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을 택하라

  • 글: 안강민 변호사·전 서울지검장

    입력2003-04-28 1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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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부산MBC 사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는 마산에서 터진 3·15 부정선거 시위의 생중계를 결정함으로써 4·19혁명의 단초를 만들었다.
    • 젊은 시절 고향에서 야학을 만들고, 빨치산 토벌대의 무리한 작전을 온몸으로 막았던 아버지는 내게 정직을 강조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무심코 거짓말을 했다가 호되게 매를 맞은 나는 이후 정직한 인간이 되려 노력하였다.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을 택하라

    1953년 경기중 1학년생이던 안강민 변호사와 그의 부친인 안성수 선생(부산 초장동에서)

    몇 주는 지났을 것이다. 나는 신문 한 귀퉁이에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단어와 만날 수 있었다. 요즘 네티즌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는 어느 익명가가 쓴 ‘아버지’란 제목의 짧은 수필이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그 수필은 첫 번째로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고 답을 적고 있었다. 읽어 내려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묘사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이 표현에서는 두 아이의 아버지인 지금의 내 모습을 그린 듯하여 씁쓸한 공감마저 느껴졌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수필 하단부에 있었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더욱 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다. 이 글을 보자 언젠가 아버지께서 내게 들려주셨던 한시 구절이 생각났다. ‘수욕정이 풍부지, 자욕효이 친부대(樹欲靜而 風不止, 子欲孝而 親不待)’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어와 흔들어대고, 자식은 효도를 하고 싶지만 부모님은 그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양친께서 모두 돌아가신 후에야 이 시구를 절실히 떠올리는 것은 역시 내가 둔감하여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었을까.



    가끔씩 나는 내 모습과 행동에 당신께서 심어주신 것들이 남아 있음을 느끼며 나 홀로 있는 것 같지 않아 가슴 한 켠으로는 뿌듯하다. 그래서일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東岩 安星洙)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30년 가까이 검사로 재직하며 나름대로 충실히 공직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내 나름대로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어릴 때 아버지께서 몸에 배도록 물려주신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1913년 경남 울산군 하상면 양정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어리광을 피울 법한 막내였지만 여섯 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총명하셨다고 한다. 문화정책으로 일제의 위세가 심해지던 1930년대 초, 아버지께서는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마을에 야학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때 당신 나이는 고작 17∼18세셨으니 젊어서부터 강직하고 소신 있는 성격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버지는 21세 때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하셨다. 해방된 후에는 거창 군수로 부임하셨다. 당시는 우익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한 때였고, 특히 지리산이 걸쳐 있는 거창은 빨치산 활동이 대단했던 곳이었다.

    6·25 발발 바로 전해인 1949년 여름, 지리산 빨치산의 습격으로 거창 군청이 전부 불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이 터졌다. 정부는 빨치산 토벌로 ‘백두산 호랑이’란 명성을 떨쳤던 김모 대령을 급파했는데 김대령은 공비와 접선한 주민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정이 좋지 않던 주민들이 서로 밀고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섞여 들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께서는 김대령을 막아서서 항의했다. 김대령은 권총을 뽑아 협박하였으나, 아버지는 “차라리 군수인 나를 쏘시오” 하며 대항하셨다고 한다. 당시는 군수라고 해도 한 순간에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입을 다물고 계셔도 그 침묵을 향해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사람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던 것이다. 김대령은 그 결연한 의지에서 진실을 읽었는지 결국 상당수 주민들을 풀어주었다. 후일 거창군민들은 그 일에 대한 고마움으로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이를 고사하셨다.

