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고군분투’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北의 ‘새롭고 대담한 제안’은 핵 포기 아닌 핵시설 포기”

  • 글: 송문홍 동아일보 논설위원 songmh@donga.com

    입력2003-06-24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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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일 북핵 공조 이상 없다 미국은 극복대상 아닌 설득대상
    • 베이징 3자회담은 한국 외교의 성과 햇볕정책 계승해 북핵 해법 찾겠다
    • 무분별한 이분법이 실용주의외교 방해 미국 도움 없이 한반도 평화 없다
    ‘고군분투’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尹 永 寬<br>● 1951년 전북 남원 출생<br>● 서울대 외교학과, 동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미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박사<br>●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br>● 대통령직 인수위 외교안보통일분과 간사<br>● 저서 : ‘전환기 국제정치 경제와 한국’ ‘21세기 한국 정치경제 모델’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마디로 ‘심심한’ 사람이다. 유별나게 앞에 나서거나 눈에 띄려고 애쓰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같은 ‘평범함’은 그가 대학교수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대학교수들 중에도 정권교체 때마다 새 집권세력을 향해 ‘나 좀 봐 달라’고 설쳐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과거의 ‘윤영관 서울대 교수’를 접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합리적이고 온건한 학자’로 기억하고 있다.

    정권인수위에서 통일외교안보분과 간사를 맡아 새 정부 대외전략의 틀을 짜던 시절 그는 미국을 방문해서 한 말 때문에 한 차례 구설에 올랐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북한이 붕괴할 경우 그냥 망하지 않고 무력충돌이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것보다는 전쟁 없는 핵 보유를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발언이었다. 당시 새 정권의 대북정책 방향과 관련해 국내외 관계자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돌출 발언’은 더 이상 없었다. 대학교수 신분으로는 마음놓고 할 수 있는 말도 공직에 나가면 세심하게 가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것일까? 아무튼 그 일이 ‘예방주사’가 됐다면, 윤장관에겐 오히려 득이 된 셈이다.

    윤장관과의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은 6월11일 오후, 한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이틀 뒤였다. 언론에서는 하필이면 현충일에 일왕과 축배를 든 것을 비롯해 방일 외교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던 때였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추구한다”



    -먼저 이번 방일 외교에 대한 평가로 얘기를 시작해볼까요? 정부 밖에서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애초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주변국 정상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와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데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 적극 협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물론 한미, 미일 정상회담에서 표명된 기본 원칙을 확인했고,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서 풀어나간다는 원칙에도 합의했습니다.

    두 번째 목표는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풀어나가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럽의 경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나 유럽연합(EU)을 통해 국가들간에 상당히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또 신뢰 분위기가 조성돼 있습니다. 동북아 질서, 동아시아 질서를 이처럼 한 걸음 앞서 나아가는 국제관계 질서로 발전시키자는 일종의 공동 비전을 우리가 제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과거사 문제입니다. 우리는 과거처럼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과거사와 관련해 어떤 표현을 썼느냐는 것을 놓고 이번 회담의 성패로 삼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접근법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제시한 미래지향적인 비전의 실천에 바람직한 역사인식은 무엇인가, 과거사를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하는가 하는 입장에서 접근했다는 겁니다. 물론 대통령이나 저나 일본에 대해 할 얘기는 다 했고, 우리 국민이 우려하는 점들도 충분히 전달했습니다. 그밖에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항공편 개설, 비자면제 등 양국간 현안을 놓고 빠른 시일 내에 협력을 증대해 가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방일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하고 한국의 새 리더십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합니다. 예컨대 대통령께서 일본 TBS 방송에 나가 일본 국민들과 직접 대화한 것은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정치학 교수 출신답게 ‘원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답변. 여기에 조금만 ‘살’을 갖다 붙이면 ‘한일관계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논문 제목을 붙여도 될 듯한 ‘정답’이다. 인터뷰를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 모두 아직 몸이 덜 풀어졌는지 모른다. 오늘의 ‘주제’인 북핵 문제는 잠시 뒤로 돌리고 다른 화제를 던져보자.

