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막사이사이상 받은 법륜 스님

“부패한 기복신앙, 마약보다 해롭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com

    입력2004-09-06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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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륜(法輪) 스님이 벌이는 기아·질병·문맹 퇴치 운동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다. 1994년부터 인도 북부의 둥게스와리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세워 천민 계급의 자녀들에게 유치원과 초·중등 교육을 시켜주고 병원을 지어 무료 진료를 해주고 있다.

    법륜 스님은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집행위원장을 맡아 기독교 천주교와 연대해 북한주민 돕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제 기아·질병·문맹 퇴치기구인 JTS(Join Together Society)를 설립해 북한의 나진·선봉 지구에서 어린이들에게 빵을 공급하고, ‘좋은벗들’이라는 법인을 통해 30만명으로 추정되는 재중국 북한 난민을 돕고 있다.

    사회민주화 운동에 진력하던 법륜 스님은 1988년경부터 방향을 틀어 환경운동과 빈민돕기 운동에 나섰다. 그는 지금도 법륜이라는 법명보다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조계종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이끌던 최석호 지도법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불교에 입문한 것은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다. 경주 분황사에서 숙식하며 절에서는 승복을 입고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었다. 1991년 38세에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비구계를 받았다. 실제로 절에 들어온 것은 열여섯 살 무렵이니 늦깎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가 창립한 정토회는 불교계에서 환경운동에 가장 먼저 눈을 뜬 조직이다. 서울 서초동 정토회 사무실의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고 인도·태국 식으로 비데를 이용해 뒷물을 한다.

    법륜 스님이 8월31일 인도 빈민과 북한 난민을 도운 공로로 막사이사이 상(평화 및 국제 이해부문)을 받는다. 필리핀의 전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막사이사이상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 있고 영광스러운 상이다.



    ―큰 상을 받아 기쁘겠어요.

    “개인적으로 영예이지만 출가한 승려로서 상을 받자니 부끄럽기도 합니다. 아직 내 마음속에서 완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쑥스럽습니다. 북한 동포 돕기는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했을 뿐입니다.”

    막사이사이상 선정 이유서에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 ‘인간미가 흐르는 새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가 들어 있다. 그가 추구하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제까지는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자연을 얼마나 정복했냐에 따라 사회의 발전 정도를 평가했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정복 대상이 되면서부터 환경 파괴가 시작됩니다. 정토회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삶의 토대로 파악합니다. 인간과 자연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야 할 관계라는 관점에서 환경운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간미가 흐르는 새로운 사회’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딱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어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관계는 경쟁 또는 적대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좋은 벗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을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선정위원회에서 ‘인간미가 흐르는 새로운 사회’라고 이름 붙인 것 같아요.”

    상금은 5만달러(6000만원)로 많은 편은 아니다. 법륜 스님은 상금 전액을 북한을 돕는 단체에 보태줄 생각이라고 밝혔다.

    ―불교계에서는 법륜 스님의 승적을 두고 논란이 있더군요.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한 것은 언제입니까.

    “중학교 3학년 때 불교학생회에 나가면서 불교를 알기 시작했고, 처음 출가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과학자가 되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모교인 경주고등학교 바로 옆에 분황사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불교학생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도문 스님을 뵙고 그 분을 통해 새로운 불교를 배우게 됐어요.

    독립운동 33인 가운데 한 분이 백용성 스님입니다. 조선 말기 서울 도성에 승려 출입을 금지하던 제도가 폐지되자, 맨 먼저 종로에 대각사라는 포교당을 내신 분입니다. 경전을 한글로 처음 번역한 분입니다. 위대한 선각자시죠. 도문 스님은 백용성 스님의 제자의 제자이십니다.

    그래서인지 도문 스님은 민족의식이 강렬하셨습니다. 도문 스님이 가르치는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제가 추구하던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부합했습니다. 그 분을 통해 불교에 심취하게 됐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분황사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은사 스님은 그때를 내가 출가한 시기로 잡고 계시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절사람이 되었지만 형식을 갖춰서 승려가 된 것은 아니므로 출가라고 하지 않고 입문이라는 표현을 썼다. 절에 들어온 지 2년 뒤부터 불교정신을 사회에서 실천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농촌 출신인 법륜 스님은 산업화 시대를 맞아 붕괴돼 가는 농촌에 애정이 많았다. 20대 초반에는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농민 교육을 받았다. 청소년을 위한 불교 교육에 주력하다가 1983년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사회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출가할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출가합니까. 경전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자기 입으로 법문할 때는 뭐라고 합니까. 실천과 양심 사이에 약간의 갭은 있을 수 있지만, 그 갭을 최대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해인사에서 43m짜리 불상을 세운다고 해서 논란이 일다가, 33m로 축소하기로 문화재청과 합의했다고 해요.

