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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저항적 상상력을 위하여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변방의 저항적 상상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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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저항적 상상력을 위하여
20년 20일. 내가 이 숫자를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대학 새내기 시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충격 때문이다. 20년 20일은 고(故)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간이다.

‘잃어버린 그 시간들’은 단지 빼앗긴 것만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선생은 또 하나의 ‘대학’을 발견했다. 대학이 가르쳐야 할 크고 깊은 학문의 뿌리는 단지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파란만장한 사연으로 잡혀온 수형자들의 신산스러운 삶 속에 녹아 있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보이지 않는 감옥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굳이 추위와 더위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추위보다는 더위가 ‘덜 서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추위는 옆 사람의 체온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오지만, 더위는 옆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을 가져오기에 여름 감방 생활이 훨씬 힘들다는 고백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일관되게 감지되는 흐름은 ‘중심성’으로부터의 탈주다. 중심의 눈치를 보지 않는 변방, 중심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는 변방의 저항적 상상력이야말로 그의 삶을 지탱해온 에너지다. 늘 유행을 따르고 대세에 순응하는 삶에서는 변방의 저항적 상상력이 싹틀 여지가 없다. 우선 내가 선 자리가 변방임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탈주는 시작된다. 그는 비전향 장기수의 좌우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해답을 얻었다. 30, 40년 동안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온 장기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

이는 공부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임을 강조하는 선생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뛰어난 이론을 ‘머리’로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이론을 ‘가슴 깊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더 어렵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지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면, 더 어려운 여행은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다. 가슴 깊이 간직한 배움의 감동을 발로 뛰는 실천으로 이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부의 완성이다. 좌경적인 이론이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자의 끝없는 자유이며, 우경적인 실천이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인간의 본성은 과연 보수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선생의 대답이 특히 흥미로웠다.

“나는 라면 끓일 때 계란을 깨 넣으면서 끓는 물 속에서 흰자가 노른자를 에워싸는 걸 보고 감동했습니다. 노른자를 지키려는 충직함이 감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윌슨의 책을 읽고 나서 실망했습니다. 티눈 속 DNA가 자기의 영양분인 노른자를 놓지 않으려는 집착이었습니다. 티눈 속의 DNA가 자기의 서바이벌을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 먼저 닭을 만들고 그 닭으로 하여금 수많은 계란을 낳게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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