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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IOC위원의 30년 스포츠 交遊錄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 김운용 IOC집행위원· 대한 체육회장 ·새천년 민주당 상임고문· 16대 국회의원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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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정상회담 대표단으로 평양을 다녀온 한국 체육계의 거목 김운용. 그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 스포츠계 인물들과 폭넓게 교유해왔다. 젊은 시절 여러가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70년대 이후부터는 오직 국제 스포츠 외교에 승부수를 던졌다.》
내 인생은 어떤 상황이든 서울 올림픽과 떼어놓을 수 없다. 따라서 삶의 실타래와 교유 관계도 여기서부터 하나씩 풀어야 마땅하다.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정식 취임한 보름후인 1981년 9월18일 김포공항.

서울발 서독 프랑크프루트행 대한항공 901편은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사고가 난 것일까?

그러나 승무원들은 그다지 특별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출발예정시간을 30여분이 지나서야 검은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서둘러 탑승했고, 그제서야 비행기는 서서히 활주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비행기는 서울 하늘로 솟아올랐다.

“ 세울, 꼬레아!”

「선더버드 9·20 작전」

선더버드 작전이란, 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 위한 정부주도의 극비작전암호다. 이 비행기에 마지막으로 탄 승객은, 그때까지 정치와 체육계에서 물러나 있던 비밀특사자격 박종규씨(전 청와대 경호실장)였다.

우리의 여러가지 유치전략 가운데 하나인 이 작전은 박종규씨를 비롯한 우리 대표단이 당시 서독의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메이커인 아디다스(Adidas)의 다슬리회장과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ANOC)의 바스케(멕시코)회장 등과 긴밀하게 접촉,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1981년 6월이 다 지나서였다. 국내는 5共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어수선했을 뿐만 아니라, 80년 5월에 있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을 본 세계는 한국을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문제 투성이 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미 일본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속히 국민의 단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치적인 목적과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외교적인 이익을 고려해 올림픽 유치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올림픽을 개최하자는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서울에서 열린 첫 국제 규모의 세계사격대회를 성공리에 치르고 난 직후인 1978년이었다.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9년 봄 국민체육심의회를 통해서였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택수 IOC위원, 정상천 서울시장, 박찬현 문교부장관, 박종규 사격연맹회장과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와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집행위원을 맡고 있던 나를 포함한 심의회에서 올림픽 개최여부를 심도 있게 논의했지만 박종규씨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연이은 12·12사태 등으로 올림픽 유치논의는 일단 중단되었다.

5共 들어 다시 올림픽 유치 논의가 시작됐는데 국민의 단합과 국위선양, 대외 홍보에서 올림픽보다 나은 범국가적 이벤트는 없다고 판단, 이를 적극 추진키로 했다. 이때 박종규씨의 설득이 큰 힘이 되었다.

유치단이 서울을 출발하기 4개월 전인 81년 5월 체육계에선 경제계의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장를 비롯, 언론계의 이원홍 KBS사장, 박영수 서울시장, 조상호 대한체육회장, 이연택 국무총리실 행정관 그리고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WTF) 총재직을 맡고 있던 나를 포함해서 올림픽 기획단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처음에 참여했다가 막판에 빠져나왔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어느 날 IOC 사무총장 모니크 베를리우 여사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올림픽 개최지 선정이라는 중요한 안건을 다루는 총회에 한 사람이 두 단체의 업무를 보는 것은 규정상 불가능하므로 내가 맡고있는 국제경기연맹 (GAISF) 회장과 서울 올림픽 유치단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GAISF회장 자격이 유치 활동을 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였다. 나는 이 충고에 따랐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

제 24회 올림픽 개최 도시가 서울로 결정되었다.

“ 세울 , 꼬레아!”

지금까지도 나의 귓전에는 사마란치 위원장의 그 한마디가 생생하기만 하다. 이 말은 동방의 작은 나라를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급부상시키는 동시에 나의 어깨 위에 스포츠 외교라는 막중한 책임을 올려놓았다.

총회가 끝난 뒤 그날 저녁, 쿠루트하우스에서 유치성공 자축 리셉션이 열렸다.

비록 스포츠인 출신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정주영 회장은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등 몹시 기뻐했다.

나의 후원자, 사마란치

세월이 지나면 새 친구 사귀기도 어렵고, 기왕에 있던 친구들과 우정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신분이나 활동범위, 경제력 등이 서로 비슷하지 않으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25년 간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 중 하나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975년 로마 NOC(국가 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였다. 첫 대면부터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다음해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GAISF 총회에서는 당시 IOC부위원장이던 그가 내게 꽃을 보내왔다. 서로 가까워진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을 펴면서부터였다.

서울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많은 난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올림픽 게임 이래 가장 훌륭하게 치러낸 대회였다고 자부한다. 특히 서울 올림픽 경기 스케줄과 TV방영권 문제가 어렵게 꼬일 때 이를 함께 해결하면서 우리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국제 스포츠계는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과 GAISF의 토머스 켈러 회장이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켈러의 뒤를 이어 이 단체의 회장 선거에 출마했고, 켈러의 출마 포기 선언 후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GAISF회장이 된 이후 내가 선택한 것은 IOC와의 대립이 아니라 평화였다.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올림픽 정신에 근거하여 상호 동반자 관계를 형성, 국제 스포츠계의 평화를 유지하자는 나의 뜻을 사마란치가 수용했다.

사마란치는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에스파냐 (스페인)가 민주 왕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그는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거나 서울 평화상을 받으러 오는 등 그 동안 서울만 30차례 방문했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미래를 매우 밝게 보는 친한파가 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12월16일 대통령 선거를 하던 날. 그는 30분 간격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개표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낮이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소식을 전하기 쉬웠지만, 한밤중에도 그는 30분 간격으로 전화를 했다. 자다가 일어나 텔리비전의 개표상황을 말해 주는 것을 보면서 집사람이 “사마란치 위원장 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물을 정도였다.

이튿날 다시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과 전화였다.

“김 위원, 어제는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가 불안해져 올림픽을 치르는데 장애가 될까 싶어 걱정이 돼서 그랬습니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나라입니다. 앞으로 크게 성공할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은 그 품성과 능력을 가지고 머지않아 세계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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