    -앞에서 ‘동북아 중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는 거대한 비전으로 포장해 설명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허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인 듯 합니다. 아시아라는 지역 특성상 유럽처럼 집단안전보장체제라든가 경제공동체가 형성되기 어렵다는 것은 여러 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정부가 과연 이 구상을 어떻게 구체화해 나갈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지요.

    “어떤 의미에서 이 구상은 우리에게 절박한 과제입니다. 한국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새롭게 하고 분단과 갈등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욕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단계에선 다소 추상적인 말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실한 과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향후 5년 동안에 한반도에 확실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 현 정부의 목표입니다. 이건 물론 남북한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동북아 지역국가들간의 관계가 남북문제를 풀어가기에 적합한 구조로 성격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거의 정치적·군사적 적대관계를 해소한 유럽의 방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고,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비전이 절실하다는 겁니다.

    물론 유럽과 동아시아는 지역적 성격에 차이가 있어요. 그러나 현재 동북아 국제질서는 과거 19세기 유럽처럼 일종의 강대국 권력정치질서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고, 더욱 그 방향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 제동을 걸면서 일본이 건설적인 리더십을 행사하도록 촉구하고 그 과정에 우리가 공동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동북아 정치의 물줄기를 바꿔나갈 수 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물론 그 속에서 남북문제도 풀어나갈 수 있다고 보고요.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추구해갈지 구체적인 방안은 앞으로 차근차근 정리해야겠지요.”

    -그 것과 관련해 한 국내 국제정치학자는 ‘중추국가(pivotal state)론’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동아시아의 중추국가 역할을 하려면 구체적인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지정학적인 면에서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가운데서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인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중위권 국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도적으로 양자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입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힘입니다. 19세기 때처럼 민족주의와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이건 세계정치의 큰 흐름에서 봐도 명분 있는 비전이고, 중국이나 일본 역시 동북아 향후 질서가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데에 반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비전을 제시하는 게 유효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러한 외교적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그때그때 하는 선택을 국민이 얼마나 수용하느냐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국민의 생각과 정부가 추구하는 비전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겁니다. 이번 노대통령 방일 뒤에 국내에서 벌어졌던 논란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국민들 생각 사이의 갭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봅니다.

    앞으로 몇 년에 걸쳐서 우리 정부나 일본이나 그런 점에서 국민을 설득해나가고 동북아 국가들간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도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자유무역협정(FTA)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가 심화됨으로써 평화 분위기가 강화되는 측면이 크지요.”

    “동북아 질서에 미국이 기여할 수 있어”

    -지금 말씀과 관련해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국민과의 TV 대화에서 한국과 ‘제일 가까운 나라’로 일본, 중국, 미국을 차례로 꼽았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 일각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한국에게 앞으로도 가장 중요한 동맹은 역시 미국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점에서 우려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이런 발언으로 볼 때 우리 정부가 혹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종의 등거리 외교를 추구하려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는데요.

