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7월호

축구인 최은택

  • 입력2006-10-04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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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을 하면서 학업도 병행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장려해야지, 그게 논란이 된다면, 이거 나라가 망할 일입니다. 개인 생활을 못하게 하고 운동 이외의 소질을 개발할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면 그건 감옥이지요. 무엇보다도 교육적이 아니에요.” 》
    대학 교수들에게 안식년(安息年)이라는 것이 있다. 본시 유대 사람들이 7년째 되는 해에는 휴식을 취하던 데서 비롯된 것인데, 일정 기간 근속해온 교수들의 노고를 위무하고 학문 연찬의 시간을 주자는 의미에서 시행하는 제도일 터이다.

    나는 교수들이 이 안식년을 어떻게 보내는지 잘 알지 못한다. 재가연수(在家練修)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외국 대학에 나가 연찬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안식년을 中國 연변 오동팀 감독으로

    그러나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친 안식년을 중국 연변에서 보낸 한양대학교 체육대학의 최은택 교수(62)만큼, 의미 있는 안식년을 보낸 교수도 드물 것이다. 그는 강단에 선 이래 처음 맞은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중국의 한 프로축구팀 감독으로 지냈다. 그가 맡았던 팀은 길림성의 조선족 자치지역인 연변의 ‘오동(敖東)팀’이었다.





    1997년 7월 7일자 연변지역 조선족 ‘종합신문’은, 최은택 감독이 오동팀을 맡은 이래 막강 전력을 자랑하던 ‘전위’팀을 맞아 2:1로 이긴 뉴스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문기사라기보다는 격문에 가깝다. 1부리그 격인 ‘갑(甲)A’에서 꼴찌를 맴돌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전위팀을 상대로 홈스포츠장(홈구장)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조선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실감케 하는 기사다. 조선족뿐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팀만 만나면 공한증(恐韓症)으로 맥을 못 추고 있던 중국의 축구계는 ‘최은택’을 통해 한국식 축구의 면모를 읽기에 바빴다. 인민일보, 신화통신, CCTV를 비롯한 중국의 주요 언론이 다투어 그를 소개했다.

    恐韓症을 극복시켜줄 ‘교수님’

    98년 1월, KBS는 ‘최은택 현상’을 다큐멘터리로 소개한 적이 있다. 연변의 한 조선족 사내아이는,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최은택 교수님”이라 했다. 연길시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나 날아갈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서안(西安)의 한 시민은 “최은택 감독을 아느냐?”는 질문에 “함부로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 그분은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교수님이다”라며 오히려 한국 취재팀을 야단쳤다.

    그는 이제 다시 교수로 돌아와 강단에서 학생지도에 전념하는 한편으로, ‘2002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직분에 충실하고 있다. 운동장의 함성이나 질타도 뒷전으로 물러나고 매스컴의 각광도 그를 저만치 비켜난 지금이, 축구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얘기를 담담하게 듣기에는 오히려 맞춤한 때가 아닐까? 지난 6월3일, 서울 역삼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월드컵 관계로 일본에 다녀오신 걸로 아는데 어떤 일을 보고 오셨는지요?

    “2002 일본조직위원회를 방문해서 성공적인 경기개최를 위한 방안도 논의하고, 경기장 건설 상황과 각 경기장의 특색들을 둘러봤습니다.”

    ―일본의 경기장 건설 상황은 어땠습니까?

    “요코하마와 오사카 경기장을 둘러 봤는데요, 요코하마는 예전 전용축구장을 증축하는 경우고, 오사카는 우리 잠실경기장같이 종합경기장인데 이미 완공이 된 상태였고 다른 경기장은 40%에서 60%의 공정을 보였습니다.”

    ―공동 개최국으로서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본받아서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우선 장애인이 관람하는 데에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0개의 경기장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립니다. 서울의 경우야 다르겠지만, 지방의 경우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조성한 대형 축구장이 월드컵 경기가 끝난 후 어떻게 관리되고 활용될 것인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요.

    “일본도 월드컵 이후의 경기장 관리문제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축구장에 유스호스텔을 지어서 청소년의 사회활동에 기여한다거나, 풀을 조성하겠다는 등의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의 경우만 해도 J리그가 아주 잘 되고 있고 관중도 많습니다.”

    ―관중 호응도는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열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관심가는 국제경기가 열려야 스탠드가 들어차는데….

