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김운용 IOC위원의 30년 스포츠 交遊錄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 김운용 IOC집행위원· 대한 체육회장 ·새천년 민주당 상임고문· 16대 국회의원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3/4
4·19와 관련해 최근 밝혀진 일화가 하나 있다. 신동아(新東亞) 2000년 5월호 별책부록인 ‘16대 국회의원 인물 사전’을 들추다 한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서울 용산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한 설송웅( 松雄)씨는 4·19당시 중동고등학교 학생회장으로 시민 대표 6명 중 1명으로 뽑혀 송 계엄사령관과 조재미(趙在美) 15사단장 안내로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가 이대통령에게 하야(下野)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는 말을 듣고 당시 안내했던 이병간 대위의 보고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그는 지역구로 나는 전국구로 함께 첫 금배지를 달게 되었으니 정확히 40년이 흐른 세월 앞에 인생무상을 되씹을 수밖에. 송장군은 4·19가 마무리되는 5월 허정(許政) 과도 내각이 들어서면서 최영희(崔榮喜) 장군에게 육참총장 자리를 넘겨주고 예편,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육군 소장 주도의 군사 쿠데타.

미국에 머물고 있던 송요찬 장군은 혁명 정부의 요청으로 그해 6월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나도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한 달 뒤 송장관이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으로 영전되자 함께 의전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후에 김현철씨가 내각수반을 맡았고 나는 이 두 분을 모시고 일한 보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5·16 군사 쿠데타 2주년을 막 넘긴 63년 8월8일 동아일보가 3면 전면에 걸쳐 송요찬 전 군정 내각수반이 ‘박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편지를 실었다. 송 전 수반은 이 장문의 공개 편지에서 박정희 의장에게 민정으로 가는 길목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군정 당국은 곧 6·25 전쟁 당시 장교를 사살했다는 혐의 등으로 송장군을 구속했다. 마침 나는 미국에 공무로 출타중이었는데 아무런 기색도 모르고 귀국하다 공항에서 곧 바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들은 송장군의 의전 비서관으로 재직했다는 이유로 ‘공개장’작성 관여와 외국언론에 전달 여부 등을 추궁했다. 사실 전혀 모르는 일이라 관련이 없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나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을 뒤늦게 안 김현철 내각수반 (1962년 7월 ∼ 1963년 12월)이 “현재 나의 의전 비서관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강력 항의해서 나는 곧바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다음날 사표를 들고 내각수반 공관을 찾았으나 김수반의 만류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나는 내각수반 겸 외무장관 비서관으로 있는 동안에도 카이로 총영사, 콩고 대리 대사 등으로 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196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미대사관(대사 金貞烈) 참사관으로 임명돼 외교관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 당시 나는 많은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다.

5.16ㆍ송요찬(宋堯讚)ㆍ나

나는 공항에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배웅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내는 손님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늘 바빴다. 당시 워싱턴에는 한국 식당이 없던 까닭에 우리 음식을 대접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 당시 미국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 집에서 밥 한끼 먹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감히 자부할 정도다. 우리 집에서 하도 많은 고기를 소비하는 탓에 동네 슈퍼마켓에서는 우리가 식당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 지경이었다. 초청대상에는 외국 사람들도 많았다. 이때 사귄 사람들은 내 평생의 후원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1965년에 UN대표부 참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UN에서 일하는 동안 세계에 대해 진정으로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의 이름과 대사들의 이름을 외어야 하는 고충도 있었지만 한꺼번에 각국의 대사들이 일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서 장래 큰 도움이 되었다.

UN은 말 그대로 회의외교의 본고장이었다. 그곳에서 국제적인 회의를 어떻게 진행하고, 발언을 어떻게 하며, 기분이 언짢아도 참으면서 적절한 때에는 어떻게 반격을 해야 하는가 등을 실제적으로 몸에 익힐 수가 있었다.

1967년 영국 대사관 참사관으로 전근했다. 영국은 민주주의의 전통이 깊은 나라고, 세계를 자기 손안에 쥐고 흔들던 강대국이었다. 나는 거기서 교육제도, 복지정책, 근검절약, 애국심, 신사도 등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런데 1968년 1월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그 달 21일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이틀 후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국내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고, 무엇보다도 한미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 박종규 실장이 연락을 보내왔다. “지금 청와대에는 미국 문제를 전담할 일급 비서관이 필요합니다. 즉시 귀국하십시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미국을 잘 아는 전문가가 많지 않았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물론 미 군부에도 친구가 많았고 워싱턴과 뉴욕의 언론인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나는 좋은 기회다 싶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맡게 된 일은 귀국 때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청와대 경호관들이 미공군 특수부대로부터 특수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맡은 것은 그들의 자문역이었다. 우선 이 일부터 익힌 후 비서실로 옮기라는 이야기였다.

아내는 이 일을 두고 사기 당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나도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조용히 가족들과의 생활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1971년 뜻밖에도 전혀 다른 제의가 들어왔다. 난데없이 태권도 협회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추대에 의해 그 직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 때 내 나이 40세였다.

불패 신화 계속 되다.

“아, 그럼 동방불패(東方不敗)시군요”

언젠가 내가 선거나 표 대결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자 어느 젊은 기자가 이런 말을 던졌다.

“뭐, 동방불패라고요?”

무슨 뜻인지 몰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그 기자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그 내용을 말했다. ‘동방불패’는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 크게 히트한 중국 영화의 제목으로 영화 속에서는 무림 최고의 고수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개인적인 선거에서나 나라의 명예를 걸고 싸운 모든 표 대결에서 한번도 지지 않았으므로 패배를 모르는 동방사나이라는 기자의 얘기였다.

나는 1986년 10월17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 91차 총회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여섯 번째로 IOC위원에 선출되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IOC위원이던 박종규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마란치 위원장이 나를 추천했다. 그때 우리 정부는 추천권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을 후보로 내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 측근들이 매우 탐냈던 모양이다.

그때 사마란치 위원장은 “김운용씨가 아니라면 한국은 IOC위원이 없는 상태에서 서울올림픽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3/4
김운용 IOC집행위원· 대한 체육회장 ·새천년 민주당 상임고문· 16대 국회의원
목록 닫기

“사마란치와 앤공주 두 앙숙이 모두 내친구”

댓글 창 닫기

2019/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