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언론女帝’ 캐서린 그레이엄

  • 김택환언론학 박사 < 조지타운대 방문학자 >

    입력2005-03-23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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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17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가 타계했다. 다음날 워싱턴 포스트는 1면 톱으로 ‘캐서린 84세에 죽다’는 제목을 뽑았다. 부제는 ‘용기, 영향력, 겸양의 지도자’. 부시 대통령도 애도사에서 그녀를 “수줍음이 있지만 강철 같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겸손하며 우아한 사람”이라고 묘사했고, A. 윌리엄스 워싱턴 시장은 캐서린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내에 조기를 걸게 했다. 아울러 그녀를 “탁월한 발행인, 사업가이자 활동적인 시민 지도자”로 평가하면서 “시정(市政)에 대한 끊임없는 워싱턴 포스트의 비판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는 뜻을 전했다.

    캐서린 그레이엄. 그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기에 죽어서도 ‘용기와 영향력, 겸양의 지도자’라고 극찬받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어떤 면이 현직 대통령까지 나서 찬사로 가득 찬 애도사를 읽게 만든 것일까.

    독립 언론의 ‘진정한 발행인’

    캐서린의 용기는 전설적인 두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방부 기밀 ‘펜타곤 서류(Pentagon Papers)’의 보도와 미국 대통령 닉슨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 보도다. 캐서린의 영향력은 미국 역대 최고의 편집국장으로 손꼽히는 벤 브래들리의 표현대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춰주는 저널리스트”에게 용기를 주는 발행인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사회·정치적 영향력까지 의미한다. 겸양이란, 그녀가 막강한 언론 권력을 가지고 있고, 역대 대통령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인과 경제인을 친구로 두고 있지만, 거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생활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행정부의 수장을 대통령 혹은 수상이라고 부른다면, 언론의 수장은 발행인이다. 언론 발행인이라는 단어는 개념의 독특함만큼이나 권위와 무게를 담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W. 저스트는 권한과 책임을 가진 발행인의 모습을 구현한 대표적 인물로 캐서린을 꼽는다.



    또한 캐서린은 1998년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 ‘퍼스널 히스토리(Personal History)’에서 “저널리즘의 우수성을 따질 때 영업 이익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 뛰어난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신문이 살아야 공익도 있다’는 그녀의 경영철학은 언론도 비즈니스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포천’지가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에 포함되는 그날, 워싱턴포스트는 진정한 ‘독립 언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믿음이었다.

    사업 능력과 사교 감각

    1960년 캐서린이 사업 일선에 뛰어들었을 당시 언론사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운 시대적 기운, 즉 반전 운동·여성운동 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자리를 기꺼이 맡았다. 한 예로 캐서린은 워싱턴의 흑인 대학 하워드에 거액을 기증하는가 하면, 미국 최초의 여성 방송사장이 탄생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그녀는 장학금 수여 등 다양한 사회자선 사업을 펼쳐 시민사회 지도자로서도 훌륭히 활동했다.

    캐서린은 1917년 6월16일 유대인 사업가이자 관료를 지낸 유진 메이어와 독일 루터교 목사의 딸인 애그니스 언스트의 넷째 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진은 뉴욕에서 미국 최초로 증권연구·분석팀을 둔 투자전문회사를 차려 거부가 되고, 워싱턴에서는 7명의 미국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 정부 고위관리를 지내다가 연방제도 이사회 의장과 세계은행 총재를 지냈다. 그리고 1933년 경영난으로 경매에 나온 워싱턴포스트를 매입함으로써 언론사 발행인이 되었다. 어머니 애그니스는 전위예술가이자 독일어·프랑스어·라틴어뿐만 아니라 중국어까지 구사하는 연구가로 많은 저서와 기사를 쓰고 정치에도 적극 참여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캐서린은 다섯 남매 중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다. 아버지 유진은 캐서린이 다섯 살 때 루스벨트에게 “나중에 캐서린이 놀랄 만한 일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는 캐서린의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후계자로 점찍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는 탁월한 정치·사업 능력을, 어머니에게는 예술·사교적 감각을 물려받았다.