    “그게 걱정입니다. 월드컵이 끝나고나서 그 운동장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우리도 고민이 많습니다. 청소년 캠프로 활용하거나 음악회 등의 행사를 유치한다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거든요. 가장 좋은 것은 한국의 프로축구가 활성화해서 경기장이 글자 그대로 ‘경기의 장’으로 거뜬히 관리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미군 하우스 보이로 전쟁중 호강

    최은택은 193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1945년 소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는데, 그때는 강원도 통천에서 살았다. 소학교 시절 이미 학교 대표 축구선수였다. 47년 부모를 따라 월남, 경기도 연천중 1학년 때 6·25를 맞았다. 피란길에 길이 엇갈려 가족들과 헤어졌으나 대구까지 흘러간 그는 운 좋게도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들어가 전쟁시기를 ‘호강’하며 보냈다.

    미군 부대의 북진 행렬에 끼여 인천까지 올라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를 다시 만나 인천에서 송도중학을 다니게 된다.

    ―전쟁 직후의 학교 체육 상황은 어땠습니까? 축구팀 만들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을 것 같은데….

    “축구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오히려 지금 프로축구보다 관중이 더 많았어요. 송도중학을 졸업하고 축구 명문이던 한양공고에 진학했는데, 당시에는 한양공고와 더불어 배재·중동·동북·영등포공고 등이 서울에서는 강호였고, 지방에서는 부산의 동래고와 경남상고 그리고 전주의 전주고, 광주의 광주사범 등이 강팀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어떤 포지션을 맡았습니까?

    “이너(Inner)였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미드필더지요.”

    한양공고를 졸업한 뒤 신흥대학에 진학한 그는 한양대에 축구부가 생기자 그리 옮겨간다. 그러니까 최은택은 한양대 축구부가 처음 생기던 시절에 선수로 들어가서 감독을 거쳐 체육대학 교수가 되었으니 한양대 축구의 살아 있는 역사인 셈이다.

    1950년대에는 국제경기가 고작 1년에 한 번 정도였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양대 축구부와 육군헌병감실 축구단, 그리고 대한중석팀을 거치는 동안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 2진으로 활약했으나 빼어난 활약을 못한 축이었다.

    ―당시에도 요즘처럼 다양한 축구 기술이나 전술이 있었습니까? 가령 선수배치를 4·4·2 시스템으로 한다거나….

    “기술이래야 단순했지요. 전술 역시 ‘WM 포메이션’(공격진은 W 대형으로, 수비진은 M자 대형으로 포진)이 고작이었어요.”

    1967년, 선수 생활을 마친 그는 이듬해에 모교인 한양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10년 넘게 감독생활을 한다. 1971년에 한국 고교축구 상비군이 생길 때 초대 감독을 맡았고, 72년에는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해외원정을 다녔다. 조광래, 조영증, 허정무 등 근래 프로팀 감독으로 활약하는 사람들이 그 무렵 청소년 대표팀의 주축이었다.

    73년도부터는 국가대표 코치를 맡아 지도했다. 이회택, 박이천, 김재한, 이세연, 변호영 등이 활약하던 시절이다.

    ―국가대표 코칭 스태프로 대표선수를 이끌고 치렀던 경기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경기나 가장 아쉬웠던 경기는 어떤 경기였습니까?

    “기분 좋았던 경기는 다 잊어버렸는데 가슴 아팠던 경기는 기억이 납니다.”

    ―어떤 경기였는데요?

    “74년도에 이란에서 열렸던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 축구팀 코치로 참가했어요. 북한 대표도 참가했지요. 테헤란은 저녁에는 시원하지만 낮에는 굉장히 덥습니다. 이회택, 박이천, 김재한 등 평소에 팔팔 날던 선수들이 더위에 맥을 못 추는 겁니다. 예선 1차전에서 태국을 상대로 1:0으로 이겼어요. 선수단 관계자들이 실망한 거지요.”

    그 당시 태국은 워낙 약체였기 때문에 10골 가까이 넣어야 만족해하는 분위기였다. 한국·태국전 다음 경기는 북한이 출전하는 경기였는데, 해가 지고 난 다음 선선한 날씨 속에 치른 탓인지 북한 선수들의 움직임은 남한 선수들보다 민첩해 보였다.

