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시장만 쫓아다녔다 신기술이 보였다”

셋톱박스 유럽시장 1위 휴맥스 강중용 연구위원

  • 김강호 아이커뮤니케이션센터 연구위원 khkim@bora.dacom.co.kr

    입력2004-09-13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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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성TV는 세계를 안방으로 끌어들인 미디어 혁명의 일등공신. 디지털 셋톱박스는 바로 그 위성TV 수신을 가능케 하는 핵심장비다. 휴맥스는 셋톱박스의 경연장인 유럽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달리는 한국의 간판 벤처기업이다. 휴맥스의 셋톱박스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시장의 요구에 따라 하나하나 벽돌 쌓듯 지어올린 거대한 기술탑이다.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한은 이미 수십년 전에 ‘미디어는 메시지’라며 미디어 혁명시대를 예고했다. 전세계 수십억명의 축구팬들은 2002월드컵 축구경기를 위성TV라는 미디어를 통해 지켜봤다. 그들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펼쳐보인 “대∼한민국”의 열정적인 메시지를 접하며 한국을 새롭게 인식했다. 그러니 우리도 미디어 혁명의 혜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러나 세계의 미디어 혁명시대를 열어가는 데 한국의 한 벤처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 곳곳의 축구팬들이 인공위성으로 중계되는 월드컵 경기를 집이나 사무실의 TV수상기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셋톱박스 덕분에 가능했다. 바로 이 디지털 셋톱박스를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기업이 한국의 휴맥스다. 휴맥스는 13년 전, 서울대 공대를 나온 6명의 석·박사 출신 청년들이 그야말로 ‘벤처정신’ 하나로 뭉쳐 설립한 회사다.

    매출 28%가 순익

    셋톱박스는 글자 그대로 TV수상기 같은 ‘세트’ 위에 올려놓는 ‘박스’다. 셋톱박스의 종류는 다양하다. 휴맥스는 그중에서 위성TV 방송은 물론 디지털 지상파TV나 케이블TV 등도 가정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셋톱박스를 생산하고 있다.

    지금까지 휴맥스가 개발, 시판한 제품은 30여 종. 개발에 착수한 1996년 이래 6년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다. 1997년 유럽으로 첫 수출을 한 후 생산제품 전량을 유럽, 아시아, 미주지역 등으로 수출했다.



    지난해 매출은 3151억원, 당기순이익은 887억원으로, 1426억원 매출에 33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린 2000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성장했다.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순이익의 비중은 28.1%. 100원어치를 팔아 28원을 남겼다는 얘기다. 지난해 국내 상장기업들이 100원어치를 팔아 평균 5원 정도의 영업이익을 남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이익률이다.

    또한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휴맥스는 매년 144%의 놀라운 수출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요시장인 유럽에서 노키아와 페이스, 소니, 필립스 등의 쟁쟁한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유럽 일반 유통시장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지난 5월 투자전문지 ‘싱크머니’는 “휴맥스는 셋톱박스 한 제품으로 유럽시장을 석권한 한국의 대표적 벤처기업”이라며 “벤처 종사자뿐만 아니라 주식투자자들에게도 휴맥스는 이제 새로운 신화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했다.

    휴맥스의 영국법인 휴맥스 일렉트로닉스는 지난 4월 영국 여왕으로부터 ‘퀸 어워드(Queen Award)’를 받았다. 36년 전통의 이 상은 국제무역·혁신·지속적 개발 가능성 등 3개 분야에서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휴맥스는 국제무역 분야 수상자가 됐다. 이에 따라 휴맥스는 앞으로 5년간 영국 왕실의 왕관이 새겨진 엠블럼을 제품에 부착할 수 있게 되어 영국은 물론 유럽시장 전역에서 신인도를 높일 수 있게 됐다.

    해외 언론으로부터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7월 ‘비즈니스위크’지는 “휴맥스는 부채에 시달리는 많은 한국 제조업체들과는 달리 120명의 기술연구팀과 공격적인 마케팅을 바탕으로 1억1300만달러 매출에 27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은 제조 부문을 철저히 외주에 의존해 왔는데, 한국에서 이는 혁신적인 발상이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해 3월 ‘월스트리트저널’도 “휴맥스는 외주로 비용을 줄여 강력한 경쟁우위를 확보했다. 휴맥스는 2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그중 절반이 연구·개발직이다”고 소개했다.

    휴맥스의 강중용(姜中庸·37) 신사업연구위원은 휴맥스 창업자이자 CEO인 변대규(卞大圭·42) 사장과 함께 창업 초기부터 기술개발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최근까지 휴맥스 기술연구소장을 지내는 등 차세대 기술 구상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왔다.