    “우리 외교의 기본축인 한미동맹 관계와 동북아의 통합 노력은 서로 배치되는 게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1950년대에 미국이 유럽에 대해 적용한 정책은 유럽의 통합을 도와주고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거든요.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과 경제적 이해관계로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정치가 안정되는 것이 자신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도 이 지역 질서의 안정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지요. 노대통령도 미국의 이해관계가 동북아에 걸려 있다는 것이 동북아 질서 안정에 도움이 되지 마이너스 요인은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동북아 질서를 변화시키는 데에 미국의 협력을 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론이 너무 길고 무거웠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다. 한미일 3국은 한미 정상회담(5월14일)에 이어 미일 정상회담(5월23일), 한일 정상회담(6월7일)을 거쳐 대북(對北) 공조체제를 재정비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추가적 조치(further steps)’,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더욱 강경한 조치(tougher actions)’라는 해법이 도출됐다. 표현상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북한이 폐연료봉 재처리에 들어가는 등 금지선(red line)을 넘어설 경우 한미일 3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데에 합의한 것이다. 물론 그 전 단계에서 외교적·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데에도 합의했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공동성명에서는 북핵 불용(不容) 원칙과 함께 평화적 해결이 강조됐습니다. 그러나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대북 접근방식에서 양국간 미묘한 입장 차이가 드러났지요. 그런가 하면 방일을 전후한 노대통령 발언에서도 북한과의 대화 이외에 다른 방안은 배제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최근 일련의 정상 외교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한일간, 나아가 한 미일 3국간에 입장 차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저는 북핵문제 해법을 두고 한일간에 이견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컨대 한일 정상의 기자회견에서 노대통령이 대화를 강조하자 고이즈미 총리가 곧바로 이 말을 받아서 ‘압력이란 상대방을 대화로 유도해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미국 역시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기본 전략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이라크와는 다르다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반적으로 한미일 3국의 공조는 튼튼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보도처럼 3국간 견해에 편차가 있지는 않아요.”

    “핵문제는 다자간 문제”

    -곧 하와이에서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가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미중 3자회담이든 뭐든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북한과의 대화가 빨리 시작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가 최근에는 미국과 일본의 주장에 따라 5자회담에 동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회담 형식면에서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냐는 거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일각에선 우리 정부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명제 외에는 TCOG 회의에 내놓을 내용도 빈약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우리 입장에서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 분명히 있지요. 핵 문제는 양자 문제가 아니라 다자 문제입니다. 여기에 한국과 동북아의 안보가 걸려 있고 세계적 차원에서 핵비확산 문제가 걸려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핵확산금지조약(NPT)에 187개 국가가 들어가 있고 심지어 중국과 러시아까지 북한의 핵 보유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양자 차원에서만 볼 수가 있겠어요?

    그동안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가 워낙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대화의 동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한 핵문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이 주변국 국민과 지도자들 사이에 축적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고…. 우리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핵문제는 다자적 관점에서 다뤄져야 하고 이것과 연관되는 경제지원 문제 등도 결국 다자 차원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우리가 내용이 없이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추가적 조치’ 취할 의지 있나

    -미국과 일본이 5자회담을 고집한다면 동의하실 겁니까?

    “이번 TCOG 회의에서 회담 형식이 논의될 겁니다. 다른 한편으론 북한의 태도가 흥미로운데요. 북한은 그동안 북미 양자대화만을 고집해오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한국과 일본이 참여하는 다자회담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미일 공조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본에서 “대화 이외의 방법을 거부한다는 시사를 했다”고 하는 등 일련의 대통령 발언도 그런 예가 되겠지요. 반면 장관께서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추가적 조치’와 ‘더욱 강경한 조치’가 같은 말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대북 접근방식에 있어 한미일 3국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세 국가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기본 원칙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핵 보유는 용납할 수 없고 이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걸핏하면 이 말이 나오니까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자꾸 반복하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이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이 같은 원칙에 합의하기까지는 상당한 외교적 노력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예컨대 미국정부 지도자들의 입에서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같은 원칙이 전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전체 구도에서 세부 계획이 만들어지고 정책 공조가 이뤄지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한미일 3국간에는 공조의 틀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논란의 핵심은 과연 우리 정부가 ‘추가적 조치’ 혹은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할 의지를 갖고 있느냐는 점이라고 봅니다만.

