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문민정부 ‘황태자’ 김현철 5년 만에 입열다

“김홍일에 연민느껴, 야당때 던진 부메랑에 당한 것”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4-11-04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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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닷컴(donga.com) 인물정보에 들어가 ‘김현철’을 검색하면 모두 6명의 김현철이 등장한다. 전 내각수반, 현직 변호사, 두 명의 기업체 간부 김현철의 이름이 나오고 다음에는 ‘춘천가는 기차’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김현철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천지검 검사 김현철씨가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 문민정부 시절, 특히 문민정부 말기인 1997년을 떠들썩하게 했고 그해 뉴스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던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의 아들 현철(賢哲·42)씨, 그래서 한국사람이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 그러나 인터넷 인물정보 사이트에서 그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다.

    1997년 2월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현철씨는 ‘한보 비리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현철씨는 의혹을 제기한 당시 야당의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맞섰다. 결국 한보사태와 관련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해 5월17일 현철씨는 정치자금수수와 관련, ‘특가법상 알선수재와 조세포탈’이라는 생소한 범죄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이어진 재판과 수감생활, 보석으로 석방, 2000년 8월 최종 복권과 공민권 등 모든권리 회복, 그리고 2000년 4월 미국유학 길에 오른 뒤 14개월 만인 2001년 6월 귀국과 칩거…. 그에 대한 소식은 가끔 신문의 단신기사로나 접할 수 있었을 뿐, 그가 요즘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좀처럼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문민정부의 황태자’라는 거창한 별명 탓에 까마득하게만 보였던 그를 2001년 12월14일 오후 서울 구기동 자택에서 만났다. 김현철씨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취재진을 맞았다. 현철씨의 웃는 얼굴은 무척 낯설었다. 언론을 통해 보아온 그의 얼굴은 언제나 굳어 있었고, 전국에 중계되는 TV청문회 도중에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었는데, 지금 얼굴 가득 웃음짓는 현철씨를 대하니 마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버지 YS와 흡사한 외모에 엑시머레이저수술로 그동안 그와 아버지를 구분짓게 했던 안경마저 벗어버리자, 청년 YS를 보는 듯할 정도로 아버지와 닮아 보였다. 40대에 접어들면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마저 보태져 더더욱 YS와 닮아 보였다.



    “제 기억에는 아버님이 40대기수론을 주장하실 때 반백(半白)이셨는데 저는 그때보다 조금 더 머리가 센 것 같네요.”

    인터뷰를 위해 회의용 탁자가 놓인 접대실로 안내하면서 현철씨가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는 김 전대통령보다 조금 가늘었고 말하는 속도는 조금 빨랐다. 웃는 모습에서는 어머니 손명순 여사의 태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 YS가 1999년 5월1일 아들을 위해 특별히 썼다는 ‘호연지기(浩然之氣)’ 네 글자 편액이 걸려 있었다. 현철씨는 바로 그 앞 의자에 앉았다.

    “저는 누구든지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언론과 접촉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과거에는 언론과 얘기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언론하고 인터뷰를 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이슈가 있어야 만나지요.”

    현철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동안 언론 인터뷰가 뜸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서 미국 객원교수 생활과 2002년 3월부터 예정된 경남대 행정학과 대학원 출강 계획을 경쾌한 어조로 소개했다.

    ‘국가경영론’ 책 곧 출간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있었습니다. 이 대학 정부학과 학과장이자 공화당의 여론조사에도 참여했던 피쉬긴 교수로부터 ‘딜리버레이티브 폴링(Deliberative Polling)’이라는 새로운 여론조사 기법을 배우고 직접 참여도 했습니다. 우리말로 ‘깊이 생각하는 조사’로 변역할 수 있는 이 여론조사는 전화나 방문조사와 달리 표준 국민들을 선정, 합숙을 하며 각 정당의 정강 정책을 교육시킨 뒤 의견을 묻는 방식이었는데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귀국한 뒤 현정부에서 통일부 장관도 지내신 박재규 경남대 전총장께서 ‘경남대에 와서 강의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이 다른 곳에 적을 두지 않았다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셔서 연구소 비상근 연구위원으로 적을 두게 됐죠.”

    ―책을 쓴다는데 내용은 어떤 겁니까. 항간에는 미래학 분야라고 하는데….

