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배부른 사람은 절대 환경운동 못해요”

안산시 시화호 조수(鳥獸)보호원 최종인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3-02-25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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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과 배고픔을 견디려 새를 벗하던 소년, 사업 실패의 좌절과 분노를 시화호 주변을 거닐며 삭이던 사내가 시화간척지의 생태계와 야생동물을 보살피는 지킴이가 되었다. 지난해 연말 환경기자클럽이 주는 ‘올해의 환경인상’을 수상한 경기도 안산시 환경과 조수보호원 최종인씨(49). 썩은 물 가득하던 죽음의 호수가 생명의 보고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본 최씨의 새와 짐승과 사람 이야기.
    “배부른 사람은 절대 환경운동 못해요”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시, 화성시에 연해 있는 시화간척지는 직접 현장에 가본 사람만이 그 스케일을 실감할 수 있다. 광활한 토지와 인공호수, 호수 위를 나는 수천의 물새떼, 끝없이 펼쳐진 갈대습지공원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간척을 통해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구나 하는 경탄이 절로 일어난다.

    시화간척지의 공식면적은 약 4500여 만평. 직접 눈으로 보면 얼마나 광활한지를 금세 알 수 있다. 1987년 1286만평의 담수호와 3302만평의 간석지를 활용하기 위해 12.6km의 방조제 공사를 시작하여 장장 10년의 대역사 끝에 완공된 시화간척지는 흡사 만주벌판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시화간척계획은 2000년 한 해 동안 ‘갯벌이 죽고 담수호가 간장빛으로 썩어간다’고 외치는 환경단체들의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결국 정부는 2001년 2월 시화호 물을 농공업용수로 쓰겠다는 원래의 계획을 포기했고, 지금은 바닷물을 들여오고 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방조제 안의 토지는 지금 갈대숲과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는 생태계로 소생했다. 새로운 녹색지대가 형성되자 노랑머리저어새(천연기념물 205호), 검은머리물떼새(천연기념물 326호), 큰고니(천연기념물 201호) 등 80여 종의 조류가 최대 15만마리까지 서식하는 보금자리가 되었고, 고라니 멧돼지 노루 너구리 등 포유류 수백 마리가 번식하는 동물낙원으로 변모했다.

    월 80만원의 노무직

    시화호의 자정능력이 되살아나면서 습지는 촉촉한 생명력의 보고로 거듭났고, 이 지역은 생태학습장과 휴식공간으로 시민들에게 제공됐다. 시화호가 이처럼 건강을 되찾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기까지 많은 이의 노력이 있었다. 생태계를 살려내자는 이 고장 사람들의 열망과 전국적인 환경캠페인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화호의 보안관으로 불리는 최종인씨가 있다. 그의 공식직함은 안산시 환경과 조수보호원.



    “말이 전문성이 있는 조수보호원이지 사실은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신분증에는 일용직도 아니고 노무직으로 되어 있어요. 대학 졸업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조류연구에 평생을 바쳐도 아무 소용 없는 모양이지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 한편에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에 대한 대접이 말이 아니지 않느냐는 뉘앙스가 묻어난다. 노무직으로 받는 그의 월급은 일당 2만원 남짓과 시간외 수당을 포함해 월 80만원 정도. 그러나 이 액수도 올해 들어 시간외 수당을 더 산정해 10만원 정도 올려 책정된 것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이것도 고마운 액수지요. 생활비야 아내가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큰 걱정은 없고요.”

    그러나 그 말 뒤에 “일본만 하더라도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과 능력 위주로 평가한다”는 한마디가 따라붙는다. 우리의 경직된 학벌위주 사회구조, 공무원 세계의 보수성을 꼬집는 말인 셈이다. ‘내 비록 학벌은 신통치 않다마는 전문성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다’는 자신감도 스며 있다.

    최씨의 사무실은 안산시청 별관 환경위생과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사무실로 들어서면 검은 천이 유리창을 가로막아 실내가 흡사 시골 영화관처럼 어둠침침하다. 유리창이 서쪽으로 나 있어 햇빛이 들어오면 필름 등 자료들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검은 천을 둘러놓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방문객의 시선을 끄는 것은 창문 쪽에 가지런히 놓인, 골동품처럼 낡은 예닐곱 개의 사기그릇. 그릇마다 물이 3분의 2쯤 담겨 있다.