    “절에서 자기 돈으로 불상을 만들겠다 하는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입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 그런 돈이 있다면 북한돕기에 쓰고 싶습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으로 이름을 내야지, 대형 불상으로 이름이 나서는 안됩니다. 새로 만든 조그마한 절이라면 이름을 높이기 위해 대형 상징물이 필요하겠지만, 해인사는 가야산과 팔만대장경이라는 문화유산이 있지 않습니까. 불상 만든다는 것은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칭찬할 일도 아닌 것 같아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빌딩을 날려버린 비행기 테러는 알 카에다라는 이슬람교 원리주의자들이 일으켰다고 본다. 유고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을 강간하고 학살하는 전쟁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종교간 갈등이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단군상의 목이 잘린다든지, 심산유곡의 불상이 훼손되는 사건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쓰레기통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

    ―자기의 종교만이 절대 진리라고 믿는 원리주의 종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리석고 불쌍하죠. 그것은 개방된 사회에서는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사이비 신앙입니다. 다른 종교가 그렇더라도 불교인들이 절대 그런 것에 대응해 닮아가서는 안됩니다.”

    ―조계종 총무원장의 임기가 다가오면 관행처럼 승려들 간에 각목 전투가 벌어집니다. 불자가 아닌 사람도 안타까워요.

    “백년 해로하겠다고 약속한 부부도 3년을 못 살고 이혼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스님들도 출가할 때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크게 보면 그것도 사회현상입니다. 정치인들이 싸우는 거나 승려들이 싸우는 거나 다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기독교 천주교와 함께 활동하시는데, 종교간의 화해와 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교는 나쁘게 말하면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에고(ego)의 극치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다 버리고 매달리지 않습니까. 종교인이 그것을 놔버리면 다른 길이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들에게 그것을 놔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리 문제를 놓고 여러 종교가 대화하면 성과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종교간 대화는 현안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환경이라는 현안을 놓고 토론하면 금방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높냐, 부처님이 높냐를 놓고 따지면 밤새도록 얘기해도 끝이 나지 않지만, 북한돕기를 놓고 대화하면 공통점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돕기를 하면서 많은 기독교인 천주교인과 친구가 됐습니다.”

    정토회관의 책상에 놓여 있는 화분은 대개 재활용 화분이다. 화장실에는 화장지 대신에 태국제 비데를 쓴다.

    “봉암사에서 부목을 할 때 법당 스님들 방청소를 해주었는데, 쓰레기통을 비워보면 이 사람이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수박을 깨끗이 먹는 사람은 착실히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가운데만 파먹고 버리는 사람은 정신 상태도 그렇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큰 싸움 나겠구나’하는 예측까지도 하게 됩니다.

    정토회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조사해봤더니 엄청난 낭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도 쓰레기 없이 살아보자는 운동을 폈습니다. 그랬더니 쓰레기가 100ℓ 봉지 두 개로 줄고, 몇 달 지나니 열흘에 한 봉지로 줄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줄지 않기에 쓰레기를 전부 꺼내서 성상을 분류해봤어요. 도대체 무슨 쓰레기 때문인가 살펴보니 대부분 화장실의 휴지였어요.

    80명이 오줌 누고 똥 누니 화장지 쓰레기가 많은 겁니다. 인도에서는 뒷물을 하잖습니까. 그 경험을 가지고 뒷물을 시도했는데 불편해서 태국에 가서 뒷물 비데를 사왔지요. 그걸 사용하면 샤워하고 나온 것처럼 깨끗해요.

    화장지 다음으로는 여성 생리대가 많았습니다. 여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강요하지는 않지만, 할 수 있으면 면 생리대를 쓰라고 권장합니다. 여직원 가운데 절반은 면 생리대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손수건 쓰기, 자기 컵 사용하기, 1회용품 없애기를 권장해 여기까지 왔는데, 나중에는 이 운동을 국민적인 운동으로 전개하려고 합니다.”

    ―평소 좌우명으로 삼는 법어를 소개해주겠습니까.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불행과 행복 다른 사람이 만든 것 아니네.’ 법구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스스로에게도 타이르고 다른 사람이 불교 문구를 적어달라고 하면 늘 이것을 적어줍니다.”

    ―어떤 이는 법륜 스님이 종단에 승적이 없다고 합니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은 공직에 나갈 수 없겠죠. 나는 조계종 스님입니다. 조계종에서 인정해주든 인정해주지 않든 부처님으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온 역사성을 갖는 승려입니다. 승려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고요.”

