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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컴퓨터책 집필하는 74세 괴테연구가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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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테연구가 박찬기 교수.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라는 괴테의 아포리즘에 천착해 살아가는 그의 삶은 엄격하고 열정적이다.
분명히 9월7일 오후 3시30분에 만나기로 약속 했는데, 사무실 문은 열려 있고, 사람은 부재중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19-2 동화빌딩 705호. 괴테전집간행회라는 간판이 출입문에 붙어있다. 평생을 독일문학, 그것도 괴테연구를 하다 정년퇴임한 뒤엔 컴퓨터 연구로 벌써 세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박찬기(74) 고려대 명예교수의 연구실이다.

마감시간에 대기 위해선 오늘만은 인터뷰를 성사시켜야 하는데 주인공은 행방이 묘연하다. 그의 하와이 여행 일정 때문에 인터뷰 일정이 미뤄지고, 귀국하자마자 약속한 미팅시간이 또 버그러졌다. 일부러 골탕을 먹이나,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지만 아직 그가 골탕을 먹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필자는 박찬기 교수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초급독일어’란 책의 저자가 박찬기 교수였는데 그가 지은 참고서로 공부한 결과였는지 고1 독일어 중간고사에서 100점 만점을 받은 것이다.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그 후의 ‘씁쓸한 사건’ 때문이다. 독일어 교사가 100점 만점자인 필자를 호명하며 “잘했다”고 했을 때 필자는 “커닝했어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반에서 우스운 행동이나 엉뚱한 화제로 관심을 끌어보려는 이상한 취미를 갖고 있던 그 시절, 필자의 엉뚱한 대답이 나오자 그릇 깨지는 듯한 급우들의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예 화가 났던지 독일어 교사는 필자의 성적을 50점으로 감점해버렸다. K시의 한 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아버지의 주선으로 M시의 고교에 뒤늦게 입학한 필자에게 이 같은 평가는 충격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K시의 학교로 전학을 간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런 추억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박교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과자봉지가 굴러다니는 연구실

궁금하던 차에 슬며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방은 연구실이 아니라 흡사 마귀들이 놀다 간 자리인 양 지저분하고 너저분하다. 소문대로 그의 괴팍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후에 이야기를 나눈 그의 운전기사 설명으로는 그나마 손님이 오고, 사진도 찍는다면서 교수님과 함께 아침에 이것저것 치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실내는 철없는 아이들이 실컷 장난을 하고 나간 뒷자리처럼 뒤죽박죽이다.

컴퓨터 단말기 세 대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소파에는 신문, 잡지, 과자부스러기가 내팽개쳐져 있다. 고장난 듯한 TV 수상기가 책더미 속에 잠자고 있고, 읽다가 내버려둔 듯한 ‘로마인이야기’ ‘이피게니에 스텔라’ ‘윈도 95 컴퓨터 가이드’ ‘괴테 연구’ ‘독일문학사’ 등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널려 있다.

집무책상인 듯한 자리는 더 난장판이다. 두루말이 화장지와 일회용 화장지, 마른 쓰레기가 친구처럼 엉겨 있고, 의자 곁엔 양파링 인디안밥 GOD섹시 양갱 양파깡 봉지가 굴러다니듯 널려 있다. 먹다 남은 양파깡이나 맛동산 에이스 봉지는 고무밴드로 단단히 묶여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공기가 들어가면 과자가 축축해져 본 맛이 없어지므로 먹다 남은 과자는 이처럼 고무밴드로 단단히 묶어둔다고 한다.

주인 없는 사무실, 그것도 냉방이 되지 않아 땀이 비오듯 하는 곳에 계속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보았다. 바로 옆, 책상에서 수신신호가 요란하게 났다. 휴대폰을 두고 외출을 한 것이다. 집으로 연락을 해보았다. 그의 부인은 “낮 12시30분에 만나기로 했다면서 기다리다 안 오니 볼 일 보러 나가신 것 같다”며 “그 양반이 나이가 드니 건망증이 생겨서 그렇게 착각을 한다”고 대신 위로해주었다. 운전기사를 보낼 테니 함께 찾아보라는 말대로 잠시 후 50대 초반의 순박한 중년남자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가 여러 차례 오고, 휴대폰도 수시로 울렸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전화를 대신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버려두어야 해요. 교수님은 남이 손대는 것을 싫어하세요. 그래서 비닐종이 한 장도 손대지 않아요. 이렇게 너저분해도 교수님은 휴지조각 하나도 위치를 다 아세요. 그리고 이런 분위기라야 일을 하실 수 있대요. 이런 혼란스런 분위기라야 글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죠.”

좀 우습지 않으냐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표정이다. 실내와 복도를 오가며 40분쯤 기다렸을까 꾀죄죄하나 기품 있는 노인이 터벅터벅 들어왔다. 바로 박찬기 교수다. 서울대에서 10년, 고려대에서 33년간 재직하다 1994년 정년퇴임한 뒤 컴퓨터와 괴테 연구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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