    “무슨 실험을 하는 중인가요?”

    “아닙니다. 먼지를 받기 위해 물을 떠놓았지요. 사나흘에 한번씩 물을 갈아주는데 물그릇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요.”

    혼자 쓰는 사무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시화호에서 보낸다고 하니 늘상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무실이다. 그런데도 실내에 먼지가 많은 것을 걱정해 사기그릇에 물을 담아놓았다는 말에서 생활환경을 꼼꼼히 따지는 그의 성격이 엿보인다. 연일 장바닥처럼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서울의 일반 사무실에도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이 흔치 않음을 생각해보면 더 말해 무엇하랴.

    책상머리에 앉은 최씨는 시화호에서 자신이 찍은 희귀조와 야생동물, 식물들을 소개하겠다며 비디오테이프를 한참이나 돌린다. 그러다가 그것으로 부족했던지 갑자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함께 시화호에 나가보자는 것이다. 작달막한 체구, 재빠른 몸 동작, 거침없는 말투가 영락없는 ‘형사 콜롬보’다.

    “직접 가보고 기사를 써야 설득력이 있지요. 요즘 기자들은 도대체가 현장에 안 가고도 간 것처럼 막 쓰니까 죽은 기사가 되잖아요. 옛날 기자들은 안 그랬다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고임금 기자들이라 ‘귀족화’했다는 핀잔이다. 실상은 접해보지도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쓰는 관념적인 기사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최씨의 다그침에 따라 나선 필자와 사진기자는 점퍼와 사진 장비, 텐트와 식기 등이 널려 있는 지프 뒷좌석을 치우고 겨우 한구석에 걸터앉아 시화간척지 현장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갈대습지공원은 안산시 본오동과 사동, 화성시 비봉면에 걸쳐 있다. 말이 갈대밭이지 한마디로 광활한 평원이다. 다양한 생태 양식이 존재하는 습지는 주변 생태계는 물론 철새의 이동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소우주. 특히 시화호 일대 습지는 연안 생태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월천, 동화천, 삼화천 등 인근 지천에서 받아들이는 물이 갈대습지를 거치면서 깨끗하게 정화되어 시화호에 유입되고 있는 까닭이다. 일종의 필터인 셈이다. 공원 한켠에 위치한 전망대 옆 개천에는 깨끗하게 정화된 물이 샘물로 고였다가 흘러가는데, 겨울철에는 수질이 식수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전망대 1층 전시관에는 박제된 고라니 너구리 산토끼 족제비 날다람쥐 등 갈대밭에서 야생하는 동물과, 파랑새 기러기 넙적부리오리 흰뺨검둥오리 청딱다구리 꿩 등 텃새와 철새 수십 마리가 각기 날개를 파닥거리는 형세로 박제, 전시돼 있다. 모두 갈대습지와 공룡알 화석지에서 포획했거나 주민들이 덫을 놓아 잡은 것을 수거한 것들이다.

    “시화호 갈대습지공원은 수자원공사가 270억원을 들여 하수정화와 자연학습장 기능을 하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곳입니다. 그러나 갈대만 식재하다 보니 또 문제가 생기는군요. 겨울이 되면 마른 갈대가 오염원이 되는 거지요.

    당초에 제가 갈대만 식재하는 것에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인간도 편식을 하면 안 되듯 이곳 습지도 갈대만 무성하면 공해가 되기 십상이지요. 아닌게아니라 겨울철이 되면 마른 갈대가 엄청난 퇴비가 되어 쌓입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수생식물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그러나 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방문객의 눈에 비친 광활한 갈대밭은 아름답기만 했다. 창공을 베고 지나가는 맵고 차가운 바람을 받아 서걱거리는 갈대밭에 서 있으니 저절로 겨울 우수와 시적 감흥이 솟아나는 듯했다.

    가난한 소년의 친구가 되어준 새

    최씨는 이곳 습지와 공룡알 화석지 지킴이로 지난해 말 환경기자클럽이 주는 ‘올해의 환경인상’을 받았다. 그는 시상식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화호를 살릴 수 없다고 했지만 되살아나고 있다. 인간이 망쳤지만 역시 인간의 노력과 애정이 쏟아지니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교훈이다”고 소감을 말했다.

    -왜 하필이면 시화호 지킴이로 나섰습니까.

