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동지 입장에서 대통령께 민심 전합니다”

  • 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7-01-11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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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문제 서로 자주 의논해요
    • 이형자씨가 만나자고 했지만 거절했어요
    • 대통령이 좋아하는 음식은 홍어, 추어탕, 조기, 싱싱한 해산물
    • 눈이 큰 미남이었던 대통령, 이젠…
    청와대 비서실 공보기획 담당과장은 정확하게 12월10일 오후 1시20분에 청와대 본관 정문 앞에 대기하라고 했다. 사전에 청와대 비서실에서 요구한 대로 인터뷰 담당기자와 사진 담당 기자의 주민등록번호와 약력, 타고갈 차종과 차번 및 색깔을 알려주었다.

    청와대 11호 정문이라고 불리는 대문 앞에 도착하자 이미 통보를 받고 대기중인 경호원이 다가와서 신분과 차종을 확인한 뒤 대문을 열어주었다. 마침 대문 안쪽에서는 2대의 대형관광버스가 막 나오려던 참이었다. 관광버스 창문에는 ‘위탁가정’ 이라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직감적으로 영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과 오찬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청와대 본관 옆 주차장에 타고온 차를 세운 후 마중나와 있던 담당과장과 함께 창살로 된 문을 지나 청와대 본관으로 걸어들어갔다. 청와대 본관의 육중한 현관문이 열리자 경호원들이 소지품을 자세하게 검사했다. 녹음기의 버튼과 사진기의 셔터를 일일이 눌러보게 했다.

    이윽고 이희호 여사의 접견실에 들어섰다. 접견실은 연한 빛깔로 치장됐는데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벽 주위로는 우리나라 전통 소품들이 진열돼 있었고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여왕이 쓴 듯한 금관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 이희호 여사가 선 채로 웃는 모습을 찍은 조그마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인터뷰 약속시간인 오후 1시30분이 되자 이희호 여사가 접견실에 들어섰다. 연한 계란색의 투피스를 입고 나온 이 여사는 한결 젊어보였고 머리 모양은 마치 둥근 모자를 쓴 듯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 여사가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에 동교동이나 일산의 자택에서 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할머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새로운 자리는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일까.



    ─ 새 천년을 맞는 2000년 1월 1일은 어디에서 맞겠습니까?

    “청와대에서 새 천년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겠죠. 하지만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정을 가질 생각입니다.”

    ─ 어떤 새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2000년대가 열리는 새해의 꿈은 너무 많아요. 무엇보다 우리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제일 큰 소망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의 형편이 훨씬 나아져 빈부의 격차가 좁아졌으면 합니다. 또 새해에는 결식아동이나 소년소녀가장, 장애인이나 불우노인 등 어려운 이들에게 더 많은 사랑의 손길이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새 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여성들의 권익이 한층 신장되고 사회나 나라를 위해서도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어 남녀평등사회로 발전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정치가 여·야의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롭게 상호교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여기에다가 공동여당의 합당과 내년 총선에서의 승리만 곁들인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새해 소망과 이 여사의 소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100년 산삼 먹긴 했지만…”

    ─ 청와대에 들어오신 후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대통령께서 편한 마음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게끔 돕는 일에 신경을 쏟아요. 대통령께서 연세가 많으신 관계로 주위에서 건강에 대해 염려를 많이 해주세요. 저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구요. 고마운 것은 많은 분들이 저희들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겁니다. 저희들은 기독교를 믿지만 불교 신자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시니 힘이 됩니다. 제가 대통령의 건강에 신경을 쓴다고 해서 보약을 해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될 수 있는대로 규칙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씁니다.”

    ─ 저번에 어떤 사람이 100년 된 산삼을 청와대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글쎄 보내신 분의 정성을 생각해서 대통령께서 잡수긴 했는데 100년이 됐는지, 산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런 것 받지 않아요.”

    이 여사는 약간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는데 별로 효험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 대통령은 산에서 나는 음식보다는 해산물을 즐겨드신다고 했는데….

    “원래 어려서부터 섬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해산물 중에서도 싱싱한 것을 좋아하세요. 소금에 절인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런 것을 다 알고 음식을 장만해줘요. 추어탕도 좋아하세요. 장어나 조기도 좋아하시죠. 기본적으로 그쪽은 홍어를 좋아하니까 큰아이가 겨울만 되면 홍어를 가지고 옵니다.”

    ─ 요즘 이 여사께서는 건강관리를 어떻게 합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수영을 하세요.”

