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권위주의자 박홍 원칙주의자 김홍신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입력2005-05-23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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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아파서 병원에 온 사람은 대부분 의사의 말을 잘 따른다. 또 나이, 성별과 상관없이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써준다. 환자가 장관이든 재벌이든 국회의원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의사의 직업적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권위’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별하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권위’는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을 말하며, ‘권위주의’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려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얘기하면 당연한 말인데도 그 무게와 감동이 다르고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法語)를 들으면 모든 산천이 다시 보이는 것은, 그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와 한나라당 국회의원 김홍신은 특정한 권위를 부여받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권위를 사용하는 방법은 콩쥐와 팥쥐의 차이만큼이나 전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성당의 신부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



    먼저 박홍 신부에 관해서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박홍 신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부와 짝지워 연상되는 성당에서의 강론 모습은 어쩐지 박홍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교구를 맡지 않는 예수회 소속 신부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박홍을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종교인이자 교육가이며 사회운동가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서강대 총장을 8년이나 역임한 사회적 경력, 정열적이고 활발한 사회활동, 독특한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대 사회적 발언은 박홍의 그런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지난 1997년 한보사건 등으로 총체적 난국을 겪고 있던 문민정부 말기, 박홍은 한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나라가 이 상태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눈치만 살피며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성질 급한’ 내가 또 이렇게 나섰다”고 말한다. 꼭 그가 나서야 했던 문제였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있지만, 사람들은 사제 신분으로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흥분하면 고함을 치며 무슨 말이든 가리지 않고 해대는 박홍의 모습을 별로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홍이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 건 1989년 서강대 총장에 취임한 이후부터다. ‘신부 총장’이라는 독특한 위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건 ‘주사파 발언’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 격렬한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를 사상논쟁의 ‘회오리 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한 신부의 모습, 그 ‘권위’가 길을 잃어 ‘권위주의’에 빠졌을 때의 모습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오해를 막기 위해 사적인 얘기 하나를 덧붙인다. 필자는 이회창 총재에 관한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하는 두 집단 중 하나는 법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이 짐작하는 대로 그 나머지 한 집단은 ‘신부’다.

    물론 필자는 아직 명동성당에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사람이다. 종교적인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제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비록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신부에 대한 필자의 전폭적 신뢰는 일반의 보편적 정서에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에서 ‘권위가 있어서 믿음을 주는’ 사람들 중에서 신부만큼 강력한 집단이 또 있는가. 그러니까 ‘인간 박홍’에 관한 얘기를 종교적인 문제와 연관시켜 행여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싶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박홍이란 인물을 1991년 5월8일 ‘이전의 박홍’과 ‘이후의 박홍’으로 나누어서 인식하고 있다. 단순무지한 이분법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박홍의 개인적 성향을 살펴보는 데는 요긴한 잣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991년 5월8일은 어떤 날인가. 명지대 강경대씨 치사사건 뒤 이른바 ‘분신정국’이 이어지던 이 날 오전 8시7분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김기설 전민련 사회국 부장이 분신자살을 했다. 불과 네 시간여 후인 12시30분 박홍은 기자회견을 통해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충격적 내용을 발표했다.

    망자의 양복 저고리에서 꺼낸 유서를 침통한 목소리로 읽은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며 죽음 앞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세력들의 정체를 깨닫도록 ‘식별의 지혜’를 베푸소서”라며 3분 동안 침묵기도를 하는 박홍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날 오후 검찰은 곧바로 죽음을 선동하는 배후세력 및 자살방조 여부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공안당국은 강기훈씨를 유서를 대신 써준 인물로 단정하고 죄목도 생소한 ‘자살방조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강씨를 “목적을 위해서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 분자로서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천인공노할 범죄자”로 몰아세웠다. 결국 강기훈씨는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의 언론기관과 그 언론을 통해서 상황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일반 국민들은 박홍에게 심정적인 동조를 보냈다. 당시 한 일간지 논설위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시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아닌 대학총장의 신분이고 시종 성경에 손을 얹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한 폼으로 보아 근거도 없는 허튼소리를 지껄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그 개연성만은 부정할 수 없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말을 증명할 물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당시 ‘사제총장’이라는 믿음직스러운 권위는 박홍의 말에 엄청난 힘을 실어 주었다. ‘사회평론 길’의 김진아 기자는 박홍의 권위가 가지고 있었던 부작용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박홍 총장의 증언은 오로지 신부로서의 권위나 민주적 이미지에만 기대고 있을 뿐, 사실관계 확인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굳이 되짚어 증명할 필요도 없다는 편리함 때문인지 그의 말은 필요에 의해 수시로 바뀌었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계기로 박홍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있고, 가장 저명한 ‘사상적 대부’로 자리잡았다. 그 후 박홍은 마치 뉴스메이커가 되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언론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쉼 없이 벌였다.