    ―왜 승적을 갖지 않았습니까.

    “행정적인 착오에 의한 것이지, 특별히 갈등이 있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불교 전통은 스승이 제자에게 수계를 해 스님이 됩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조계종은 합동수계라는 제도를 만들어 한자리에 모아서 수계를 주었습니다. 저는 합동수계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승적을 갖지 않으려고 참석하지 않은 게 아니었기에 승려가 된 뒤에 서류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합동수계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려해요. 조계종 법규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쪽에서는 지금이라도 합동수계에 참석하라고 하는데, 바쁘다 보니 한달 동안 진행되는 합동수계에 들어갈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행정 착오에 의한 시비는 조금 증폭되는 듯하더니 요즘은 괜찮아졌어요.”

    ―역대 스님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원효대사입니다. 그는 통불교, 즉 종파주의를 뛰어넘었습니다. 특수한 계층의 불교에서 모든 사람의 불교, 민중불교로 전환시킨 분입니다. 저는 원효스님을 이 땅에 오신 부처님 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근세에 와서는 백용성 스님을 존경합니다.

    스승의 스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불교적인 원칙과 계율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전통적인 수행도 철저히 했습니다. 그렇다고 산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민족운동에 참여했고, 경전 번역 작업을 했고, 거리 포교도 시작했습니다. 찬불가를 만들었습니다. 도시에 포교당을 내고 살았지만 세속에 물들지도 않았습니다. 이 분의 제자가 많습니다. 성철 스님도 그분 제자의 제자입니다.”

    ―살아계신 스님 중에서 존경할 만한 분은 없는가요.

    “지금은 거의 기동을 못하십니다만 봉암사 조실인 서암 스님을 존경합니다. 큰스님이시면서도 평생 대중 교통을 이용하시고, 시봉도 두지 않고 혼자 사십니다. 조그만 단체에서 법문을 해달라고 해도 응낙하시는 분입니다.”

    불가에서는 출가전 일에 대해 묻는 것은 큰 결례라고 한다. 그러나 인터뷰에서는 금기를 깰 수도 있다.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아버님(최창규)은 87세이십니다. 울산에 계신데 근방에 법회를 가면 찾아뵙습니다. 형이 셋이고 누나와 여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형제는 전부 종교가 달라요. 큰형은 가톨릭 농민운동을 했고 둘째형은 미국에 삽니다. 셋째형은 학생운동 농민운동을 했고 감옥생활도 오래했어요.”

    결례를 한 김에 조금 더 나가보기로 했다. 후학이 쓴 성철 스님 전기를 보면 고향에 버리고 온 부인과 자녀 이야기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정식으로 출가하기 전에 사랑하던 여인은 없었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21일간 단식을 했습니다. 신도 한 분께서 ‘어떻게 단식을 했느냐’고 묻기에 ‘어떻게 하기는? 밥을 안 먹었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배 안 고팠어요’라고 물어요. 21일간 단식한 사람 보고 배가 고프지 않았느냐고 묻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내가 빙긋이 웃었죠.”

    사랑해본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나도 단식을 하면 배가 고픈 사람’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느끼던 인간이라는 대답이리라. 더 이상 나가면, 기자도 ‘단식을 하니까 배가 고프더냐’고 묻는 바보가 된다.

    ―공양은 어떻게 합니까. 스님이니까 채식을 하시겠지만….

    “절에서는 완전한 채식입니다. 파 마늘도 쓰지 않습니다. 문경에서 수련할 때는 두 끼를 먹습니다. 인도 가면 오후 불식(不食)을 합니다. 거기 스님들은 점심 후에는 밥을 먹지 않거든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습니까.

    “특별히 싫어하는 음식이 없습니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 고기라고는 미꾸라지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시골 고향에 가면 어릴 때 좋아하던 추어탕을 구해줍니다. 그러면 맛있게 먹습니다.”

    ―추어탕은 채식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절대 채식주의자가 아니에요. 절에 있으면 채식을 하지만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고기를 건져내지는 않아요.”

    ―한 장소에서 이틀 자는 일이 없을 정도로 활동가로 알려졌는데….

    “한국에 있어도 오늘은 서울, 내일은 부산, 모레는 대구로 옮겨 다닙니다. 1년 중 7∼8개월은 해외에 있는 편이에요. 인도에 가장 오래 머무르지요. 중국에 자주 가고 미국과 독일에 법회하러 1년 서너 번씩 갑니다. 필리핀과 태국에도 교민들이 부르면 갑니다. 절 밖에서는 제가 사회운동을 하지만, 제 본업은 사람들을 수행시키고 상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람도 나오고 정토회의 활동에 쓸 보시도 얻습니다.”

