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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고흐 평전 쓴 영남대 박홍규 법대학장

척박한 시대에 희귀한 ‘르네상스적 인간’

  •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척박한 시대에 희귀한 ‘르네상스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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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흐라는 사람은 여러분의 친구다, 고흐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몇 년간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바로 여러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이다, 나는 여러분의 근로시간이 단축되고 삶의 질이 조금 더 나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여러분은 고흐의 그림도 즐길 수 있고 베토벤의 음악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회가 정말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해요.” 》

“나는 빈센트를 사랑한다. 형제처럼 부모처럼 친구처럼 애인처럼 연인처럼. 나는 그를 존경하거나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위인도 천재도 거장도 대가도 사표도 스승도 도사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모자랐고 약했으며 슬펐다. 지독하게 못났고 어설펐으며 서글펐다. 나도 그렇기에 그를 사랑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다. 아무 노력도 없이 오직 약간의 손재주와 감각으로 예술가연 하고자 짐짓 미친 체하는 예술가들은 강한 자다. 그들은 순수하지 못한 정신적 사기꾼이다. 그들은 똑똑하고 영리하며 재빠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가짜로 미친 체한 적이 없는 빈센트가 결국 진짜로 미쳐버린 것처럼 보인 것은 그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술수를 부리거나 사기를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정신이 순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살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이 책을 빈센트를 사랑하는 약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들, 열심히 노력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내 마음의 벗들에게 바친다.…”

지난 10월 중순 발간된 책 ‘내 친구 빈센트’의 머릿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지은이는 영남대 법대 박홍규(朴洪圭·48) 학장. 박교수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이 땅에서 까마득히 먼 유럽 땅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한 화가를 스스럼없이 ‘내 친구’라고 부르며,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박교수가 사랑하는 그 ‘친구’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학창 시절에 배운 기억에 의하면,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화가다.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어느 날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자기 손으로 한쪽 귀를 자르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자살해버렸다는 ‘미친 천재’다. 생전에 ‘해바라기’ 단 한 점이 헐값에 팔렸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과 세인들의 철저한 무시 속에 살았지만, (신문 해외토픽난에 이따금 실리는 단신에 의하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것 정도가 일반인들이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이다. 또 있다. “starry starry night /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로 시작하는 돈 매클린의 영어 노래 ‘빈센트’….

박홍규 교수는 그런 ‘빈센트’를 왜 새삼 한국에 소개한 것일까? 100년 전 유럽에서 살다 간 ‘미친 천재 화가’가 2000년대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각별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더욱이 박교수는 미술이나 미학이 아니라 노동법을 전공한 법학자다. 차갑고 냉철한 법 논리를 공부하는 학자가, 불꽃 같은 예술혼을 주체하지 못해 끝내는 스스로를 불살라버린 예술가의 평전을 쓴다?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앞의 인용문에도 희미하게나마 드러나 있다. 즉 박교수는 이 책에서 후세인들에 의해 신비화한 ‘천재 화가’가 아니라 ‘나약하고 순수한 보통 사람’인 빈센트 반 고흐, 세상과 담을 쌓고 혼자만의 광기로 똘똘 뭉친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시대를 고뇌하면서 노동자와 고통을 함께 나누자 했던 한 인간인 빈센트 반 고흐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가의 평전을 쓴 법학자의 심사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 정도 ‘짐작’만으로 박홍규 교수를 직접 만나볼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할 생각이 든 것은, 몇 사람으로부터 그에 관한 약간의 ‘사전 정보’를 듣고 나서였다. 예컨대 그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점, 교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도시락을 싸들고, 자전거로 출퇴근해왔다는 점, 이번 책말고도 서양의 동양에 대한 편견, 다시 말해 서구중심적 제국주의 문명에 통렬한 비판을 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저 ‘오리엔탈리즘’과 미셸 푸코의 고전 ‘감시와 처벌’을 번역하는 등 그동안 법학자로서는 ‘상습적인 외도’를 해왔다는 점 등이 그의 주변에서 나도는 이런저런 얘기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인간 박홍규’에 대한 호기심을 부쩍 자극했다.