    아버지께서는 1959년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부산MBC 사장에 취임하여 10년간 재직하시면서 1961년부터 서울MBC, 울산MBC, 진주MBC, 마산MBC 등 민간방송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고 여수MBC를 인수해 회장을 지내셨다. 또한 영남과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로터리 제 366지구를 창설해 초대 총재에 올랐다. 그뿐인가. 숨을 거두신 1987년까지 꾸준히 사회봉사활동을 실행하시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오셨다. 아버지의 정의감은 부산MBC 사장을 할 때 크게 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매우 단호한 분이셨다. 1960년 3월 마산에서 3·15 정·부통령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첫 시위가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진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시위는 점점 격렬해졌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을 단행했다. 부산MBC 생방송 팀을 마산에 급파해 현장 소식을 생중계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정은 부산MBC 사장직을 걸고 내린 것이었다. 이로써 마산 시위는 일파만파가 되어 전국으로 퍼지고 급기야 4·19 혁명을 발생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정이 많은 로맨티스트였다. 강한 자에게는 강했지만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분이셨다. 한때 아버지를 모략하고 못살게 굴었던 고위 관리 한 분이 퇴임 후 사업을 하다가 망해 끼니가 어려워지자 아버지께서는 쌀 두 가마를 보내 위로하신 일도 있다. 그 일로 어머니와 크게 다투기까지 하면서도….

    고집이 복이 되어 돌아오다

    사회생활을 해보면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하게 대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이 인지상정이 되어버렸으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행적으로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로 가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초스피드 시대인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 ‘둔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나 또한 어쩌면 ‘둔한 사람’의 부류에 속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가슴 한 켠이 뿌듯해지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나는 평검사 시절 상사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혼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74년 부산지검에 근무할 때는 검사장이 석방해 주라고 하는 피의자를 구속 기소했다가 하루아침에 특별수사부에서 송무 담당 검사로 쫓겨나기도 했다. 말뚝 같은 내 고집이 빚어낸 일이었지만 그 고집이 복이 되어 돌아온 때도 있었다.

    7년 가까운 지방검사 생활을 마치고 올라와 서울지검 형사부에 배속되었을 때였다. 억울하게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청소년 세 명을 석방하려다 차장검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 그 충돌로 나는 ‘시골 검사’라는 불명예(?)를 벗게 됐고 상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차장검사와도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시 부장검사는 내 인상을 보고 “당신 시골 구석의 농고 출신인 줄 알았는데 경기고등학교 나왔더구만” 하고 농담까지 했다.

    아버지께서는 “죄를 미워하되 인간은 절대로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약한 자들은 덕과 정으로 대하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검사생활 동안 이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사형’을 구형했던 피의자들과 지금까지도 교분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그리 야박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지금 지방의 개척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C목사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육군본부 검찰관으로 있던 시절. C는 강간살인, 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채포돼왔다. 휴가를 나갔던 그는 누나의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 가정부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강간하고 살해하였던 것이다.

    나는 사건을 조사한 뒤 ‘사형’을 구형했다. 그 후 나는 그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만 안 채 군복무를 마쳤고 검사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렇게 17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남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됐다. 1987년 서울북부지청의 부장검사로 있을 때였다.

    그 남자는 이름을 밝혔지만 나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자 군 복무 시절의 이야기를 들춰가며 자신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형선고를 받았던 C였던 것이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에 혹시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가 생각했으나 사무실로 들르라고 했다.

    다음날 그가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경계심으로 그를 대했는데 그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하고 온화하였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어느 날 관할관이 갑작스런 감형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사형을 면하고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소하였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다시 태어난 것으로 믿고 그 모두가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며 목사 수업을 받고 있다. 여러 곳에서 간증을 하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간증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찾아온 이유를 따로 밝혔다. 당시 내가 밤늦도록 그를 조사하다가 사병을 시켜 통닭 한 마리를 사오게 하였는데, 반을 쪼개서 자기에게도 나눠준 것이 그때로서는 그렇게 고마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C와 다시 인연을 맺었는데, 그는 지금 전라도 어느 지방에서 가정을 꾸리고 목사생활을 하며 가끔씩 ‘토산품’을 보내주고 있다.

