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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증권인생 24년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증권인생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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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광주일고 합격통지 받던 날 돌아가신 아버지
  • ● 21살부터 주식투자, 26세 때 사설 투자자문사 설립
  • ● ‘당대의 큰손’ 백할머니와의 만남
  • ● 2~3년 전부터 공무원들에 “벤처 투자 말라” 조언
  • ● “게이트는 금감원·검찰 조사 받은 기업에서 터진다”
  • ● “현상 너머 본질을 보라, 책 속에 답이 있다”
  • ● 미국 체류 진짜 목적은 투자 자문 해외 네트워크 구축
  • ● 올해 중 해외 펀드 출범…강력한 투자은행 설립이 목표
  • ● “정치권과 멀다고 불이익 받으면 한국은 희망 없는 나라”
  • ● “중국 활황 이면을 봐야, 고성장 유지 못하면 위험”
  • ● “복지재단에 75억원 기증 후 이틀 잠 못 자”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초유의 국가위기 상황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주식시장을 포함한 금융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중 각종 ‘게이트’나 주가조작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이전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는 김정태 국민은행장과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44) 정도일 것이다.

김행장이 현재 한국 금융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영인이라면, 박회장은 미래 자본시장에 어떤 식으로든 큰 변화를 몰고 올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1997년, 11년간의 증권사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자의 길로 들어선 박회장은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두세 걸음 앞선 미래 분석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놀라운 성공신화를 창조했다. 코스닥 열풍이 몰아치기 2년여 전, 일찌감치 벤처기업에 눈을 돌려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1998년 12월에는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를 도입해 주식시장에 간접투자 돌풍을 일으켰다. 1999년 12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면서는 업계의 비난과 우려를 뚫고 파격적인 위탁수수료 인하를 단행, 단숨에 약정 순위 6~7위 증권사로 도약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2000년 3월, 박회장은 또 한번의 ‘파격’을 시도한다. 개인 성과급 75억원을 쾌척, ‘박현주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박회장은 재단이사장은 물론 이사진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음으로써 재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박현주가 떴다”


그런 박회장이 2001년 2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오르자 증권업계는 또 한번 술렁거렸다. 같은 해 11월, 본업에 복귀하면서는 “박현주가 떴으니 증시도 뜰 것”이라는 소문이 시장을 휩쓸었다. 이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업계를 넘어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박회장에 대한 업계의 평가는 유보적이다.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척자’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나,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해온 까닭에 그 미래상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너무 앞서간다”거나 “돈만 아는 투기꾼”이라는 비난도 있다. “뒤에 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추측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가 1970년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그랬듯 2000년대 샐러리맨의 우상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하우를 배우고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최고의 투자전문가라는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박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해 왔다.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시도했지만 쉬 성사되지 않았다. 박회장 측은 그 이유로 “미래에셋은 아직 갈 길이 먼 회사다. 순이익이 1000억원을 넘어서고 해외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다음 제대로 하고 싶다. 신생사인 미래에셋에 대한 업계 일각의 불편한 시각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미래에셋은 수많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발전해 온 회사다. 창업자만 부각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도 밝혔다.

정치권과 관련한 몇몇 악성 루머 때문에 예민해진 측면도 없지 않았다. 미래에셋의 한 임원은 “누군가에게 당신 도둑질 한 것 아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인격 모독 아닌가. 우리는 그런 모욕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인터뷰 성사가 불투명한 까닭에 먼저 증권업계와 박회장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접 취재에 들어갔다. 그 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박회장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친소(親疎) 관계를 떠나 박회장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가 시장경제 원칙에 반하는 일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런저런 소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조차 “당신에게 여유 자금이 있다면 박현주에게 맡기겠느냐”는 질문에는 대체로 “그렇다”고 답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지난 2월10일, 마침내 인터뷰가 성사됐다. 박회장이 미국출장 중이었던 까닭에 국제전화를 이용했다. 완강한 태도로 인터뷰를 고사해온 박회장이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후에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 인터뷰는 미국 현지시간으로 새벽 1시부터 5시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3일 후 같은 시각, 다시 1시간 동안 계속됐다.

박회장은 오랜 통화에서 개인사는 물론 기업관, 정치관, 증시전망, 한국 자본시장의 미래 등에 대해 거침없는 답변을 토해냈다. 미래에셋의 비전도 제시했는데, 올해 안에 해외 펀드를 출범시킬 예정이며 투자은행 설립을 계획중인 점, 해외 투자자문 네트워크 결성, 지분의 30% 한도 내에서 해외 투자를 받기 위해 협상 중이라는 소식 등은 금융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었다. 박회장은 “나에게는 꿈이 있다. 우리 자본시장의 큰 흐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만약 내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회사에 문제가 생긴다면 한국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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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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