    “한미 공동선언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노대통령은 그동안 ‘추가적 조치’와는 뉘앙스가 다른 말을 계속해오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발언들 때문에 미일 당국이나 우리 국민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고요.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핵문제와 관련한 발언이 끼칠 수 있는 경제적 여파나 심리적 불안감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대화를 통해 핵문제를 풀겠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도가 잘못 해석되거나 오해받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노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할 때마다 곤혹스럽지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의 이른바 ‘대담한 제안’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북한 쪽에서도 미세한 입장 변화가 감지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4월 베이징 3자회담에서 북한이 내놓았다는 ‘새롭고 대담한 해결방도’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이제 시간도 좀 지났으니 내용을 밝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그 자체가 앞으로 다자협상에서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얘기하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짐작건대 핵심은 ‘북한은 핵을 포기하겠다, 대신 미국은 체제안전을 보장해달라, 다만 핵 의혹은 거래의 최종 단계에서 해소하겠다…’는 것이겠지요.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단계에서 핵시설을 포기하겠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4월 3자회담 때 북한이 제임스 켈리 미국 대표를 불러내 ‘우리는 핵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의 그 핵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핵 협상에서 어려운 것은, 북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핵카드를 쥐고 있으려고 하고, 미국은 북한이 먼저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쪽에서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협상 자체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우리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건데요. 예를 들어 정부가 미국에 대해 단계적인 접근방식을 권유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까요?

    “협상의 첫 단계에서는 대체로 양측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협상 당사국을 둘러싼 상황 구조가 바뀌면서 양측의 기본 입장도 바뀌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해서라도 대화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런 맥락에서 보면 협상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한 것은 주변 환경 조건이나 부수적인 부분을 제외한, 북미 양측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 입장인데 그것까지도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앞으로 협상과정을 봐야겠지요. 그런데 협상이란 항상 기본 입장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므로 여러 가지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다고 봐요.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 폐기를 검증하는 데에는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지난해 10월 우라늄 핵 문제가 거론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은 핵 사찰을 받을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거지요. 아무튼 핵 검증에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또 한 가지 측면이라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당장 핵 포기를 하라고 요구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현상동결 아닙니까. 북한에 대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추가적 조치를 취하지 말아달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요. 그것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건 일종의 전제조건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지난해 10월 제임스 켈리 특사의 평양회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그와 동시에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될 것이고….”

    ‘고군분투’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윤영관 장관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 실용주의 외교로 북핵 해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가 앞으로 북한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설득할 대목이 꽤 있지 않겠습니까?

    “북한이 핵개발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를 대화로 풀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킵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안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핵 개발을 택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핵 개발이 오히려 안보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올바른 선택이 무엇이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해요.”

    -제 말은, 핵문제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미국에 대해서도 설득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에 대해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노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여러 차례 반복한 얘기, 즉 ‘다른 수단을 거론하기에 앞서 외교적 수단을 모두 소진해야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힘을 기울여 미국에 부탁한 내용입니다. 결국 그것이 받아들여져 베이징 3자회담이 열렸던 것이지요.

    이제 후속 회담 문제를 논의해야 할 상황인데, 우리의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으려면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가 대단히 중요해요. 우리가 노력해서 대화 자리를 만들어도 북한이 기존 입장을 고집한다면 대화가 힘들어집니다. 대화론자의 입지도 약화되고….”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정부 외교안보팀에 참여한 한 ‘보수성향이 강한 인사’가 윤장관에 대해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진보색깔이 강한 사람들로 대부분 채워진 현 외교안보팀에서 합리적인 성품의 윤장관이 그나마 얘기가 통한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인가. 이리저리 찔러보는 질문에도 그는 꿈쩍 않고 ‘정답’만 내놓았다. 인터뷰로는 영 재미없는 내용이 될 것 같아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한 시간 넘게 얘기하면서도 ‘제목 거리’ 하나 내놓지 않는 이런 ‘조심성 많은’ 인물이 정부에 들어간 게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화제를 좀 돌려보지요. 북한의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안보 현안 중에서도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일인데, 그렇다면 정부가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좀더 보수적인 입장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 옳은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정부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 대응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상황의 변화나 추이를 보아가면서 준비를 하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 정부 입장 변할 것”

    -가능성을 전제로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 곤란하실지 모르겠지만, 북한이 금지선을 넘었다고 할 경우에도 우리가 협상과 대화만을 강조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어떤 구체적인 상황이 실제로 발생하기 전에 우리의 대응책을 말하기는 곤란하고요. 그렇게까지 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이나 북한에 대한 설득 노력을 해야겠지요.”