    “제목이 좀 거창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21세기 한국국가 경영론’입니다. ‘국가경영론’은 대학원 강의 제목이 될 겁니다. 민간 정권인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 추진하려 했던 개혁정책들을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인지, 미래정치 쪽에서 살펴보는 것이 책과 강의의 포인트가 될 겁니다. ‘세계화’는 미국식과 유럽식이 있는데 우리가 추구하려는 세계화 전략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경쟁력 측면에서 국가 경영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를 담았습니다.”

    ―문민정부가 했고 현 정부가 하고 있는, 그러나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개혁과제들을 정리해보자는 뜻도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의미를 자꾸 부여하면 거창해지는데요. 어떻게 보면 경영학도로서 어른(YS) 가까이에서 정치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것까지 다 포함해 아쉬웠던 부분들, 실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앞선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되다 보니 실상이 많이 가려지는 것 같아요. 어느 누군가는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민정부 최대의 치적은 뭐라고 봅니까?

    “그건 제가 답할 문제가 아니죠. 어느 정부이건 빛과 그림자가 있는 것 아닙니까. 군(軍) 개혁이라든가 금융실명제 등 각각의 개혁정책이 있는데 그 정권 5년 내에 하나만 정착돼도 사실 평가를 받을 만한 업적이거든요.”

    ―문민정부 최대 치적은 뭐니뭐니해도 군(軍)이 다시 정치에 관여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의견에 동의합니까?

    “그럼요.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죠. 지금 국민들 어느 누구도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모든 여건이 불안해도 군이 다시 나올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 바탕을 (YS가) 혁명적으로 이끌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치 논쟁도 많았지만, 그건 인적 개혁이라 표현해야지 인치라는 식으로 깎아내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금융실명제 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죠.”

    김현철씨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가 문민정부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 점을 지적한다. 현철씨는 문민정부에 인사추천을 한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는 “‘아버지의 사람’을 아버지에게 추천한 것일 뿐 사리사욕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문민정부 초기에 권영해(權寧海) 국방부 장관을 중심으로 하나회 숙청작업이 전개됐습니다. 당시 권장관을 국방장관에 추천한 사람이 김현철씨라고 알려졌었는데요.

    “그건 이렇게 봐야 합니다. 어른께서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정치를 해오시면서 수많은 사람을 아십니다. 그런 가운데 자연히 저도 그런 분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거죠. 제 나름대로 어른께 추천해 드린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어른께서 아시는 분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서 알게된 거죠.”

    ―김 전대통령이 아는 분들 중에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따로 만나보고 얘기를 들어본 뒤, 이 사람은 괜찮겠다 싶으면 대통령께 추천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아버님하고 제가 정치적인 얘기를 심도 있게 나누기 시작한 때는 1987년 대선 이후입니다. 대화를 깊게 나누다 보면 아버님과 여러 가지 얘기들이 진행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정치적 측면에서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부자지간 이상의 동지적 관계였다고 말씀을 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 의견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저 스스로는 아버님을 도와드린다고 생각했지 제가 동지적 입장에서 했다든가 그래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씩 상도동에 가서 김 전대통령과 현재와 미래에 대한 말씀을 나눈다고 들었는데 두 분이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눕니까?

    “아버님과 일상적인 얘기만 할 수는 없겠죠. 사실 퇴임 이후에도 아버님이 현실정치에 많은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요.”

    ―훈수를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잘 적으셔야 합니다. 저 자신도 그런 차원에서 아버님과 말씀을 나누려고 애를 쓰죠. 사실 아버님은 우리 가족이 상도동에 가면 아이들 재롱 떠는 것 보시면 제일 좋아하신단 말이예요. 그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시길 참 바라는데, 어른께서 심각한 현실정치에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그런 현실이 안타깝다는 얘기죠.”

    현철씨의 얘기처럼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권을 향한 훈수의 강도가 최근 들어 높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YS는 최근 공개석상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마저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타깃인지 불분명하다. 여야 정치권 모두를 향한 무차별적 비판의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자 현철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납득이 가는데요. 그 얘기는 제가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일감으로 느끼는 것은 어른께서 김대중 대통령이나 이회창 총재나 이런 분들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갖는 감정의 기복을 그때그때 나타내시는 것 아닐까요. 애증(愛憎)이라고 할까요. 김대통령 하고야 과거 민주화투쟁 당시에 생사를 함께 하면서까지 투쟁을 해오셨던 사이고, 이회창 총재야 어른께서 정권 재창출하는데 있어, 문민정부 시절에 가장 요직에 임명함으로 해서 가까이 중용했던 분 아닙니까.”

