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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로 본 故鄭周永 회장 라이프 스토리

‘빈대철학’으로 현대왕국일구다

  • 엄광용 작가

‘빈대철학’으로 현대왕국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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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이 3월21일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회장은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일궈 건설, 중공업, 자동차, 전자 등을 아우르는 세계 유수의 ‘현대왕국’을 세웠다. 한때는 세계 9위의 부호에 오르기도 했다. 정회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한국 기업사에 큰 획을 긋고 적극적인 대북사업으로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것은 독보적인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양한 일화를 통해 돌아본다.<편집자>
‘정주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성공’이란 단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성공한’ 인물이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왜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조그만 에피소드 하나에서도 그가 성공한 까닭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언젠가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정주영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부자가 되셨어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어린이가 알아듣도록 명쾌하게 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질문을 던진 아이에게 물었다.

“학생, 등산이란 걸 해본 적 있어요?”

“네, 북한산에 가본 적 있어요.”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그래요? 나도 손자들과 함께 가끔 북한산에 오릅니다.”

그러더니 정주영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는 그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자가 되는 비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높은 산에 오를 때는 까마득히 높은 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올라가면 안 돼요. 자꾸 정상을 올려다보면서 ‘저 높은 데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하고 생각하면 등산하기가 힘들어져요. 그러나 한 발짝 한 발짝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발밑을 내려다보며 올라가면 어느 사이에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나도 처음부터 큰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로 살아오다 보니 부자가 된 거예요. 학생도 꼭대기만 쳐다보지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예요.”

어느 알피니스트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고 했다. 그렇듯 정주영의 ‘등산’ 목적도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요시했다. 일이 좋아 열심히 일하다 보니 돈이 모였고, 그 돈으로 좀더 큰 일을 벌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부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끈질긴 승부근성

정주영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고향에서 송전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5학년 학생인 최경태와 우연한 일로 싸움을 벌이게 됐다. 싸움은 송전에서 평양이 더 가까운지, 서울이 더 가까운지를 놓고 입씨름을 하다 비롯됐다.

정주영은 서울이 더 가깝다고 했고, 최경태는 평양이 더 가깝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시를 동경하는 마음에서 그런 입씨름을 하게 된 것인데, 서로 끝까지 자기 주장이 옳다고 맞섰다.

“아니야, 내가 지도를 놓고 어느 쪽이 더 가까운지 자로 재보기까지 했단 말이다.”

정주영이 최경태에게 대들었다. 그는 정말로 지도를 펼쳐놓고 송전에서 서울과 평양 중 어디가 더 가까운지 삼각자로 재본 적이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도시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쬐끄만 게 우기기는… 평양이 더 가깝다면 가까운 줄 알아!”

최경태는 두 학년이 더 높다는 것을 내세우며 자존심을 꺾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나이는 어려도 정주영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입씨름은 몸씨름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는 상황이 됐다. 정주영은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를 이길 수 없었다. 최경태는 두 학년이 높은데다 나이는 열여덟 살로 이미 장가를 가서 아들까지 둔 ‘어른’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지지 않았다. 나이로 보나 덩치로 보나 어른과 아이 싸움이었으니 최경태가 이기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햇병아리와 장닭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는 예상을 뒤엎고 햇병아리에게 돌아갔다.

물론 얻어맞기는 정주영이 더 많이 맞았다. 상대가 서너 대 때리면 그는 겨우 한 대 때릴까 말까였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도전했다. 싸움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정주영은 수업만 끝나면 5학년 교실로 달려가 최경태에게 싸움을 걸었다. 수업을 일찍 마친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5학년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정주영은 최경태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 싸울 작정이었다.

며칠을 그렇게 싸우자 나중에는 최경태가 질려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 뒤로 최경태는 졸업할 때까지 저 멀리에서 정주영이 걸어오는 것만 봐도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곤 했다. 최경태가 힘이 약해 정주영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어려도 그의 고래심줄같이 끈질긴 승부근성에 기가 질려 아예 접근하는 것조차 무서워했던 것이다.

빈대에게 배운 철학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정주영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늘 뭔가를 궁리하면서 바쁘게 돌아갔다. 그는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뭔가 일을 꾸미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성격이었다.

젊은 시절 정주영은 네 번이나 가출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네 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과 함께 돌밭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100평쯤 되는 논을 만드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릴 만큼 농사일은 힘들었다.

정주영은 바쁜 농사일 틈틈이 매일 짬을 내서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하던 구장 집을 드나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을 읽는 데 재미를 붙인 것. 그는 이 소설이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믿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인 허숭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때부터 그는 서울에 가서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은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읽고 첫 가출을 감행했다. 청진항 공사와 제철공장 건설로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기사였다. 친구와 함께 도망쳤으나 결국 부친에게 붙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가출은 서울행이었으나, 친척집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뒤쫓아온 부친에게 잡혀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정주영과 부친의 도망치고 뒤쫓는 숨바꼭질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얼마 후 그는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를 보고 학원에 가기 위해 세 번째 가출을 시도했다. 황소와 송아지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달아난 것. 그러나 이번에도 부친이 서울로 찾아와 집을 나온 지 두 달 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네 번째 가출을 감행할 때 정주영은 교과서에 나오는 ‘청개구리의 교훈’을 되새겼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올라가려고 몸을 날려 뛰었다가 가지가 너무 높아 실패했지만 낙심하지 않고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뛰어오르기를 거듭한 끝에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개구리도 성공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자식인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의지를 불태웠고, 결국 네 번째 가출에 성공한다.

그렇게 객지생활을 시작한 정주영이 인천 부두에서 막일을 하고 있을 때 그곳의 노동자 합숙소에는 빈대가 우글거렸다. 낮에 힘들게 일을 하고 나서 고단한 몸을 누일라치면 빈대가 극성을 부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합숙소에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정주영과 몇몇 노동자는 빈대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그 식탁 위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빈대들은 탁자 다리를 타고 올라와 악착같이 피를 빨아먹었다.

정주영은 다시 꾀를 내어 탁자 다리를 물이 가득한 양푼 네 개에 담가놓고 그 위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빈대들로선 탁자에 오르려면 양푼에 빠져 익사할 판이라 탁자 다리를 타고 오를 수 없게 된 것. 그날 밤 정주영은 간만에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틀밤을 넘기지 못했다. 다시 빈대들이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의 빈대들이 어떻게 탁자 위로 올라왔을까?”

정주영은 불을 켜고 살펴보았다. 빈대들은 탁자 다리로 기어오른 게 아니었다. 빈대들은 장애물로 설치한 양푼을 통과하다간 물에 빠져 죽을 위험이 있으니까 아예 벽을 타고 우회해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공중낙하를 시도한 것이다. 그때 정주영은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빈대도 저렇게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노력해 제 뜻을 이루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빈대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주영은 빈대에게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주영의 ‘빈대철학’이다. 그 후 정주영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빈대철학’을 되새기며 ‘빈대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정주영은 젊은 시절부터 무서울 정도로 절약하며 살았다. 열여덟 살 때 서울에서 막노동을 할 때 그는 혼자 방을 얻어 자취했다. 건설 현장에서 하루종일 돌을 져나르는 일을 했지만 일당은 아주 적었다. 그러니 입에 제대로 풀칠이라도 하려면 극도로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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