    -미국은 최근 미일 간에 합의한 ‘보다 강경한 조치’를 구체화하고 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6월 초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G8(서방 7개국+러시아) 회담에서 북한의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운반하는 선박을 봉쇄한다는 제안이 있었고요. 그 외에 마약이나 위조지폐에 대한 논의를 봐도 국제사회의 대북 강경 여론을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줄곧 대화만 강조하다 보면 국제사회에서 외톨이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가질 수 있는데….

    “그때그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나갈 겁니다. 앞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우리 정부의 입장도 달라질 거라는 말입니다. 다만 현재는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그 나름의 검토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현 단계에서도 최소한 장래의 상황 악화에 대한 대응책은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비를 해야겠지요.”

    -이제 다음 달에는 중국과의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의 대북 입장이 과거 장쩌민(江澤民)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각에선 후진타오(胡錦濤) 체제는 김정일 정권의 교체에 반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후진타오 체제는 실용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정부라고 봅니다. 그래서 더욱 북한문제가 그들에게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고, 한반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매우 긍정적인 측면입니다.”

    -북핵 문제를 놓고 미중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볼 가능성도 과거보다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1994년 이후 한반도 상황의 안전판 역할을 해온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는 지금 사실상 파기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프로젝트는 유지되고 있지만 경수로 공사는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북핵 협상과정에서 한반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새로운 틀이 논의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것이 제네바 기본합의의 보완이건, 아니면 전혀 새로운 틀이 되건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인데, 여기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계십니까.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로 생겨난 것이 KEDO 프로젝트이므로 제네바 기본합의가 흔들리면서 KEDO 프로젝트도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네바 기본합의의 틀을 대체할 새로운 틀은 준비되지 않았고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그 틀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KEDO 문제도 결정되겠지요.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국민들의 관심도 높은 사안인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이제 겨우 두 번째 회담을 시작하느냐 마느냐 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회담이 몇 차례 열리고 새로운 골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KEDO 문제도 결정되겠지요. 제네바 기본합의는 미국이나 북한 어느 쪽도 파기됐다고 선언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좀더 시간을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각에선 제네바 기본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틀과 관련해 사할린 가스파이프 연결사업 등 동북아 에너지 프로젝트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이건 KEDO 프로젝트처럼 여러 국가가 참여하는 컨소시엄 방식으로 추진될 수 있고, 에너지난에 시달려온 북한으로서도 받아들일 만한 안이라는 거지요.

    “지금은 제네바 기본합의를 대체할 만한 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서 불확실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시중에 그런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분이 많지만 그런 일들이 북한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지 아니면 북한문제가 먼저 풀려야만 그런 프로젝트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도 지금으로선 내리기가 어려워요. 러시아에서 오는 가스는 에너지 수요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사할린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직 정부 차원에서 심각하게 검토되고 있지 않습니다.”

    현 정부, 햇볕정책과 어떻게 다른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과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시다시피 햇볕정책의 기조를 계승한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기본 입장입니다. 한반도의 대결 상황을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맞춰 평화공존 구도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철학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런 전제에서 남북한간 교류를 활성화시킨다, 이것이 6·15 정상회담의 기본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 핵심은 경제교류인데 앞으로 우리 정부가 추진해갈 남북 경제교류의 성격은 투명성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점, 경제교류로 인해 북한에 시장 메커니즘이 도입됨으로써 경제가 살아나는 방향에 초점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이 좀 넉넉하게 살게 되고 남북관계가 안정적으로 통합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 새 정부의 정책 목표입니다.