    ―현정권의 국정운영 가운데 남북문제 언론사 세무조사문제, 교육정책, 의료보험통합을 비롯한 각종 정책 등 현정권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해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낍니까?

    “그 문제는 아직은 제가 직접 언급할 상황은 아니라 생각되네요. 그것과 연관지어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숨을 돌린 뒤 현철씨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DJ정권을 향한 그간의 응어리를 토해내듯 길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이 정부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습니다. 이 정권은 소수정권 아닙니까. JP와 연립해서 간신히 승리했는데요, 그렇다면 제일 먼저 국민적인 지지를 넓혀야 했습니다.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가장 가깝게 손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부터 손을 잡고 갔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현정부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구태여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건국’ 얘기까지 나오고 말이죠.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는데 현실적으로는 힘이 없단 말이예요. 그러면 근처 세력과 힘을 모아 같이 가야하는데 그쪽을 배척했어요. 저희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는 명실공히 민간정부란 말입니다. 문민정부가 내건 기치가 뭡니까? 변화와 개혁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내건 게 뭡니까? 개혁 아닙니까? 그렇다면 문민정부가 했던 개혁가운데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도 있고 또 보완을 해야 될 것도 있고 계속 추진해야할 미완의 과제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문민정부가 ‘개혁 1기’ 정부라면 국민의 정부는 ‘개혁 2기’ 정부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중단없이 계속 가야 한다고 봅니다. 80년 초부터 90년대 초까지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정부 때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었어요. 그때 구조조정 하느라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금융개혁을 해치웠단 말입니다. 당시 미국은 공적자금을 넣어서 성공적으로 회수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런 식으로 정리해야 할 개혁과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습니다. 현정권은 소수정권이고 흔히 말하는 지역적으로 소외된 정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과감하게 화합으로 갔다면 국민적 호응을 얻지 않았을까, 그러면 지금과 같은 이런 사분오열(四分五裂)하는 갈등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노재헌의 좌절 가슴 아파”

    ―지금은 늦었다고 보십니까?

    “다 끝난 것 아닙니까? 내년이 대선인데요. 최근 들어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현재의 단임은 과거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절, 다시는 독재를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야합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 아닙니까? 지금 5년 단임 갖고는 그야말로 첫해는 시작하느라 시간 보내고 마지막 해는 선거하느라, 마무리하느라 보내면 실제 3년인데, 3년조차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것 같아요.”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해 현철씨는 직답을 피해갔다. 그러나 최근 정가의 쟁점 가운데 현철씨가 유난히 관심을 쏟을 만한 뉴스가 있다. 바로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과 관련된 각종 의혹들이 그것. 1997년 2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현철씨는 “누구보다 김홍일 의원은 저를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어렵게 정치에 입문했으니 우리 나라의 정치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현철씨의 바람과 반대로 김홍일 의원을 둘러싼 소문은 날이 갈수록 사납기만 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일 의원이 최근 뉴스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각종 게이트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무성한데 왜 이런 식의 논란이 벌어지는 걸까요?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 얘기를 지금 언론을 통해 처음 얘기해보게 되는데요, 이것도 제가 언급할 문제는 아니다만, 제가 그분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아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한때는 대통령 아들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분도 국회의원 신분이지만 대통령 아들이기 때문에 느끼는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동병상련이 되겠죠. 그러나 말이 나왔으니 차제에 그 문제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제도로 될 문제는 아니예요. 대통령 가족 문제를 어떻게 제도화하겠어요. 적어도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가들은 죽을 죄를 짓지 않는 한 대통령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만큼 대통령의 가족에 대해 관심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나도 한때 새로운 대통령 가족문화를 만들어보려는 의욕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동안 노태우 전대통령의 자제 재헌씨, 그 친구는 내 경복고 후배이기도 해서 아주 격이 없이 잘 지냈어요. 그런데 민자당의 위원장 맡았다가 좌절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가슴아프게 생각해요. 지금 현직에 있는 대통령 가족을 언급하고, 대통령 후보가 될 사람의 가족 얘기가 거론됐거나 거론될 예정인데 이건 한마디로 더티게임이예요. 그렇게 해서 정권 잡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어요. 부메랑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대강 근황에 대한 질문이 끝난 뒤 곧바로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테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1998년의 납치 미수사건에 이어 개인적으로 두번째 겪는 사건이기에 그가 느꼈을 심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듯 싶었다.

