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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백천의 음악인생 上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 글: 이백천 대중음악평론가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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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음악평론가 이백천의 회고록을 3회에 걸쳐 싣는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한국 가요 역사의 산증인이자, 일세를 풍미한 포크음악의 이론적 스승이었다. 가수 조영남은 그에게 “통기타 군단의 담임선생님” 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편집자>
서울대, 미8군, 색소폰과 차차차

1962년 ‘민들레 악단’의 드라마센터 공연. 가수는 유주용, 연주자 중 앞줄 맨 왼쪽이 나

내가 태어난 곳은 황해도 배천.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하구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소읍이다. 개성에서 서쪽 해주로 가자면 약 30km쯤 되는 지점인데, 지도에서 보면 바로 38도선 아래에 있으며 배천온천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났다 해서 내 이름은 백천이 됐다. 한자로 ‘白川’이지만 지명으로 부를 때는 ‘배천’이 된다. 1933년 3월13일 새벽. 의사 이종완과 부인 이완배의 차남이었다.

누군가 내 사주를 보고 예(藝)와 문(文), 역마(驛馬)와 도규(刀圭)가 있다고 했다. 예는 음악, 문은 글, 역마는 매스컴, 도규는 의사가 되어 칼로 환자를 수술할 팔자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음악평론도 음악에 칼을 대는 것이니 사주가 아주 빗나가지는 않은 셈이다.

세 살 때 집안은 조금 더 북쪽, 황해도 신계(新溪)로 이사를 했다. 집 앞쪽은 잡화상점, 뒤쪽은 병원이었다. 어머니의 바로 아랫동생인 영배 삼촌이 그때 결혼을 하고 잡화점을 했다. 삼촌의 방에 몰래 들어가 외숙모의 경대 위에 있는 분갑을 열어 냄새를 맡곤 했는데, 숨막힐 듯하면서도 환각적인 그 냄새가 나의 첫 후각적 성체험이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 쌍날개 비행기를 보고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처음으로 소리에 집중한 순간이었다. 그때 내 별명이 ‘군수영감’. 뒷짐을 지고 느슨느슨 걷는 폼이 그랬던 모양이다.

만 여섯 살에 소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3학기(당시는 3학기제)에 우리집은 다시 전라도 이리(지금의 익산)로 이사를 했다. 물자가 귀해지기 시작한 시기(1940년)라 내가 신을 것이 여자 운동화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싫어 그냥 맨발로 학교에 갔던 기억도 있다. 일요일이면 목상리에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큰집에 가 사촌들과 어울려 논에서 우렁도 캐고 개울에서 미역도 감았다. 그때쯤 아버지가 라디오를 가져오셨다.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찾는 일이 신기했다. 음악소리가 너무도 깨끗하고 곱게 들렸다.

3학년 때에는 다시 서울 노량진 본동으로 이사했다. 한강교의 아치가 너무 웅장해 산처럼 높게 느꼈다. 한강교 남단 바로 옆에 제법 큰 요정이 있었는데 이름은 용봉정(龍鳳亭), 그 뒤 계곡에 우리가 살 집이 있었다. 학교는 흑석동의 은로국민학교였다.

전학하고 얼마 후부터 조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교장의 훈시, 동경을 향한 궁성요배(宮城遙拜), 교육칙어(敎育勅語) 낭독, 대열행진연습, 사열. 여기저기 나붙은 문자도 어수선했다. 국어상용(일본어상용)에 성씨개명, 공출, 징용, 징병, 귀축미영(鬼畜美英), 결사대,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 등이었다.

아버지는 李자를 둘로 나눠 목자(木子)라는 성을 만드셨다. ‘기노코’가 창씨개명한 새 성이었다 ‘카미카제’ ‘옥쇄(玉碎)’라는 단어가 자주 들려올 즈음 미군 비행기 B29가 한강교 위를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할 무렵 졸업기가 되었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일차 경복중학 낙방, 이차 중앙중학 합격. 이때가 1945년 4월이었다. 그리고 종전과 해방. 한동안 전차가 다니더니 전력사정으로 운행중단이 되고 역마차가 교통수단이 되었다. 지나가는 트럭이 속도를 늦추면 가방 먼저 던져넣고 올라타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상도동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전철을 타려면 노량진까지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때로는 전기사정으로 전차가 오지 않아 종로 계동 중앙중학교까지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한강다리 건너 용산, 삼각지, 남영동, 서울역, 남대문을 돌아, 을지로, 종로2가 교동국민학교앞 지나, 계동 휘문중학 지나고 대동중학, 그리고 맨 끝 언덕 위의 학교. “흘러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는…” 이렇게 시작하는 교가의 중앙중학교까지 걸어서 두 시간 거리였다.

1학년, 넉 달 반 동안은 아직 일제치하였다. 어느 날 맨발로 조회 앞줄에 섰는데 선생이 다가와 학교에 올 때는 신발을 신고 와야 한다고 했다. 신발은 있었다. 발바닥 모양의 나무쪽 위에 고무로 띠를 두른 슬리퍼 같은 나무신발. 그것을 학교에 신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강을 건널 때 강물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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