    “이 문제를 얘기하려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겠네요.”

    “배부른 사람은 절대 환경운동 못해요”

    시화간척지 내 공룡알 화석지를 살펴보고 있는 최종인씨

    그의 고향은 전남 장흥군 장평면. 보성군과 연해 있는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자랐다. 1966년과 67년 연 이태 동안 큰 한해(旱害)가 들어 농작물이 모두 타들어갔다. 천수답만 가지고 근근이 먹고 살아온 그의 부모는 농사를 더 이상 지을 수 없어 식솔들을 이끌고 무작정 서울로 찾아들었다.

    “그때 물에 대한 절박성을 느꼈습니다. 물기가 있는 개천을 아무리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농사지을 물은커녕 식수도 해결 못했어요. 정말 살 길이 막막했지요. 물의 중요성이 어떠하다는 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겁니다.”

    상경한 일가족이 자리잡은 곳은 서울 장위동의 무허가촌. 최씨는 아버지를 따라 고물장수 일에 나섰다. 망가진 양은 냄비, 깨진 밥솥과 헌 고무신짝을 받고 엿을 바꾸어주는 행상이었다. 그때의 ‘훈련’으로 그는 지금도 누구보다 가위질을 잘한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고 상경했으므로 그의 최종 학력은 따지고 보면 초등학교 중퇴다. 그 후 영세민 자녀들이 다니는 한빛중학교에 잠시 다녔지만 그마저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학력란에 기분 따라 중학교 중퇴라고도 쓰고 초등학교 중퇴라고도 쓴다.

    “그때도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는 산새들, 물고기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더 좋았어요. 허기지고 외로운 소년이 벗삼을 것이라고는 종달새나 가마우지, 송사리나 붕어, 미꾸라지밖에 없었으니까요.”

    어느 봄날 제비가 날아들자 흥부 이야기를 사실로 믿었던 그는 제비가 금붙이라도 하나 물어다줄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돌봤다. 그만큼 가난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난은 숙명처럼 휴대품이 되어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결국 그 덕분에 새를 사랑하게 된 셈이다.

    이후 그는 1968년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전기사업소에 전공(電工)으로 취업한다. 신축건물의 전기공사와 배선공사를 따라다녔다. 감전사고로 다치기도 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는 게 그의 회고다. 그렇게 18년을 일하자 사업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 1985년 하수도 오수관을 납품하는 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사업은 4년 만에 거덜이 났다. 남은 것이라고는 카메라 실력뿐이었다. 오수관 주변 오염 실태를 사진으로 계속 찍어대다 보니 쌓인 기술이었다.

    “사실은 전공으로 일할 때도 사진 찍는 일을 취미로 삼았지요. 공장이 망한 뒤 카메라 한 대 둘러메고 산천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야 빚쟁이들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1988년 안산으로 도망치다시피 이주해온 그는 틈만 나면 시화호를 찾았다. 시화호만이 그를 반기는 친구였던 시절이었다. 오갈 데 없던 그는 시화호 상류에서 하류까지 매일 왔다갔다 하며 소일했다. 때로는 상류 소나무숲에 쓰러져 자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의 주변을 맴돈 것은 새와 너구리 등 야생조류와 야생동물이었다. 소년시절 가까이 했던 벗들을 본의 아니게 다시 만난 셈이다.

    그렇게 몇 해의 시간을 보낸 1990년대 중반, 시화호 개발에 따른 생태계 파괴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날마다 호수 주변을 찾던 그가 보기에도 담수호로 개발된 시화호는 갈수록 간장빛을 띠며 썩은 호수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화호의 환경변화를 꾸준히 관찰할 적임자로는 근 10년 가까이 외로움과 번뇌를 삭이며 시화호를 지켜본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소문이 퍼지자 안산시는 그에게 시화호 지킴이로 일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최씨가 공식적으로 조수보호원 일을 시작한 것이 1997년 9월이다. 이틀에 한번씩 시화호 전체를 돌아보고 운행일지와 보고서를 작성해 안산시에 제출하는 업무다.

    “환경운동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명감도 없었고요. 환경운동은 고상한 분들이나 하는 일로 여겼지요. 안산에 정착해 살다 보니 어릴 때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행복에 잠기고, 그러다 보니 결국 시화호 지킴이가 된 것뿐입니다.”