    8월8일 경기도 분당 서현역 근처 8층짜리 사옥에 있는 휴맥스연구소를 찾았다. 강위원의 방은 7층 사장실 바로 옆이었다. 직함은 ‘부장’이지만 회사의 미래를 놓고 최고경영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직감케 했다. 국내 셋톱박스 기술인력 중 선두주자로 ‘신동아’의 ‘세계 최고를 만드는 사람들’에 선정된 소감부터 물었다.

    “적잖이 부담스럽습니다. 휴맥스에는 과거부터 셋톱박스를 만들어온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현재 이 분들이 회사 조직상 다른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 명함에 ‘휴맥스’ 세 글자를 박고 인터뷰에 나설 사람이 저밖에 없었나 봐요.”

    인터뷰를 며칠 앞두고 강위원에게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메일로 극히 간단한 내용의 이력서를 보내왔다. 주소와 가족 구성원을 소개한 석 줄의 인적사항,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두 줄의 학력, 그리고 1989년 휴맥스 창업멤버로 입사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석 줄의 경력사항으로 자신의 37년 인생을 요약했다. 한마디로 겉치레를 모르는 소박한 엔지니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강위원은 신사업연구위원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다시 몇 년 뒤의 휴맥스를 준비하고 있다. 과연 그가 꿈꾸는 휴맥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강위원은 초창기부터 제품 하드웨어를 개발하고, 이를 각종 TV프로그램을 선택하는 등 기능을 선택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연결하는 업무를 맡았다. 연극으로 말하자면 무대장치를 만들고 배우와 스태프에게 대본을 나눠준 뒤 이를 총괄하는 연출자 노릇을 했던 셈이다. 덕분에 그는 휴맥스의 제품 개발사를 줄줄이 꿰고 있다.

    “셋톱박스라는 제품이 우연하게 나온 게 아닙니다. 1989년 설립 이후 휴맥스가 개발했던 제품 하나 하나가 없었다면 지금의 셋톱박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기체의 행동에는 그 배경이 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휴맥스가 오늘날 한국 최고의 디지털 셋톱박스 전문업체로 부상한 것도 하룻밤의 꿈일 리는 없다.

    입사 초기에 강위원은 주유소 판매시점 관리시스템(POS) 개발과 같은 외주 용역을 맡아 일했다. 그 과정에서 제어감시시스템 개발비용을 줄이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다 특수 영상카드를 만들게 됐고, 이것이 세계 톱 클래스의 셋톱박스 개발을 견인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작은 기술이 모여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큰 기술로 성장해간 것이다.

    “창업 당시에는 계측기 관련기술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힘만으로는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시도할 수 없었어요. 당장 회사를 유지해가려면 외주 용역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기술개발의 포인트도 비용절감에 뒀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전공분야와 관련된 정부와 민간연구소, 기업의 프로젝트를 일감으로 얻어와 회사를 꾸렸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들이 꿈꿨던 계측기기 개발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는 자금사정 등으로 엄두도 내지 못했다.

    특히 공장자동화(FA·Factory Auto -mation) 등의 업무를 많이 맡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감지(感知)’였다. 공장자동화를 제대로 하려면 공정을 정교하게 제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현장의 여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하는 제어방식이다. 그러나 당시 시중에 판매되던 영상카드는 FA에 적용하는 데 불필요한 기능이 너무 많았다. 당연히 가격도 비쌌다.

    휴맥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달린 끝에 1990년에 ‘See Eye 256’이란 제품을 만들어냈다. 휴맥스가 내놓은 최초의 상용제품이다. 카메라로 촬영한 움직임을 정지화면, 즉 사진으로 뽑아낼 수 있도록 한 일명 ‘프레임 그래버(Frame Grabber)’라는 혁신적인 제품이다.

    물론 이것은 개발을 위한 개발의 결과물이 아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궁리를 거듭한 끝에 독자적인 상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또한 스스로의 처지에 맞는 기술개발에 몰두하다 보니 뜻밖에도 실용성이 높은 상품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가라오케에 매달린 석·박사들

    “첫 제품이 그리 많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현상이 나타났어요. 저희 제품을 본 사람들이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낸 겁니다. 그중에 누군가가 ‘당신네 제품에 조금만 손을 대면 중계유선방송용 자막기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1990년대 초반에 동네 다방이나 식당 등의 영세업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영상을 틀어주는 중계유선방송을 신청, 손님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중계유선방송에서 이런저런 자막이 뜨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이다.