    성실 강조한 실수 없는 애주가

    아버지께서는 또한 성실한 직업인이 될 것과 충실한 직장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셨다. 나는 검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지만 아버지의 당부 때문인지 출근 후 목욕탕에 가서 1~2시간 쉰 적은 서너 번 있어도 30년여의 직장생활에서 술로 인해 지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주가들에게는 대개 술과 관련된 일화가 있게 마련인데, 나에게도 사건수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대구지검에 근무하던 때 나는 경찰에서 강도미수로 구속 송치한 사건을 맡게 되었다. 그 사건 피의자는 한밤중에 복면을 하고 조그마한 주상복합 아파트 3층에 있는 남의 집 안방으로 침입해 들어가려다 주인 여자가 고함을 지르자 도망을 쳐 상가 공중변소에 숨어 있다가 경비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처음부터 범행을 부인하면서 술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술에 취해 자기 집인 줄 알고 들어갔고 복면한 사실도 없었으며 ‘도둑이야’란 소리에 놀라 달아났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특별히 현장검증을 나가보니 그 아파트는 1층이 상가인 5층 건물이었고 그의 주장대로 그의 집은 그 아파트에 있었다. 그 건물의 층계는 중앙부분과 양쪽 측면의 세 군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가 침입했던 집은 중앙층계로 올라가 3층 오른쪽의 첫 번째 집이었고 그가 살고 있던 집은 좌측층계로 올라가서 4층의 우측 첫 번째 집이었다.

    그렇게 현장을 보고 나자 술에 취하면 계단과 층수를 잘못 알고 실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그 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집주인인 여자는 방에 5촉짜리 전등이 켜 있긴 했으나 어두워서 그가 복면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해 무혐의로 석방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이 사람처럼 술로 인한 큰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이는 대주가셨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체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께서는 칠순을 넘긴 연세에도 양주 반 병을 거뜬히 즐기는 대주가셨다. 그렇게도 술을 좋아하셨지만, 술로 인해 실수를 하거나 늦게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을 떠나 있었고 아버지께서도 이런저런 사회활동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대화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그것이 미안하셨던지 아버지께서는 시간만 나면 어린 나와 함께 놀아주려고 애를 쓰셨다. 서울로 오시면 항상 나를 창경원이나 남한산성 등으로 데리고 가 이런저런 대화에 응해주셨다. 이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성실과 함께 정직을 강조하셨다. 성실과 정직은 ‘화목’과 함께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볼 때, 아버지의 교육방식은 대단히 ‘민주적’이었다. 주눅이 들게 다그친 적도 없거니와 매를 든 적도 없었다. 비록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불러서 알아듣도록 타일러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여 더욱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을 눈앞에 둔 날이었다. 반에서 줄곧 1등을 했지만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한 나를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니 “숙제는 다 마쳤느냐?”고 물으셨다. 놀이에 빠져 있던 나는 엉겁결에 “다했습니다”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발단이 됐다.

    숙제를 하지 않은 사실이 곧 들통나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로부터 크게 매를 맞았다. 호되게 매를 드시고 난 아버지께서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일화’를 이야기하며 거짓말이 얼마나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가를 일러주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시간이 많이 흘러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그것은 기자들이 쓴 책에서였다. 나는 대검 중수부장 시절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큰 사건이었던지라 그 사건 수사가 끝난 후 ‘조선일보’ 법조출입 기자팀이 ‘각하, 찢어버립시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취재 뒷이야기를 기술한 부분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수사 총책임자인 나에 대한 평가가 당연히 수록돼 있었다.

    그 책에서 기자들은 나를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하였다. 사회의 목탁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하였으니 나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가.

    수사에는 수사 기술상 미리 공개하지 못할 비밀이 많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2개월여에 걸쳐 매일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기자들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공개하지 못할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며 정면으로 대응했다. 물론 은유 등으로 농담도 섞어가면서….

    이런 식으로 수사기밀은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브리핑 자리를 리드하는 나의 화법이 미국의 ‘뉴욕타임스’나 일본의 ‘마이니치(每日)’ 신문에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외국 언론이 보기엔 내 모습이 한국 상황으로는 파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번 거짓을 말하면 그것을 포장하기 위해 다시 그보다 큰 거짓을 말하게 되고 일은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인간이기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누군가에 훈계를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기회가 있으면 가끔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을 후배나 자식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실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결코 그 실수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실수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지만 거짓말은 인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정직만큼 훌륭한 재산은 없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 정직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재산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정직과 성실을 아버지의 유산 중 가장 큰 재산으로 아끼며 이를 나의 두 아들에게도 물려주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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