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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의 기인·괴짜 10인 열전

오토바이 타고 날아다니는 프리재즈 뮤지션 김대환

  • 이윤수

오토바이 타고 날아다니는 프리재즈 뮤지션 김대환

  • 그가 북채를 들면 관객의 가슴에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친다. 때림의 경지, 두드림의 미학을 화두로 품고 살아가는 구도의 길.
나무들도 제 몸을 비워내는 텅 빈 충만의 계절에 압구정동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테크노나 하드코어 음악이 어울릴 만한 압구정동과 한평생 북과 더불어 살아온 재즈 연주계의 지주 김대환(68)은 어떻게 어울릴까 싶었다. 차라리 그가 매일 8시간씩 연습을 하는 작업실이 자리한 인사동이 그의 이미지에 맞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에서부터 몇 시간씩 종횡무진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가 하염없는 그는 예상 밖으로 압구정동 이미지와 썩 잘 어울렸다.

“압구정동에서 산 게 27년쨉니다. 배밭이 널려 있던 시절에 정말 돈이 없어서 살게 된 동네지요. 나요? 뭐든 하날 가지면 바꾸지도, 팔지도 않고 살아왔어요. 은행통장도 하나뿐이고, 30년 돼 털털거리는 폴크스바겐도 그렇고, 13년 된 스쿠터도 그렇고, 사는 집도 그렇죠.”

왜 사람들은 김대환씨의 이름 석자 앞에 ‘기인’이란 말을 붙이는 것일까.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머리를 묶고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친 채 오토바이로 전국을 누비는 그의 외양 때문일까. 혹은 쌀알 한 톨에 반야심경 280자를 새기는 세각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휴대폰 사용법을 잘 몰라 ‘오는 전화’만 받는, 첨단문명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생활태도 때문일까. 남들이 기인이라고 부르는 걸 그는 어떻게 느낄까.

“기인 소리 듣는 건 싫어요. 아마 세상 사는 게 답답해 보일 수도 있을 테고 불편해 보이기도 해서 기인이라고 하는 거겠죠. 사람이 사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거 아닌가요. 내일 일본 떠나는데 여행사 직원이 마일리지를 보고 놀라더라구요. 잔뜩 쌓아두고 활용할 줄 모른다는 거죠. 난 마일리지가 뭔지, 그게 어떤 혜택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으니까요. 앞으로도 관심없구요.”

그는 단축버튼 하나로 전화 거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전화를 걸더라도 정성을 다해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최고의 연주료를 받는 그이지만, 신용카드 한 장 없다. 소유지족(少有之足) ― 김대환의 철학이다.



할레이 데이비드슨과 땅의 두드림

매일 새벽에 눈을 뜨면 먹을 갈아 붓을 드는 그에게 검을 흑(黑)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어느날 만 가지 색의 우위에 검정이 있음을 느꼈고, 타악기를 오래 하면서 멜로디 없는 음악을 하는 자신이 흑빛을 닮았다고 여겼다. 그의 소리는 두드리고 때리면서 들을 수 있는 소리란 점에서 비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춰진 어두운 곳에서 숨은 가락을 찾는다는 의미로 흑우(黑雨)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 우리말로 풀어서 ‘흙소리’라고 부른다. 타악의 소리가 쇳소리 가죽소리 나무소리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셋을 합쳤을 때 흙이 되리라. 그의 연주무대에 항상 ‘흑우’ ‘흙소리’라는 타이틀이 걸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는 가끔 흙소리란 글자를 먹 대신 맹물로 쓰는 일도 있다.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흩어져버리듯, 글씨도 라이브무대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서다. 붓을 들어 글을 쓸 때 그는 마주 선 이가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좌서법(左書法)을 행한다. 쓰기 어렵게 전각을 새기듯 뒤집어서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보는 이가 행하기 어려운 일을 지켜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김대환의 연주회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가 하나 있다. 팻보이라고 부르는 1400㏄ 모터사이클 ‘할레이 데이비드슨’. 이 오토바이는 그의 두드림이 끝나면서 시동이 걸리고 연주자가 떠난 텅 빈 공간 위에 저 홀로 우렁찬 발동음을 내며 내려오는 막을 지켜보는 해피 엔딩의 역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도 오토바이를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 인사동을 오간다. 퀵서비스맨처럼 번잡한 도로 위에서 공연시간에 맞춰 다니는 일엔 제격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땅의 울림에 귀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박자의 중저음, 그 우람한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북채를 잡는다. 그에게 오토바이는 음악의 원천인 셈이다.

그런 김대환을 두고 사람들은 청춘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보이는 모양새도 그러하거니와 연주 때 뿜어내는 기와 혼이 깃들인 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말 나이를 잊고 영원히 청춘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일까.

“후배들에게 ‘단 10분을 연주해도 삼등분을 하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잘 할까가 아니라 인생길처럼 연주하라는 거지요. 인생이란 무조건 열심히 배우는 시기, 왕성하게 창작하는 힘의 시기, 그리고 감동을 주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40대가 순발력으로 사는 맛을 보여주는 시기라면 60대엔 그 튼튼한 세월을 바탕으로 노련미의 감동을 전해줘야 합니다. 난 청춘을 잊은 지 오랩니다. 부축을 받아야 할 때가 오면 부축을 받는 게 노인다운 일이지요.”