    “프레임 그래버를 변형해 자막처리기를 만들면 중계유선방송국에 팔 수 있겠다고 본 거죠. 그렇게 해서 중계유선방송국에서 자체 광고와 안내방송을 위해 자막을 넣거나 볼링장에서 핀이 쓰러질 때 앞쪽 전광판에 핀이 쓰러지는 영상 등을 자막으로 처리해주는 장치를 연구하게 된 겁니다.”

    때마침 일본에서 부산 일대로 건너와 이내 전국을 강타한 가라오케 열풍 덕분에 자막처리기 수요가 급증했다. 노래방이 확산되기 전이어서 스탠드바 같은 업소에서 간편하고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막처리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시 유흥업소에선 레이저 디스크로 자연풍경 등을 촬영한 영상을 틀고, 그 화면 위에다 노래가사를 비춰주는 초기 형태의 8트랙 카세트 자막처리기를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 기계로 노래를 찾는 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손님들이 노래 한 곡을 부르려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휴맥스의 프레임 그래버 원리를 응용하면 자막을 손쉽게 스크린에 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무렵 한 전자업체가 휴맥스에 새 장비 개발을 의뢰했고, 휴맥스 기술진은 가라오케 기기 개발에 나서게 됐다. 명문대에서 제어계측을 전공한 석·박사 출신의 난다 긴다 하는 기술인력들이 전공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가라오케 기기 개발에 매달린 것이다. 몰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됐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회의적인 심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제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내가 원하는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어라는 말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다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계를 움직이는 것,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것도 제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죠. 제가 대학에서 배운 것도 바로 그 원리였습니다. 가라오케 같은 놀이기구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그 핵심은 제어라고 생각했죠. 다들 그런 마인드로 연구와 비즈니스에 몰두했습니다.”

    개발은 성공했다. 휴맥스는 이 시스템을 가요반주기 업체와 오디오 회사 등에 납품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회사는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갔다. 매년 몇 차례씩 이사를 다니다 1993년 말, 드디어 서울 가락동에 6층짜리 사옥을 마련했다.

    몸에 밴 글로벌 스탠더드

    당시 개발한 가라오케 시스템에는 한번 입력하면 교체할 수 없는 롬(ROM : Read Only Memory) 반도체가 사용됐다.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신곡들을 입력하는 게 난제로 떠올랐다.

    다행히 그 무렵 CD롬이 대중화하면서 이것을 활용한 비디오CD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CD롬에는 1시간 분량의 영상 데이터를 수록할 수 있기 때문에 동영상을 제공할 때 레이저 디스크를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95년 휴맥스는 MPEG(Motion Picture Expert Group)1 기술을 적용한 비디오CD를 출시했다. 휴맥스의 CD 반주기는 세계 가전분야에서 디지털시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지 않았던 당시 국내 시장에서 보기 드문 디지털 가전제품이었다. 덕분에 휴맥스는 이 분야에서 약 50%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비디오CD 개발은 휴맥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셋톱박스를 개발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당시 MPEG2 기술을 활용한 위성 셋톱박스 개발업체를 찾던 한 종합상사 관계자가 휴맥스 개발진과 연결된 것.

    강위원은 “사실 그때는 셋톱박스가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기계인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기계인지도 몰랐다. 단지 고객이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털어놨다.

    제품 개발공정 전체를 책임진 강위원은 하루에도 수백번씩 완제품 케이스를 뜯고 다시 조립해가며 부품과 기능을 체크했다. 그렇게 해서 1996년 7월 독일에 수출할 500대를 컨테이너에 실었다. 이후 휴맥스 임직원들은 제품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하기 위해 유럽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제품을 만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기술 선진국들로부터 품질을 인정받는 것이 더 어려웠습니다. 결과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가 일찌감치 몸에 배게 됐지만, 다른 언어와 문화체계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할 물건을 만들어 그들을 만족시키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덕분에 휴맥스는 내수 시장에서 다진 실용적인 기술 개발능력을 기반으로 해외시장에 진출, 밑바닥부터 훑어가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족시키는 교과서적인 연구자세, 다양한 경로의 마케팅 전략, 그리고 유연한 협상력을 체화했다.