    캐서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명문 여자 대학인 Vassar대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다가 시카고대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녀는 당시 시카고대학 총장이었던 허친스에게 매료되었으며 그로부터 언론에서 일해볼 것을 권유받는다. 이미 아버지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뒤였기 때문에 방학 때마다 신문사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대학 사회에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던 허친스 총장은 13명의 미국 유명 지식인으로 구성된 언론자유위원회 위원장으로 1946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김택환 역, 중앙M&B)’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은 인물이다. 이 책은 미국 저널리즘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언론 자유와 윤리 그리고 정부·언론·시민의 자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캐서린은 워싱턴포스트에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제의를 뒤로 하고, 당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던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 ‘샌프란시스코 뉴스’ 기자로 입사한다. 그녀는 주당 24달러를 받으며, 부두 노조에 대한 기사를 자주 썼다. 이런 연유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모의 성향에 따라 공화당 지지자였던 그녀는 민주당 지지자로 정치적 견해를 바꾼다. 그녀는 그곳에서 반년 이상 일한 뒤 1939년 워싱턴포스트에 입사했다. 처음 맡은 일은 독자란이었다.

    1940년은 캐서린의 운명이 바뀐 해였다. 필립 그레이엄을 만나 6월5일에 결혼한 것. 필립은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케네디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캐서린의 어머니가 흠모해 마지않던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시민사회에서 1대가 돈을 벌면 2대는 정치를 추구하고 3대는 예술을 하려 한다”고 했다. 필립 역시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필립은 태평양 정보 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1녀3남의 아버지가 되었다.

    필립은 1946년 장인의 권유로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초기에는 발행인으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 특히 1954년 조간 경쟁지였던 ‘헤럴드’를 인수·합병함으로써 워싱턴 5개 신문사 중 만년 4등의 꼬리표를 떼고 선두 ‘이브닝스타’를 앞지르게 되었다. 플로리다 TV방송국도 인수해 경영 다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필립은 조울증에 시달렸고, 자사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1963년 8월3일 권총자살로 48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자서전에 “남편 필립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노라”고 적고 있다.

    캐서린은 남편의 죽음으로 “워싱턴포스트를 매각하든지, 다른 사람을 내세우든지 혹은 자신이 직접 뛰어드는 것” 중 한가지를 택해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그녀는 직접 맡기로 결심하고 1963년 9월20일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채 헤어나기도 전에 발행인의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행사해야 했던 그녀는 자서전에서 “눈감은 상태에서 일을 시작해 눈을 뜨니 어느 정도 발을 디디고 정착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녀에게는 전통적인 가정주부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발행인으로 변신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녀는 여러 스승과 조언자를 구했다. 뉴욕의 법률가인 F. S. 비비에게는 사업에 관한 자문을, 당시 뉴욕타임스 워싱턴 총국장이던 제임스 레스턴과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월터 리프만에게는 저널리즘에 대해 자문했다. 캐서린은 죽기 전까지 빌 게이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비펫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조언자와 친구를 만들어가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갔다.

    캐서린은 발행인이 되기로 한 자신의 첫 결정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브래들리라는 걸출한 인물을 편집장으로 영입할 수 있었던 점을 펜타곤 자료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그가 있었기에 펜타곤과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가 가능했으며, 오늘날의 워싱턴포스트와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주로서 그녀가 능력 있는 언론인을 어떻게 아끼고 평가했는지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캐서린의 장례식에서 브래들리의 추도사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장면이 전 세계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위대한 편집국장으로서 브래들리의 삶은 그의 저서 ‘A good life’에 기록되어 있다. 캐서린은 브래들리에게 매료된 가장 큰 이유로 그의 강직함과 건실한 보도 태도, 기자로서의 훌륭한 품성을 들었다.

    워싱턴포스트의 펜타곤 문서와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만큼 미국 정치와 저널리즘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도 없을 것이다.

    펜타곤 사건의 핵심 쟁점은 국민의 알 권리를 대신하는 언론의 자유와 기밀보호라는 정부의 권리가 충돌한 것이다. 펜타곤 사건은 뉴욕타임스가 국방부 비밀문서인 베트남 전쟁 관련 펜타곤 보고서를 입수·보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닉슨 정부는 법원을 통해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그 내용을 기어이 보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때 보여준 결단력

    물론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법률 고문들은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보도를 유보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편집국장 브래들리와 베테랑 기자였던 프리츠 비비 등은 보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사안은 워싱턴포스트의 존폐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만약 대법원이 이 보도행위를 간첩법 위반으로 판결할 경우 각종 악영향과 더불어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권 갱신 취소, 주가 폭락 등의 문제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서린이 최종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go ahead’, 즉 발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워싱턴포스트가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한 지 2주가 지나 대법원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년 후 일어난 워싱턴포스트의 또 다른 충격적 보도의 그늘에 가려진다. 바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사임케 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사건은 1972년 6월17일 토요일에 시작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전날 밤 전국민주당중앙위원회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 한 사무실에서 남녀가 소파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이 건장한 남자 5명이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 체포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미 펜타곤 페이퍼 보도로 닉슨 정권과의 관계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워싱턴포스트는 다시 정권과의 싸움에 사운을 걸게 된 것이다.