김대환, 어릴 적 가난한 악극단의 나팔수로 떠돌던 그가 68살의 가을날에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타악 연주자들이 모인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신들린 듯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뿜어냈으니, 전세계는 그가 휘두른 첫 북소리 하나에 매료되고 말았다.

김대환씨는 ‘왕희지의 서법보다 더 자유분방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자신의 붓글씨 작품을 주위에 선물로 주곤 한다. 내용은 ‘아리랑’과 ‘반야심경’, 그리고 ‘주기도문’ 세 가지로 정해져 있다. 외국을 많이 다니다 보니 우리 한글을 미학적으로 보여주면서 한국인의 정신이 깃들인 걸 전해주는데 아리랑만한 게 없었다. 아리랑을 받은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글씨체만으로도 눈물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다고들 좋아했다.

그에게 아리랑 구절을 적는 일과 우리 타악의 리듬을 알리는 일은 절대 둘이 아니다. 반야심경이야 자신의 종교라 열심히 적고, 주기도문은 이웃의 종교니까 또 열심히 적어서 인연 있는 타 종교인들에게 준다는 걸 보면, 그의 자유로움은 삶의 한 자락 어디에서든 엿볼 수 있을 듯하다. 특히 그의 주기도문은 남다르다. “在天吾父…” 하는 식의 한문구다.



내 안의 ‘그 분’을 위해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는 글의 낙관에 그는 1999년을 빼놓지 않고 쓴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서귀포 일출봉에 모인 수많은 인파가 카운트다운을 할 때 쓴 글이 ‘안녕 99.12.31! 가자 99.13.1’이다.

“모두가 새 천년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1초 차이잖아요. 가는 20세기가 아쉬울 뿐 아니라 20세기를 쉽게 잊어서도 안 되고 또 21세기를 쉽게 맞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죽더라도 묘비에 2000몇년 하고 새기는 건 원치 않아요. 난 20세기를 산 사람이니까요.”

세월이 어찌어찌 흐를지라도 김대환은 여전히 20세기를 사는 것이다.

중학 시절부터 브라스밴드에서 활동했고, 1952년부터 드럼을 쳐온 사람, 공군 군악대 생활을 마친 뒤 미8군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룹사운드를 할 때엔 신중현 조용필 이남이 등이 그곳을 거쳐가기도 했다.

악보 없이 눈빛만으로 서로 감흥을 교류하며 연주하는 프리재즈의 새 장을 연 뒤로 그는 1985년부터 일본 무대에 진출했고, 지금은 매달 일주일씩 일본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이제까지 흑우 묵우 등 2장의 CD를 선보였고, 해마다 200여 차례의 해외연주를 해오는 북의 명인, 김대환.

그에게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세각명인(細刻名人). 중국의 세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부터 쌀알에 반야심경을 새기기 시작해 1990년 세각 분야에서 세계 기네스북의 공인을 받은 세각 예술가다. 요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45배 확대 현미경 앞에 노안을 들이대고 앉아 쌀알 한 톨에 글자를 새겨 넣고 있다. 두드림과 세각, 서로 상반되는 세계인 듯 여겨지지만, 그에게 세각과 북의 길은 다른 길이 아니었다.

“마치 북을 칠 때 소리의 높낮이와 무게를 전신으로 느끼듯이 세각을 하면서도 깎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귀에 안 들리는 미음(微音)이 있는 것처럼 눈에 안 보이는 글씨가 있기 마련이죠. 눈에 안 보이는 게 귀로 보이고, 귀에 안 들리는 게 눈으로 들리는 경지가 세각의 세계이며 타악의 세계예요.”

그가 북채를 들면 관객의 가슴에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친다. 우주의 섭리를 일깨우는 연주인 탓이다. 파격적인 그의 음악은 생경한 충격을 주기도 하고 귀를 맑게 해 가슴까지 깨우치는 세계를 지녔다. 묵직한 방망이에서부터 장구채까지 여섯 가지 북채를 양손가락에 끼우고 무대에 서서 북의 시나위를 펼치면 관객들은 신기 어린 연주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 그래서 도올 김용옥은 그의 연주를 가리켜 “천지를 둘러싼 대기의 회통이며 아프리카의 검은빛과 조선의 아침빛이 음양의 한 질서였음을 입증하는 태극상(太極相)”이라고 했던가.

“난 김대환이란 인물이 내가 아닌 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분’이라고 부르죠. 난 그분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존재입니다. 내가 죽어 없어져도 영원히 남을 분, 나 아닌 김대환이 있기에 단 한 번 들어도 평생 동안 가슴에 울릴 수 있는 연주를 하기 위해 애쓰고, 그 명예를 위해 곁에서 돌보고 뒷바라지하는 게 내몫이라고 생각하지요.”

내 안의 나, 불성(佛性)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법문하는 큰스님을 마주한 듯, 그의 이야기에선 깊은 사유의 세계가 넘쳐 흘렀다.

그러고 보면 그는 기인이 아니라 구도자였다. 때림의 경지, 두드림의 미학을 화두로 품고 살아가는 구도의 길. 그 험난한 구도의 길을 마다 않고, 예순여덟의 세월마저 뒤로 한 채 오직 자유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삶. 어쩌면 그 때문에 김대환씨 이름 앞에 늘상 ‘기인’이 붙어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신동아 2000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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