    운동권 학생의 홀어머니와 함께 교도소를 방문하여 구속 중인 학생에게 폭력시위에 대한 반성문을 쓰도록 설득하고, 수배 중인 운동권 학생의 아버지와 함께 시위 도중 화염병과 쇠파이프에 맞아 치료를 받고 있는 전경들을 방문한다. 또 시위진압 도중 숨진 경찰의 영결식에 참석하여 “1000여 명이 넘는 조문객에서 대학생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서글픈 현실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다”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그는 북측대표단이 참석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만찬 장소에선 가수들의 공연이 끝날 즈음 갑자기 무대로 올라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수고하시는 두 총리께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다’며 ‘사랑해 당신’을 불러 청중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단다.

    그의 행동이 모두 옳지 않다거나 이벤트성 행동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큰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한 뒤 그 집에 어울리는 새 가구를 마련하는 것처럼 박홍의 그런 행동들이 ‘사상적 대부’의 권위에 걸맞은 적절한 소재로 기능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런 권위에 기대어 박홍은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로 사회 각 분야를 향해 소위 ‘레드 바이러스’와 관련된 경고 메시지를 끊임없이 날렸다.

    “요즘 대학생들은 표피적 지식만을 습득해 편견과 고집만 강할 뿐 사물의 전체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고등 놈팽이”라고 질타하기도 하고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처럼 좌익적인 학생운동은 사회적 불신에서 나온 ‘사상적 서방질’이므로 정치인들은 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희한한 충고를 하기도 한다. 본격적인 사상논쟁의 회오리를 예고하는 복선같은 메시지였다.

    학생들과 어울린 ‘막걸리 총장’

    그러나 ‘이전의 박홍’은 권위를 앞세워 마구잡이식으로 사상적 투망질을 하는 이상한 사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박홍이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가톨릭대학 철학과에 다니다 군에 입대하여 DMZ에서 근무하던 중 동료병사들이 간첩을 사살하고 축하회식을 여는 것을 보고난 후라고 한다.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다시 대건신학대를 졸업, 사제서품을 받은 박홍은 1970년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교육자의 길에 들어선 후, 전태일 추모미사를 집전했다가 공안당국에 끌려가기도 하고, 크리스천사회행동협의체를 만들어 모든 종교인의 이름으로 ‘정의 구현사회의 위상’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조사를 받기도 한다.

    이후 미국을 거쳐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9년 만인 1980년 서강대 교수로 복직한 박홍은 다시 시국사건에 연루된다. 교수들의 민주화 성명 발표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2주간 조사를 받으면서 닷새 동안 단식을 했는데, 석방 후에는 홧병으로 눈의 모세혈관이 터지는 급성중심성 망막염에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암흑의 시기에 한줄기 등불이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자칭’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박홍의 선의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1989년 박홍 루까 신부는 대학 최초의 직선제 총장으로 서강대 7대 총장에 취임했는데, 그의 총장 취임 일성은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는 당연하고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였다. 그는 총장이 되고 나서도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취임 첫해에는 등록금을 둘러싼 갈등과 마찰이 일자 학사행정에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학교와 학생의 원만한 타협으로 해결했다. 총학생회가 출범할 때는 관례를 깨고 그 자리에 참석해 축사를 한 후 총학생회장과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아침이슬’을 부르고 학생들과 술잔을 나누어 ‘막걸리 총장’이란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반정부 활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의 복교를 허용하는 대통령령이 발표되자 그 영을 무시하고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제적생 11명의 재입학을 허용했고, 학생회비를 등록금 고지서에서 분리해 학생회 예산을 근원적으로 줄이려 하던 문교부 지침도 거부했다. 학생들은 박홍을 진보적인 운동권 총장, 대화가 통하는 민주적인 신부로 불렀다.

    그러나 1991년 5월8일 분신 배후설을 제기하고 언론의 중심인물이 된 후 박홍이 보인 행태는 ‘권위주의’ 그 자체였다. 그런 권위주의적 경향은 1992년 총장에 재선되고 나서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최초의 직선총장 출신답지 않게 총장 선출과정이 밀실에서 이뤄지면서 여러 가지 구설수를 낳았고, 그에 따라 학사 행정의 보수화도 뚜렷해졌다는 게 당시 학생회의 평가다. 박홍은 학내신문인 ‘서강학보’를 학생기자들을 배제한 채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교수와 직원 두명만으로 제작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학생들이 지나치게 운동권 논리에 편중된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또 원래 직선제였던 단대 학장과 보직 교수 선출을 간선제로 바꿔 총장의 권력을 강화했다. 모든 권위주의 체제는 그 성립의 시기가 곧 붕괴의 시작이라는 말을 박홍은 알고 있었을까.

    이같은 권위적 행태와 함께 그의 ‘레드 바이러스’ 발언이 계속되자 재야 운동권에서는 박홍을 ‘돈키호테같은 극우신부’로 불렀다. 하지만 박홍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전문적 식견과 운명적 사명감을 이렇게 강조했다.