    이로써 캐서린은 닉슨 정권이 가하는 여러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세무조사, 방송국 허가권을 갱신해 주지 않겠다는 협박, 제3자로 하여금 워싱턴포스트 주식을 사게 해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시도나 주가 폭락 유도 등.

    C. 번스타인과 함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의 영웅인 B. 우드워드는 당시 닉슨의 선거본부장이자 나중에 법무장관이 된 존 미첼로부터 “보도하면 캐서린의 젖가슴을 큰 세탁기에 넣고 짜버리겠다”는 협박과 욕설까지 듣는다. 그러나 캐서린은 편집국에서 “우리는 이제 물살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며 브래들리와 기자들을 격려했다. 또 방송국 허가권 갱신도 포기할 수 있다며 강경하게 밀고 나간다. 그녀의 결단에 워싱턴포스트의 많은 기자가 감동했음은 물론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마침내 닉슨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입수해 대통령에게 결정타를 먹인다. 이후 워터게이트 보도로 퓰리처상을 탄 우드워드는 캐서린에게 10달러짜리 빨래 짜는 건조기를 선물했고, 캐서린은 그것을 자기 사무실에 전시해 두었다.

    펜타곤 페이퍼와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가 미국 역사 및 저널리즘의 방향을 바꾸는 데 기여했지만, 캐서린은 그 찬사들 가운데서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기자들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해이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캐서린과 워싱턴포스트는 그 이듬해인 1975년 노조의 방화 및 사보타주로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일부 기자들이 노조원들의 폭력에 쓰러지는가 하면 139일 동안 계속된 파업으로 회사는 만신창이가 됐다. 캐서린은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폭력에 가담한 모든 노조원을 해고하고, 새로운 기계들을 구입하고, 인력을 대체하는 등 강력한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이 위기를 넘기면서 워싱턴포스트는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캐서린은 사주와 편집국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에디터(편집자)에게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발행인의 권리가 아니다. 그러나 발행인의 분명한 책임은 신문이 완벽하게, 정확하게, 공정하게, 탁월하게 발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답했다. 즉 편집국에 간섭하지 않되, 사주로서 자기 신문이 언론의 정도를 걸으며 남다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워싱턴포스트가, 자신의 친구이자 회사 이사이며 전 국방부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의 자서전을 혹독하게 비평했을 때도 편집국과 기자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편집국의 일상적인 보도와 편집은 편집국장의 책임하에 처리됐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등 사운이 걸린 사건의 보도는 캐서린이 최종 판단을 내리곤 했다.

    캐서린이 발행인으로서 보여준 탁월함과 신문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는 워싱턴포스트 기자들로부터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녀는 일 년에 두세 차례 기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으며 친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었다. 특히 간부보다 젊은 기자들과 논쟁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사주의 모습은 회사의 기운을 북돋우고 젊은 기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많은 기자들은 편집국장보다 발행인과 가진 사석의 빈도가 더 많았다고 필자에게 전했다. 이런 자리에서 캐서린은 기자들에게 회사의 모든 사안에 대해 기탄 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물론 캐서린이 기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언론사 중역들에게 전하지만 그것이 기자에 대한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1972년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최초로 옴부즈만 제도를 도입한다. 옴부즈만 제도는 워싱턴포스트가 좀더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캐서린의 제작 방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칼럼니스트들은 캐서린이 남편 사망 후 워싱턴포스트와 재혼했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캐서린의 남다른 노력으로 워싱턴포스트는 발전을 거듭했다.

    캐서린은 지면과 사교를 통해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녀는 워싱턴포스트의 ‘스타일’ 섹션에 변함없는 애정을 보였다. 선정주의가 난무하고 신문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1960년대에 캐서린은 음란한 성 이야기, 가십 등을 다루던 지면을 없애고 대신 고급스럽고 건전한 대중문화 형성에 노력했다. 이것은 지면을 통한 그녀의 여성 운동으로 볼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미 국무장관을 역임한 슐츠의 표현대로 ‘워싱턴의 명물’인 자택에서의 ‘라운드 테이블’ 만찬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두 번, 클린턴과 부시가 대통령 당선 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에 초대를 받았으며 수많은 정치인, 사업가, 예술인, 언론인, 정치인 등이 그 자리를 거쳐갔다.

