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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조각하는 트라우마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나를 조각하는 트라우마

나를 조각하는 트라우마


연약함은 어디에서 올까


가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에게서 뜻밖의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예컨대 이런 문장을 읽었을 때다. “나는 연약하고, 정말로 연약하고, 정말 말할 수도 없이 최고로 연약했다.” ‘팔리 경전’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천천히 읽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 고백을 토해낸 사람이 바로 붓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자신의 연약함을 이토록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붓다는 자신의 연약함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 연약함으로부터, 그 연약함을 발판으로 삼아, 깨달음의 광대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가 그토록 연약했던 이유는 ‘아버지의 과보호’ 때문이었다.

‘트라우마 사용설명서’는 붓다의 깨달음의 여정을 트라우마의 자기 치유 과정으로 본다. 심리학자 마크 엡스타인은 붓다의 인생에서 가장 원초적인 상실을 어머니의 죽음으로 본다. 붓다의 어머니 마야는 붓다를 낳은 후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아이는 엄마 없이 자라야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가여운 일인가’라는 집단적 연민의 분위기가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붓다의 아버지와 시종들은 붓다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붓다가 그 어떤 아픔도 겪지 않도록 지나치게 조심한 것 같다. 붓다가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죽음, 질병, 늙음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다.

붓다는 고통의 방어막에 둘러싸여 고통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붓다의 아버지 또한 아내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에, 그 트라우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아들을 완벽하게 살균된 환경에서 키우려 한 것일까. 고통도 슬픔도 없는 인공의 낙원에서, 거대한 인큐베이터처럼 살균된 환경에서 자라난 붓다는 ‘고난’이 없는 대신 ‘경험’도 ‘지혜’도 부족했다.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하고 좋은 곳이야’라고만 가르치는 것도 억압의 일종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로부터 도피함으로써 그들은 붓다를 완전무결한 행복의 나라 통치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해리’라고 한다. 트라우마와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트라우마가 상기되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회피하는 것, 트라우마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려는 것이 해리다. 이것은 붓다의 주변인뿐 아니라 우리도 고통을 잊으려 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붓다의 주변인은 고통을 해리한 후 고통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의 휴화산 아래에는 거대한 슬픔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적어도 삶의 표면에서만은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붓다의 주변인들은 그의 성장환경을 상처 없는 무균실로 통제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했다. 상처가 없는 한 존재는 깊어질 수도 넓어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붓다의 상처

해리는 상처로부터 최선의 방어기제가 될 수 없다. 일시적 위안일 뿐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은 필연적으로 분출의 비상구를 필요로 한다. ‘나는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나는 못났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아픔을 표현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쿨한 태도가 오히려 상처를 키운다.

고통 자체로부터 차단된 환경에서 산 붓다는 극도로 연약한 마음을 지닌 젊은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항상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것은 강요된 평화, 조작된 행복이었다.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고, 일상적인 사건만이 일어나고, 항상 평화스러운 상태에서 살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했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이미 일어나버린 트라우마가 있었다.” 붓다는 마침내 가족은 물론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던 모든 안락함을 송두리째 버린다. 주변의 과잉보호 속에서 ‘거짓 자아(false self)’로 살아온 스스로의 뼈아픈 트라우마를 깨닫고 출가를 결심한다. 궁 밖에서 노인, 병자, 죽은 사람, 숲 속의 수행자를 만난 후 깊은 충격을 받은 그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출가한다.

붓다의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아잔 차의 유리잔 이야기다. 엡스타인은 태국의 유명한 수행자 아잔 차를 만난 경험을 소개한다. 아잔 차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아름다운 유리잔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잔을 사랑합니다. 햇빛이 유리잔에 비치면 그 햇빛을 아름답게 반사합니다. 내가 이 잔을 두드리면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유리잔은 이미 부서진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넘어뜨리거나 내 팔꿈치에 맞아 선반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유리잔은 부서져버립니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 유리잔이 이미 부서졌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유리잔과 함께하는 일분일초는 소중해집니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거대한 제방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섬광 같은 깨달음의 빛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무상성(無常性)의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무상성을 ‘모든 것이 덧없다, 그래서 허무하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무상성이란 바로 ‘이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파할 기회를 주는 것

유리잔이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예찬하면서도, 동시에 ‘이 유리잔은 이미 부서져 있다’고 인식하는 것. 이렇게 가장 긍정적인 극단은 물론 가장 부정적인 극단까지 모두 끌어안는 ‘열림’의 자세가 바로 무상성이라는 것을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깨달았다. 소멸에 대한 공포로 떨지만 말고 소멸 자체를 내 친구로, 아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소멸에 대한 공포를 내 편으로, 내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자에게 상실의 공포는 오히려 마음을 성장시키는 촉진제가 돼줄 것이다.

남보다 빨리 걷고, 남보다 빨리 말하고, 남보다 무엇이든 빨리 해내는 것이 좋을까. 심리학자들은 이런 속성 성장을 건강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엡스타인은 ‘빨리 걷는 아이’를 예로 들면서 “부모는 아직 아이가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계속 아이를 재촉함으로써 아이가 마음속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자 어떻게든 더 빨리 일어서고 더 빨리 걸으려고 분투한다. 그 결과 몸이 준비됐을 때 스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걷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뭐든지 빨리 배우는 아이, 부모에게 쉽게 순종하는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뭔가 안정되지 못한 내면의 불안감이 그런 순종하는 인격의 소유자에게 늘 붙어다닌다”는 것이다.  

상실의 아픔, 성장의 고통을 스스로 겪는 지혜로움은 삶의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함에서 우러나온다.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돌보면서도 그 상처에 지나친 자기연민을 기울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은 자기 마음을 좋건 싫건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평정이 시작되는 시간은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순간이 아니라 ‘트라우마 따위는 없는 척하기’를 멈출 때다.

불교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순전히 관찰하는 태도를 ‘순수한 주의 기울이기’라고 한다. 어떤 미화도 과장도 없이 자기 마음의 추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는 자꾸 자기 마음을 ‘판단’하거나 ‘과장’하거나 ‘해석’하는 데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습관이나 관습의 중력을 거부하고, 마음의 천변만화한 움직임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엡스타인은 “즐거운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즐겁지 않은 것을 거부하지도 말라. 단순히 있는 그대로 거기 머물러서 ‘마음의 바람’을 느껴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이것을 ‘스파이 의식’이라고 한다. ‘스파이 의식’이라는 명칭이 무척 흥미롭다. 내 마음이면서도 내 마음이 아닌 제3의 눈, 그것이야말로 스파이의 시선이니까. 내 마음 내부에서 나왔지만 때로는 내 마음 외부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내 마음을 망원경으로 혹은 현미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는 기술, 그것이야말로 마음 챙김의 핵심이다.

심리학자 하비 슈바르츠는 말한다. 마음은 고통을 대피시키기 위해 자신의 주체성을 버린다고. 아픔이 덮쳐오는 그 수많은 순간, 우리는 ‘내가 내 아픔의 주체가 되는 것’을 포기하곤 한다. 상처를 한 올 한 올 느끼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기에 그럴 테지만 아픔의 한가운데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아프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자 성장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삶은 또 다른 미소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신동아 2016년 6월 호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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