    “바티칸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공산주의의 공존에 관한 연구를 했다. 나같은 사제들은 무신론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워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쉼없이 사상적 ‘입질’을 계속하던 박홍은 결국 ‘대박’을 터뜨린다. 1994년 7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전국 14개 대학 총장들과의 오찬 자리에서였다. 박홍은 그 자리에서 “학생 운동권 배후에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사노총(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김정일이 있다. 그들은 북한 로동신문이나 팩시밀리를 통해 지령을 받는다”고 말했다.

    박홍의 말에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으면 금방 북한에 의해 공산화가 될 것처럼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발언장소도 절묘했지만 박홍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신뢰도 그 발언의 파장을 증폭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 했을 것이다.

    박홍의 말에 따르면 분신 배후설을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제기한 다음해인 문민정부 초기, 김영삼 대통령이 교육부 장관 자리를 맡으라고 세 시간이나 설득했지만 자신은 교육자로서 본분을 지키기 위해 그 제의를 거절했단다. 그런 사이였으니 김대통령 입장에서는 박홍의 발언 하나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박홍의 발언이 언론을 통해 경천동지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독특한 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일차적으로 거론해야 마땅하나 박홍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알아보기 위한 글이므로 아쉽지만 잠시 시야의 폭을 좁혀 보자. 경북대학교 신방과 백선기 교수는 당시 박홍의 ‘주사파 발언’을 보도한 8일간의 신문보도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대통령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여러 대학 총장들의 발언이 오갔고 그 내용도 박홍 총장의 발언과 비슷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그중 유독 박홍 총장의 발언만 부각시켰다. 그만이 지닌 성격 및 경력의 독특성이 이러한 부각을 부추긴 것으로 생각된다. 천주교 사제이며, 교수이며, 나아가 대학총장이고, 사회 운동가인 다소 복잡하지만 매력적인 요소들이 그의 발언에 높은 신빙성을 주게 되고 따라서 신문들은 그의 발언에 주목하게 된 것 같다. 즉 그의 종교인이라는 신분과 대학총장이라는 직분은 다른 사람들이 지닐 만한 사심, 이른바 명예욕과 출세욕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발언이 높은 신뢰감으로 독자들에게 인식될 수 있으리라는 점이 참작된 것 같다.”

    승진이나 성공한 이후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것을 ‘성공 공포’라고 한다. 그들의 심리는 대개 이렇다. 내심 자신은 승진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승진을 하고 나니 불안해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새 업무를 추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무능이 노출되어, 결국은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사람의 반응은 ‘승진’이라는 스트레스(?)로 인해 여기저기 아프거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지만, 역공포반응(counter-phobic reaction)을 보이기도 한다. 공격이 최상의 수비라는 식이다. 성공공포가 전혀 없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저돌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등 오버를 하면서 자신의 공포를 잊으려 하는 것이다.

    신부교수였을 때 그는 대단히 민주적인 사제였다. 그러나 대학의 수장이 된 후부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비이성적 일탈은 더 심해진 느낌이다.

    퇴임한 장관들이 선호하는 자리 중의 하나가 대학총장이라 한다. 장관과 대학총장은 그 격이 어느 정도 맞다는 이유에서란다. 박홍은 행정적으로는 장관급에, 윤리적으로는 그 최고봉이라 할 성직자였으니 그 권위의 파괴력은 가히 폭발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엄청난 자리가 부여하는 권위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외부적인 공격 목표를 찾으면서 내적인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무리한 해석일 수 있다. 오히려 강준만 교수가 지적한 대로 박홍처럼 자기과시욕 또는 기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레드 콤플렉스’에 걸려 있는 언론의 장단에 맞춰 춤추다가 일어난 행동이라고 보는 게 심정적으론 더 와닿는다. 그러나 정신의학적으로 어떤 해석이라도 해보고 싶을 만큼 박홍의 변신은 급격하고 터무니없었다.

    그는 그간 우리 사회에는 좌경화한 학생운동을 꾸짖는 사람이 없었다고 자신의 용기를 자화자찬하며, 외신 회견이나 해외 강연을 통해서 국내외적으로 쉴새없이 주사파 관련 발언을 쏟아냈다.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되었다” “1987년 이후 주사파가 1만5000여 명 이상 배출되었다” “종교계와 언론계 정치권에까지 주사파가 침투했고 일부 야당에 750명 정도가 암약 중이다” 등등.

