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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엄익준 전국정원차장의 삶과 죽음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힌 ‘진짜 정보맨’

  • 김당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힌 ‘진짜 정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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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부훈(部訓)이 지향하는 바 그대로 '음지'에서 살다가 '양지'에 묻혔지만, '음'지에서 살다가 '음지'에 묻한 정보맨들이 훨신 많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죽은 자의 삶은 더러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미화되기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지난 5월3일 타계한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의 ‘운명(殞命) 스토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국정원의 신화로 남을 모양이다. 그의 죽음은 ‘요절’은 아니었지만 예상보다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삶을 불태우고 갔다고 할까. 그래서 아쉬움이 더 크다.

엄차장이 지난 2월7일 처음 간암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 5월3일 운명할 때까지의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삼성의료원 등에서 지병인 허리디스크를 고치려고 물리치료를 받아왔다. 별다른 차도가 없자 친구 소개로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침술 한방치료를 받았지만 허리통증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를 이상히 여긴 병원측이 2월7일 1차 정밀진단을 해본 결과 간암에서 전이된 종양을 척추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병원측은 환자 본인과 보호자(부인)가 동석한 가운데 그런 사실을 알리고 정밀진단을 권유했다.

간암 판정하자 “내가 오래 살았구먼”

엄차장이 처음 간암 판정을 통보받았을 때 보인 첫 반응은 뜻밖에도 “내가 오래 살았구먼. 집사람 덕분에 20년을 덤으로 살았어”라는 혼잣말이었다. 그 말은 아내에 대한 감사이기도 했다. 20여 년 전 간염 양성 판정을 받았는데도 이제까지 건강을 유지해온 것은 서울대 간호학과 출신인 아내의 각별한 내조 덕분이라는 뜻이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부인은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간암 판정을 통보 받고서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곧 “그래요. 당신은 오래 사셨어요”라고 ‘맞장구’를 치며 남편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남편에게는 물론 주변에도 슬픈 표정이나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다.

한방병원에서는 삼성의료원에서 2차 정밀진단을 받아 거기서도 간암 확정판정을 받으면 그때 가서 치료 방법을 결정하자고 권유했지만 엄차장은 ‘현안 업무’를 처리하느라 병원 가는 것을 미루다가 2월22일 정밀검사를 한 끝에 암세포가 이미 폐와 척추까지 퍼져 있다는 확정선고를 받았다. 삼성병원 주치의는 현 단계에는 암세포가 너무 퍼져 있어 수술이 불가능하며 기타 항암 요법도 어렵다고 했다. 대신 홀뮴 치료 및 진통제 투여를 제안하면서 즉시 직무를 중단하고 안정을 취하라고 권유했다.

엄차장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확정판정을 받고 사직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임할 경우 투병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건강을 이유로 남북관계의 ‘중대한 현안’을 앞두고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우려했다. 또 갑작스레 사임할 경우 후임자를 임명해서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키기까지의 업무 공백과 조직의 동요가 걱정되었다. 결국 그는 진통제를 복용하며 2주에 한 번씩 암 전이 속도 등을 관찰하는 외래진료를 계속하면서 근무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 병세 악화에 따른 통증과 체력의 저하로 정상적인 집무수행이 어려워지자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하루 앞둔 4월7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직서를 냈다.

그때까지 엄차장은 자신의 신병에 대해 완벽한 ‘보안’을 유지했다. 그는 아내와 보좌관말고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도 단단히 다짐을 받아 사표를 낼 때까지 끝내 보안을 유지했다. 심지어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에게까지도.

주변에서는 그의 초인적인 정신력은 국정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공직자로서의 투철한 자세 그리고 철저한 직업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후배들이 엄차장에게 갖는 인식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66년 중앙정보부 공채(公採) 출신으로 안기부·국정원까지 34년간 재직하는 동안 말단 직원에서 출발해 역대 최초로 차장을 두 번씩이나 지낸 정통 정보맨이었다. 그것은 그의 명예이자 후배들의 꿈이었다. 그런 그가 국정원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4월7일 사의를 표명하고 집무실을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A4용지 3쪽 분량의 이임사를 남겼다. “돌이켜 보면 국정원 34년 재직중 대북 전략국장과 3차장(대북 담당), 2차장(국내 담당) 등 요직을 두루 거치는 영광을 안아 국가와 국정원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중 사표를 내게 된 아쉬움과 함께 후배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당부했다. 공직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조직의 화합이 필요하며, 부단한 자기계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이임사는 직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고 투병하는 동안에도 본연의 업무를 수행한 엄차장의 불굴의 정신과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본받자는 취지의 원내(院內) 전자메일이 돌았다.

