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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어느 때고 반성하라

현덕왕후 복위 논란

  • 이규옥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어느 때고 반성하라

어느 때고 반성하라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취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한국고전번역원 刊 ‘사필(史筆)’
 

조선시대에는 왕위와 관련된 금기(禁忌)는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함부로 입에 담았다간 정권의 존립 기반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조선의 가장 큰 정치적 금기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을 목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관련된 일이었다.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권을 탈취한 숙부를 언급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모두가 이렇게 쉬쉬할 때 금기를 깨는 일이 일어났다.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복위(復位)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현덕왕후는 세자빈으로 있을 때 단종을 낳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 문종이 즉위한 뒤 왕후로 추존되었다. 그런데 문종이 죽고 즉위한 단종이 계유정난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세조 2년(1456)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사건에 참여했다 발각되고, 이듬해에는 금성대군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는 사건을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해 결국 단종의 죽음을 초래했다.  

단종이 죽자 현덕왕후는 서인(庶人)으로 폐해졌으며 신위는 종묘에서 쫓겨나고 무덤인 소릉(昭陵)은 파헤쳐졌다. 이후 현덕왕후의 복위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다. 폐위된 지 20년이 지난 성종 9년(1478)의 일이다



정권 정통성과 직결

어느 때고 반성하라

일러스트• 이부록

“소릉(현덕왕후)께서는 뜻밖에 병자년(1456) 사건에 연루되어 폐위를 당하고 20여 년 동안 원혼이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하늘에 계시는 문종의 영혼이 홀로 제사를 받으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소릉을 폐위한 것은 민심과 어긋납니다. 따라서 하늘의 마음과도 어긋납니다. 그러니 존호(尊號)를 복구하고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 백성과 하늘과 선왕들의 마음에 답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성종실록 9년 4월 15일)

남효온의 상소는 당시 도승지 임사홍과 영의정 정창손이 저지해 성종에게 전해지지 못했으나,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연산군 때에도 김일손 등 사림 출신 관원들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연산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종의 모친을 복위하는 것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덕왕후 복위 문제는 폐위 55년째 되던 해인 중종 7년(1512)에야 본격적인 정치 현안으로 거론됐다. 경연(經筵)에서 소세양이 아뢰었다.

“천자와 제후로부터 일반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부가 함께 제사를 받는데, 우리 문종대왕만은 홀로 제사를 받고 계십니다. 그때의 일을 신이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종 때 소릉 복위 문제를 아뢴 이가 있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 많은 사람이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만약 자손이 선대왕의 일이라고 해서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만대가 지나더라도 선대왕의 허물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더한 잘못은 없을 것입니다.”(중종실록 7년 11월 22일)



종묘에 떨어진 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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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종묘대제 시작을 알리는 어가행렬이 재현됐다. 종묘대제는 조선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다.[ 동아일보]

소세양도 남효온과 같이 문종이 홀로 종묘의 제향을 받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며, 이런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세조의 허물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조가 현덕왕후를 폐위한 일을 드러내놓고 비판하기 어렵게 되자 우회적으로 종묘에 문종의 배위(配位, 남편과 아내가 다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가 없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인지 중종은 성종이나 연산군과는 달리 “검토해볼 수 있는 사안이니 일의 전말을 조사해 오라”고 명했다. 일의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 신중하게 처리하겠다는 태도로 돌아선 것이다.

현덕왕후가 폐위된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중종은 “이전 조정에서 결정한 일을 쉽게 바꿀 수는 없다”며 조정 신하들이 회의를 해서 의견을 아뢰라고 했다. 조정의 의견이 갈렸다. 유순정, 성희안 등 보수적인 대신들은 “현덕왕후를 복위하는 것이 의리상 옳기는 하나 당초 세조가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한 일이므로 후대 임금이 가벼이 번복할 수 없다”고 했다. 반면 신용개, 강혼 등 사림 출신 신하들은 “현덕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나 단종 말년의 일을 알지 못했고, 당초 폐위한 것도 세조의 적극적인 의지는 아니었으므로 복위해도 별문제가 없다”고 봤다. 그리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기 어렵다면 별도의 사당에 모셔도 된다고 했다. 중종이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소릉의 어머니가 이미 반역죄를 지어 벌을 받았는데, 그 딸 권씨가 어떻게 역대의 왕과 왕비가 제사를 받는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세조께서 이미 종묘에 고하고 폐출했는데, 지금 다시 종묘에 고하여 복위하고 명호(名號)를 바로잡는다면 이는 세조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지금 복위하라고 명을 내리더라도 조정에서 무슨 말로 감히 종묘에 고하겠는가.” (중종실록 7년 12월 1일)

보수적인 대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현덕왕후의 부모가 종묘사직에 죄를 지었으므로 죄인의 딸이 왕후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대간(臺諫,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과 시종신(侍從臣)들은 한 달이 넘도록 현덕왕후의 복위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러던 중 중종 8년 2월 18일, 종묘의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자연재해조차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여기던 때에 역대 선왕의 신주(神主)를 모신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자, 중종은 사정전(思政殿)에 조정 신하들을 모두 불러놓고 재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사간 조원기 : “신들이 여러 달 동안 소릉을 복위해야 한다고 간청해도 듣지 않으시더니, 지금 종묘에 큰 변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하늘이 뜻을 보인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중종 : “재해가 발생한 이유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필시 아무런 이유 없이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근래에 해마다 재해가 있어 늘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번에 또 종묘에 재해가 발생해 매우 놀랐다. 소릉을 복위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선왕이 하신 일을 함부로 고칠 수 없어 의견을 모아 결정했는데, 대간에서는 더 널리 의견을 모으자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중종실록 8년 3월 2일)



계기와 명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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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유배된 강원 영월군 청령포를 그린 ‘청령포도’. 화첩 ‘월중도’에 있는 8폭 그림 중 하나다. [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종묘에 떨어진 벼락 덕분에 조정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신하 대부분이 현덕왕후를 복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중종도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과인도 당초에 복위하는 것이 인정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다”라며 현덕왕후를 복위하고 종묘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사안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초 이 문제를 의논할 때에, 의정부 신하들과 부원군들이 모두 복위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다른 재상들은 대부분 이 의견을 따랐고, 복위해야 한다고 주장한 신용개 등의 의견을 따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 뒤에 대간과 시종신들이 해를 넘기며 복위를 주장했으나 주상은 조금도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만일 하늘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소릉의 원혼은 복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복위를 주장했다면 어찌 종묘에 벼락이 친 뒤에야 복위했겠는가.

-중종실록 7년 11월 26일



사림 출신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사관도 현덕왕후의 복위를 역사의 순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현덕왕후의 복위는 이렇게 해결됐지만 그 출발점이라 할 세조의 즉위에 대한 신하들의 인식 차이는 컸다. 훈구대신들은 이를 정당하다고 여긴 반면에, 사림 세력들은 이 과정을 부도덕한 것으로 보고 현덕왕후 복위 문제를 통해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어쨌든 세조의 왕위 찬탈과 관련된 금기 중에서 현덕왕후 복위 문제는 종묘에 내려친 벼락으로 인해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실제로 벼락이 무서워서 현덕왕후를 복위시켰을까. 인심에 어긋난 뒤틀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계기나 명분을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통치자가 자연현상을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꼭 어리석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신동아 2016년 8월 호

이규옥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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