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명사 에세이

인생도 결혼도 상생관계

  • 정양호 | 조달청장

    입력2017-01-20 10: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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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2월 25일은 결혼 30주년 된 날이다. 진주혼식이다. 아내가 다시 웨딩드레스를 입기 원해 리마인드 결혼식을 했다. 30년 전 집안 어른의 뜻에 따라 고향의 작은 농협 예식장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아내는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아쉬움도 달래고 싶었나 보다.

    그동안 일에 빠져 집안일에 소홀해온 필자로선 아내에게 미안함이 많았는데, 이번엔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아내 뜻에 선뜻 따르기로 했다. 자식들도 부모의 결혼 30주년 선물로 준비한 여행비용을 리마인드 결혼식에 쓰겠다며 찬성했다.



    결혼 한 번 더 하다

    벌써 결혼생활 30년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30년 전엔 없던 아이가 아이 엄마가 돼 손주와 함께 내 옆에서 사진 찍는 걸 보면서 무정한 세월의 흐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30년 후의 사진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했다.

    ‘결혼은 젊어서 하면 너무 이르고, 나이 들어 하면 너무 늦다.’ 무려 기원전 4세기에 디오게네스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한 결혼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얼굴을 지녔을까. 결혼은 신석기시대에 등장해,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고대국가가 등장하고부터 정착된 제도라는 기록이 있다. 아이의 부계(父系)가 누구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 결혼이란 제도를 발명해냈다고 한다. 남자는 아내가 잉태한 생명이 자신의 자식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계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보완으로 생겨난 결혼제도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사실 현재와 같은 일부일처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플라톤의 저서 ‘공화국’에 따르면 그는 집단결혼을 장려했다. 플라톤은 결혼제도가 인간을 도구화한다고 비판했으며, 사랑은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심한 비난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인간의 통과의례인가, 배우자 선택에 자율권이 없어도 되는가,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이혼이 더 나쁜가 등에 대해 수많은 나라에서 의문을 제기해왔다. 드디어 19세기 이후엔 여성해방론자들에 의해 결혼 비판론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는 10여 년 전 펴낸 ‘21세기 사전’에서 이미 일부일처에 근거한 결혼제도의 종말을 예언했다. 그는 “2030년이면 결혼제도가 사라지고 90%가 동거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결혼 풍습에 대해 연구한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헬렌 피셔도 “과거 1만 년 기간보다 최근 100년 동안의 결혼 관습이 더 많이 변화했다”며 “이 같은 추세로 볼 때 앞으로의 변화는 더욱 극적일 것”이라 전망했다.

    학자들의 분석이나 전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 해체 모습은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혼인율이 해마다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보도는 물론이고, 결혼 적령기 세대에서 결혼을 ‘필수’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더 이상 결혼을 일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전통은 계속될 수 없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벌써 옛말이 돼버렸다.

    유엔미래보고서에서도 ‘2040년경에는 결혼제도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평균수명이 120세를 넘어서는 시점에선 한 배우자와 100년을 함께하는 삶이 인위적으로 불가능해질 수 있으며, 심지어 배우자가 생활의 파트너로서 인식이 전환돼 그 파트너가 인공지능(AI)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AI가 혼자 사는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00세 시대, 새 부부로 거듭나기

    사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결혼제도에 구속받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에선 최근 졸혼(卒婚)이 보편화하고 있다. 나이 든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 개별적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결혼 형태다. 굳이 피곤하게 ‘황혼이혼’이란 걸 하지 않고 말이다.  

    한번 결혼하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사는 건 평균수명이 50대일 때 가능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평균수명이 85세이니 결혼하고 50년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버거워하는 걸까. 우리나라에서도 졸혼에 대한 긍정적 답변이 60%라는 보도가 있었다. 지금과 같은 결혼제도에 식상해졌다는 방증이다.  

    대다수 서유럽 국가에선 사실혼이나 동거가 가족 형태 중 하나로 인정되고 결혼과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는다. 사회생활에서 배우자가 ‘법적 혼인 상태냐, 동거냐’는 도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다. 다양한 결혼과 가족의 형태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이런 추세라면 부부의 개념과 역할도 급속도로 변할 것이며, 결혼제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100세 시대에 아직도 50년을 더 같이 살아야 하는데 갑자기 새롭게 태어날 순 없어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해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다시 했다.

    리마인드 결혼식 외에도 2016년엔 결혼식과 관련한 의미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처음으로 주례를 맡은 것이다. 그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에 비유해 부부생활에 도움이 될 7가지 지침을 이야기해주었다. 필자가 30년 결혼생활에서 얻은 교훈들이다. 사실 결혼생활이란 서로 다름에서 출발해 상생(相生)의 협력관계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후배에게 해준 당시의 주례사가 앞으로 30년의 결혼생활을 다짐하는 리마인드 결혼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두 가지 꼽아보았다.

    첫째,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공통된 삶의 가치, 집안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빠른 시간 내에 정해보자. 앞으로의 생활에 기준으로 삼아야 할 집안의 규칙(house rule)을 빨리 정해두면 불필요한 다툼도 줄고 생활의 보람도 커질 것이다. 이 문제만은 치열하게 토론하고 열심히 싸워 조기에 확정하자.

    둘째,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 이전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주도적으로 생각해보자. 아내의 소망을 내가 먼저 생각해보고, 처가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찾아 실천한다면 집안의 평화는 자연스럽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흔히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결혼은 사랑의 시작이다.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올리면서 신혼의 초심을 되새겨본다. 이제 또 다른 출발이다. 파이팅!



    정 양 호

    ● 1961년 경북 안동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경제학 박사
    ● 지식경제부 산업기술정책관·기후변화에너지자원개발정책관,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 現 조달청장
    ● 저서: ‘때로는 길이 아닌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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