    ―2000년 10월인가요. 미국에서 괴한들에게 납치테러를 당할 뻔한 적이 있다는 뒤늦은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저하고 테러하고는 관계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조용히 살고 있는 미국에서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사건은 미스터리예요. 여러 가지 놀랄 만한 일들도 제보를 듣고 있기는 한데요, 아무튼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예요.”

    다음은 현철씨가 말하는 납치테러사건의 줄거리. 아침 나절이었다. 차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현철씨가 막 현관문을 들어설 때 그를 뒤쫓아 괴한들이 집으로 몰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한 두명 정도인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 7∼8명으로 늘어나 있었다고 한다. 바깥에는 이들이 타고온 밴 차량 두 대가 서있었다.

    순간 현철씨는 ‘이놈들이 나를 납치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일단 이 위기를 빨리 외부에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마침 현철씨가 앉은 자리에서 뒷편에는 블라인드에 가려진 쪽문이 있었는데 쏜살같이 그 문으로 빠져 나와 옆집으로 달려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러자 괴한들은 그들이 타고온 차로 도망가버렸다.

    “7∼8명의 괴한 모두가 특정지역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한국에서 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난 뒤 서울 상도동에도 전화를 했습니다. 상도동에서는 난리가 났죠.”

    김 전대통령은 긴급히 민주계 의원들 10여명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당장 정치쟁점으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철씨가 급하게 제동을 걸었다.

    “너무 놀라서 일단 서울에 알려드리기는 했지만 너무 빠르게 판단하시는 느낌이었고, 우선 범인을 잡아야 할 것 아닙니까. 심증은 가는데 확실히 하려면 범인을 잡아 자백을 받는 절차가 있어야지, 범인은 달아났는데 너무 정치적으로 몰고 가다가는 역공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제가 자제해 달라고 한 거죠. 저는 경찰이 곧 잡을 줄 알았어요. 그래봤자 그자들이 어디로 가나 싶었어요. 차량 번호는 못 봤지만 차종이나 차 색깔, 그 밖의 인상착의 등을 경찰에 얘기했습니다. 경찰도 곧 잡을 것처럼 말하길래 전모가 드러날 줄 알았어요.”

    ―그럼 현재도 미제사건인가요.

    “아직 그쪽 경찰에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긴 한데, 사건 이후 보름 뒤에 묘한 얘기를 들었거든요. 확인이 안됐으니까 공개는 않겠지만 놀랄만한 얘기들을 많이 듣고 있어요.”

    ―어떤 얘기인지 궁금증이 더 커집니다.

    “처음엔 저도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그들이 왜 들어왔을까. 납치를 하려면 한국에서 하면 되는데 미국에까지 온 이유가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그런데 한 보름 뒤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자료’를 가지러 우리 집에 왔다는 겁니다. 괴한은 모두 8명인데 두 사람이 한국에서 왔고 6명은 현지 안내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안내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지금 도피 중인데 제보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건 결국 간단한 사건은 아니다, 단순 강도 사건도 아니라는 거예요.”

    ―납치사건은 아니고 그러면 자료를 탈취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겁니까?

    “납치는 맞아요. 자기네들끼리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는 얘기가 나오던데요. 그런데 끔찍한 얘기까지 들었어요. 하여간 실패할 경우 살해 얘기까지 나오고…, 그 제보자 얘기가 자기는 한국에서 온 두 사람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듣고 알게 됐다는 겁니다. 납치에 실패한 뒤 두 사람은 LA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온 두 사람이 일반인입니까? 아니면 국가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제보자도 믿을만 한지 확인해봐야하는 상태니까요. 그러나 너무나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사건 직후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이예요. 그런데 지인(知人)을 통해서 앞의 제보자가 제보를 해왔는데 그 지인은 내가 테러를 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제보자 한테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놀래서 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미국에서 교민과 교류를 거의 안했거든요. 그런데도 우리집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들어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현철씨 측은 가급적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포부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러나 그와 만난 자리에서 1997년의 대소동에 대한 김현철씨의 현재 심경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구속 당시의 심경은 어떠했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것은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아들을 구속시켰겠느냐’하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입니다. 검찰조사에서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난 한보의 몸통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점도 속이 상합니다. 군자 화이부동(君子 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로 군자는 부화뇌동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따지고 보면 1997년에 개인적으로 엄청난 실패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실패를 모르면 성공을 못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아들의 구속을 직접 지시했다고 회고했는데 그 일로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까.