    그가 미리 써놓은 막사이사이상 수상 연설문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나는 300만명이 죽고 1천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한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청년시절은 군사독재정권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데모로 투석과 최루탄 연기가 뒤섞인 서울에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나도 민주화운동에 동참해 고문을 당하면서 불 같은 적개심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적개심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중략)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개인이나 집단 종교 등으로 인해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평화는 먼저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 연관된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간관계가 경쟁하고 적대하는 ‘죽임’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양성 속에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살림’의 관계로 전환해야 합니다.”

    1979년 그는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에 자금을 댔다는 이유로 경찰 대공분실에 잡혀가 며칠 동안 두들겨 맞고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불교계에서 처음으로 10·27 법난의 부당성을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온 인물이다. 1980년 10월27일 새벽 전국의 사찰에 총검을 든 군인들이 난입해 100여 명이 넘는 승려들을 체포했다. 얼마 후 신문에는 승려들의 축첩과 축재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00여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영장도 없이 잡혀가 두들겨 맞고 삼청교육대에서 깡패 범법자들과 함께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피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는 민심을 얻기 위해, 고질적인 사회악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불교계에 손을 댄 것이다. 법난에 앞서 불교계 안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비리 승려에 대한 진정서가 수없이 당국에 접수됐다고 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었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10·27 법난을 사회문제화하면서 당국과 대립하자, 그들은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부패한 승려들을 옹호하냐고 비판했습니다. 불교계가 할 수 없는 일을 당국이 대신 해준 거라는 시각이었지요.

    대한민국 국법에는 누구나 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재물을 모을 자유가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야 하고 사유재산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은 불교의 내부 규약입니다. 이것은 불교계에서 징계해야지 국법으로 단죄할 문제가 아닙니다. 불가에서 이들을 축출하는 것과 국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구분돼야 합니다.

    종교 비리는 천주교에도 있고 개신교에도 있습니다. 불교만 친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납니다. 특정한 종교 하나를 찍어 군홧발로 짓밟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자료를 제공하는 바람에 불교계 전체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정부의 사과와 해명 그리고 명예 회복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법난에 대해 말하기를 겁내거나 문제의식이 없었어요.

    저는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중심으로 부당한 행위라고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조계사에서 10·27 법난을 소재로 강연을 했다가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종로경찰서에서 잘못했다고 자술서를 쓰면 용서해주겠다고 하길래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절 마당 일주문 안에서 했기 때문에 집시법 위반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대웅전 밖에서 했기 때문에 집시법 위반이라며 구속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그만두면 내보내주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뭔데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하느냐. 총무원장이 그만두라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경찰이 지도법사를 그만두라고 할 권리가 있느냐. 대통령도 그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검찰에 가서도 반성문을 쓰지 않았는데, 조계종 원로스님들이 각서를 써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불교계 스스로 비리 승려를 없애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외부 개입을 불러온 것은 아닙니까.

    “불교 안에 정화위원회라는 게 참 많았어요. 그러나 정화를 하겠다는 사람이나 정화를 당해야 할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만 싸움이 돼버렸던 거죠. 저도 정화 활동에 참여해보고 나서 정화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어요. 이것은 이대로 가고 새로운 걸 해야지, 계속 이것을 갖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로는 종단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법륜 스님은 1991년 인도로 여행을 떠나기 전 서초동 대성사에 있던 은사 도문 스님에게 인사를 갔다. 도문 스님은 “네가 밖에서 활동한 지 20년 됐으니 이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도에 무슨 안팎이 있느냐”고 대들었다. 도문 스님은 “이놈아 네가 밖을 고집하니 안이 생기지 않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안팎이 없다’며 밖을 고집하는 것을 꿰뚫어보신 거죠. 그 자리에서 비구계 전법계 법사계를 받고 발우(밥그릇)와 주장자 그리고 스님이 입던 옷을 받았습니다. 그날 새벽 머리를 깎고 포교당에 들어오니까, 모두 영문을 몰라하며 ‘법사님 어떻게 된 거요’라고 물어요. 그래서 ‘지붕 개량했다’고 했더니 모두 내일 인도에 가니까 머리를 깎은 걸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도문 스님의 질타와 사랑 속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무릎 꿇고 배웠기 때문에 늦깎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종교활동과 사회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인도 빈민과 북한 난민 돕기 등으로 관심을 돌린 계기는 무엇입니까.