    주사파 발언 파문이 계속되는 몇 개월 동안 한국의 실질적인 안기부장은 박홍이었다. 그가 무언가 터뜨리면 뒤늦게 안기부와 검찰이 움직였다. 당시 한 언론인은 “박홍의 지시에 따라 기관이 움직이는 것인지 박씨가 공안당국의 스케줄을 알아내 예언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워할 정도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전국 국공립대교수협의회 등 몇몇 단체에서 박홍의 발언은 편견과 무지에 의한 것이며, 사제이자 대학총장으로서 기본적 양식과 상식을 벗어난 일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거대한 폭포 옆에 놓여 있는 컵 속에 떨어지는 한방울 물소리처럼 너무 작았다.

    영문도 모른 채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면서 내달리다 숨이 가빠지자 자신이 뛰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는 사람처럼 ‘레드 바이러스’라는 ‘미친 달음박질’은 얼마 안 가 주춤거리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박홍의 말을 증명할 물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동안은 ‘사제 총장’이라는 독특한 권위가 대단한 효과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그의 발언의 동기는 순수하고 진솔하다고 보아야 한다. 동기가 순수한데 그 발언의 뒤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고 거들었지만 아전인수식 해석이었다.

    권위주의의 추락

    박홍의 발언은 투박하고 조악했다. 학생운동의 배후에 사노맹과 사노청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묻자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얘기”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여의도클럽 토론회 도중 주사파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한 시사잡지를 들어 보이면서 “주사파의 행위들이 이 월간지에 다 나와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과 99% 동일하다”고 말한다. ‘사제의 양심’을 거론하며 구체적인 얘기는 않겠다고도 했다. 결혼하자고 해 놓고 구체적인 절차를 의논하자니까 그런 얘기는 부끄러워서 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런 얘기는 또 어떤가.

    “나는 북한의 돈을 받아 공부한 후 교수가 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지만 당사자의 인권을 위해 이름을 밝힐 수는 없으며 본인이 스스로 밝히기를 바란다.”

    법봉을 들고 관심법의 무서움을 상기시키며 이실직고를 강요하는 궁예가 따로 없다.

    “여야정당 언론계 학계에 750명의 주사파가 활동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뻥튀기’도 이 정도가 되면 정상궤도를 이탈해도 한참 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안을 놓고도 전혀 다른 비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둘러싼 저간의 사태는 사람 많은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도둑을 조심하라고 소리쳤더니 몇 사람이 그에게 누가 도둑이며 그 증거는 무엇인지 대라고 윽박지르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 설혹 그의 발언내용이 과장된 것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결코 손가락질할 일은 아니다.”

    비유야 자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아직도 의혹에 쌓여 있는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씨는 3년 2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고, ‘교수들 가운데도 주사파가 있다’는 박홍의 말 때문에 국가보안법 혐의로 기소된 경상대학교 교수들은 무려 6년여를 재판에 시달리다 지난해 7월에야 무죄 선고를 받았다. 혹시 한 명이라도 있을지 모를 공산당을 잡아내기 위해서 열 명 모두를 때려잡는 매카시즘과 무엇이 다른가.

    보다못한 서강대 총학생회는 박홍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에 대한 박홍의 대답은 ‘권위주의’의 극치를 보여 준다.

    “총장 그만 두라는 총학생회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그만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발자크는 ‘권위는 한 번 비판의 대상이 되면 이미 그때부터 권위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권위’가 빠진 박홍의 ‘권위주의’는 끝간 데없이 계속된다. 주사파 발언 이듬해인 1995년 서강대는 면접시험에서 수험생들에게 ‘좌경 폭력혁명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개인 서약서를 받았는데, 수험생들은 이 서약서를 제출해야만 면접을 받을 수 있었다.

    박홍은 또 한국통신 노조원들의 명동성당, 조계사 농성이 북한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밑도끝도 없는 발언을 했다. 박홍은 발언 다음날 자신이 한 발언의 내용과 의미가 확대해석돼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한통노조는 박홍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3년여의 재판 끝에 1998년 10월 박홍은 대법원으로부터 패소확정 판결을 받아 한통노조에 배상금 2500만원을 지급했다. 한국통신 노조는 박홍에게서 받은 손해배상금을 한국복지재단과 가정형편이 어려운 성남시 중고교생 20명에게 학자금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박홍은 1997년 한 인터뷰에서 “일부에서는 나를 공안정국에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만 주사파 실체를 사회에 고발한 것이 생애 가장 큰 보람”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Y2K(밀레니엄 버그)’ 문제로 온세계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 긴장했지만 큰 사고없이 21세기를 맞았다. 한 쪽에서는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어 너무 많은 기회비용과 시간이 소모되었다고 불평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보이지 않는 노력 때문에 무사히 지나간 것이라고 항변한다.

    박홍도 그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나마 자신의 용기있는 발언이 있었기에 이 사회 전체가 ‘레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걸 막을 수 있었다고. 그는 “병자는 사랑해도 병균은 퇴치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병균은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잡듯이 뒤졌어도 존재했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은 그 ‘병균’ 때문에 그는 숱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셈이다.