    “검찰에서 구속이 결정되고 구치소로 향하는 저에게 한 기자가 ‘김현철씨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고 툭 묻는 거예요. 또 ‘아버지한테 한마디 하십쇼’ 하고 물어봅디다. 그 기자한테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고 되묻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구속시키려고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심정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이는 영조와 비슷하지 않았겠습니까. 1997년 5월15일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 아침 아버님이 전화로 ‘미안하다.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현철씨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얼굴도 붉게 달아 올랐다.

    “당시 야당의원들이 리베이트로 2000억원을 받았느니 하고 떠들었던 것 기억 납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얘길 갖고 검찰에선 조사하고…. 본인들은 알 겁니다. 근거 없이 나를 몰아세웠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후 그런 얘기 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언론에 의해서 여론재판 식으로 가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더라고요. 내 목소리를 낼 곳은 한 군데도 없고 언론과 정치권에선 ‘죽일 놈’ 이라고 몰아부치고, 한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별건으로 조사한다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졌습니다.”

    그는 “당시 아버님의 주변 참모들은 한결같이 아버님의 원만한 국정운영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나의 구속을 진언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이 안간다”고도 말했다.

    현철씨는 “그 당시에 나는 검찰의 위상을 세우기 위한 희생양이었다”고도 말했다.

    “검찰에서 조사 받고 있는데 검사가 이러는 겁니다. ‘대통령께 감사드린다. 대통령께서 검찰의 위상을 세워줬다’ 그래서 제가 ‘언제부터 당신들이 검찰위상을 생각했느냐. 정권의 눈치만 봐왔던 사람들이었지. 이 문제로 만약에 정권에 위기가 오거나 국가 위기가 오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게 무슨 검찰의 위상을 세우는 거냐’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기가 막힌 것은 제가 하도 버티니까 검찰에서 ‘딜(deal)’을 하자는 거예요. 조그만 거라도 하나 걸어 가지고 (감옥에) 들어가면 어떻겠느냐고 검찰 쪽에서 그래요. 작은 건이든 큰 건이든 죄가 있으면 들어가는 것이지 그게 타협의 대상은 아니잖아요. 기가 막히게 구속되었지만 그후 아버님이 좀 힘을 내셨으면 현재 이런 험한 꼴은 보지 않았을 텐데 하는 회한은 있습니다.”

    ―구속 뒤 가족들의 고통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무슨 독립운동이나 민주화투쟁하다 감옥간 것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파렴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갔으니 이 얘기를 어린 자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집사람은 아이들에게 아빠는 할아버지를 돕다가 나쁜 사람들이 아빠를 미워해서 억울하게 들어갔으니 걱정마라’ 고 얘기했지만 아이들은 ‘그 나쁜 사람들이 누구냐. 이름을 대달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가만 안두겠다고 흥분하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대통령인데 왜 아빠가 감옥에 들어가는걸 막지 못했느냐’고 따지는 녀석도 있었어요. 학교에서 ‘너희 아빠 감옥갔다’고 놀리는 아이들과 싸웠다는 얘기를 들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김현철씨를 얘기할 때 한때 늘 함께 등장하던 인물이 있다. 박태중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박씨는 현철씨의 중학 동창으로 현철씨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도왔던 사람이다. 박씨는 지난 1997년 현철씨와는 별도로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 1999년 출감했다.

    ―박태중씨와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 친구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 친구 만나지도 않습니다. 그 친구도 결국은 저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거죠. 그걸 그 친구 탓으로 돌리면 안되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저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제가 그 친구에 대해 몰랐던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그 친구는 저한테 해야 할 말이 많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박태중이 출감한 1999년 이후로는 못보게 됐어요

    ―박태중씨가 1997년 2월 황장엽씨의 망명과정에 개입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황씨 망명 사실을 사전에 인지했다고 봐도 됩니까.