    “1980년대 종교활동은 사회민주화와 결합된 활동이었어요. 스님들에게 사회의식을 깨우쳐주고 대학생에게 불교 사상에 대한 사회적인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기복신앙이 불교의 본질이 아니고 자기 수행에 정진하고 사회에 대한 헌신을 해나가는 게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라는 법문을 하고 실천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88년을 넘어서면서 시민들의 민주화의식이 깨어났습니다. 노동운동도 노동자 스스로의 힘으로 할 단계에 왔고, 농민운동도 농촌지도자들이 할 단계에 도달한 것이지요.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다 보면, 출가할 때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요. 투쟁을 하고 데모를 하다보면 마음의 평정과 고요를 유지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로 인해 내면적으로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구도의 방향을 잡기 위해 1989년 봉암사에 부목(절머슴)으로 들어갔다. 조실 스님에게만 행선지를 알리고 모른 척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0일간 침묵정진을 했다. 장작을 패고 화장실도 치고 밭을 매고 나무를 했다. 누가 그 유명한 최석호 법사를 알아볼까 싶어 고개를 땅에 박고 지냈다.

    “오랜만에 싸우고 운동하는 현안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스스로 살펴보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토론을 하면서 네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됐어요. 지구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환경이 제일 큰 문제다. 인류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사람이 굶어죽고 병들고, 아이들이 학교 가지 못하는, 기아와 질병과 문맹이 두번째로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부 빛깔이 다르고 국가와 민족과 종교와 남녀, 그리고 계급이 다른 것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 세번째로 큰 문제였습니다. 네번째는 불안과 초조, 증오와 미움으로 인한 괴로움을 수행을 통해 해결하는 과제였습니다.

    인간성 상실로 인해서 방황하는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수행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행이 승려나 종교인들의 특수한 영역이 아니고 인류 문명의 보편적인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1988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정토법당이라는 이름으로 수행운동을 전개했어요. 불교인으로 불교적 가치관에 모순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운동 중에는 환경운동이 제일입니다. 우리는 1990년에 환경운동을 시작했어요.”

    법륜 스님은 1994년 인도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학교가 없다’는 대답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 JTS 운동의 시초다.

    “초등학생이 동생을 데리고 교실에 오니까 시끄러워 수업이 안돼요. 그래서 꼬마들을 위해 유치원을 만들었습니다. 몸이 아픈 아이들을 위해서는 양호실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양호실에 와서 약을 달라는 마을 사람들이 늘어나서 의사를 초빙해 자원봉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하루에 100명씩 밀려오니까 감당할 수 없어 병원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사업이 점점 커진 것입니다.

    의사가 아이들의 종기가 잘 낫지 않는 이유는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해, 바나나와 계란 등으로 학교 급식을 했습니다. 급식을 하니까 학교에 나오라고 해도 오지 않던 아이들이 몰려와 학생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150명을 생각하고 지은 학교에 금방 500명이 넘쳐 났습니다. 학교가 있는 다른 마을에서 오는 아이들은 오지 못하도록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 초등학교에서 졸업생이 나오자 중학교 교육을 받게 해달라는 아우성이 나왔습니다. 동네마다 유치원을 만들어주고 중학생을 전부 유치원 선생으로 임명했습니다. 유치원 선생에게는 자전거를 사줘, 오전에는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오후에는 중학교에서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유치원 14개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각각 하나씩이 되었습니다. 지금 유치원생은 1200명, 초등학생은 200명, 중학생은 23명입니다.”

    ―인도에서 학교와 병원을 운용하는 데 드는 1년 예산은 얼마입니까.

    “보통 2억원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몇백만원만 있으면 될 줄 알고 덤볐는데, 일이 커졌어요.”

    ―인도와 북한을 돕자면 상당한 재원이 필요할 텐데요.

    “매월 5000원 혹은 1만원씩 내는 북한아이 돕기 계좌가 있습니다. 이 계좌를 통해 정기적으로 도와주는 돈이 제일 큽니다. 두번째는 절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신도들이 내주시는 보시금입니다. 정토회에서 모집한 인도 부처님 성지순례단은 호텔에서 자지 않고 배낭에 넣어간 침낭 잠을 잡니다. 밥도 해서 먹습니다. 이렇게 하면 돈이 제법 남습니다. 중국 역사기행도 검소하게 수행하면 꽤 많은 수입이 들어옵니다. 문경 수련장을 운영하고 도서 테이프를 판매하는 데서도 수익을 올립니다.”

    정토회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전부 자원봉사자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은 20만원을 주고 추가로 가족 한 사람당 7만원의 수당을 지급한다. 그 외에는 지출이 없으니 들어온 돈이 쌓이는 것이다.