    이희호 여사의 건강 관리에 대해서 물었지만 이 여사는 무심결에 대통령의 건강관리에 대한 대답을 했다. 그만큼 신경을 쓴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희호 여사의 건강관리에 대해 다시 묻자 이 여사는 허리를 굽혀 자신의 다리 부분을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작년에 여기를 다쳤어요. 뼈에 문제가 생겨 플라스틱을 집어넣었어요. 의사가 무리하게 걸으면 안된다고 해서 매일 수영장의 물속에서 뛰어요. 물속에서는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더 쉬워요.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르거든요. 아무튼 건강관리는 규칙적인 생활과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는 것이 최고예요. 될 수 있는 대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 대통령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취침전에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든지,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습니까.

    “날마다 기분좋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취침전에는 우스운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곤 합니다.”

    이희호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독특한 스타일의 영부인이다. 단순한 내조형도 아니고 과시적인 활동형도 아니다.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에는 여성운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결혼한 후에는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활동했다.

    이희호 여사가 92년에 쓴 회고록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보면 이 여사의 활동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 만약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지 않고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아니면 독신으로 남았더라면 이 여사는 외무부장관이나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정도는 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마이 웨이’를 걷지 못한 아쉬움은 없었습니까.

    “그런 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이미 책에서도 썼지만 결혼한 지 9일만에 남편이 경찰에 잡혀가는 등 계속 어려운 일에 부닥치니까….”

    책 얘기를 꺼내면서 이 여사는 고생했던 옛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여성보다는 늦은 40대에 결혼을 했으니까 아기자기한 결혼생활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때 남편은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어요.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낭인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정치하는 사람은 굴곡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졌어요. 그래서 불행한 일이 닥쳐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이 어려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요.”

    일제가 지배하던 시대인 1922년에 태어난 이희호 여사에게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전주 이씨 의사 집안의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문과에 입학한 재원이었지만 일제 말기에 그가 했던 일은 충남 예산 삽교국민학교에 부설된 ‘여자청년연성소’에서 오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함께 논밭 매고 보리 베고 산으로 송탄유를 따러가는 것이었다.

    23세 때 해방을 맞은 이 여사는 여자사범대학교 임시 중등교원 양성소에서 국문과 3개월을 마치고 중등교사 자격증을 얻었지만 한번도 활용하지는 못했다. 1946년 9월에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다가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1950년에 졸업했다.

    이 여사는 졸업후 미 문화원의 부설기관에서 계속 공부를 하다가 한달도 되지 않아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의 와중에 이 여사는 김정례, 박기순, 장옥분씨 등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를 조직, 외교국장을 맡았다. 당시 단장은 모윤숙씨였고 김정례씨는 조직국장이었다.

    1952년에는 부산에서 황신덕, 이예행, 이태영, 박순천씨 등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사단법인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고, 이 단체의 상임간사로 일했다.

    이 단체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여성문제연구회’로 개칭하고 남녀가 동등한 법의 개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구 미 공군 정훈국의 군목 소개로 1954년에 도미 유학한 이 여사는 램버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미국 스카렛대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58년 귀국후에는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59년부터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한 62년까지 YWCA연합회 총무로 일했다.

    ─ 김대중 대통령과의 결혼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을텐데요. 그 당시 YWCA 총무로 재직하고 있었잖습니까. 독신도 생각했을 법합니다만….

    “독신도 생각해죠. 주위에서 반대가 많아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인간 자체에 여러 가지로 끌리는 점이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것이 깊고 책을 많이 읽고 얘기해주는 것이 좋았아요. 제 책에도 썼지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좋았어요.”

    ─ 외모가 잘 생긴 점도 한몫 했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이미지와 영 달라졌어요. 지금은 살이 많이 찌셨죠. 그때는 살찐 형이 아니었거든요. 거기다가 눈도 상당히 컸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다지 크지 않거든요. 살이 쪄서 그렇게 보이는가 봐요.”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살찐 모습이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에 비하면 이 여사는 몸매 관리를 잘했는지 호리호리해 보이는 모습이 그다지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사는 청와대에 들어온 뒤 “체중이 좀 늘었다”고 한다.

