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청계천 복원사업 시작한 이명박 서울시장

“강북 개발로 강남 투기 막겠다”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3-06-24 1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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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복원사업 시작한 이명박 서울시장
    복개된 도로 아래로 썩은 물이 흐르는 하천을 되살리고 주변 슬럼가를 정비하는 청계천 복원사업이 7월1일부터 시작된다. 인왕산과 북악산·남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모여 흘러가다 중랑천과 만나는 청계천은 한양과 초기 서울의 하수도이자 빨래터였다. 작가 박태원이 1938년에 발표한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은 쌀쌀한 겨울 어느날 청계천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의 수다로 시작된다.

    일제의 토지조사 때 농촌을 떠난 농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청계천 제방에 무허가 임시 건물이 빼곡이 들어차면서 청계천변은 서울의 대표적 인구 밀집지역이 되었다. ‘맑은 물이 흐르던 청계천’이란 말은 옛말이 되고 장마가 지면 침수되는 가옥이 부지기수였다. 전염병이 돌면 청계천에 가까운 곳에 거주할수록 사망률이 높았다.

    청계천을 덮은 복개 공사는 자유당 정권 때 시작돼 박정희 정권에서 마무리됐다. 1969년에 완공된 삼일아파트와 청계고가도로, 그리고 세운상가 등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의 트레이드마크였지만 지금은 슬럼으로 변해 서울 강북의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다. 우중충하고 낡은 구조물들을 헐어낸 2년 뒤에 청계천에는 다시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돌아올 것인가.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명박(李明博·62) 서울시장이 취임하며 청계천 복원을 추진하자 교통대란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역풍을 의식한 듯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사업에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는 듯 보인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7월1일부터 청계고가도로 철거공사에 들어가니 승용차 운행을 자제하고 지하철을 이용해달라’는 안내판이 세워졌다.

    과연 교통대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빚투성이 재정에 청계천을 서울의 센강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우선 순위가 높은 사업인가. 우려반 기대반 속에 청계천 복원사업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기대半 우려半 청계천 복원

    이명박 시장의 정치 행로는 끊임없는 도전으로 점철됐지만 순풍을 탄 항해만은 아니었다. 1992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첫 진출한 그는 1996년 정치 1번지라는 종로구에서 이종찬·노무현 후보와 맞붙어 승리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5년 동안 정치방학을 보내고 돌아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바람을 타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곧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됨으로써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할 가능성도 안고 있다.

    이명박 시장과의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날 그는 약속한 시간에 50분이나 지각했다. 그리고 한 시간 가량 인터뷰하다 청와대에서 열리는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환영 만찬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틀 뒤 1시간10분 동안 추가 인터뷰를 했다.

    -청계천 복원 같은 대공사를 하자면 중앙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한나라당 소속 서울시장이 민주당 정권의 협조를 원만하게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사업의 명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떠나 지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청계고가도로는 이미 수명을 다한, 매우 위험하고 낡은 구조물입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시장이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가만둘 수는 없습니다. 환경 복원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현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는 젊고 친환경적이어서 적극 지원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이유에 의한 반대라는 오해를 살 염려가 있습니다.”

    수수방관하던 노무현 정부는 6월5일 국무회의 보고를 계기로 적극 지원으로 돌아섰다. 노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복원된 청계천이 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고건 총리를 중심으로 관계 장관들이 긴밀히 협력해달라”고 당부했다.

    -국무회의에서 이시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나서 대통령이 지시한 내용을 소개해주겠습니까.

    “노대통령은 논의과정에서 반대하던 사람들도 힘을 합쳐 도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자동차 문화를 바꿔 대중교통체계로 나가자는 지시를 했어요.”

    얼마 전까지도 경찰이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청계천 복원과 관련한 업무 협조를 안 해줘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서울시장의 당적이 여당이었다면 경찰의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청계고가도로가 수명이 다해서 매우 낡고 위험하기 때문에 철거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차량을 통행시키면서 보강공사를 해나가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청계고가도로는 2001년 안전진단 결과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와 전임 고건 시장이 1029억원을 들여 3.8km를 긴급 보수공사하기로 결정해놓았습니다. 공사기간이 2년10개월입니다. 보수공사를 하자면 상판을 모두 뜯어내고 새롭게 만들어야 됩니다. 구조물의 복원이지요. 교량처럼 한쪽으로 차량을 통행시키며 할 수 있는 보수공사가 아닙니다. 어차피 뜯어야 한다면 그 기회에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구상입니다.

    청계천 복원은 환경의 복원이며 문화와 역사의 복원이기도 합니다. 600년 가까이 된 광교와 수표교 등 살아 있는 문화재를 복원하고 환경도 살리는 시대적인 소명입니다.