    “그 한 경기를 보고 나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을 통해서 다음날 바레인하고의 경기에서 져주라고 지침을 내린 겁니다. 우리가 바레인을 이겨버리면 2회전에서 북한과 맞붙을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내가 보기에 당시의 북한 축구팀 실력은 우리보다 한 수 낮았어요.”

    그때만 해도 스포츠 대결에서도 북한은 무찔러야 할 ‘적군’이었던 것이다.

    ―그 지시대로 이행했나요? 져주라는 지시에 선수들이 순순히 따르던가요?

    “‘기관’으로 통하던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지시를 거역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레인한테 1골만 먹고 져주라고 했는데 선수들이 ‘실수로’ 그랬는지, 아니면 그런 지시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거의 안 뛰고 서 있다가 4골이나 먹어버렸어요. 나도 선수를 해봤지만 경기에 나가서 져주라는 지시를 받거나 지시를 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당시 최영근 감독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축구판을 영원히 떠나고 싶을 만큼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북한은 남한 대표의 ‘보이지 않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예선 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주먹만한 활자로 멍청하게 서서 맥없이 당한 대표팀에 뭇매를 가했다. 그렇다고 “중앙정보부에서 지라고 하는데 어떡하란 말이냐”고 대꾸할 수도 없어 쏟아지는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열렸던 제5회 세계대학선수권대회에 감독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파라과이를 꺾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대학선수권대회이긴 했으나 우리나라 남자 단체 구기 팀이 세계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기는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신연호, 유동춘, 김강남·성남 형제 등이 주축이었다.

    ―오랫동안 대학에 몸담으셨으니까 드리는 질문인데, 제가 보기에는 선수를 양성하는 시스템에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축구만 해도 이미 초·중·고 시절부터 아예 학업을 전폐하며 운동에만 매달리지 않습니까?

    “교육정책이 잘못됐어요.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선수로 뛰었지만 그때는 학교 수업을 다 받으면서 운동했어요. 축구를 24시간 해야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하루에 두세 시간만 해도 충분해요. 초등학교 교육은 성인이 됐을 때 뭔가를 하기 위한 준비과정 아닙니까. 축구도 마찬가지예요. 어렸을 때 기본에 충실해야 나중에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어요.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식의 성과 지상주의로는 훌륭한 선수가 될 수도 없어요.”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야 한다”

    ―최근 한 여자 수영선수가 선수촌을 이탈했다가 징계당한 사건을 두고 엘리트 체육 중심의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학업도 병행하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장려해야지…. 운동시간에 자기 능력 이상의 목표를 향해서 매진할 수 있도록 강도 높게 훈련시키는 것, 그건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 생활을 못하게 하고 운동 이외의 소질개발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면 그건 감옥이지요. 교육적이 아니에요. 제자들 사이에 나는 아주 무서운 감독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선수들 합숙훈련을 할 때에 나는 대학원생들 데려다가 영어 공부도 시켰습니다. 물론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학생들이라 흥미를 느끼는 선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최은택 교수는 우리나라 축구인 중에서 해외 연수를 가장 많이 받은 지도자다. 1972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던 FIFA 코칭스쿨에 참가하여 100여일 동안 연수를 받고 돌아왔고 1977∼78년 2년 동안은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말레이시아 연수 때에는 간단한 영어시험만 보고 참가했으나, 독일 유학은 사정이 달랐다.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유학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비자를 주는 조건이었다.

    “축구협회 추천으로 유학 간다고 신문 보도가 났는데, 독일어 못해서 못 간다면 망신 아닙니까. 독일어 개인교습을 받느라 땀깨나 흘렸지요. 6개월을 밤낮 없이 공부했더니 눈병이 생겨서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이 됐습니다.”

    간신히 시험에 합격해서 독일로 간 그는 6개월 동안 현지에서 어학연수를 더 받은 다음에 쾰른 체육대학에 배치됐다. 그는 그래도 의사소통에 애로가 있더라면서, 외국말 배우는 것이 축구보다 더 어렵더라고 실토했다.

    79년 그는 대한축구협회의 최연소(41세) 이사가 되었고, 그해 아시아축구연맹 기술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한양대 체육대 교수로 임용된 그는 84년에는 프로축구 포철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92년부터 4년간 체육대학장을 지내던 그가 학교로부터 1년간의 안식년을 부여받은 때가 96년이었다.

    이제 연변에 진출하게 된 내력을 들어볼 차례다.