    첫 대화가 건강이나 음식 이야기부터 옛날 이야기까지 비교적 가볍고 부드러운 주제로 이어지자 이희호 여사는 엄숙한 청와대의 분위기와는 달리 소리를 내 웃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제스처도 취하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기분도 무척 좋아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다.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옷로비사건의 관련 문제일 것이다. 여기에 시중의 궁금증까지 더하면 이 여사가 즐겨 입는 옷의 종류와 구입처일 것이다.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는 청와대 비서실에서도 인터뷰를 하기 전에 옷로비사건과 관련해서는 질문을 자제해줄 것을 부탁했다. 시중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일일이 해명해봐야 더 큰 의혹만 증폭시킨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가 옷로비사건으로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러가기 전에 여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옷로비와 관련된 질문을 꼭 해야 한다며 노골적인 ‘압력’을 넣었다.

    “이형자씨 면담 요청 거절”

    ─ 청와대에 들어오신 뒤 가장 기뻤던 일은 대통령께서 미국 필라델피아시의 자유메달을 수상한 것이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옷로비사건이었죠. 특히 대통령께서 아끼던 김태정 전법무장관이 구속되고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청와대를 떠나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는데….

    “참 안됐지만 옷로비사건에 대해서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다만 일부 언론에 내 얼굴이 나오기에 보니까 추측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자꾸 문제를 삼아요. (옷로비사건과 관련) 대통령도 그런 말씀(‘실패한 로비’가 본질)을 하셨지만 나한테도 접근하려고 했어요. 지난 9월인가 이형자씨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해왔어요. 나는 상대편이 누구든간에 돈 있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다고 거절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만날 꿈도 꾸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이를 공식석상에서 만났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 ‘저 사람이 63빌딩 회장 부인의 동생’이라고 하기에 (이형자씨가) 동생인 줄만 알고 있었어요.”

    그동안 세간에는 이희호 여사가 소속된 창천감리교회의 황용배 장로가 최순영 회장의 구속을 막기 위해 이 여사에게 로비를 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 현재 마사회 감사로 있는 황장로는 신동아 인터뷰(본지 238페이지 참조)에서 “청와대에 들어가 이 여사에게 최 회장 구속과 관련, 교계 목사들의 비판적인 여론을 전했다”고 했다. 이때 이 여사의 입장은 “법적인 문제에 목사들이 나서서는 안된다”며 단호했다는 것.

    창천감리교회측에 의하면 이 여사와 황장로는 오래전부터 창천감리교회에 같이 다닌 신앙적 동지일 뿐 아니라 군사독재 시절에는 동교동에 경찰이나 정보요원들이 밀어닥치면 바로 옆집에 있던 황장로 집으로 중요한 서류나 자료 등을 옮겨놓을 정도로 신뢰가 깊은 사이였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는 현재 창천감리교회 은퇴 장로인데 청와대에 들어간 직후에는 신앙의 문제라며 매주일 교회에 출석했으나 경호원들이 쉬지 못하고 경호상의 어려움도 있어 지금은 매주일 참석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 신동아측에서 이 여사께 로비를 하려다가 접근도 못했습니까?

    “그렇죠. 신문을 보면 ‘내일을 위한 기도’ 출판 기념회를 63빌딩에서 가진 것에 대해 말들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신문사에서 주최해서 내가 참석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때 63빌딩의 (주인) 내외가 저를 만나려고 했다는 것은 나중에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내일을 위한 기도’는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이희호 여사와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책이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구중궁궐’에 있는 이 여사에게 시중의 궁금증을 한번 물어보았다.

    ─ 라스포사 옷은 몇 벌 가지고 계십니까.

    “몇 벌이라고 누가 세고 있나요. 저는 라스포사 옷보다는 클라라윤 옷을….”

    이 여사는 라스포사 옷도 입지만 클라라윤 옷을 더 즐겨 입는다는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최근 옷로비사건의 파문 때문에 옷과 관련된 발언은 몹시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언론에 오르내려 유명 부티크(매장)가 된 라스포사의 옷은 중가 이상이긴 하지만 최고급 의류는 아니다. 80년대에 결혼예복업체로 출발한 라스포사는 현재 일반 정장까지 판매하는 업체로 성장했는데 정일순씨가 사장으로 있다.

    클라라윤은 정일순씨의 남편인 정환상씨가 부도가 난 브랜드업체를 80년대 말에 인수한 것이다. 주로 보통 여자들이 입는 숙녀복 정장을 다루는데 20~30대의 미시족을 겨냥해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희호 여사가 클라라윤을 언급한 것은 라스포사 옷보다 더 싼 옷을 즐겨입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여사가 라스포사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알기에, 라스포사는 신문에 난 건물을 짓기 전에 웨딩드레스를 만들었어요. 당시 충무로 4간가 5가에 있었는데 그때 한국부인회 회장을 맡았던 박금순씨가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6년 전이지요.”