    이 라운드 테이블 만찬은 1960년, 당시 매서운 필력으로 이름을 날리던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 ‘조셉 알솝’이 자신의 정보원들을 위해 조지타운에 살롱을 운영하면서 시가와 위스키를 나누며 토론과 정보를 주고받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왔다고 한다. 그 살롱의 경우 여자들이 초대되기는 했지만 시가와 위스키를 나누기 어려웠던 점에 착안해, 캐서린은 자신의 집에 성차별 없는 살롱을 차렸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M. 다우드에 따르면, 이 라운드 테이블에는 한번에 12명 정도가 초대되었으며 그중에는 정치인이 한두 명 끼곤 했다. 이곳은 모든 사안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흉금을 터놓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라운드 테이블에서 워싱턴의 역사가 만들어졌으며, 바로 그런 기능으로 인해 캐서린의 집은 ‘워싱턴의 핵심’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여주인이 워싱턴의 저명인사들을 위해 사랑방을 마련해 준 격이다.

    캐서린은 이 라운드 테이블을 자신의 사교와 워싱턴포스트의 발전을 위해 적절히 활용했다. 실제로 캐서린은 편집국에 많은 정보와 힌트를 주었다고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말한다. 테이블에서 오간 ‘오프 더 레코드’ 정보들은 기자들이 다음 혹은 다른 취재를 위해 뒷배경이나 맥락을 파악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캐서린은 워싱턴포스트를 ‘포천’지가 선정한 ‘미국의 500대 기업’으로 만든 여성 기업가이기도 하다. 워싱턴포스트는 대표신문인 워싱턴포스트 외에 워싱턴 주와 메릴랜드 주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6개 지방 TV방송국과 19개 주에 영업망을 가진 케이블 네트워크, 뉴스위크를 비롯한 여러 잡지, 교육 자회사 ‘카플란’ 과 인터넷 자회사 WPNI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등 여러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복합미디어 기업이다.

    “돈 벌어야 정론 가능”

    캐서린이 발행인으로 취임할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매출액이 84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30여 년 후인 1991년, 그녀가 아들 도널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는 매출액이 14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2000년에는 매출액이 24억달러(약 3조1200억원이며 이중 신문매출액이 약 10억 달러로 40%를 차지함)를 넘었다.

    뉴욕타임스에 이어 1971년 뉴욕 증시에 주식을 상장한 워싱턴포스트는 현재 월가 최고의 우량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주당 가격이 500달러를 넘을 정도. 워싱턴포스트는 두 가지 주식을 발행하고 있는데 하나는 의결권이 있는 ‘클래스 A’, 또 하나는 그렇지 않은 ‘클래스 B’다. 전자는 현재 그레이엄 가족만 소유하고 있으며, 후자는 뉴욕 주식시장에서 자유로이 거래된다.

    워싱턴포스트는 거대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고, 저널리즘의 질적 차원뿐 아니라 미디어 경영의 양적 차원에서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했다. 저널리즘의 질과 경영의 질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을 캐서린은 잘 알고 있었고, 평생에 걸쳐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언론사라야 정론을 펼 수 있다’는 언론관을 그대로 실천했다.

    1977년 C. 로버츠가 쓴 ‘워싱턴포스트 100년사(The Washington Post: The First 100 Years)’는 캐서린이 이끈 30여 년을 ‘성숙기’로 규정했다. 1991년 맏아들 도널드 그레이엄이 회사 경영권과 회장직을 물려받아 최대 호황을 누린 지난 10년은 흔히 ‘안정기’로 규정된다.

    캐서린은 일찌감치 장남을 후계자로 점찍고 1971년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을 시켰다. 도널드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월남전에 참전하고 워싱턴 시 경찰 근무를 거쳐 1971년 워싱턴포스트에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편집국을 비롯해 판매·광고·인쇄 등 각 분야를 경험한 뒤 1976년 부사장에 선임됐다. 1979년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직책을 물려받고, 1991년엔 ‘워싱턴포스트 컴퍼니’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랐다.

    캐서린의 유족으로는 도널드 외에도 1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이 있고, 10명의 손자와 손녀들이 있다. 딸 엘리자베스는 현재 워싱턴포스트와 뉴스위크 기자로 일하고 있다. 둘째 아들 윌리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투자가로, 막내아들 스티븐은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자선사업가로 활동중이다.