    -새에 대한 남다른 취미를 갖고 계신 것 같은데요.

    “어릴 때 고향의 초막집 토방에 누워있으면 새들이 날아와 초가집 추녀 끝에 매달아놓은 배추잎사귀 무말랭이를 뜯어먹고 가곤 했어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좋았어요. 또 참새들이 처마 구멍에 알을 낳아 새끼 기르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지요. 우리집에 오는 제비와는 거의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이 지냈어요. 제가 마을 밖으로 나가면 우리집 제비가 따라와 배웅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친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는 흔히 머리 나쁜 사람을 ‘새대가리’라고 부르며 놀리곤 하는데, 새는 결코 머리가 나쁘지 않습니다. 새도 누가 자기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요. 새와 사귀려면 먼저 자신이 새가 돼야 해요. 새들은 경계심이 많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하면 가까이 옵니다.

    제가 새를 발견하고 관찰하면 새 역시 저를 관찰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진을 찍으려고 덤비기 전에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우선 새와 친해지려고 합니다. 카메라 같은 낯선 물건을 보고 놀랄까봐 미리 설치해놓거나 비슷한 물건을 놓아두고 안심시키기도 하지요. 사진 한 장 찍겠다고 조급하게 굴면 새는 어느새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려요. 특히 자기보다 덩치가 큰것이 나타나면 곧바로 위협을 느낍니다. 새보다 수천 배가 큰 인간이 가까이 가면 아무리 담이 큰 새라고 해도 겁먹는 게 당연하지요.

    또 새는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면 앞을 못 보는 습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진을 찍을 때는 반드시 햇빛을 등지고 찍어야 합니다. 그러면 새가 대상을 별로 의식하지 못하니까요. 새의 둥지를 발견하면 빨리 보고 나와야 해요. 오래도록 들여다보다가 새가 들어가지 못하면 온도가 떨어져 결국 알이 부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니까요.

    겨울이 되면 가끔 철원 등 휴전선 근방에서 독수리나 겨울철새 먹이를 주는 모습이 TV를 통해 나오는데, 포대째 갖다주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렇게 무턱대고 먹이를 가져다주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새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그 예로 그는 까치에게 쫓기는 독수리를 들어 설명했다.

    “얼마 전 TV에서 독수리가 까치에게 쫓기는 장면을 봤습니다. 독수리가 사냥을 안 하다 보니 싸워야 할 이유가 없고, 결국 독수리 특유의 야성이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겨울철에 사람들이 독수리가 안됐다고 닭고기며 수입쇠고기를 들판에 내다놓아 생긴 문제입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데 싸울 일이 있겠습니까. 또 눈 많이 올 때 뿌리는 옥수수나 볍씨도 마찬가지예요. 맛을 들인 새들이 가을철 수확기에 농부들이 정성껏 기른 옥수수나 볍씨를 쪼아먹거든요. 기왕 줄 먹이라면 농작물 피해가 덜 가는 먹이를 골라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야생 조수와 동물 사진이 많던데 모두 얼마나 됩니까.

    “필름으로 새가 18만장, 포유류 3만장, 식물 1만장, 오폐수 관련 환경 사진 2만장, 기타 5000장 등 합치면 24만 5000장 정도 됩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저 스스로 신명이 나서 하는 일이라 비용 문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와 야생동물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족하니까요. 슬라이드 필름 한 통에 8000원 정도 하고, 이것을 한 달에 몇백 통씩 쓰니까 평균 40만원 정도 지출합니다. 그러나 필름 값이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 400mm, 800mm 망원렌즈 등 장비 구입비가 엄청나지요. 얼마 전에는 빚을 내서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최씨는 검은머리물떼새(천연기념물 326호) 검은머리갈매기(국제 보호조) 노랑부리백로(천연기념물 361호) 조롱이(보호조) 등을 사진에 담았을 때의 보람과 기쁨을 자랑삼아 들려주었다. 이들 새의 생태를 담은 사진은 전망대가 위치해 있는 탐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온 김에 갈대숲을 한바퀴 돌아보자는 최씨의 제의에 따라 다시 지프에 올라 아스팔트처럼 단단해진 개펄을 달렸다. 개펄은 하얀 서리가 내린 듯 염분이 보료처럼 깔려 있다. 시화호가 담수를 포기하고 해수를 끌어오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했다. 얼마쯤 달리자 갈대숲 사이에 영업용 택시 한 대가 숨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최씨는 단번에 ‘택시 기사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쪽이 피해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그러나 최씨는 진주군처럼 당당하게 택시 쪽으로 지프를 몰고 가더니 가까이 가자 빵빵 경음기까지 울린다. 그러자 한 남자의 머리가 불쑥 택시 창문 위로 솟아오른다.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최씨가 호되게 물으니 택시 안의 남자가 머뭇거린다.