30년 만에 완성한 숙제

그를 만나기 위해 대구 영남대로 향한 것은 초겨울 바람이 더욱 스산하게 느껴지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두꺼운 스웨터에 콤비 저고리, 그리고 적당하게 헝클어진 머릿결이 서울의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만나는 ‘법대 교수님’과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연구실을 온통 채운 책들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기 전까지는 철학이나 불문학쯤을 가르치는 인문학자로 착각하기에 딱 알맞다.

─ 언제부터 ‘내 친구 빈센트’를 쓸 생각을 하신 겁니까?

“내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10년이 넘어요.”

─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게 1964년입니다. 신구문화사에서 ‘세계의 인간상’이라는 12권짜리 책이 나왔어요. 당시로는 장정이나 내용이 획기적인 책이었습니다. 거기 화가편에 미켈란젤로·세잔·밀레·고흐, 이렇게 네 사람의 얘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고흐 책이었는데, 당시 그 책에 굉장히 열광했어요.

알고 보니 스테판 폴라첵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는데, 지금도 고흐가 자기 귀를 잘라서 손에 들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아버지가 ‘태양은 붉다’고 했더니 소년 고흐는 ‘아니다. 태양은 노랗다’고 말하는 대목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그 땐 소년다운 유치한 차원에서 고흐에 열광했던 것이지요.”

─ 왜 하필 고흐였지요? 얼핏 생각하기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에도 천재성을 발휘했던 미켈란젤로에게 열광할 만한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 미켈란젤로나 세잔, 밀레 얘기도 좋았어요. 저는 언젠가는 밀레에 대한 책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 네 권 중 폴라첵의 고흐 전기는 유일하게 소설 형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생 시절에 고흐 얘기가 더 와 닿지 않았을까…”

─ 물론 고흐를 미친 천재로 묘사한 책이었겠지요?

“그래요. 어릴 때부터 아주 유별나고 특이한 아이였고,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였다, 말하자면 고흐에 대해서 지금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상식을 기본으로 만든 책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책은 1930년대에 독일에서 나온 책이었고, 그 때는 고흐가 막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할 때였다는 것도 알게 됐지요.”

─ 중학 시절에 읽은 고흐 이야기가 30여년이 흐른 지금 이 책으로 결실을 보게 된 거로군요?

“우리 세대 모두가 그렇게 자랐지만, 저 역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데모하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서도 혼자서 스케치를 하곤 했어요. 친구들은 그런 저를 비웃었지요. 그림이라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부르주아 짓인데, 하면서 말이죠(웃음).”

─ 교수님 시절에는 데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았나요?(웃음)

“아, 그래도 우리는 데모를 했습니다(웃음). 그것도 열심히 했어요.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빈센트를 잊고 살았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고흐에 관한 책이 나오면 꼭 챙겨봤고, 그림을 그린다든가 그림책을 본다든가 하는 정도는 계속했지만….

그런데 80년대 말쯤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반성을 했겠지만, 뭐라고 할까, 지식인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 도그마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저에게 80년대는 도그마의 시대였거든요.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양 믿던 시절인데,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대세에서 좀 벗어나 있었어요. 사회주의나 노동문제에 대한 저의 관심은, 그런 사상이 구현되는 세상과 예술은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느냐에 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마르크스를 열심히 읽던 본류 진보지식인들과는 좀 거리가 있었지요.”

‘사회주의자’ 빈센트 반 고흐

─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빈센트가 다시 떠오른 겁니까?

“그래서 80년대 말 이후로 좀 더 다양하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도 읽고,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게 된 거지요. 사실 나에게 빈센트 반 고흐는 숙제였어요. 어린 시절에 읽었던 기억대로 고흐를 미친 천재로만 이해하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남아 있었던 거지요.”

─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기려면 다들 저렇게 미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군요?

“그래요. 거기엔 또 나 같은 범인(凡人)들의 질투심 비슷한 감정도 있었겠지요.

내가 빈센트의 작품을 처음 본 게 1983년입니다. 일본에 유학을 갔는데, 일본에 빈센트 그림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작품 ‘해바라기’도 일본에 있어요. 그런데 그 전에 손바닥만한 사진으로 봤을 때와는 느낌이 굉장히 달랐어요.