    캐서린은 언론사업을 위해 기자를 동반한 외국 여행을 자주 다녔다. 1977년에는 유엔 산하 ‘브란트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제1세계와 제3세계 간 격차를 줄이는 데 공헌했다. 이 위원회에는 서독 수상을 지낸 빌리 브란트,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지스카르 데스탱, 스웨덴 수상 올로프 팔메 등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그녀는 언론 유관기관에서도 여러 차례 활동했다. 미국 신문발행인들이 공동 출자한 AP통신사의 첫 여성이사로 활약한 것을 비롯, 미국신문발행인협회 회장, 광고주협회 이사, 워싱턴 및 시카고 대학 이사로도 일했다. 워싱턴포스트사의 전·현직 직원 일동은 조사로, “캐서린이 없는 세계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의 전면광고를 내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 태도나 캐서린의 언론관련 활동에 비판받을 점이나 문제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발행인의 지위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편집에 간섭한 사례가 있다. 어느 날 캐서린이 워싱턴포스트의 ‘스타일’섹션 면 내용과 편집에 불만을 표시하자 편집국장 브래들리가 “당신이 여기서 손떼지 않으면 편집과 발행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맞선 것. 이 비판을 캐서린은 받아들였다. 이는 훌륭한 언론인이 좋은 사주를 만들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 일이기도 하다. 이후 캐서린은, 우드워드가 쓴 대로 ‘take off, mind on’, 즉 ‘손은 떼되 마음은 항상 그곳에 있는’ 태도를 취했다.

    캐서린은 1975년 노조 파업 때 파업관련 노조원을 모두 해고했다. 또 워싱턴포스트의 수많은 CEO 및 간부들을 스카우트 했다 해고하기도 했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녀의 기업운영 방식이 ‘전횡적이고 독선적’이라며 비판했다.

    그녀는 사주로서 누구보다 많은 권한과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그녀는 사업에서 맨파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해 수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과감히 자르는 냉정함을 보였다. 즉 전문인으로서 역량과 수준이 되지 않은 경우 워싱턴포스트의 간부로 일할 수 없었다.

    캐서린이 소유하고 있는 워싱턴포스트를 포함한 언론들의 보도에서, 권언유착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녀는 자서전에서 솔직히 인정했다. 특히 정치에 야망이 있던 그녀 남편 필립은 역대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들, 많은 정치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그녀는 솔직하게 적고 있다.

    1952년 대선에서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면서 아이젠하워에게 비판적인 사설과 만화를 빼도록 압력을 행사한 사실, 존슨을 위해 찬조연설을 하고 선거전략을 짜고 연설문을 작성한 사실,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로 존슨을 지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 등도 자서전에 담겨 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지금 생각하면 필요 이상 정치와 밀착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반성했다.

    그녀가 워싱턴포스트 사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정치인들을 활용하고, 미국의 보수적인 국제정치를 옹호하고, 끊임없이 미디어 관련 기업을 사냥한 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함으로써 오늘의 워싱턴포스트를 만들었다. 캐서린이 베트남전에 미국의 개입을 적극 찬성하다가 반전으로 돌아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캐서린은 1977년부터 1997년까지 모두 네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필자가 그녀를 직접 대면한 것은 1997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그녀의 자서전 출판기념 초청 강연회에서였다. 김영희 대기자의 표현대로 “참 곱게 나이든” 할머니의 인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부드러움이 어쩌면 역사를 바꾼 힘의 실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와 특정 국가의 역사·문화에 기인하는 특수 가치들이 공존과 갈등을 빚는 역사의 현장에 놓여 있다. 저널리즘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때, 언론과 권력은 끊임없는 긴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작금의 한국 언론은 위기이자 기회를 맞고 있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언론의 역할과 함께 건강하고 투명한 경영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무한경쟁시대에 언론의 사활은 사주와 언론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캐서린은 한 인터뷰에서 “발행인은 영업뿐 아니라 기사와 편집도 잘 알아야 한다. 편집인은 재능 있는 기자를 발굴하는 안목과, 실어야 할 기사와 버려야 할 기사를 구분하는 센스, 명석한 두뇌와 용기와 직관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캐서린은 죽음 직전의 순간까지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8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디어 최고경영자 세미나에 명찰을 달고 참석해 토론하는 자세야말로 그녀의 인물됨을 한눈에 보여준 사례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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