    ─ 정일순 사장이 어려운 시절에 이 여사를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이는 아니고요. 지난 대선 때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줬어요.”

    ─ 지난번 모스크바 방문 때 라스포사 옷을 입고 가셨다는데….

    “라스포사 옷을 한 두벌 가져 갔으니까 입기도 했죠. 그러나 다른 옷도 가져가 입었어요.”

    ─ 필리핀 방문 때 입은 옷도 상당히 좋아보였다는 반응이 있습니다만….

    “동아일보의 어떤 분이 그걸 썼더군요. 그런데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공항에서 손을 흔들 때 입었던 옷인데 예전에도 입던 옷이에요. 필리핀에 간다고 새로 해입은 옷이 아닙니다. 예전에 방영된 텔레비전에도 그 옷을 입은 모습이 나와요.”

    옷에 관한 한 이 여사는 할 말이 많다. 이번에야 로비의혹과 관련돼 옷문제가 거론되는 바람에 당혹스러웠지만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인사’들의 재판정에서 항의하기 위해 다른 여성들과 함께 보라색 옷을 입는 등 옷으로 ‘저항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여사가 옷로비를 받거나 사치할 사람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이번 옷로비의혹 사건과 관련, 공직자 부인들이 수백만원대의 옷을 해입은 사실이 밝혀져 일반 국민들의 분노를 쌌다.

    ─ 대통령께서는 장관에게 임명장을 줄 때 부인을 배석시켰습니다. 그것은 공직자 부인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으로 봅니다. 공직자 부인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직자 부인도 공인입니다. 따라서 남편의 뒷바라지 뿐만 아니라 공인으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직자 내외는 늘 공인으로서 절제하는 생활을 하여 타의 모범이 되도록 해야죠. 그것이 곧 자신과 남편을 위해서는 물론 사회와 나라를 위해 기여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공직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일 것입니다.”

    “대통령과는 동지”

    ─ 이번 옷로비사건으로 대통령이 상당히 상심했을 터인데 어떻게 위로해드렸습니까?

    “상심하셨을 때는 말이 없으시니까 위로해드리기가 힘들어요.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더욱 마음을 상하게 할 것 같아서요. 그때는 나도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있어요. 뭔가 골똘히 생각하시는데 방해가 될 것도 같고요.”

    ─ 대통령께서는 청와대에 들어오신 후 옷로비사건으로 가장 상심한 것 같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박주선 비서관이) 속였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시지요. 김태정씨에게 서류를 전하는 문제는 미리 의논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 영부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제가 할 일은 먼저 말한대로 대통령이 마음 편히 국정수행을 하도록 해드리고 소외계층을 돕는 일입니다. 제가 늘 관심갖고 있는 여성·청소년·노인·장애자·문화·환경분야 등을 지원하는 역할이죠. 그리고 밖의 이야기, 즉 국민의 뜻을 가감없이 전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 부부는 동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동지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에 대해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십니까.

    “거의 모든 대화를 나누는데 제가 간섭하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인사문제예요. 다만 근본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능력있는 그런…, 어느 누구를 추천하지는 않아요. 청와대 안이고 밖이고 내가 추천해서 취직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여사는 분명히 성실하고 정직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추천한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사문제가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 성실하고 정직하고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영부인으로서 추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사실 추천하려고 들면 그런 사람이 있지도 않지만… 다만 여성에 관한 것은 대통령께서 때로 물어보십니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그러나 그런 경우도 특정인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정치, 사회참여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과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고 인사에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여성의 발전을 위해 많은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고 성과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수십년동안 쌓여온 인식이 하루아침에 바뀌기 어렵듯이 아직도 부족한 점은 있겠지요. 우선 여성의 정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해 대통령 직속의 여성특별위원회 등 6개 부처에 여성정책담당관을 신설했지요.

    정책결정과정에서는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여성위원이 2002년까지 30% 이상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공무원채용목표제도를 도입하여 신규채용시 20%를 여성으로 뽑도록 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후보의 30%를 여성에게 할당하고 지역구 진출도 늘리는 방안을 적극 강구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능력있는 많은 여성들의 창업과 기업활동을 지원하고 있지요. 그러나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법 개정도 정치권의 합의를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듯이 정부만이 아니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 개선 못지 않게 여성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봐달라는 사람도 많고”

    ─ 어머니로서 자녀들 교육문제나 성장과정에 대해 아쉬운 점이나 보람된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시죠.