    “내가 골프를 잘 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 중에서는 아마 둘째 가라면 섭섭할 겁니다. 그런데 골프를 열심히 하다 보니 팔꿈치에 통증이 생겼어요. 국내에서는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양대학에서 체육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중국 연변 출신 조선족인 추명(秋明)이라는 청년이 중국에 가서 한방(漢方) 치료를 받아보라고 하는 바람에 건너가게 됐어요.”

    술과 담배에 절어 있던 연변팀

    추명은 80년대에 최교수가 아시아 축구협회 일로 중국에 갔을 때 통역을 담당했던 학생인데 최교수의 주선으로 한양대에 유학 왔다. 연변으로 건너간 최교수는 추명의 안내로 현지 축구관계자들을 두루 만나볼 기회를 가졌다.

    ―중국의 프로축구 갑A리그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습니까?

    “지금은 14팀인데 당시에는 12팀이었어요. 리그가 끝난 뒤 하위 2개팀은 2부로 떨어지고 2부에서 잘 한 팀이 갑A로 올라오는 방식입니다.”

    ―연변팀은 모두 조선족으로만 구성돼 있습니까?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데, 조선족 선수가 60% 정도 되고 한족(漢族)과 아프리카에서 온 용병도 있었어요.”

    최교수는 연변대학으로부터는 안식년인 1년 동안 겸임교수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그리고 자치주 당국으로부터는 2부 리그로 떨어지기 직전에 있는 축구팀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겸임교수 제안은 쉽게 승낙했으나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축구팀을 맡는 것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탐색차 선수단을 방문한 최교수는 실망하고 말았다. 선수들이 감독·코치와 맞담배질을 하고 있었고, 경기가 없는 날은 술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 당국에 감독 수락 조건을 제시했다.

    “팀을 맡기려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2부로 떨어지더라도 성적을 두고 시비하지 말라, 선수 기용이나 관리에 대해서도 일절 간섭하지 말라.”

    그런 조건이었다. 그는 팀을 맡자 일대 수술을 단행했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선수들을 모두 쫓아냈어요. 그러고는 18∼19세의 어린 선수 30명을 모아 기초훈련부터 시키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주변에서 야단이 났지요. 쓸 만한 선수들은 다 내보내고 어린애들을 데리고 무슨 프로축구를 하겠다는 거냐고요. 그래서 나한테 맡긴다고 했으니 이런저런 소리 말라고 했지요.”

    뿐만 아니라 20명이 똑같이 나눠 갖던 경기수당도 시합에 나가는 11명에게만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침운동이라는 걸 모르던 선수들에게 겨울철(11월)인데도 ‘6시 훈련집합’ 명령을 내렸다. 안 나오면 월급에서 벌금을 공제하겠다고 했다.

    “돈 벌려면 뛰어라”

    선수들이 달라지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다음해 봄, 시즌이 시작됐다. 문제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시합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첫 게임 상대는 최강을 다투던 상해팀이었다. 2:1로 졌다. 그러나 선전이었다.

    그런데 이후 5게임을 내리 져버렸다. 연변 자치주 당국은 물론이고 주민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성적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잖으냐. 열여덟 열아홉의 어린 선수들이니 2부로 떨어지더라도 거기서 충실히 기반을 닦은 다음 다시 갑A리그로 올라와야 그 실력이 영원히 가는 거다. 자꾸 간섭하면 그만두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6번째 상대는 군(軍) 팀인 ‘8·1隊’였다. 연변팀은 상대의 홈구장인 북경 근방에서 벌인 시합에서 3:0으로 승리했다. 첫 승리였다. 조선족 신문인 ‘종합신문’은 ‘연변팀, 목마름에서 해탈’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아래 ‘눈물겨운 승리’라고 표현했다. 연변 주정부의 정룡철 주장(州長)은 선수단에 축전을 보냈다.

    ―특별하게 지시한 전술이 있었습니까?

    “워낙 개인기가 약하다 보니 그걸 커버하기 위해서 많이 뛰는 축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역을 좁히는 전술로 나갔어요. 공을 뺏기면 거기서 싸우지 말고 전부 우리 문앞으로 후퇴해서 수비를 강화했다가 상대로부터 공을 빼앗으면 벌떼처럼 달려나가는 거죠.”