    “정토회서 일하는 분들도 북한돕기 계좌에 5만원 10만원씩 내고 있으니, 그분들이 용돈으로 쓸 수 있는 것은 5만원도 안됩니다. 그나마 경력 3년 미만의 자원봉사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도울 수 있는 것이지요. 정토회는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각자 맡은 바 일을 하고 회의를 합니다. ‘좋은벗들’의 일을 하는 분들은 중국에 가서 두들겨 맞고 감옥에도 끌려갔었습니다. 작년 인도에서는 총을 맞고 죽은 자원봉사자도 있었습니다.

    정토회 분들은 해외에 가는 경비도 처음에는 자기 돈을 내야 돼요. 며칠 있다가 못 견디겠다며 돌아와버리면 대중이 낸 돈에 손실이 생기잖아요. 첫번째는 자기 돈으로 가서 해외생활을 견뎌낸 후, 다시 자발적으로 가겠다 할 때는 정토회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주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빈민 돕기를 하다 1996년부터 북한 난민과 재북동포 돕기 운동을 벌인 계기는 무엇입니까.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려면 단일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주에는 상고사와 독립운동사에 관련된 유적이 많습니다. 1993년에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님들과 함께 만주에 가서, 민족의 뿌리 찾기와 독립운동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는 현장학습을 했었습니다. 1995년 역사기행을 갔을 때 안내원이 ‘북한에 가보니 식량이 부족해 고통이 심각하다. 아이들의 키가 자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믿을 수 없다고 했더니 안내원은 ‘나는 중국 공산당원으로 초청을 받아 북한에 갔다 왔다’고 강조하더군요.

    1996년에는 인도에 있는 학교의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갖고 가 보여주고 ‘요즘은 지구 가족 시대라서 내 민족 내 동포라고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안내원 왈 ‘스님, 북한 사정은 이보다 더합니다’ 그래요.

    그래도 믿지 않으니까 저에게 점퍼 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다음 배에 태워서 두만강을 따라 올라가며 북한 쪽을 보여주었습니다. 북한 쪽에서는 민둥산과 쭈그려 앉아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영양 실조에 걸려 강변에 앉아 있는 꽃제비 어린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배의 속도를 늦추게 해 그 아이를 바라보는데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북한에 대해 나쁘게 생각한 것만이 편견이 아니라, 좋게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돕기를 시작했는데 전혀 자료가 없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북한의 홍수와 기아 상황을 입증할 신문과 비디오 자료를 구했습니다. 그 자료를 갖고 불교계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주자고 하면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강릉에 잠수함이 출현했던 시기였으니까, 지금의 서해교전처럼 북한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12일 불교계 33개 단체의 협조를 얻어 송월주 스님을 모시고 우리민족 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를 발족시켰습니다.

    다음해 1월15일 대한적십자에서 대북지원을 재개했을 때 우리는 5000만원을 갖다 냈는데, 3∼4개월 후에나 북한에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굶어죽는데 3, 4개월 후는 너무 뒵니다. 그해 강원도 감자 값이 폭락했길래 감자를 사서 인천에서 배편으로 북한에 들여보냈습니다. 기독교 목사들과 힘을 합해 중국에서 옥수수를 사 단둥(丹東)에서 열차편으로 북한에 들여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단둥역에서 신의주로 떠나는 옥수수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1997년 5월부터 단둥에서 시작해 백두산을 넘어 훈춘(琿春)까지 이어지는 한중 국경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이때 매일같이 북한 난민을 여러 명 만나 증언을 채록했다. 이들의 증언은 평양에 다녀온 사람이나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증언과는 크게 차이가 났다. 평양은 북한에서 배급 사정이 가장 나은 편이었다.

    난민들이 전한 북한의 기아 실태는 목불인견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결핵치료사업을 하는 한국유진벨재단의 스티븐 린튼 회장과 함께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다. 그는 추기경에게 “대북정책을 맡은 사람들의 사고를 바꾸기 위해 유서를 쓰고 단식을 시작하겠으니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추기경은 사람 살리려는 일을 하면서 죽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며 다른 방안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조건 없이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것을 촉구하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룡 목사, 송월주 스님을 대표로 하고 실무는 기독교의 김명동 목사와 그가 맡았다. 두달 동안 해수욕장과 목욕탕까지 찾아다니면서 받아낸 100만명의 서명서가 트럭 한 대분이 됐다. 이 서명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만나 주지 않는 바람에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만났다. 정부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한 체면치레에도 미치지 못하는 5만달러를 지원해 주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전이 벌어지자 그러한 관심마저도 줄어들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북한의 기아실태를 알리고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자 한결같이 증거를 요구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두 달 동안 북한 난민 200여 명을 인터뷰하며 북한의 식량난을 조사했다. 북한의 식량 사정은 해를 지날수록 악화하고 있었다.