    ‘박홍은 사상가가 아니라 매스컴에 의해 만들어진 연예인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박홍을 아는 열쇠’라고 했던 한 기자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영화속 제임스본드의 암호명인 ‘007’의 앞번호 ‘00’은 일종의 살인면허를 뜻하는 숫자라고 한다. 살인을 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국가에서 그 정보요원에게 그만큼 직업적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징표로 선사하는 ‘권위’에 다름 아니다. 의사면허 소지자가 사람 몸에 칼을 들이대도 잡혀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박홍은 ‘인간’이 아니라 ‘사상적 이유’ 때문에 신부 집단이 가지고 있는 아름답고 착한 권위를 남용했다.

    마지막으로 박홍의 주사파 발언이 정점에 달한 1994년 8월 한 신문에 게재된 사설을 다시 보자.

    “박총장은 훗날 대학사회의 사상적 편향성을 걱정했던 것이라고 자신의 말을 합리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것이 없다면 대학의 ‘좌경화’ 분위기에 대한 걱정이 앞서 사물 인식과 판단에 착오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성직자로서, 학자로서 양심을 지키는 길일 것이다.”

    박홍은 자신에게 부여된 엄청난 ‘권위’가 버거웠던 것일까.

    이번에는 김홍신 의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차피(於此彼)’라는 말이 있다. ‘이렇든 저렇든’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자포자기’지만 또 다르게 보면 지나친 낙관의 한 표현이다. 김홍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그저 그렇게’ 혹은 매사 ‘건성건성’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김홍신은 체질적으로 ‘어차피’란 단어의 의미가 싫은 모양이다. 무엇이든 맺고 끊는 게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그래서’ 형(型)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관점에서 김홍신의 소설 ‘무죄증명’에 대한 문학평론가 송승환의 작품 해설은 매우 흥미롭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형상화한 대다수의 작품들은 이 비극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그려주면서 문제를 던진다. 그런데 이 작품은 문제의 제시를 통해 아픔을 부각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어떤 해결을 모색하려 한다.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에 맞서는 것은, 그와 유사한 대응이라는 공격적이고 원시적인 방식이다. 이 점이 이 소설을 특이하게 한다. 즉 우리가 안고 있고 쉽사리 풀리지 않을 듯한 억압을 소설적 카타르시스에 의해 한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죄증명’은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김홍신이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한 시기다. 전문적인 식견이 짧아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그 후에 발표된 김홍신 소설의 기본 얼개는 많은 부분 ‘무죄증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다. 즉 반전과 대안과 확실한 결론이 있는 ‘그래서’ 구조를 선호한다는 말이다. 당연하게 김홍신은 현재 본업으로 삼고 있는 국회의원 노릇에도 이 개념을 정확하게 적용한다.

    그는 최소한 ‘내가 왜, 무엇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는가’ 하고 물어볼 경우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게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이지만, 그런 개념이 없을 경우 놀고 먹으려고 하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직업이 따로 없단다. 혹 동료의원 중 누가 들으면 또 ‘잘난 척’한다고 한소리 들을 말이다. 김홍신은 자신이 정치를 그만둔 뒤에 비겁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으며, 깨끗했다는 세 가지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다.

    국회의원 6년차인 현재까지는 그 희망사항이 무난히 이루어진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홍신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의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지난 1996년 국정감사가 시작된 이래 김홍신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국감 평가 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다. 15대 국회의원 의정활동 평가 1997년도 최우수상 수상, 1998년도 전체 대상 수상, 1999년도 최우수상 수상, 제 15대 전체 종합평가 대상 수상 등 언론사와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평가에서 1위를 휩쓸었다.

    김홍신은 자신의 전공인 보건복지분야에 대단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지난해 8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국민기초 생활보장법’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얼마나 국회의원 노릇을 잘했던지 지난 4·13총선 공천을 앞두고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은 한나라당에 공문을 보내 ‘15대 국회의정활동 최우수의원’인 김홍신을 16대 총선에서 전국구 당선권 후보로 추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김홍신은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16번으로 당선이 확정되어 재선의원이 되었다. 아마도 특별한 정치적 입지 없이 의정활동만으로 전국구 재선의원이 된 사람은 김홍신을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권위와 권세의 차이