    97 시즌에 4등을 했다. 꼴찌팀을, 그것도 어린 선수들을 다듬어 4강까지 끌어올리자 전중국이 깜짝 놀랐다. 그것도 ‘한 게임은 져주고’ 거둔 수확이었다. 한 경기를 일부러 져주다니?

    “천진팀이었어요. 그 팀은 전년도에 2부로 떨어졌다가 97년도에 1부로 올라온 팀이었거든요. 우리가 막판에 천진팀에 이겨버리면 그 팀은 또다시 2부리그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연변팀이 2부 추락 위기에 처했을 때 천진팀이 한 번 져준 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완강하게 거부했지요. 세상에 경기에서 패하라는 지시를 선수들한테 내리라니 무슨 소리냐,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으로 돌아가버리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이미 주(州)의 수장들 사이에 거래가 이뤄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아시안 게임에서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져준 후 자괴감으로 축구판을 떠날 생각까지 했던 그로서는 선수들에게 “운동장에 나가서 지고 오라”는 지시를 내릴 수는 없었다. 최감독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을 택했다. “좋다. 2진 선수들만 출전시키겠다. 그래도 천진팀이 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연변팀 2진은 열심히 싸웠다. 천진팀이 3:2로 간신히 이겼다. 중국 신문에서 난리가 났다. ‘최은택이 상대 팀으로부터 돈을 받고 2진을 내보냈다’는 것이었다.

    연변팀의 ‘4강신화’에 대한 주민들의 열광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연변에 자치주가 생긴 이래 사상 첫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고, 주 행사에서는 최은택 감독 이야기를 가무극으로 꾸며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선수들을 데리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 오르기도 했고,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흑룡강성의 하얼빈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땅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최은택 교수님’에게 사인을 받겠다고 몰려들었다. 중국의 프로팀 중에서 경기가 끝난 뒤에 선수들이 감독에게 인사를 하는 광경은 연변팀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선수들에게 단지 축구기술만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후배 선수들이 선배를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것도 최감독 부임 후에 생겨난 풍경이었다.

    ―98년도에는 시즌 벽두부터 성적이 안 좋았고,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으로 보도가 됐는데요?

    “구단 예산이 없으니까 선수들 월급을 못 주고 자꾸 미루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선수들이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뛰겠습니까?”

    중국 대표팀 맡을 뻔하기도

    ―프로축구 팀이 연변자치주 팀인데, 운영도 주 예산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주에서 스폰서를 잡아가지고 운영합니다. 당시에 연변팀의 스폰서가 ‘오동제약’인데, 98년에 재계약을 못하겠다고 손을 들어버린 겁니다. 직업 선수들에게 월급을 못 주는 상황이니 경기가 되겠습니까. 주 당국의 관료들에게 왜 당신들은 호화스럽게 살면서 선수들 월급을 안 주느냐고 따져보기도 했어요. 콩고 출신 용병도 3명이나 있는데, 월급을 못 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 얘기는 그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최교수는 다시 한양대학의 평교수로 돌아왔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귀국한 것을 그는 못내 아쉬워한다. 현재 연변팀은 다시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는 소식이다.

    ―중국 축구협회에서 최교수님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영입을 하는 문제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중국 축구협회 관계자들과 체육기자 등이 감독 물망에 올라 있던 중국인과 나, 그리고 영국인을 대상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1000명이 투표를 했는데 내 표가 47%가량 나왔어요.”

    압도적인 지지였다. 그러나 중국 당국에서 이모저모로 생각해본 결과 한국인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영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시아 지역에서 걸핏하면 맞붙어야 할 한국팀인데, ‘적장’ 출신에게 아군의 지휘권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영국인 감독을 영입하는 쪽으로 피해갔다.

    ―중국의 다른 프로팀으로부터 맡아달라는 제의가 없었습니까?

    “많았지요. 사천팀의 경우 상당히 좋은 조건을 내걸고 제의를 해왔지만 거절했습니다.”

    ―상당히 좋은 조건이라면 어느 정도….

    “최소한 50만 달러는 되지요.”

    ―왜 안 가셨어요?

    “축구감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세요? 애당초 1년만 하고 학교로 돌아오겠다는 계획이었고, 건강도 썩 좋지 못해서 미련없이 돌아왔어요.”

    ―최교수님의 뒤를 이어서 김정남, 박종환, 차범근 등등의 지도자들이 중국 프로팀 감독으로 속속 진출했는데 한결같이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세요?

