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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흥남대철수 작전의 숨은 주역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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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박사는 다급했던 흥남대철수 때 민간인 철수를 강력히 주장해 10만명에 가까운 북한 주민이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게 한 주인공이다.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지금, 그의 행동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평생을 살면서 정말로 남을 위해 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더구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을 때, 남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생살여탈권은 평생에 한번 쥐기도 어렵거니와 그 권한은 더 없이 크고 막중해서, 장삼이사(張三李四) 같은 평범한 남녀라면 그 무게에 눌려 제대로 행사해 보지도 못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넘기고 말 것이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임상병리학과 과장을 맡고 있는 현봉학(玄鳳學·78) 박사.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각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형제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것 등을 제외하면, 그는 특별한 특장점을 지니지 않은 많고 많은 원로 의사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한창 나이 28세 때, 그 어떠한 정복자보다도 큰 생살여탈권을 쥔 적이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이 권한을 생(生)을 탈(奪·빼앗고)하고 사(死)를 여(與·주는)하는 쪽으로 행사하지 않고, 생(生)을 여(與)하고 살(殺)을 탈(奪)하는 쪽으로 사용한 후 경건히 이 권한을 하늘에 되돌려 주었다.

6·25전쟁 때의 이야기다. 일본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을 중심으로 급히 편조된 미 10군단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낙동강 전선에 밀려 있던 미 8군과 한국 육군으로 구성된 한미연합군이 총반격에 나섰다. 1950년 10월1일 한국군 3사단이 최선두로 38선을 돌파하면서부터 한미연합군은 앞다투어 북한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봉학은 의사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한순간에 한국 해병대 소속 문관이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 서술한다). 한국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 때 미 해병대 1사단과 함께 인천에 상륙해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낙동강전선에서부터 쫓겨 올라오는 인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현봉학도 한국 해병대를 따라 고성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미 10군단은 맥아더 원수로부터 ‘다시 배를 타고 함경도 원산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10군단이 원산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원산을 점령(10월10일)해버려, 미 10군단은 안전하게 원산에 ‘행정상륙’할 수 있었다. 10월24일 맥아더 원수는 “한미군은 모든 지상군 부대를 투입해 신속하게 한·만 국경선까지 진격하라”는 이른바 ‘무제한 북진’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미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미 해병대 1사단을 이끄는 스미스(Smith) 소장에게 “미 해병대 1사단은 함경남도 한복판에 위치한 장진호를 따라 압록강 중류 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바(Bar) 소장이 이끄는 미 육군 7사단에 대해서는 “함경남북도의 경계선을 따라 압록강 최상류인 혜산진으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알몬드 소장과의 만남

이 무렵 알몬드 군단장이 군단 부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해병대 대령을 데리고 강원도 고성에 있는 한국 해병대로 시찰을 나왔다. 미국에 유학한 적이 있어 영어에 능통한 현봉학은 알몬드 군단장과 한국 해병대 여단장 신현준 준장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신준장과 대화를 마친 알몬드 소장은 봉학에게 “당신 영어를 아주 잘 한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봉학이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의과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대답하자, 알몬드 군단장은 깜짝 놀라며 “내 고향이 바로 버지니아주의 루레이(Luray)다”라며 매우 반가워했다.

이어 알몬드 군단장은 “당신의 고향은 어디인가?”라고 물었다. 봉학이 “미 10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함흥이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알몬드는 “나와 함께 당신의 고향(함흥)으로 가자. 그렇지 않아도 우리 부대에는 함흥을 아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고 말했다.

며칠 후 함흥 공회당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함흥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현봉학은 미 10군단의 초청을 받아 신현준 준장 등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기념식이 끝나자 알몬드 군단장의 부관인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훗날 NATO군 사령관을 거쳐 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냄)가 ‘현봉학을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명함’이라는 명령서를 들고 왔다.

이로써 현봉학은 10군단 민사부에서 일하게 됐는데, 이것이 그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생살여탈권을 쥐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 10군단은 점령한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군정(軍政)을 펼쳤는데, 군정 담당 부서가 바로 민사부였다. 민사부장은 무어(Moore) 대령이었다. 무어 대령은 현봉학에게 함경남도 도지사와 함흥 시장 인선 문제를 의논해왔다. 현봉학은 물망에 오른 사람들을 검토해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 보고하는 일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구하(李龜河)씨가 함경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도 현봉학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함흥 지역의 병원을 찾아가 의약품을 지원해 주는 일을 도왔다. 현봉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공산 치하 5년 동안 숨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여러 교회를 찾아가, 신도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이런 가운데 스산한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맥아더 원수는 북진을 독려했는데, 11월24일 맥아더 원수는 그 유명한 ‘End the War Offensive(終戰을 위한 총공세)’ 명령을 하달했다. 미군 병사들은 이 명령을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총공격’으로 해석하고, ‘Home by Christmas Offen- sive(크리스마스 대공세)’로 바꿔 불렀다. 맥아더 이하 전 미군은 당연히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며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팽덕회(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의 인민지원군은 한미연합군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깊은 산맥을 따라 내려와, 한미군 후방 깊숙히 침투해 있었다.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된 바로 다음날 팽덕회는 그 유명한 ‘운동방어(運動防禦)’ 전술을 구사해, “한미연합군을 궤멸하라”는 대공격 명령을 내렸다. 운동방어란 적군이 쳐들어 오면 후퇴하는 척 물러나 깊숙한 곳까지 유인한 후, 후미를 차단함과 동시에 대부대를 동원해 포위 섬멸하는 고난도 전술이다.

