujarat)주의 기르숲 국립공원(Gir Forest National Park)에서만 산다. 기르숲 국립공원은 아시아 사자, 페르시아 사자(Persian lion), 인도 사자(Indian lion)로 불리는 비(非)아프리카 사자들의 유일한 서식지다. 

    기르숲 국립공원은 넓이가 1412㎢로 서울 면적의 두 배에 달하지만 이 수치에는 함정이 있다. 공원의 18.3%인 258㎢만 사람의 출입이 전면 제한된다. 81.7%인 1153㎢는 야생동물보호지역으로 지정됐으되 제한된 규모의 목축이 이뤄지고 있다. 523마리(2015년 기준)나 되는 아시아 사자가 살기에는 결코 넓은 공간이 아니다. 

    케냐의 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은 면적이 1만4763㎢로 경기도의 1.4배, 기르숲 국립공원의 10배다. 세렝게티에는 300만 마리에 달하는 포유동물이 사는데 그중 누 100만 마리, 얼룩말 20만 마리가 있다. 이들을 먹이로 삼는 사자도 2000여 마리나 서식한다. 세렝게티에서 사자 한 마리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7.4㎢에 이른다. 기르숲의 아시아 사자들에 비해 3배 넘는 면적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자는 독립해 생활하는 다른 고양잇과 동물과 다르게 무리 생활을 한다. 사자 무리인 프라이드는 사냥을 해 먹이를 조달하는 10여 마리의 암컷과 무리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수컷 2~3마리, 새끼 10여 마리로 구성된다. 대략 20여 마리의 사자가 프라이드를 구성하는데, 이를 단순 계산하면 각 프라이드가 차지하는 면적은 기르숲에서는 54㎢, 세렝게티에서는 148㎢가 된다. 

    아시아 사자는 보존해야 할 생태계의 보물이다. 개체 수를 늘리려면 사자들을 기르숲 국립공원 외의 곳으로도 분산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 사자들에게 더욱 넓은 서식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먹이 활동과 번식뿐 아니라 전염병 예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기르숲에서 치명적 전염병이 발병하면 아시아 사자 전체가 절멸할 수 있다. 인도의 다른 지역뿐 아니라 수백 년 전까지 아시아 사자가 남아 있던 이란이나 터키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인도의 구자라트는 그동안 많은 비용과 노력을 기울여 아시아 사자를 보호하고 지켜온 공이 있다. 이는 존중받아야 하는 업적이다. 구자라트 또한 그런 명예를 잃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사자가 더욱 넓은 지역에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다. 아시아 사자의 분산을 통한 개체 수 확대 정책을 추진하려면 구자라트가 그간 행한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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