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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온산부터 새만금까지… 최열의 환경운동 20년 회상기

  • 글: 최열

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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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환경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 오는 2월말 자리에서 물러나 야전의 운동가로 돌아간다.
  • 환경운동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척박한 여건에서 20여 년간 한 우물을 파온 최총장이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한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한 환경운동가의 ‘고난의 행군’을 통해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편집자).
단식농성단 앞에서 공무원들은 고기를 구워 먹고…

1997년 방한한 월드위치연구소 레스터브라운 소장(왼쪽)과 함께한 최열총장

2003년, 쉰다섯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격변의 시기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이 나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봐왔다. 군사독재, 개발독재, 그리고 다양한 시민사회의 성장까지 모두 함께. 그 덕에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지금 내 눈은 한국사회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흐름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구 곳곳에서 ‘환경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자연과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낀다.

물오른 버들개지처럼 유연하고 혈기왕성한 젊음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년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쉰다섯이면 조금 여유있게 살고 싶은 마음도 들 때다. 그러나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하루 1달러에 의지해 살아가고, 공해로 매년 300만명의 극빈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며, 오염된 물로 300만명의 어린이가 설사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뻔히 바라보면서 한가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구의 환경문제는 어느새 내 삶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섣부른 공치사가 될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보다 더 묵묵히 일해온 운동가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운동에 대한 생각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믿는 까닭에, 지난 20여 년 기억의 사진첩에서 한 장 한 장 옛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한다.

돌아보면 위기는 언제나 좋은 기회였다. 복잡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한 해결책이 없었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술을 먹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보면 방법이 생기고 도와주는 이들이 나서 위기가 기회로 변하는 것이다.

1.08평 독방에서 환경운동 시작

환경에 대한 나의 고민은 197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1971년 대학군사교육 강화 방침에 맞서 교련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강제징집되었던 나는, 이후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벌이다 1975년 6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45명의 ‘동지’들과 함께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갇힌 곳에서 여름을 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비록 영어(囹圄)의 몸이지만 조국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을 품고 있던 우리는 밤마다 방을 바꾸어가며 시국 토론을 벌였다. 토론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결론은 언제나 ‘출감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함께 복역중인 동료들은 한결같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공해가 모순된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공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와 빈민, 어린이들이다. 그렇다면 공해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또 다른 운동이 아닌가.

이런 얘길 꺼내면 동료들은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무슨 환경이냐”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옆방에서 함께 복역하던 시인 김지하씨, 국회의원 이부영씨 등은 한결같이 나를 격려해주었다. 1976년 가을부터 환경 관련 서적들을 탐독해나간 것도 따지고 보면 이들 덕분이다.

다음해 3월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나는 1.08평짜리 독방에서, 어렵게 반입해온 책을 하루 12시간 이상 읽었다. ‘공해’나 ‘환경파괴’의 현장에 직접 갈 수 없다는 게 무엇보다 갑갑했지만, 복역 기간 2년3개월 동안 독파한 250여 권의 책은 나를 누구와 토론을 벌여도 대적할 수 있는 환경전문가로 만들어주었다.

첫 삽, 공해문제연구소

유신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9년 5월 나는 4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꿈꾸어왔던 환경운동을 시작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다. 많은 동료들이 “지금은 환경운동보다 민주화운동이 절실하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맡게 된 것이 민주청년협의회(민청) 부회장이었다.

6개월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청조직 활성화 작업을 하다 보니 이내 다시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해 11월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보안사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조사를 마치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나는 이번에도 환경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어려운 수형 생활을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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