    “그건 사실이 아닐 뿐더러 저도 그 친구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입니다.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됐는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 친구를 안 만나게 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제가 그 친구가 하고 다니는 일에 대해 몰랐던 것이 너무 많았어요 여러 가지 일을 당하다 보니까 그런 큰 일도 그 때는 그냥 넘어 갔습니다. 저도 사실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남북문제, 어른과 상의한 적 없어

    ―김영삼 대통령 취임 초부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애를 쓰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1995년 북경 쌀회담 등에서 깊숙이 관여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저는 어른하고 그런 얘기 안합니다. 북한과의 문제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 어른과 깊게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습니다.”

    ―한약업사 로비사건 보도와 관련, 한겨레신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강제취하했죠. 어른이 사무실 폐쇄하고 소송도 취하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절대로 취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런 상황에 내몰렸고 어른도 취하하라고 하는데….”

    ―’하고싶은 이야기 듣고싶은 이야기’에는 신문사가 문을 닫더라도 절대로 소송취하 안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책을 만든 동기가 바로 한겨레 사건 때문입니다. 한겨레가 매일 저에 대한 말들을 쏟아내는데 저도 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어디다 할 데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책을 내게 된 겁니다.”

    김현철씨에게는 몇차례 정치인으로 변신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13대, 14대 두 번의 총선때 아버지로부터 강력한 출마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당시 출마해서 현역의원이 됐다면 단언할 수 없지만 그의 처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무관의 문민황태자’가 아니라 또 다른 김현철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의 후광아래 쉽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를 뿌리친 지금, 그는 따가운 시선 속에 혹독한 홀로서기의 시험대로 나서고 있다.

    ―정치를 하고 싶다는 의욕을 꾸준히 밝혔습니다. 더구나 2002년에는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가 있고 8월에는 보궐선거가 있어 전국단위의 선거가 이어질 전망인데 정치인으로서 포부와 꿈은 과거와 변함이 없습니까?

    “정치는 해야죠. 정치는 반드시 할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명예회복이나 문민정부의 회복을 위해서 정치를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구요. 사실 아무래도 어른께서 거의 한평생 정치를 해오셨는데 제가 옆에서 늘 지켜보면서 느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부분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정치인들이 다 출사표를 던질 때 포부를 밝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갖고 있었던 과거의 이미지, 물론 왜곡된 이미지도 많습니다만 그런 것들을 과거로 돌아가서 일일이 해명하거나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것을 통해 (국민들에게) 보여드리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첫단계로 강단에 서게 됐는데 사실 저는 강단에 서기 전에 연단에 먼저 설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조금 못참겠습니까? 과거 이미지를 불식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정치라는 게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세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적 지지를 얻어나가 마침내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인데 어떤 정치세력과 함께 하겠다는 계획은 갖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죠. 지역적인 기반을 정파적 이해관계로 발전시켜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출발하는 과정에서 지역적인 기반을 갖고 간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부시가(家)가 그렇고 일본의 경우 다나카 외상이 상당히 기인인 것처럼 얘기됩니다만 다나카 전총리의 따님 아닙니까? 본인은 자기 개인으로 봐달라고 얘기한다고 하지만 정치적 기반을 애써 외면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제 주변에도 파격적으로 수도권에서 출마하는 게 어떻겠냐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라는 게 어차피 현실 아닙니까.”

    ―15대 때는 거제도에 출마할 뜻이 있었는데 좌절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13대 총선 때인 1988년에는 어른께서 대통령선거에 실패하시고 민주당이 제2야당이 되는 등 어려움도 많이 겪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어른께서 저에게 13대 총선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하셨는데 거절했습니다. 당시 출마 예상지역구가 어른과 오랫동안 정치를 해왔던 분의 지역구여서 저로서는 선택이 어렵더라고요.”

    ―당시도 거제였습니까?

    “거제는 아니었고 부산지역이었습니다. 1992년 총선 때도 어른께서 ‘기회가 늘 있는 게 아니다. 출마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김 전대통령이 ‘선견지명’이 있으셨네요.

    “사실 그 때도 고민을 했어요. 결론은 아버님이 원하시는 목표(대통령당선)를 달성한 이후에 내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문민정부가 등장하고 난 다음에 출마하려니까 잘 안되더라고요. 솔직히 15대 총선 때는 정말 출마하고 싶었어요. 그 때는 제 스스로 출마를 원해 말씀을 드렸더니 어른께서 고민이 많이 되셨던 모양이예요. 허허.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출마한다는 점이 제일 걸리셨던 겁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계신데 자식이 무리하게 고집을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포기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꿈이 좌절된 얘기를 하던 중, 현철씨는 김 전대통령이 눈물을 흘린 얘기를 들려주었다.