    김홍신의 인터뷰 기사마다 등장하는 얘기라서 좀 따분하긴 하지만 김홍신의 성실한 질의태도나 근거자료에 입각한 일문일답은 의정활동의 한 전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의정활동에 대한 김홍신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는 평소에도 사비를 들여 1∼2명의 보좌진을 더 보강해서 활동하는 사람인데 세비는 향후 100년 간 동결되더라도 보좌진 수만은 확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의정활동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를 보좌진의 공으로 돌리곤 한다. 김홍신은 보좌진들과의 관계가 수평적, 민주적으로 알려져 있는 국회의원인데, 보좌진은 연출가, 감독이고 국회의원은 배우라는 것이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얘기인데 그와 보좌진의 수평적 관계가 언론의 단골 소재인 걸 보면 일반적으론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가 상당히 권위적인 모양이다. 이게 김홍신이 ‘튀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김홍신은 국회의원이 된 직후부터 ‘권위’와 ‘권세’를 구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다. 무릇 정치인이란 권위는 갖되 권세를 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996년 김홍신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권위와 권세의 차이를 이렇게 밝힌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고심한 것은 정치판의 권세주의였다. 통념상 권위주의라고들 표현하는데, 권위와 권세를 혼동한 탓인 듯했다. 국회의원의 권위란,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직책이기에 국정을 감시하고 행정부를 감시하며 온당한 법을 만들고… 권세란 국회의원직을 큰 벼슬로 생각한다거나 금배지의 위력을 행사하거나 의원직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갖가지 대우와 행세를 하며 그 직책을 즐기려는 행태를 뜻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정부를 감시하고 법을 만들고 고치라고 부여해준 법적 ‘권위’를 개인에게 부여한 ‘권세’로 누리려 들면 안된다는 뜻이다.

    확실히 김홍신은 권세를 버린 대신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원 고유의 권위를 획득한 듯하다. 특정 계파에 속하지도 않고 지역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상습적 당론 거부자’로 불릴 만큼 자기 소신을 견지하고 때로 자신을 전국구 의원으로 추천한 이회창 총재 앞에서도 그의 말대로 ‘꼬장’을 부릴 수 있는 건 남들과 다른 그만의 ‘권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3월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는 ‘공업용 미싱’ 발언과 임창열 경기도지사의 사생활을 비방한 혐의로 기소된 김홍신에 대해 형법상 모욕죄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죄를 적용, 벌금 100만원과 벌금 8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정치적 비판의 한계를 넘어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다음 얘기다. 원래 선거법 위반죄로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박탈된다고 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홍신이 성실하게 의정활동을 해온 점 등을 감안, 의원 신분을 유지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결 결과를 김홍신이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 고유의 ‘권위’ 덕분이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와 유사한 의미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 하다. 대신 국회의원의 권위를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주위 사람들이 질릴 만큼 집요하다.

    그가 15대 국회에서 시작한 첫 사업은 의원세비 반납 운동이었다. 임기가 48개월인 의원들이 49개월분의 세비를 수령하는 법안을 고치자는 취지의 운동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는 시작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 일을 회상하며 김홍신은 “왕따, 그거 굉장히 어려워요.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라고 심적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김홍신은 끈덕지게 그 일에 매달려 지난해 여야 초·재선 의원 25명과 함께 공동으로 의원세비를 날짜별로 계산토록 한 ‘국회의원 수당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16대 국회 제1호 법안으로 제출하여 통과시킨다.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김홍신이 맨 먼저 시작한 일은 가짜 독립유공자를 가려내는 일이었단다. TV 사극에서 몇 백년 전 자기 조상이 간신처럼 묘사됐다는 이유만으로도 격렬한 항의를 하는 우리 풍토에서 그 후손들의 압력과 방해가 얼마나 심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하지만 김홍신은 1996년 정기국회에서 가짜 독립유공자 5명을 밝혀냈고 1997년 초에 유공자 자격을 박탈케 했다. 김홍신에겐 사회적 불의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하는 그런 성질이 있는 것 같다는 한 교수의 말이 실감난다.

    김홍신은 또 의약분업 관련 법안 처리 과정에서도 같은 당 의사출신 의원들로부터 “김의원은 이제 병원 갈 생각말라”는 뼈있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의사들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지만 그는 소신을 굽힐 생각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다.