    “걔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아이들도 같이 겪어야 했어요. 막내아이가 국민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아마 71년 대통령선거가 있던 해였을 거예요. 그때 우리가 미국에 잠시 있었는데 우리집에 폭발물 사건이 일어났어요. 막내아이가 사람들이 몰려오고 조사하는 것을 다 보고 자랐어요.

    그리고 납치사건을 당했죠. 우리집으로 돌아오신 후에는 연금을 당했으니까 막내아이를 경찰들이 데리고 학교에 다녀왔어요. 그리고 3·1구국사건으로 구속되시는 바람에 막내아이가 중학교 교복을 입는 것도 못 보셨어요. 고등학생 때는 80년 사건이 났죠. 그러니까 남들처럼 호화롭게 과외공부시키는 것은 없었어요. 큰 아이들도 대학졸업 후 취직을 할 수 있어요, 사업을 할 수 있어요. 아무 것도 못해요. 더구나 큰 아이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도 아버지 직업난에 쓸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의 고통은 보통이 아니었죠. 젊은 나이에….”

    자녀들에 관한 한 보람된 것보다 아픈 기억이 많았던 이 여사의 목소리는 한없이 잦아들었다. 특히 막내아들 홍걸씨에 대한 안타까움은 목소리에 절절히 녹아 있었다.

    ─ 청와대에 들어온 후 가족들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문제는 야당 때보다 지금이 아이들이나 우리들 자신이 더욱 힘이 들어요. 우리들 모두 언행을 조심해야죠. 봐달라는 사람도 많고…. 너무 조심해야 하니까 둘째 아이는 어디 숨어 있을 때가 있으면 숨었으면 좋겠대요. 여기는 오히려 나아요.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러나 걔들이 있는 곳은 자유롭잖아요. 이리 가면 이미 사람들이 알고 만나려고 지켜서 있고 저리 가면 저리 가서 서 있으니… 걔들 뿐만 아니라 저를 좀 아는 사람도 제가 어디에 왔다는 것을 알면 그쪽을 통해서 뭔가 부탁을 하려고 하고, 이력서를 줘보려고 하는데…. 저는 이력서를 받지 않지만 갖다주면 그것을 그냥 놓아둬요. 그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나를 통해 누가 취직을 했다고 하면 그 사람 입을 통해 나가지 비밀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 말이 나가면 또 딴 사람도 원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일체 그런 부탁에는 응하지 않아야 ‘부탁해봐야 소용이 없더라’고 하지 않겠어요.”

    아마 이 여사의 발언은 그의 속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털어놓은 말일 것이다. 가난할 때는 서로 도와주는 마음만으로도 배부르지만 부자만 되면 이런 저런 옛 인연을 들먹이며 손 벌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통령의 부인과 아들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오죽 많을까. 특히 어려웠던 시절에 안 사람들의 부탁은 거절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 민주화의 동지로서 볼 때 대통령이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돕도록 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계시다가 내려올 적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아주 고민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여야 총재회담이 있을 때 노대통령이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혹시라도 전두환 대통령이 사가로 돌아오면 야당에서 들고 나올 것이 아닌가 해서… .

    그런데 그때도 쾌히 승낙했어요. 염려마시고 오시도록 하라고… 여하간 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는 대통령의 그런 점을 존경해요. 그리고 말로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죠. 예수님께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나를 괴롭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기에) 처음에는 저도 깜짝 놀라긴 했어요. 그러나 다 용서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가 남긴 공적도 있으니까…. 그런데 제가 어제 신문을 보니 민주화를 위해 가장 애쓴 대통령이 현 대통령이고 다음이 박정희 대통령이래요. 놀랐어요.

    그래서 나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니 유신 시절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감옥에 가고 했는데, 얼마나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은데, 두번째로 지목되다니요. 물론 점수는 낮은데 그래도 2등이잖아요.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첫번째 지도자로 박정희 전대통령을 꼽는다면서요. 그것도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국민들이 그렇다면 따르는 거죠.”

    ─ 정치인으로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부군으로서의 김대중 대통령을 평가하신다면?

    “대통령은 일생동안 그 숱한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민주주의의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용기로 숱한 역경을 헤쳐온 데 대해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가 숱한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남편이 걷고 있는 길이 분명 옳은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다음 손님을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짜여진 일정에 따라 78세의 ‘할머니 영부인’은 육중한 문으로 다시 사라졌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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