    또 하나 차이점이라면 남북 경제교류를 한반도만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주변국과의 경제통합이라는 거시적 맥락에서 함께 추구하는, 그런 개념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동북아 경제중심이라는 정부의 정책 목표가 남북한 관계개선이라는 목표와 별도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연결되는 목표라는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남북한간에 안보, 평화문제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거론해야 할 때가 됐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햇볕정책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김대중 정부의 외교안보팀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변화를 유도한다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북한은 얼마나 변화했다고 평가하십니까.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를 곁들여 말씀해주시지요.

    “햇볕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2000년 6월15일 정상회담 이후부터입니다. 그 후 새 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경제교류를 본격 추진하기 위한 여건이 미흡했던 것 같아요. 국내적으로 반대가 많았고 논란이 컸기 때문에 상당히 힘이 들었고, 이제 겨우 한 걸음 내디딘 상황이라고 봐요.

    그런 점에서 햇볕정책의 공과를 따지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죠. 좀더 시간이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남북관계도 상당히 변화했고 경제교류 면에서 개성공단이나 철도 연결과 같은 프로젝트가 점차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의미 있는 진전은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성공이냐 실패냐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아니냐는 거지요.”

    -햇볕정책에서 또 하나 전제는 북한은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는 것입니다. 이 정부도 마찬가지겠지요?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북간에 경제교류나 포용정책을 추진할 수 있겠어요?”

    -대북정책의 밑바닥에는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인식론이 깔려 있습니다. 그 인식에 따라 정책이 달라지고 국면마다 구체적인 접근방식이 달라진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북한은 물론 대화 파트너입니다. 북한이 만약 대화가 안 되는 상대라면 그들과 어떻게 교류를 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밤을 새워가면서 그들과 핵문제를 얘기하는 것도 일단 그 쪽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모든 교류가 끊어져야겠지요.”

    -그렇게 노력한 결과 과거에 비해 북한이 바뀌었습니까?

    “저는 점진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의 기대만큼 빠르게 변화했느냐, 그리고 국제사회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변화했느냐는 것은 별개 문제이지만, 나름대로 변화했다고 봐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오늘 다룰 마지막 큰 주제가 한미관계입니다. 먼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국내적으로 논란이 있는데, 우리 정부와 국민이 한반도 평화구축이라는 목표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군사분계선 양쪽에서 100만명 이상의 병력이 대치하는 현 상황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 우리도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정상적인 국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꿈이 있다면, 미국은 중요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왜 중요한가요. 그 같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미국과의 원활한 협조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경제 지원을 비롯해 북한의 경제문제를 해소하는 데에 미국의 도움 없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일본 역시 미국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측면이 상당히 큽니다. 아시다시피 일본과 미국은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그들이 쥐고 있는 엄청난 자본이 투자되기 전에는 북한 경제의 회생은 어려울 것이고, 북한 경제가 살아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간에 실질적인 경제통합과 평화유지도 힘들 겁니다. 국제적 자본이 북한에 들어가는 데 있어 수문장 역할을 바로 미국이 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서방 민간자본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국제경제기구 가입도 미국이 열쇠를 쥐고 있어요.

    안보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북한과 안보문제를 협상할 핵심 국가가 미국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정전체제를 영구적인 평화체제로 바꾸는 데에도 미국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미국과의 관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우리가 정말로 현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국민들이나 정치지도자들 모두 현명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맥락에서 미국을 바라봐야 하고,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느냐 여부가 대미 외교의 성패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문제의식 없이 굴욕 외교니 저자세 외교니 따지고, 친미다 반미다 논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대통령과는 달리 장관께서는 ‘가장 가까운 나라’ 첫 번째로 미국을 꼽아야겠네요?(웃음)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저는 대통령께서 순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봐요. 일본, 중국, 미국 순으로 미국이 맨 뒤에 나왔으니까 가장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미국을 가장 중요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잘못된 이분법의 포로 되지 않겠다”

    -현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주의 외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의를 내리시겠습니까?

