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윤채근의 古傳幻談 |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칼의 가족

  • 윤채근|단국대 교수

칼의 가족

1/4
칼의 가족

일본 군담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도모에 고젠의 상상도.[윤채근 제공]

이건 칼에 얽힌 기이한 인연 혹은 눈먼 원한에 관한 이야기다. 1760년 봄, 평양 관기 모란은 들떠 있었다. 그녀가 애호하던 한시창(한시에 곡조를 붙인 노래) ‘관산융마(關山戎馬)’의 작가 신광수가 평양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평안도관찰사가 베푼 연광정 연회에 불려나간 그녀는 ‘추강(秋江)이 적막(寂寞) 어룡냉(魚龍冷)허니~’로 시작되는 ‘관산융마’를 부르며 상석에 앉은 손님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가 찾는 신광수는 시문에 능한 평안도 성천 기생 일지홍을 옆에 끼고 이미 취해 있었다. 모란은 구성지고 처연하게 이어지던 상조(商調)의 곡조를 바꿔 씩씩한 우조(羽調)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신광수는 그제야 정색하며 모란 쪽에 눈길을 줬다.

오래도록 선망해온 시인을 목격한 직후 연정을 품게 된 모란은 신광수가 묵는 객관으로 편지를 띄워 독대를 간청했다. 답신이 없었다. 모란은 관찰사가 사사로이 아끼는 기녀였다. 제아무리 서도 지역을 풍미하던 ‘관산융마’의 작가라도 함부로 그녀를 취할 순 없었다. 소외받던 남인 출신 신광수는 과거에 합격하고도 변변한 벼슬을 받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였다.

모란은 꾀를 냈다. 관찰사의 대동강 뱃놀이 날, 일지홍을 대동해 나타난 신광수의 배에 슬쩍 올라탄 것이다. 관찰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부벽루 쪽으로 앞서 나아갔다. 모란이 일지홍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홍이는 잠자코 있거라. 내 선비님과 잠시 마음이라도 나누려 한다.”

모란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일지홍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광수 앞자리에 마주 앉은 모란은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에 가락을 맞춰 ‘관산융마’를 불렀다. 그녀가 부르는 ‘관산융마’는 평양 제일의 서도창으로 유명했다. 소리는 넓게 퍼져나가며 강물소리마저 잠재웠다. 신광수가 물었다.

“당돌하다. 저번에는 상조 아닌 우조로 부르더구나?”

웃음기를 거둔 모란이 멀리 모란봉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관산은 변방을 뜻하는데 평양이야말로 조선의 변방 아니겠습니까? 씩씩하게 불러봤습니다. 이제 다시는 가까이 모실 수 없겠사오니 한 번 더 부르고 배를 갈아타겠습니다.”

모란은 혼신을 다해 연거푸 두 번 창하고 목례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타고 온 봄바람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가늘게 흔들었다. 관찰사가 승선해 있던 배로 옮겨 탄 모란이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강녕하소서. 인연 있으면 죽기 전에 뵙겠습니다.”


1/4
윤채근|단국대 교수
목록 닫기

칼의 가족

댓글 창 닫기

2017/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