    “그 사람들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선수의 자질이나 기타 외적 조건이 부합되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이 능력이 없어서 중도에 물러났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다행스럽게 조선족 자치주로 갔기 때문에, 주 행정당국과 시민들이 같은 핏줄을 타고난 나를 믿고 맡겨줘서 내 의지대로 팀을 지휘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조건이 따라주지 못했단 말예요. 그런 차이지, 한국축구 지도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역량 차이로 가늠해서는 곤란하다고 봐요.”

    “감독을 바람막이로 써먹으면 안돼요”

    ―현재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습니다만, 가령 한·일전을 비롯한 국가대항전에서 만족할 만한 성적이 안 나오면, PC 통신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살벌한 비난들이 쏟아집니다. 차범근 감독도 홍역을 치른 적이 있고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만큼 축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감독은 승부사니 그만한 비판은 받아들여야지요. 현재 허정무 감독이 잘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축구협회나 코칭 스태프에 마스터 플랜이 없다는 점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목표로 했다면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마스터 플랜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런 계획은 감독보다도 축구협회에서 해야 돼요. 축구협회가 감독을 바람막이로 써먹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성적이 나쁘면 모든 책임을 감독에게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경기의 승패에 있어서 감독의 역량이 미칠 수 있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내가 보기에는 10%도 안 됩니다. 선수가 좋아야 되는 거지요.”

    ―선수 선발과 훈련, 작전, 그리고 경기 당일의 선수 기용 등을 통틀어서 승패에 대한 감독의 영향력이 10%밖에 안 된다는 것은 뜻밖인데요. 지금은 경기에 지고 나면 대부분의 책임이 감독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요.

    “1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팬들에게 디테일한 마스터 플랜을 사전에 내놓고 실상을 홍보해나가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이선생은 브라질 대표팀을 맡고 제가 한국 대표팀을 맡았다고 해봐요.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이길 수 없어요. 국민들이 왜 그 생각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세계 축구의 수준으로 로 볼 때 우리가 속한 아시아권은 다른 대륙에 비해 못해도 한참 못합니다. 그러니까 선수, 감독, 축구협회, 국민, 매스컴이 한덩어리가 돼서 격차를 줄여나가자, 이렇게 돼야지요. 차범근이 훌륭한 선수였고 열심히 하는 감독이었다는 점 인정해야 합니다. 왜 16강에 못 들었느냐? 실력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맞붙어 싸우는 상대국 팀의 유명선수 몸값이 1500만 달러예요. 우리 대표선수들 몸값을 다 합해도 그만큼은 안 됩니다. 그런 실상은 고려하지 않고 차범근이나 허정무한테 이기라고만 하면 안 되지요. 16강에 들면 그건 잘 한 거지요. 그러나 16강에 들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정몽준 회장이 할 수 있어요?”

    국민들이 잘한다면 그는 잘하는 선수

    ―차범근 감독은 선수 기용 문제로 비판을 받았는데, 축구팬들이 잘 한다고 생각하는 선수를 감독도 잘 하는 선수로 평가해야 합니까?

    “축구팬들이 잘 한다고 인정하는 선수는 감독이 또 다른 눈을 가지고 비틀어볼 필요가 없어요.”

    ―포지션의 특성이나 경기 운영상 일반에게 잘 한다고 알려진 선수를 제외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가 많으면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국민들이 잘 한다고 인정하는 선수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선수예요. 독일과 영국도 그걸 중시하는 건 마찬가집니다. 또 하나 대표단은 미완의 선수를 키우고 말고 할 시간이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하는, 검증받은 선수를 골라가지고 그 특질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해야지, 자기가 선수를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오히려 큰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세계축구연맹이 ‘프로리그가 있는 국가’로 인정하는 조건이 14팀 이상이다. 최교수는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나라가 ‘프로축구가 있는 나라’의 커트라인에도 미달하는(현재 10개팀) 현실을 방치하고 있는 데 대해 신랄히 비판했다.

    평생을 축구와 함께 살아온 사람답게, 그리고 선수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논문을 발표해온 이론가답게, 그는 선수와 지도자와 팬들과 축구행정가들에게 할 말이 아주 많은 듯했다.

    물론 공을 차는 방식이 여러 가지듯 그의 얘기에 이론(異論)을 달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축구팬의 입장에서, 최은택만한 경륜과 이론을 갖춘 사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든든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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