    “중장기적인 외교 목표 없이 그날그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외교는 실용주의 외교가 아닙니다.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실용주의 외교는 이른바 친미냐 반미냐, 저자세냐 고자세냐, 남북관계 우선이냐 한미공조 우선이냐, 저는 이것을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런 이분법의 포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를 대전제로 해서 5년 단위로 볼 때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서 그 목표에 접근하는 외교, 저는 그것을 실용주의 외교라고 부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실용주의 외교라면 현 정부의 노선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점에서는 미국도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공조의 대상 또는 설득의 대상이지요.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설득의 대상이고, 또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은 우리의 국가이익이지만 동시에 미국의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미국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는 미중 관계의 하부구조다, 다시 말해 미중 관계에 따라 종속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만약 우리가 그런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에는 외교라는 것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모든 것은 강대국들에 의해 결정되고 한반도 문제도 결국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면 외교가 설 자리가 없어요.

    사실 저는 한국 외교의 문제가 세계 12, 13위라는 국력에 걸맞은 외교적 역할을 못해왔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국력이 12, 13위인데 외교적 역량은 70, 80위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6, 7위가 될 수도 있거든요. 우리 국력에 걸맞은, 나아가 국력보다 더 큰 외교 역량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세를 갖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제정치를 풀겠다는 노력을 해야지 한반도문제는 강대국 권력정치의 파생논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콤플렉스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숙명론적인, 체념론적인 국제정치관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현 시점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외교 방향이 미중간의 등거리외교입니까,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것입니까?

    “동맹관계와 비동맹관계는 구분을 해야 합니다.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관계라는 겁니다. 중국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한미관계가 독특하고 특수한 동맹관계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향후 외교안보 전략을 구상할 때 이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한미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이고, 중국은 인접 국가로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고….”

    -지금 말씀을 한미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런 만큼 우리가 한미관계를 잘 하고 있느냐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이와 관련해 지난번 정상회담 이후에도 한미관계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데요.

    “그런 점에서 우선 한국이 향후 5년간 지향할 외교 목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해요. 앞서도 얘기한 평화체제 정착, 전쟁 걱정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목표인지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둘째,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한반도 평화정착과 한미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해도 결국 정부간 관계는 국민들간의 관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현실이고, 상대방 국가에 대한 인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언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9·11테러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몇 안 되는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3000∼4000명이 하루아침에 죽고 펜타곤까지 공격받았다는 사실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충격을 주었는지, 그것이 미국의 군사안보 전략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해요.

    “한미, 상호 이해 부족하다”

    반면 미국 쪽에서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고 있는 변화, 예컨대 젊은이들이 인터넷 매체를 통해 부쩍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사회 흐름을 바꾸고 있는 측면, 지난 몇 년간 햇볕정책의 결과 남북관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바뀐 정도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상대방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변화를 정확하게 전달해줘야 하는 것이 양국 언론인데 그것이 과연 충분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부분이 보완되어야만 혐한감정이나 반미감정이 수그러들고, 한미관계를 상호 이익이 되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측 모두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터뷰를 끝낼 시간.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만 다루다보니 개인사에 대한 것은 거의 묻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것을 물어봐도 역시 ‘재미없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자의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윤장관은 입각 후에도 별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학자 출신 장관’에게 늘 던지는 뻔한 질문이었다.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학자 출신으로서 현실세계에서 느끼는 어려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별로 없다’고 대답하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국제정치를 전공하면서 현실과 학문세계가 따로 노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국제정치경제라는 학문분야 자체가 현실세계의 일들을 이론화·개념화하는 작업이고, 학문적 이론을 현실세계를 통해 검증하는 작업이 곧 공부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학문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에 갭을 느끼지 않습니다. 고민이라면 수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현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중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를 어떻게 조화시켜나갈 것이냐, 이런 현실적인 사안에 대한 것들이지 제 아이디어를 현실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니까 잘 안 되더라는 식의 갭에서 오는 어려움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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