    정치가 권위를 획득하고 권세를 버려야 한다는 굳은 믿음에서 비롯한 ‘튀는’ 행동과 지독한 일처리 방식을 두고 일부 정치인들은 김홍신을 일종의 트러블 메이커로 취급하는 눈치다. 그는 민주당 대변인 시절부터 “대변인제를 없애라”고 주장했고, 당시 조순 총재가 전두환-노태우 전(前)대통령 사면을 주장했을 때는 그에 반발하여 개인성명까지 발표하는 ‘꼬장’을 부렸다. 대의적 측면에서야 아름다운 일일지 몰라도 내부집단 입장에서는 말도 못하게 피곤한 사람일 것이다. 김홍신은 이런 갈등에 대해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지만 때가 되면 또 도지는 몸속의 뜨거운 피”는 “조물주께서 뭔가 하나쯤 더 넣어서” 생긴 부작용(?)일지 모른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김홍신이란 인간은 ‘튀기 위해’ 뉴스가 안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를 하기도 한다. 걸핏하면 편지를 쓰는 것도 그런 행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가 편지를 쓰는 대상은 다양하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에게 개고기 식용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기도 하고, YS에겐 안기부 불법지원과 관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에겐 과거 정치자금에 대해 고해성사할 것을, 또 16대 국회의원 당선자 전원에겐 세비반납과 법개정에 동의할 것을 호소한다. 또 같은 당 박근혜 부총재에게 서한을 보내 박대통령 기념관을 사비로 지으라고 권했으며, 얼마전 JP 대망론이 화제가 되자 ‘영욕이 많았던 인생에서 이제는 고요한 힘을 배우라’고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점자 명함 사용이나 의원 전용시설 사용 안하기, ‘태반 정력제 사용’처럼 사회에 충격을 주는 병리현상들을 주로 폭로하는 것도 그런 연장선상이라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론 위와 같은 해석에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엔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때다. 지난해 9월 한 TV방송사의 ‘9시 저녁뉴스’에는 ‘소설가 출신 김홍신 의원이 정치권을 소재로 한 인간시장 속편을 쓸 예정’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아무리 주말 저녁이었다지만 책을 출간한 것도 아니고 ‘쓸 예정’이라는 얘기를 ‘9시 저녁뉴스’에서 다룬 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속사정이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당시 TV를 보면서 뜨악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김홍신의 모든 행동을 싸잡아 ‘언론 플레이’용으로 비난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양적’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그 내용을 따져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얼마전 한 신문엔 ‘정치인과 카메라’라는 재미있는 칼럼이 실렸다. 정치인들 중엔 사진찍히는 데 ‘도사급’ 인사들이 정말 많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는데, 예를 들어 화기애애하던 상임위가 기자들이 들어오면 갑자기 살벌해지는 경우가 많단다. 기자나 카메라가 들어온 것을 목격하는 순간 통계자료나 증거 사진 등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고 정부측 관계자들을 향해 대갈일성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인과 언론플레이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덧붙이자. 조순형 의원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한사람이다. 물론 그를 본 적도 없고 그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데 일조한 것도 없다. 그는 정치인 중에 가장 ‘꼬장꼬장’한 의원 중 한사람이라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5선의 중진의원이면서 변변한 당직 하나 없이 의정활동 베스트의원으로만 간간이 언론에 얼굴을 비칠 뿐이다. 당사자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 조순형 의원과 김홍신은 의정활동 부문에서는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조순형 의원은 하는 일에 비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치인의 언론플레이가 내용 위주로 이루어져서 조순형 의원 같은 사람이 더 많이 언론에 등장하게 되고 김홍신같은 사람도 무턱대고 ‘언론플레이에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비난받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자기실천

    김홍신은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중요한 두 가지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다.

    김홍신은 일곱 살 때부터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 그가 존경하던 신부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본당 신부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마도 ‘우리들의 건달신부’라는 소설은 김홍신의 그런 못다 이룬 꿈에 대한 표출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교훈과 정의를 향한 가톨릭의 정신은 김홍신의 심리적 성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의원의 인간화, 즉 말과 행동이 다른 의원들의 도덕적 이중성에 대한 정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흔하게 들어온 얘기라서 전혀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 중요한 건 김홍신이 그 주장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 보여주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자기실천’의 실행력이다.

    국회의원으로서 김홍신의 ‘권위’를 지켜주는 가장 근원적인 방어체계는 바로 이 ‘실행력’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김홍신의 실행력은 스스로에게 채운 ‘심리적 족쇄’가 한몫을 단단히 하는 듯 하다.

    ‘심리적 족쇄’란 이런 것이다. 금연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주위사람들에게 자신의 금연사실을 공표할 경우 그는 별 수없이 금연을 강제당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다시 담배를 피면 자신이 실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홍신이 유난히 공개적 선언을 많이 하고 소소한 원칙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데 바로 이게 김홍신의 권위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면서 공개적으로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권위는 지키되 권세를 버리는 의미로 의원 배지를 달지 않겠다고 했고, 의원전용 현관문 대신 방문객이 이용하는 쪽문을 이용하고 의원전용 사우나를 절대 이용하지 않으며, 공적인 업무가 아니면 귀빈실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국정감사에 질의할 사안을 미리 피감기관에 통고하는 ‘국감예고제’도 그런 심리적 족쇄의 한 사례다. 상대방에게 공격지점을 미리 알려 주고 전투를 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보다 얼마나 많은 노력이 수반되겠는가. 이런 현상을 ‘김홍신 효과’라고 불러보자.