    “여기는 외부 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돼 있는데 어떻게 들어왔냐고요?”

    그러자 사내가 대답 대신 한쪽으로 차를 몰아간다. 뒤로 젖혀진 운전석 옆 좌석이 뒤로 젖혀진 위에 여자가 납작 엎드려 있는 모양이 보인다.

    “왜 모기장을 아무리 단속해도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모기가 몇 마리 들어와 있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시화호 간척지에는 승용차가 들어올 수 없도록 했는데도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꼭 들어와서는 풍기문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그러더니 최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출입문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어떻게 외부차량이 들어와 있느냐는 호통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열쇠는 나한테 있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또다시 투덜거린다.

    최씨 뒤로 차창 밖에 매운 바람이 불 때마다 강의 양안에 길게 펼쳐져 있는 갈대숲이 일제히 한쪽으로 쓸리며 엎드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필자의 머리 속에 김수영 시인의 시 ‘풀’ 한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풀의 질긴 생명력, 바람(폭력) 앞에서 무너지는 것 같지만 다시 일어서는 저항성. 잊을 수 없는 멋진 풍경이다. 기를 쓰고 들어오는 ‘침입자들’의 마음도 전혀 모를 바는 아니다.

    -시화호에 서식하는 야생동물 사진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고라니 노루 너구리 등을 찍었어요. 역시 초지가 드넓게 형성되니 새가 날아들고 야생동물이 서식하게 되지요. 그런데 야생동물들은 찍기 어렵습니다. 좀체 나타나지를 않거든요. 다만 먹이를 먹을 때가 촬영 기회지요. 잡식성인 너구리는 포도나 오이를 즐겨먹는데 이때 찍기가 좋습니다. 새는 2m 가까이서 찍은 적이 있지만 야생동물은 20~30m 근처에만 갈 수 있어도 다행입니다.”

    -사진을 팔기도 합니까.

    “팔지 않습니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뜻이 훼손될까봐 돈과 연결짓는 일은 피하고 있어요. 다만 아이들이 새 사진을 갖고 싶어할 경우 그냥 주지요. 안산시에서도 새 사진 엽서를 시 홍보 차원에서 제작해 공급하고 있습니다.”

    까치가 손님을 반기는 이유는?

    -새를 관찰하면서 남다른 느낌이 있을 것 같은데요.

    “새 알이 하루 종일 부화하는 장면이나 알을 품고 있는 새,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새를 관찰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새의 양육 과정은 인간과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갓 부화한 새끼에게는 애벌레 등 부드러운 먹이를 날라다주고, 조금 자라면 날개가 있는 잠자리나 사마귀 같은 것을 물어다줍니다. 그래도 새끼들인지라 소화를 다 못하지요. 그러면 새끼 배설물을 어미가 다 먹어치워요. 영양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마저 먹어 치우는 거죠. 새처럼 완벽한 환경론자가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얼마나 많이 버립니까. 새에게는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인간이나 새나 잠시 자연을 빌려 사용하며 살다 떠나기는 마찬가지지만, 탐욕스럽고 낭비가 많기로는 인간이 새보다 훨씬 못됐다는 비판이다.

    “물론 새들 중에 못된 새도 있어요. 그 중 백로가 나쁜 짓을 가장 많이 하는 편이지요. 한 녀석이 알을 부화할 둥우리를 짓느라 지푸라기 나뭇가지를 찾아 나가 있으면, 곁에 있던 다른 백로가 몰래 그 둥우리의 지푸라기나 나뭇가지를 훔쳐다 자기 둥우리를 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는 때려주고 싶지요. 반면에 괭이갈매기가 하늘에서 바지락을 떨어뜨려 내용물을 뽑아먹는 것을 보고 그 지혜에 감탄한 적도 있어요. 검은머리물떼새는 조개를 햇볕에 내놓고 조개가 껍질을 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용물을 재빨리 꺼내먹는 재주도 발휘합니다.”