뭐랄까, ‘해바라기’든 무엇이든 참 좋은데, ‘이건 잘 그린 그림이다’ 혹은 ‘아주 능숙한 그림이다’ 이런 생각은 들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왜 이 사람의 그림이 이렇게 감동적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됐지요. (책 표지에 나온 고흐의 자화상을 가리키며) 이 그림만 해도 그래요. 인물화로 잘 그린 그림, 미술 기법상 뛰어난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터치나 색깔 묘사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지 않아요?

─ 고흐는 르누아르나 세잔같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지요. 더 거칠다고 할까….

“그럼요.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일본에 있으면서 고흐 전기나 논문들을 죄다 찾아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는 평생 고흐만 연구한 의사가 있는데, 책을 네 권이나 냈어요. 그 책을 읽고 고흐가 간질 환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위대한 화가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치기어린 생각들, 마치 어떤 사람이 바이런을 좋아해서 30리 길을 매일 절름발이 흉내를 내면서 걸었다는, 그런 콤플렉스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후 89~90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에 가 있으면서 좀 더 자료를 모았고, 91년에 처음 유럽여행을 하면서 고흐와 관련된 곳들을 둘러봤습니다.

그러면서 ‘아, 빈센트가 자기 귀를 자른 건 단순히 광기 때문이 아니었구나’ ‘빈센트가 아를(남프랑스의 도시)에 간 것은 나름의 화가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구나’ 등등의 생각을 굳혔고, 이런 생각들이 제가 80년대에 고민했던 사회주의 문제와도 맥락이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90년대 초반에는 미술사나 미학 쪽에도 사회사적 관점이랄까, 이런 게 폭넓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 이른바 예술사회학이지요.

“그래요. 예술을 사회학 내지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이런 글에 고흐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고흐 초기의 농민화나 탄광촌인 보리나주에 머물던 시절의 노동화 같은 것들도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 말하자면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단순히 천재의 개인적인 열정과 재능의 소산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군요?

“고흐의 삶을 반추하다가 고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시대적 고민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고흐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그림 속에 그런 사상을 녹여 넣었기 때문에 화풍의 유치함이나 혹은 미술의 기법적 측면과는 상관없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고흐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중간중간에 미술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우리 기준으로 보면 예술가가 될 소질이나 기회가 전혀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노동현장에 직접 투신하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열정을 그림으로 쏟아냈다는 거지요. 결론적으로 나는 고흐의 이런 면에 매료됐고, ‘내가 한번 정리해보자’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겁니다.”

노동자와 예술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런 삶이 박교수의 삶에도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 같은데요.

“나는 1981년부터 대학에서 노동법을 가르치면서 노동현장에서 무료 강연도 하고, 나름대로 노동조합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강연에 나가면 마지막 5~10분은 반드시 고흐 얘기, 아니면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나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흐라는 사람은 여러분의 친구다, 고흐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몇 년간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여러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이다, 나는 여러분의 근로시간이 단축되고 삶의 질이 조금 더 나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여러분은 고흐의 그림도 즐길 수 있고 베토벤의 음악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회가 정말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무튼 내게는 고흐가 정말 친구였어요. 내가 지금까지 맞닥뜨린 노동문제나 인권문제, 사회문제들이 고흐의 삶 속에 그대로 다 녹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를 통한 19세기 후반기에 대한 이해, 고흐를 통한 사회인식이라는 게 나 자신에게 참으로 중요한 판단의 자료가 됐고, 또 그런 것을 통해서 삶을 좀 더 다양하게 인식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요.”

─ 제가 하려던 질문을 그냥 숨쉴 겨를도 주지 않고서 다 말씀해버리셨는데요(웃음).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통념상 법대 교수가 예술가 평전을 썼다는 사실을 생경하게 느끼는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내 전공인 노동법이나 인권문제를 공부하는 것과 같은 태도와 성의로 빈센트에 대해서 제가 구할 수 있는 것, 봐야 할 것은 죄다 봤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고 얼마 안 돼 방송국에서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진행자의 첫 마디가 ‘법대 교수가 어떻게 이런 책을 냈느냐’는 거였습니다. 그 말이 한편으론 법대 교수가 쓴 미술책은 조금 소홀해도 괜찮다는 뉘앙스로 들려서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더라고요.