    1997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두번째 본사 사옥이 세워졌다. 그러나 1997년은 휴맥스 설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해이기도 했다. 독일의 한 방송사와 한 대량 수출계약이 파기되면서 비롯된 위기였다. 제품을 납품하기 직전에 이 방송사가 프랑스의 카날플러스라는 회사에 흡수 합병되는 바람에 이 회사의 모든 계약 이행이 중단되면서 재검토에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국내에선 외환위기가 닥쳐와 거래선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휴맥스가 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으로 노래방 기기를 납품하던 해태전자가 부도처리되면서 22억원이 고스란히 날아가는 등 피해가 잇달았다. 고민 끝에 창사 이후 처음으로 1998년부터 급여를 동결했다. 또한 전체 급여의 30%를 적립해 회사의 유동성 위기를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비온 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게 마련. 휴맥스에게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휴맥스는 이후 용인공장에 있는 기계와 생산인력을 송하디지털이라는 협력회사에서 관리토록 했다. 평택과 안산에 있는 공장 역시 본사와는 무관한 별도 조직으로 전환시켰다. 생산부문을 외주로 돌려 회사의 몸무게를 확 줄인 것이다.

    또한 공장에는 가능한 재고를 남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했다. 그로부터 불과 3년 뒤 휴맥스는 세계인의 눈과 귀를 연결하는 세계적인 셋톱박스 강자 대열에 합류했다.

    휴맥스는 서울대 공대 대학원 제어정보시스템연구실(CISL : Control & Information System Lab)에서 한솥밥을 먹던 선후배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했다. 휴맥스 변대규 사장은 올초 한 인터뷰에서 창업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서울대 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28세 때 창업했습니다. 얼마간 장난처럼 일을 벌였죠. 연구실을 오가던 어느 날 동기, 후배들과 함께 신림동 289번 버스종점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 그 자리에서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포장마차 결의’라고나 할까요. 며칠 후 창업자금을 융자받으려고 기술신용보증기금에 5000만원짜리 보증서를 신청하러 갔는데, 집 등기부등본을 떼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하숙생인데요’ 했더니 창구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하숙생이 돈 꾸러온 것은 처음 본다’고 했어요. 어찌어찌 해서 보증서를 받긴 했는데, 아마 서울대 박사학위를 보고 내줬던 것 같습니다.”

    강중용 위원은 변사장이 창업할 때 바로 합류하진 못했다. 변사장이 ‘(주)건인’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던 1989년 2월에는 강위원이 아직 석사과정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해 뒤인 1990년 2월에 정식으로 멤버가 됐다.

    변사장이나 강위원의 얘기를 듣다보면 당시 서울대 공대 CISL을 빼놓고는 휴맥스의 역사를 설명하기 어려울 듯하다. ‘건인’이라는 회사 이름은 이 연구실의 이름인 ‘Control’에서 ‘Con’을, ‘Information’에서 ‘In’을 따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다 한자로는 ‘세울 건(建)’자와 ‘사람 인(人)’자를 써서 ‘사람을 세우는 기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CISL은 현재의 사명인 ‘휴맥스’와도 상통한다. ‘建人’을 ‘사람(Human)을 최대화(Maximization)한다’는 뜻으로 해석, 두 단어의 머릿글자를 따 휴맥스라는 이름을 만든 것.

    휴맥스는 조직문화도 회사 이름의 유래만큼이나 독특하다. 임직원들은 개인보다는 조직 전체의 뜻을 중시하는 의식을 공유한다. 사내에 직급이라는 계급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휴맥스에선 ‘승진’이라는 말 대신 ‘승호(昇號)’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직급이 오르는 게 아니라 단지 호봉이 오른다는 의미다.

    강위원의 경우도 ‘연구위원’이라는 자리는 하나의 직책이지 직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느 벤처회사 같았으면 강위원 같은 창업공신이라면 지금쯤 임원 자리에 앉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위원은 “창업멤버들의 노력이 과대평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의 휴맥스는 모든 직원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이지, 몇몇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고 했다.

    비로소 강위원의 특이한 커리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1990년 입사 이후 하드웨어팀장, 소프트웨어팀장, 경영기획실장, 연구개발실장, 연구소장, 기조실장을 역임했다. 웬만한 주요직책을 두루 거친 입사 13년의 최고참급인 그가 난데없이 ‘부장’으로 격하된 게 아닌 것이다.

    모든 제품에는 설계자가 있다. 설계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휴맥스는 의도적으로 설계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원하고, 세상이 바라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흐름을 쫓아갔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추구한 결과 오늘을 맞게 된 것이다.

    강위원은 “저를 비롯한 휴맥스 식구들은 ‘우리가 한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냥 물 흐르듯 일해왔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고 말끝을 흐렸다. 개인보다는 조직의 힘으로 뭔가를 이뤄보려 했던 기업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그런 식으로 회사를 끌고가선 안된다는 위기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강위원은 그런 상황에서 별동대처럼 신사업의 가닥을 찾고 있다. 그동안 자신의 기술로 ‘제어’할 수 있었던 모든 제품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며, 휴맥스의 21세기형 설계도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휴맥스의 차세대 제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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