    “총선 출마 얘기를 하다보면 유학 얘기와 맞물리는데요. 이번에 미국에 객원교수로 다녀온 것은 물론 제 스스로 선택해서 다녀온 유학입니다만, 그전에는 자발적으로 유학을 검토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1991년 3당통합 직후 딱 한번 심각하게 유학을 고려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어른께서 민자당 대표시절이었습니다. 대선 후보가 되기 전이니까 내부에서 상당히 아버님을 흔들 때 아닙니까. 그때도 언론에 1997년 만큼은 아니지만 제 얘기에 나오고 그랬어요. 합당 과정 등에서 제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처럼 알려져 특히 민정계 쪽에서 나를 경원시한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나왔죠. 그때만 해도 그런 얘기가 신경이 쓰였어요. 그것이 어른께 누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른한테 상의도 하지 않고 학교를 알아보러 미국을 다녀왔어요. 돌아와서 어른께 말씀을 드렸더니 정말 의외의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어른께서는 가족들 앞에서도 한번도 우시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신데 약한 모습을 보이시더라구요. ‘자식이 아버지를 버리고 왜 떠나려고 하느냐’는 거예요.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는데 만약에 주변의 말 때문에 유학을 간다면, 자식이 아버지 돕는 게 당연한 거지 무슨 소리 하는 거냐’ 하면서 우시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유학이라는 단어를 제 머리 속에서 싹 지워버렸어요.”

    ―김 전대통령이 의회정치주의자이고, 정당정치도 오래했습니다. 정치인으로 첫출발을 할 정당으로 어느 당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제 거취에 대해 어른께서 먼저 운을 떼서 말한 적은 없지만 어른께서도 정당정치를 권하실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정당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고요. 지금으로선 정당을 선택하는 게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2004년에는 정치환경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나가려고 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있으니까 그때 상황에 맞춰서 정당을 선택해야 되지 않을까요.

    ―강의를 하게 될 경남대가 있는 선거구가 공교롭게도 김호일(金浩一) 의원 지역구에 있더군요. 그런데 김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 계류중이어서 보궐선거 실시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하하. 미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대학도 마음대로 못 정하겠어요. 이렇게 어려워서야 진짜 오비이락(烏飛梨落)이더라고요. 이런 얘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경남대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마산에는 두 지역구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는 강삼재 의원 지역구고. 그런 얘기가 돈다길래 제가 ‘거기 김호일 의원 지역구 아니지’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맞다고 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2004년 이전에는 어떤 형태의 선출직에도 별 관심이 없어요. 우선 강단에 서서 저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는데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기회가 왔을 때, 저 스스로 노력한 게 아니라 그런 기회가 온다면 마다하지는 않겠어요. 바꿔 말하면 제가 나가고자 하는 지역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든가 그렇다면 생각해 봐야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 출마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지역은 어느 쪽입니까.

    “아직 결정된 건 없어요. 한 두 군데 정도를 생각하는데, 뭐 흔히들 아까 제가 고향(경남 거제) 얘기했으니까 그거는 아실 테고, 그렇지 않으면 부산·경남지역의 한곳이 되겠죠.”

    ―한때 현철씨의 측근이던 김무성 의원의 경우 현재 이회창 총재의 측근으로 꼽히고 있지 않습니까. 김무성 의원과 김기섭, 이원종씨 등을 가리켜 문민정부의 ‘신3인방’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만나십니까.

    “김의원이야 총재비서실장도 지내고 있으니까 더 그렇겠죠. 그 분의 정치적 선택이니까 제가 왈가왈부할 성격이 아닙니다. 세 분 다 저하고 가까웠죠. 그 중에서 김기섭씨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분은 솔직히 근황을 잘 몰라요. 97년 이후로 그분들과 교류가 없으니까요.”

    ―한때 동지였다면 어려울 때 돕는 게 도리가 아닌가요.