정상회담 때문에 딸 결혼식 불참

그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조직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도 강했으며 자신보다는 늘 국가와 조직을 먼저 생각하고 오로지 업무에만 전념했던 상사로 기억되고 있다. 공직자로서 그의 자세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94년 7월2일 안기부 대북 전략국장이던 고인(故人)은 당시 판문점에서 열린 정상회담 실무대표 접촉에 ‘총리보좌관’ 모자를 쓰고 참가하느라 외동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해 화제가 됐다. 당시 그는 “둘 다 일생에 한 번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노릇보다 공직자의 사명이 먼저”라며 결혼식장으로 가던 발길을 회담장으로 돌렸다. 그때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건네주지도 못하고 본 그의 사위도 국정원 직원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곁’을 안 주기로 유명하다. 국내 담당 차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그가 언론사의 부장급 이상 간부들과 접촉하는 일은 많았지만 공석에서말고는 그와 개별적으로 접촉한 일선 취재기자가 거의 없을 정도다.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지난 5월3일 엄익준 차장이 운명하자 국정원은 ‘국가정보원 2차장 신원사항’이라는 보도자료를 만들어 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기자들에게만 배포했다. 국정원이 공개한 그의 신원사항을 원문(原文)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성명 ː 엄익준 ▲생년월일 ː 1943년 9월1일 ▲본적 ː 전라북도 전주 ▲학·경력 ː 60년 2월 전주고 졸업, 64년 2월 고려대 정외과 졸업, 95년 국가안전기획부 제3특별보좌관, 97∼98년 2월 국가안전기획부 제3차장, 99년 6월 국가정보원 2차장 ▲가족관계 ː 부인 임미대자(59), 1남1녀.

그의 신원사항에 64년 대학 졸업 후 95년 안기부 제3특보까지 30여년간의 경력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세세한 경력을 기록하다 보면 그가 역임했던 직책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아예 생략해 버린 것이다. 국정원의 내규가 그렇다. 정무직(차관급) 이상이 아니면 이름이나 직책 같은 기본적인 신원사항조차 공개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규정을 기자들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빈칸을 채우는 것은 기자의 몫이고 그 빈칸을 채워가다 보면 인간 혹은 ‘국정원맨’인 엄익준을 알 수 있다.

1943년 전북 남원 태생이다. 중등학교 교사인 부친이 그를 일곱 살에 학교에 넣었는데 공부를 잘해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을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남들보다 2년을 빨리 졸업했다. 전북 최고의 명문인 전주북중·전주고를 졸업했다. 전주고 동기(37회)인 김동선 차관에 따르면, 공부도 잘했지만 핸드볼 등 스포츠도 만능이었다.

남보다 한 살 빨리 입학한데다 월반을 해 ‘친구’도 남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교우관계가 동갑내기에서부터 위로 두 살 터울까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고·대학교 동기들과 ROTC(학군) 동기 등 친구 대부분은 그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서울대 간호학과 출신인 그의 부인도 대학 입학연도는 같지만 두 살 연상이다.

동기동창들이 평하는 학창 시절의 엄익준은 한마디로 ‘의리의 돌쇠’다. 그때 동기생 중에 특히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만든 모임이 ‘벽우회’인데 사회적으로 출세한 친구들보다는 의리를 중시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다. 그는 운명하기 이틀 전에 벽우회 친구들을 불러모아 마지막 유언을 남겼고 바로 그 친구들이 그를 임종했다.

4·19가 나던 60년에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해서는 그때 막 창설된 ROTC(학군)에 지원했다. 64년 졸업과 동시에 학군(2기) 장교로 임관해 66년 전역하면서 중앙정보부에 입부(入部)했다. 그 후 30여년간 보안·대공·기획·대북 업무 등을 두루 섭렵했다. 특히 상황판단이 빠르고 일 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기획 및 대북 전략 업무에 정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각종 내부 교육과정을 거의 모두 1등으로 수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거친 주요 보직(직책)은 중앙정보부 전주지부 정보과장, 안기부 기조실 과장, 1차장보좌관, 충북지부장, 대북 전략국장, 안기부장 제3특보, 안기부 3차장, 국정원 2차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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