중국의 인민지원군은 일본군과 대장정을 펼치며 싸운 경험이 있어, 이러한 전술을 능란히 구사할 줄 알았다. 중공군에 포위된 한미연합군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청천강 지역에 포진한 미군 부대가 와해되고 이어 전(全)전선에서 한미연합군이 퇴각하는 이른바 ‘청천강 도미노’가 일어났다.

청천강 도미노

청천강 도미노의 공포는 현봉학이 몸담은 함흥의 미 10군단에도 몰아쳤다. 적진으로 진격시킨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이 포위됐다는 것을 안 알몬드 군단장은 두 부대에 화급히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두 부대가 진격한 곳은 해발고도가 1000m가 넘는 개마고원 지대라 기온이 영하 30∼40℃까지 떨어졌다. 두 사단은 중공군은 물론이고 엄혹한 추위, 굶주림과 싸우며 후퇴를 거듭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두 부대의 퇴각로를 뚫어주기 위해 이 무렵 참전한 영국군 제41코만도(특공대)를 장진호 쪽으로 투입했다.

청천강 일대에 있던 한미연합군이 대오도 갖추지 못하고 퇴각한 데 반해, 미 해병대 1사단은 대오를 갖춰 싸우면서 후퇴했다. 미 해병대 1사단은 이 싸움을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는 뜻으로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으로 명명했다. 장진(長津)을 일본어로 읽으면 ‘쵸신’이 된다. 당시 미군은 일본이 작성한 한국 지도를 들고 작전을 짰는데, 이 지도에 그려진 장진호에는 ‘쵸신’을 영어로 옮긴 ‘Chosin’이 적혀 있었다. 미 해병대는 너무 힘들었던 장진호 전투를 기리기 위해 훗날 새로운 상륙함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Chosin’으로 명명했다.

김백일(金白一) 소장이 이끄는 한국군 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하류로 진격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이들도 서둘러 퇴각했다. 다행히 이들의 기동로가 해안에서 가까워서 해안에 접근한 미 7함대가 함포사격으로 엄호 사격을 해줘,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전(全)전선에서 한미연합군이 퇴각하자, 도지사와 시장까지 임명해 해방 무드를 느끼던 함흥의 분위기도 하루아침에 오그라들었다. 이때 함흥 남쪽에 있는 원산에 적 게릴라 부대가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알몬드 10군단장은 원산을 거쳐 육로로 철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장진호에서 철수해오는 미군과 청진 쪽에서 내려오는 한국군을 흥남으로 집결시켜, 배로 빼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미 10군단 사령부를 함흥에서 흥남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봉학은 섬뜩한 위기를 느꼈다. ‘한미연합군이 철수해 버리면 이 지역이 해방됐다고 좋아하던 함경도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미 10군단이 철수하면 이들에게는 죽음만 남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한 현봉학은 알몬드 군단장을 만나 “함경도에서 우리를 도와준 인사와 기독교인들도 함께 철수시켜야 한다.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들도 함께 철수시켜야 한다”고 미친 듯이 설득했다.

알몬드 소장도 고민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알몬드 군단장이 현봉학을 불렀다. 10군단 부참모장 포니 대령과 민사부장 무어 대령, 그리고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알몬드 군단장은 “UN군을 도와준 한국인과 기독교인들을 흥남으로 철수시킨다. 오늘 밤 12시 전까지 4000여 명의 한국인을 기차에 태워 흥남으로 데려갈 테니 함흥역으로 나오게 하라”고 말했다.

그 순간 현봉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 꽂히는 듯한 희망과 함께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연락한단 말인가’ 하는 아찔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고민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는 미 10군단 군목(軍牧)인 클리어리(Cleray) 신부에게 “가톨릭 교인들은 밤 12시 전까지 함흥역으로 모이라고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개신교 군목인 옥호열 목사의 지프를 타고 시청·도청 그리고 함흥 시내에 있는 교회를 돌며 “오늘밤 12시까지 함흥역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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