    “그건 그분들에게 여쭤보시고요. 저로서도 그분들하고 그 이전에 많은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인지상정이라 조금 섭섭하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또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분들도 저를 만날 만한 정치적인 이슈가 없다고 볼 수 있겠죠. 김기섭 차장님은 자주 뵙습니다. 그분은 고생도 많이 했지 않았습니까. 가끔 식사도 하고 교분을 계속 쌓고 있죠. 다른 분들은 연락을 안주시네요.(웃음) 많이 바쁘신 모양이예요.”

    이회창 총재, 많은 경험 얻었을 것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김전대통령이 1994년 이회창씨를 총리로 기용했지만 넉 달만에 안좋은 일로 이총리를 해임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996년 1월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전국구 1번으로 이회창씨를 영입하고, 1997년에는 당대표에 임명 되거든요. 1994년에 안 좋게 헤어진 분을 왜 다시 불러들였을까요.

    “그것은 어른께서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거겠죠.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른께 이런 말씀을 드린 기억은 있어요. 제가 선거를 치뤄 봤는데, 큰 선거에는 사이클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1995년 지방선거 1996년 총선거 1997년 대선 이렇게 매년 선거가 있지 않았습니까. 아시다시피 1995년 지방선거에선 우리가 참패했고요. 1996년 총선에선 신승이라고 할까? 다들 참패를 예상했는데 이겼지요. 그후 결과적으로 대선에서 실패했다고요. 근데 저는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어른께 이런 선거사이클에 대해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나요. 선거에서 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른께서는 1995년에 그렇게 졌으니까 1996년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셨죠. 그러나 제가 일부러 지자는 것은 아니고 1997년 대선을 위해서는 1996년 선거를 전술적으로 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은 있어요. 무리하지 말자는 의미였죠.”

    ―’이회창씨를 적극 영입하자’는 의견을 주신 건 아니고요.

    “그건 이 자리에서 얘기하기 곤란한데요. 왜냐하면 현재 후보로 뛸 분이고, 그 문제는 이 자리에서 얘기를 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어른께서 그 당시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그분(이총재)이 오셨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총체적으로 개혁적 인사들을 공천해서 전국적으로 승리했다, 이거 아닙니까. 큰 정치를 지향하시는 분으로서 불미스럽게 나간 분을 수용한다는 측면도 고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회창씨가 당대표가 된 뒤 본격적인 대선국면에 접어들면서 경북 포항에서 YS인형을 몽둥이로 때리는 등 극단적인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거든요. 선거에 이기기 위해 불가피하게 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문제는 어른께서 하도 코멘트를 많이 하셨으니까 제가 덧붙여 말하기는 그렇고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어른께서는 DJ와 이회창 총재에 나름대로 애증을 갖고 계십니다. 어른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지시 않았습니까. 그분(이총재)도 정치를 오래 하신 분이 아니니까 주변의 얘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런 면에서 그분도 많은 경험을 얻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총재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상도동을 포용하려는 자세는 아닌 것 같아요.

    “1997년의 경험을 그야말로 반면교사로 생각하고 있다면 뭔가 여러 가지를 느끼겠죠.”

    ―그러니까 1997년과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군요.

    “글쎄요.”

    ―이인제 고문의 경우는 그래도 YS를 찾아뵙고 큰절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차별화를 위해 그런 것 같은데요, 이 기회에 이런 말씀을 저도 한번 드리고 싶네요. 내년 선거가 분명히 쟁점은 있을 텐데, 3김정치와 세대교체가 주 이슈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그 동안 아버지를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는 독립선언, 즉 정치인으로 데뷔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버님과 상의했습니까.

    “우리는 자율적으로 합니다. 제가 스스로 먼저 결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향을 잡아주기는 하시죠. 유학도 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던 때를 제외하면 제 거취에 대해서 모두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어른은 알아서 하라는 쪽이에요.”

    3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내내 김현철씨는 한순간도 자세를 흩트러뜨리지 않고 진지하게 질문에 답했다. 때로는 격정과 회한이 스쳐갔지만 전체적으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하자 “다시 청문회에 온 것 같다”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김현철의 참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청문회 때 반복해서 ‘아버님과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어서 죄송합니다’란 소리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어쨌든 정권의 마무리 시점에 내 문제로 크게 물의를 빛게 된 것에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어요. 그때부터 제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인사개입 자체를 부인하고 싶지 않지만, 대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위에서는 다 지나간 얘기라고 합니다만, 내 뜻과 관계없이 한보사태의 몸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과거의 김현철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정치인 김현철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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