    식량난은 함경북도에서 시작해 황해도 쪽으로, 일반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하층계급에서 당원과 군인으로 확산돼 가는 현상이 파악되었다. 통계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서 기아로 200만명 가량 죽었다는 자료를 만들어 미국에 갔다. 그리고 UN과 미국 의회·국가안보회의·정보기관·민간단체 등 온갖 기관에 돌렸다. 그러나 200개의 표본 조사로는 정확한 조사가 이뤄졌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와 다시 두 달간 472명을 더 인터뷰해 도표까지 만들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때서야 콧방귀를 뀌던 사람이 여기저기서 보자고 했습니다. 정부기관과 의회에서도 만나자고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무덤이 있을 테니 무덤 사진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서양인을 설득하는 것은 참 어렵더군요. 민주당의 비둘기파만 만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북한 지원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매파도 만나고 다녔습니다. 여섯 차례에 걸쳐 북한난민 1800명을 조사하고, 미국을 오가느라 1997∼98년을 넘겨버렸습니다. 우리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욕을 먹었습니다. 안기부 같은 데서는 북한을 돕기 위해서 실태를 과장해서 발표한다고 비난했고, 친북 인사들은 북한의 나쁜 점만 세계에 알린다고 비난했습니다.”

    ―북한 난민돕기는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1998년경부터 북한 난민 인신매매와 임금착취·체포, 북한으로의 압송 등의 문제가 생겨나 또 다시 난민 실태조사 보고서를 냈습니다. 보고서는 조선족 수십명을 동원해 중국의 2500개 마을을 넉 달간 조사한 끝에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얻은 추론이 탈북 난민은 30만명에 이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론과 탈북 난민들이 숨어다니다 체포돼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일각에서는 근거도 없이 숫자를 부풀렸다고 비난했지만 중국 공안(경찰)의 통계협조도 받았습니다. 저희 조사는 나름대로 신뢰성이 높은 자료입니다.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 난민구제 고등판무관(UNHCR)에 가서 많이 싸웠습니다. 그들이 제가 들고간 자료에 대해 신빙성이 없다고 하기에, ‘당신들처럼 조사할 권한이 없다며 손을 놓고 있다면 도대체 유엔은 무엇을 하는 기구냐’고 항의했습니다. ‘이게 당신네 일이지 내 일이냐’고 따졌습니다.”

    JTS는 나진·선봉에서 5년째 탁아소와 유치원에 수용된 일곱 살 이하의 어린이 1만1000명에게 빵을 제공하고 있다. 쌀가루와 콩가루·분유·설탕을 섞어서 만든 빵이다. 북한에 비료와 농업 기술을 지원하는 사업도 한다. 칠보산에 있는 절의 단청도 새로 해주었고 함경북도 고아원에 옷과 옥수수를 보내주고 있다.

    ―보수파는 북한에 지원하는 식량이 군량미로 전용될 수 있다고 반대합니다. 대북 지원식량의 배급 과정을 감독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오래 보관하기 힘든 옥수수를 주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북한은 군대의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저희가 보낸 식량 중 일부는 군대로 들어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굶주린다는 것은 그만큼 식량난이 절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량은 주민들한테 갑니다. 큰 줄기를 보아야지요. 하지만 민간단체 식량지원은 투명성이 보장돼야 합니다. 이는 북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NGO가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는 도와주신 분들께 믿음을 줘야 합니다.

    저도 2000년 이전에는 북한에 옥수수를 주는 쪽을 적극 찬성했습니다. 같은 돈으로 많은 양을 살 수 있고 오래 보관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옥수수는 바로 주민들에게 배급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쌀이 남아돌아 돼지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쌀을 북한에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해교전 이후 대북지원을 바라보는 정서가 냉각됐습니다. 우리 군인을 죽여놓고서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으니 북한을 도와주자는 말을 꺼내기 어렵게 됐어요.

    “지금 당장보다 30년 혹은 50년쯤 지나 통일이 된 뒤에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본다고 생각해봅시다. 북쪽에 있는 사람들도 한 백성입니다. 북쪽에서는 사람이 굶어죽는데, 남쪽에서는 쌀을 돼지사료로 주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비난이 쏟아지겠습니까. 서해교전보다 더한 전쟁을 하면서도 적십자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적군을 치료해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같은 민족끼리 그런 휴머니즘도 발휘하지 못합니까.”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표를 의식해 북한 지원이 더욱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 지원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서해교전이 벌어지면서 입장이 어려워졌습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와 이룩한 남북관계 개선은 높이 평가하지만, 이 정부는 오히려 인도적 지원에는 인색했습니다. 인도적인 지원을 하면서 표가 늘어날 것이냐 줄어들 것이냐를 따져서는 안됩니다. 적대관계에 있고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이 굶어 죽는 마당에 돼지 사료로 쓰일 식량도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해가 부족한 국민은 설득해야 합니다.