나는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나라에서 미술사나 미학을 하는 분들이 전공 논문을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글을 보면 ‘왜들 이렇게 공부를 안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튼 아마추어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 박교수께서 예전에 번역한 ‘오리엔탈리즘’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읽으면서 느꼈고, 오늘 또 느끼는 것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르네상스형 인간’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만….

“아이구, 그건 과찬이고요(웃음).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한다면, 요즘 인문학의 위기다, 인문정신이 사라졌다, 이런 말들을 하잖아요? 특히 대학에서 학부제를 도입한다고 하면서 그런 말이 많은데, 나는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엄밀하게 말하면 인문학과의 위기 아닙니까?

무엇보다 나는 지금처럼 전공 간에 높은 장벽을 쳐놓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같이 이렇게 엄청난 장벽을 쳐놓은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요? 법대 교수가 인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이건 사실 천박한 풍토 아닙니까?”

전공 간 벽을 허물어야

─ 지금은 소위 스페셜리스트가 존중받는 시대라고들 하지요. 반면에 제네럴리스트의 미덕은 사회적으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 제네럴리스트를 강조하는 겁니까?

“그렇죠, 속담에 한 우물을 파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저보고 잡학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공 분야가 따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예술이나 사회사상 등 제가 관심있는 분야도 강의해보고 싶어요. 다만 대학에서 전공에 장벽을 워낙 높이 쳐 놓고서 그걸 막고 있어서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책도 쓰게 된 건데….

─ 말하자면, 이런 책을 쓰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런 벽을 허무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전공의 장벽을 허무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끼리 장벽을 쌓아놓고서 마치 자기 것만이 가치있는 것인 양 얘기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 아까 80년대를 도그마의 시대라고 하신 것처럼, 균형감각을 상실한 도그마라고 할까,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가르치잖아요. 내가 ‘우리 법대 학생들에게는 그저 그런 수준의 교양영어는 관두고 차라리 법률영어를 가르쳤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한 동료 교수에게 했더니 그분이 화를 버럭 내면서 ‘법률영어를 가르치더라도 영문과 출신이 가르쳐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왜?’ ‘법대 출신은 인문정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속으로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생각했어요(웃음).

이건 물론 문학으로서의 영문학과는 차원이 다른 얘깁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은 자기 전공에 함몰돼서 인문주의를 아주 좁게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다른 예로 제가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고 출간할 때에도 굉장히 애를 먹었어요.”

─ 왜요?

“출판사가 나서려고 하지 않았거든.”

─ 장사가 안 될 거라는 이유 때문에요?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우선 번역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지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몇 군데 출판사에 부탁했다가 죄다 거절당했거든요. 결국은 교보문고, 말하자면 책장사로 돈을 좀 벌어서 잘 안 팔리는 책을 몇 권 출판해주는 교보문고 출판사에서 그 책이 나왔어요.

그래도 그 책은 번역자가 인문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받지는 않은 편입니다. 그런데 대다수 인문학자들은 지금도 그 책을 많이 인용하면서도 출처를 거의 밝히지 않습니다. 원서로만 밝힐 뿐이지요.

‘오리엔탈리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사이드야말로 르네상스적인 인간입니다. 그 책은 서구문화에서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를 조목조목 밝혀내고 비판한 책인데,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사회학 등등 안 다룬 분야가 없어요. 그런 작업이 우리 나라에서는 왜 안 되는지 그게 의문스럽다는 것이지, 내가 그 책을 번역한 게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풍조는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 아까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과의 위기라고 하셨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이 현저하게 낮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잖아요?

“학생들의 인문학 지식이 언제는 대단했었는지 모르겠지만…(웃음). 더 큰 범위에서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겠지요. 사회의 위기, 체제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이런 문제를 짚어봐야 하는데…. 아무튼 내 생각은 학자들,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 전공에 매몰돼 있다든가, 그네들끼리의 언어로만 소통한다든가, 이런 짓을 이제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 영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런 자세,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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