    김홍신은 가끔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사람들한테 괜한 말을 들어가면서 힘들게 산다고 신세한탄을 한다. 이것도 ‘김홍신 효과’의 한 파장일 것이다. ‘김홍신 효과’는 실천을 필수전제로 해야 효율성이 극대화된다. 그는 ‘아이디어만 있는’ 개혁은 진정한 개혁이 아니라며 실천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실천이란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되돌아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극장 의자 사이의 팔걸이를 누가 차지하는지 아는가. 나이가 더 많은 사람 아니면 여자보단 남자? 정답은 먼저 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허무개그처럼 썰렁한 말이지만 심리학자들의 오랜 관찰에서 나온 결론이다. 먼저 앉은 사람이 돈을 더 낸 것도 아니지만 뒤에 온 사람은 그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내가 먼저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꾸 팔을 걸치려고 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솟는 심정도 한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기득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심리적 기득권’도 그러한데 거기에 ‘물리적 기득권’이 동반되면 ‘권위적’이 되는 건 순간이다. 권위적이 되거나 권세를 누리려는 건 인간의 본능적 속성에 해당하기 때문에 권세를 부리지 않고 ‘착한 권위’만 가지려면 김홍신처럼 심리적 족쇄를 채우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선언보다 실천이 더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다.

    김홍신은 ‘김홍신 효과’를 이용해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국회의원으로서의 고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겠다. 김홍신이 좋아하는 ‘쓴소리’다. 소설가 타령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설가나 작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그의 집착은 거의 병적인 것 같다. 지난해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정당 연설에서 김홍신이 한 첫마디는 “소설 쓰다가 정치를 시작한 김홍신입니다”였다. ‘공업용 미싱’ 발언 재판에서 당내에 쟁쟁한 율사 출신들이 포진해 있음에도 엄상익 변호사를 찾아간 건 그가 ‘글쟁이 변호사’라는 이유에서란다. 그 재판과정에서 선배의원이 증인으로 나왔을 때 김홍신이 한 말은 정치가인지 작가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다.

    “형님, 제가 처벌받는 건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소설가로서는 영원합니다. 제가 받은 이 재판을 소설로 꼭 쓸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 선배님의 그 무소신을 꼭 표현할 겁니다.”

    김홍신이 소설가 출신이란 건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훈미정음 창제 이후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작가에다 100여 권의 책을 출간한 소설가인데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국회의원들은 싫어하겠지만 정치하면서 수집한 소재가 소설 100권은 쓸 만큼 있으니까 곧 ‘인간시장’의 속편을 쓰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면 국회의원들이 진짜 싫어할 것이다. 작가가 정치가보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 김홍신’이 아니라 ‘정치인 김홍신’에게 국회의원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지금 정치인 김홍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권위가 작가 김홍신에게 뒤지지 않는데도 왜 자꾸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또 그의 말대로 소설은 잘못됐다는 말만 할 수 있지만, 국회의원은 잘못된 일을 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고칠 수 있지 않은가. 필자는 김홍신과 문학동아리 선후배 사이인 김한길 장관의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하고 가까운 김의원같은 경우는 정치도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라고 말씀하시던데 그것이 잘못이란 것은 아니지만 저는 달라요.… 청와대에 있을 때나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자료를 절대 안 남겨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뭐든 쓸까 해서요. 그리고 저는 작품이란 것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무엇을 쓰겠다는 계획도 없지만 열심히 살아온 결과를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쓰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작가관’일 수도 있는 문제를 가지고 주제넘은 ‘쓴소리’를 하는 건 국회의원 김홍신이 그 자체로 ‘인간 만년필’이 되어 ‘새로운’ 정치소설을 써 나가고 있는데, 그런 개인적 욕심을 구구절절이 얘기할 필요가 무어 있겠느냐는 말이다. 김홍신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자기만의 새로운 권위로 만들어가고 있는 유별난 정치인이 아닌가.

    이제 마지막으로 그가 정치개혁 TV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들려준 인상적인 얘기 하나를 들으면서 이 글을 끝맺자.

    “사우디아라비아 고산지대에서는 원숭이의 욕심을 이용하여 원숭이를 손쉽게 잡는다고 한다. 네모난 상자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큰 뼈를 넣고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둔다고 한다. 잡았던 닭뼈를 얼른 놓고 도망가면 될 터인데 원숭이는 닭뼈를 움켜쥔 채 무거운 상자를 질질 끌며 힘겹게 뒤뚱거리다가 잡힌다.”

    원숭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인간도 ‘닭뼈’를 잡으면 잡힐 때까지 놓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손을 넣으면 빼기 어렵다. 제일 좋은 방법은 김홍신처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든 나는 컴컴한 통속에는 절대 손을 넣지 않겠다’고 먼저 선언하면 된다. 그러면 ‘김홍신 효과’가 무슨 뜻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김홍신을 포함한 그런 정치인들에게 김홍신식으로 인사를 보낸다.

    “내리 석삼년 재수있으세요.”

    격투기를 할 때 가장 무서운 상대는 예비 동작없이 바로 공격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쿵푸처럼 그 준비동작이 화려한 무술보다 무심하게 앉아 있는 것 같던 상대가 갑자기 몸을 날려 일격을 가한다면 순식간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권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군더더기가 없을수록, 즉 ‘권위주의’가 없을수록 ‘권위’의 일격은 그 파괴력을 더한다. ‘권위적이지 않은 권위’가 최고의 권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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