    “배부른 사람은 절대 환경운동 못해요”

    그동안 최씨가 촬영한 시화간척지의 동식물 사진은 모두 24만5000장에 달한다.

    한마디로 현장에서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관찰보고서다. 최씨는 ‘까치에 대한 속설의 허구’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라지만 그의 구수한 입담 덕인지 더 그럴듯하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하는데 그것도 다 이치가 있습니다. 요놈들은 참 머리가 좋습니다. 마을에서 2~3년만 살면 동네 사람들을 다 알아보게 되거든요. 누구네 집 돼지까지도 알아보니까요. 그러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까악까악 짖어댑니다. 반가워서가 아니라 낯 모를 사람에 대한 경계신호, 별 이상한 종자가 다 왔다는 의구심을 표현하는 거죠. 그런데 해석하길 좋아하는 인간들은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올 길조라고들 해요. 그렇지만 까치를 가만히 살펴보면 성질머리가 까탈스럽기 이를 데 없고 쓰레기 매립장을 까마귀떼보다 더 억척스럽게 뒤지는 망나니여서 길조가 아니라 광야의 난폭자 같지요.”

    -새로운 철새들도 발견됩니까.

    “물론입니다. 알락해오라기 여덟 마리가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200mm 카메라로 처음 이들을 발견했지요. 텃새인 흰뺨검둥오리 청딱다구리 꿩 등이 많고, 여름철새인 파랑새, 요즘에는 기러기를 비롯해 넙적부리오리 알락오리 등 사계절 내내 철새와 텃새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서산 천수만과 함께 시화호가 철새의 한반도 기지가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부자가 된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국립 자연사박물관을 꿈꾸며

    지프는 화성시 비봉면의 지방도를 따라 30분 가까이 달리다 공룡알 화석지가 있는 비봉면 고정리로 들어섰다. 시화방조제 조성 이후 생긴 광활한 평원이 펼쳐졌다. 경비행기가 하늘을 선회하다가 이착륙 연습을 하는 비행장이 한쪽에 들어서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넓디넓은 초지가 조성되어 있다. 가끔씩 창공 멀리 철새들이 V자 대형이나 一자 대형을 갖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질펀하게 펼쳐진 들판엔 시든 잡초들만이 서걱일 뿐 인적이라곤 없어 을씨년스럽다. 아직 일반에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평원은 텅 비어있다시피한 것이다.

    “이곳은 경기도 화성시 고정리 일대인데 제가 공룡알 화석을 발견한 곳입니다. 1998년 9월 새 사진을 찍다가 이상한 돌멩이를 발견했어요. 바위섬에 새겨진 커다란 문신 같은 것도 발견했고요. 곧바로 안산시에 보고해 전문가들이 감식을 했는데 그게 바로 공룡알 화석이었죠. 1999년 4월 한국해양연구원과 ‘희망을 주는 시화호 만들기 시민연대(이하 시화호시민연대)’가 함께 조사에 착수한 뒤, 여러 검증을 거친 끝에 이듬해 문화재청이 국가 중요문화재 천연기념물 414호로 지정했습니다.

    한 일본학자가 찾아와서 ‘간석지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도록 일본 자본이 지원을 할 테니, 대신 공룡알 화석을 일본으로 가져가면 어떠냐’고 제안하더군요. 바로 거절했지요.

    현재까지 조사에 따르면 공룡알 화석 300개 이상이 30여 개 둥지에서 발견됐고, 공룡뼈 화석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중생대의 수많은 식물화석과 1만5000년 전의 코뿔소 두개골과 사슴뿔도 나왔어요.”

    -이런 문화재를 발견하고 나서도 국가로부터 보상이나 훈장 같은 것은 받은 적 없습니까.