    퍼주기라는 비난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퍼주면 좋지 뭐가 나쁘냐고 대범하게 나가야 합니다. 찬반론자들이 당당하게 TV에 나와서 토론하는 공청회를 열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여론의 지지를 받아 지원해야 합니다. 여야가 정략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북한에 가본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1997년에 북한에서 초청장을 세 번 보냈는데, 한국 정부가 못 가게 해서 못 갔습니다. 1998년 이후부터는 탈북난민을 돕는 운동을 해서인지, 북한에서 오라고 하는 소리가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북한 체제가 안정을 유지하고 개혁·개방을 해서 자생력을 갖도록 도와준 후, 국가연합 방식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통일해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내부적인 문제로 붕괴한다면 흡수통일로 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만 북한 체제를 일부러 붕괴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화제를 불교로 돌렸다. 그는 몸을 몇 개로 나눠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지내면서도 ‘세상 속의 행복찾기’ ‘실천적 불교사상’ 등 16권의 저서를 펴냈다. 고통 받는 중생의 구원을 강조한 ‘실천적 불교사상’은 13년 전에 처음 펴냈지만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인도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언제 그렇게 많은 글을 씁니까.

    “제가 직접 원고를 쓴 것은 ‘실천적 불교사상’ 등 세 권뿐입니다. 법문을 하거나 강의를 하면 정토회에서 녹취를 해 초안을 만들어서 줍니다. 그것을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교정을 봐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고승들 중에는 심산유곡 암자에 들어가 세상과 절연하고 매스컴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법륜 스님은 개인 홈페이지도 갖고 있다. 컴퓨터를 만질 줄 몰라 정토회 직원들이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없는 사실과 마찬가지다’는 언론관을 갖고 있다. 북한 식량난과 북한 난민 돕기를 하면서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듯하다.

    사회운동을 하려면 매스컴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겠지요.

    “언론 홍보가 부족한 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그대로 바깥에 알려, 많은 분들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바깥에 알려지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언론에 이런 거 저런 거 내달라고 요구해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만, 언론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크든 작든 거절하지 않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에는 거대한 사회구조에 대한 무지와 공포 때문에 현대판 원시신앙이 득세하고 있다며 기복(祈福) 신앙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진실한 삶을 추구하지 못하고 고통을 면제받거나 현실적 욕망을 더욱 쉽게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신앙은 잘못됐다는 논지다.

    ―가족의 성공과 화평·건강을 기원하는 종교 행위는 잘못인가요.

    “어머니가 자녀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신앙은 자연발생적입니다. 적극적으로 권장할 것은 아니지만 비판할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의 발로라고 생각해요. 제가 비판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지금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공평하게 적용돼야 합니다. 룰을 어기고, 아는 사람이나 돈을 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부정부패라고 합니다. 절이나 교회에서 돈을 내놓고 ‘공부 못하는 아들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 ‘능력이 안되는 남편을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해달라’ ‘나는 부족한 게 많지만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비는 것도 그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면 부정부패의 원흉이 되라는 것이 아닌가요. 세상에서 비판받는 행위가 종교 안에서 합리화돼서는 안됩니다. 무분별한 기복신앙은 마약과 음주보다 더 해악이 심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정의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부정부패형 기복신앙은 종교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절이나 교회가 기복신앙을 토대로 성장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세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싸우지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도 그들 나름대로는 자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님이나 신부·목사를 특별하게 보지 않아요. 제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합니다. 부처님은 계급과 남녀 차별이 있었던 시절에 차별을 부정한 선각자였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회 제도적으로 남녀와 계급과 인종의 차별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려와 신도, 신부와 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은 여전합니다. 자발적인 존경의 형태가 아니라면 이것은 제도적인 차별일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을 내포한 종교 집단이 미래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실천적 불교사상’에서는 절을 크게 짓고 불상에 금빛을 찬란하게 입히는 것으로 승려의 능력을 판단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더군요. 요즘 종교단체마다 성전을 호사스럽게 짓고 있습니다.

    “저는 성전을 크게 짓는 데 대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신도수가 많고 하는 사업이 많으면 그만큼 성전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정토회관이 이 정도로 깨끗하게 지어진 것도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우리가 그전에 살았던 공간에는 지금의 서울 시민이 올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삶의 조건이 개선될 때는 조금 뒤처져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금으로 호화롭게 칠한다든지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것은 불교의 출가 정신에 어긋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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