    “훈장을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표창장 한 장도 받은 적 없습니다. 그러나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공룡 유적지, 철새 도래지, 자연생태공원 등을 한데 묶어 국립 자연사박물관으로 키워나갔으면 하는데, 이 지역에 대한 보호나 과학적인 관리는 아직 걸음마 단계거든요. 2000만명이 사는 수도권에 이런 정도의 자연사박물관을 꾸미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최씨는 이곳에 국립 자연사박물관을 지어야 한다고 국회에 청원해놓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미국, 캐나다와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시화호에서만 350개의 공룡알 화석과 공룡뼈 화석이 발견됐으니 이를 충분히 관광자원화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일본 후쿠이박물관은 공룡뼈 화석 3개로 공룡박물관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그보다 훨씬 알차게 박물관을 꾸밀 수 있습니다. 후쿠이(福井) 공룡박물관은 연간 수백 억원의 관광수익을 올리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공룡 화석이 많은 우리가 세계적인 공룡화석박물관을 만들지 못하라는 법이 없죠.”

    최종인씨는 간석지 안에 있는 안산시 대부동 탄도의 대부광산 채석장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을 발견한 일화도 소개해주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골재 채취장으로 쓰이던 바닷가 한쪽이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으로 확인됐습니다. 1999년 이곳에서 14개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됐죠. 골재 채취업자가 공룡발자국 발견으로 공사가 중단될 것이 두려워 공룡발자국 화석을 몰래 인천 자택에 갖다놓기도 했어요. 업자 입장에서는 ‘이제 나는 망했다’ 싶었겠지요. 그 바람에 일부는 멸실됐지만 일부는 수거해서 안산시청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현장에는 세 개의 발자국 화석이 방치되어 있고요.”

    폐허가 된 공사현장은 영화에서 본 노천금광을 연상케 한다. 골재 채취기가 망가진 채 한켠에 나뒹굴고 있고,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퇴적층의 파편이 흉물스럽게 흩어져 있다. 100m 이상 절개된 바위산의 낭떠러지는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공룡이 살았던 시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퇴적층입니다. 충분히 학습장으로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또 부근을 치밀하게 조사하면 더 많은 공룡발자국 화석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손빨래 하는 까닭

    현재 최씨는 안산 YMCA, 안산 경실련 등 안산과 시흥, 화성의 시민단체 26곳이 참여하고 있는 시화호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공동대표로 일하면서 초중고교 학생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환경 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 중 하나는 배부른 사람은 환경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돈 없는 사람만이 환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언뜻 다른 생각이 들어 질문을 던져보았다.

    -본인 스스로 아내나 가족들에게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해 갖게 된 생각은 아닙니까.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요. 가장인 제가 이 운동에 힘을 쏟은 이후로 계속 아내가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니 속으로는 미안하지요. 지금은 아내도 이해하고 격려해줍니다만, 한때는 정말 상황이 안 좋아서 갈등이 위기가 될 뻔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그는 집에서 가족을 위해 빨래를 한다. 세탁기 대신 직접 손빨래를 하는 것이다. 우선은 세탁기가 환경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세제를 풀어 써야 하고, 물 낭비도 심하다는 것.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손빨래로 아내나 두 자녀의 옷을 빨다 보면 가족간의 유대감도 확인할 수 있고, 옷깃에 스민 가족들의 체취도 느낀다는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도 알게 모르게 환경의 중요성, 절제하는 삶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더군요. 아내에게도 시화호 지킴이로서 제 참뜻을 이해시킬 수 있고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인지 아이들이 절제와 책임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맙습니다. 항상 아이들 쓰라고 탁자 위에 돈을 놓아두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정도 이상은 가져가지 않습니다. 정말 알아야 하는 것만 체험을 통해 제대로 깨우치면 나머지는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절제하는 법을 익혀나가는 거지요.”

    공동선은 작은 데 숨어 있다

    시화간척지 곳곳을 둘러본 후 다시 마주앉은 자리에서 요즘 갖고 있는 소망이 무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 동안 새와 야생동물을 관찰하며 찍은 사진을 모아 책으로 내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의 풍요를 책에 담아보겠다는 포부인 셈이다. 이미 지난 1998년에 1만2000장의 생태사진을 골라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뭘 보태지 않아도 자기는 이미 많은 것을 얻었노라고 덧붙인다.



    “많은 이들이 안산과 시화호가 달라졌다고들 합니다. 시커먼 죽음의 호수, 반월공단의 오폐수와 배기가스라는 부정적인 도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는 거겠지요. 물론 이것은 시민들이나 행정기관이 환경에 대해 남다른 인식을 갖게 된 결과입니다. 기쁜 것은 도시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만드는 데 저도 힘을 보탰다는 사실입니다. 긍지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가 아니냐고 그는 반문했다.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은 크고 거창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데 더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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