    내가 취임한 후 1일 점검 1일 보수팀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매일 안전도를 검사하고 그때그때 보수를 하는 데 하루 700만원을 쓰고 있습니다. 7월에 공사를 시작하려는 것은 7, 8월이 1년 중 가장 교통이 한산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방학하고 직장인은 휴가를 떠나 교통량이 10% 가량 줄어들어 청계천을 막더라도 교통 혼잡도가 10% 이상 올라가지 않습니다. 7, 8월에 공사를 시작해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 휴가철이 끝나는 9월 이후에도 큰 교통혼란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치적 목적은 없다

    -도심의 빌딩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노천 카페에서 연인들이 정담을 나누는 그림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초·중·고교생들까지 포함해 성금을 걷어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21개의 고풍스런 다리를 건설하자는 아이디어도 환경 퍼포먼스로는 멋져 보입니다. 그러나 주요 간선도로를 차단하기 전에 먼저 서울시 교통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나 수술을 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 시장이 임기중에 서둘러 하려는 것은 개인적인 야심, 즉 서울시장 재선이나 혹은 다른 꿈을 바라보고 그러는 것 아니냐고 질의한 시의원이 있더군요.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 중에 그렇게 오해하는 분들이 있지요. 독일과 프랑스 전문가들이 와서 현장을 둘러본 뒤 ‘청계천 고가도로 같은 구조물이 독일이나 프랑스에 있었다면 지금 이 시간부터 교통을 차단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사고가 터져야만 비로소 깨달을 정도로 안전의식이 둔감합니다.

    성수대교 경우만 봐도 보수만 했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다른 관료 출신이나 정치인보다 이러한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광화문 종로 청계천 을지로에는 중앙 정부부처·금융기관·대기업 본사·언론사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진입하는 도로 용량이 갑자기 줄어든다면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결과적으로 강북이 더 쇠퇴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습니다.

    “강남북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청계천은 복원돼야 합니다. 청계고가도로 주변은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된 1960년대의 모습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저개발 지역입니다.

    서울은 상하이·도쿄·싱가포르와 경쟁해야 하는데 도심에 방치된 지역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동북아의 경제·금융 중심지는 막연한 구호만으론 이룰 수 없습니다. 도심에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됩니다. 뉴욕·런던·프랑크푸르트에 가보면 모두 도심에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본부가 있어요.

    강남의 아파트 지역과 주변 상업지역으로는 금융 중심지가 될 수 없습니다. 여의도, 복원된 청계천 지역, 상암지역 이렇게 삼각형 안에서 새롭게 틀이 짜여져야 합니다.”

    이시장 말만 듣다 보면 청계천 복원이야말로 국가적으로 가장 시급한 사업 같지만 전문가들 중에는 교통대란으로 인한 경제활동의 위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건영 단국대 교수는 건교부 차관과 교통개발연구원장을 지낸 교통전문가이다. 그는 얼마 전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청계천로와 청계고가도로의 하루 교통량은 17만대 정도이다. 도심 동서 통행량의 30% 정도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로가 4차선으로 줄어들면 교통대란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중략) 도심지로 진입하는 도로 용량을 줄이면 도심지의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결과적으로 강북은 쇠퇴할 것이다.’

    -이건영 교수의 주장은 이 시장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인데요.

    “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던데…. 글을 쓰자면 그렇게 써야 신문에서 실어주겠지요. ‘청계천로 철거가 좋다’고 하면 신문에서 실어주겠어요? (웃음)

    나도 도시계획 전문가입니다. 서울 강북 도심에는 율곡로 종로 청계로 을지로 퇴계로 등 다섯 개 간선도로가 있습니다. 청계천을 빼고 율곡로 퇴계로 을지로 종로 4개 구간에 지하철이 다닙니다. 청계고가도로가 없어지면 도심의 평균 교통속도가 시속 21km에서 18km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교통체계를 개선하면 도심의 교통속도를 1km 가량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서울만큼 교통질서를 안 지키는 도시가 없습니다. 불법주차로 차가 빠지지를 않습니다. 교통질서 지키기 운동과 함께 대중교통 이용하기 운동을 벌일 계획입니다. 세계 일류도시인 도쿄에 가보면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경기도 일대에서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차량 대수가 하루 160만대입니다. 서울 도로 위에서 승용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79%이고 그 가운데 81%가 혼자 차를 몰고 다닙니다. 승용차의 수송능력은 25%밖에 안 되는데 승용차는 매년 20만대씩 늘어납니다.

    지금처럼 학생과 시장 보는 주부들까지 차를 몰고 나와서는 도심 교통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승용차를 몰고 나오면 주차하기 힘들게 하고 주차비를 비싸게 받아 지하철과 버스를 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런던에서는 금년 2월부터 도심 진입료를 5파운드씩 받습니다. 우리 돈으로 1만원이지요. 이 제도를 시행하고 나서 승용차의 도심 진입량이 20% 이상 감소했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선 상시 홀짝수 운행을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돼 있기 때문에 도심의 교통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교통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시민의식이 바뀐다면 좋겠습니다. 학자들 말대로 완벽하게 대책을 세워놓고 하라면 무슨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 문제는 또 다른 방법으로 풀어나가겠습니다.”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경제와 교통에 관련된 사람들은 대체로 반대하고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찬성한다. 삼보일배(三步一拜)로 새만금 간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청계천 복원의 주요 지지자이다.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이시장은 4개월째 지하철로 출근하고 있다. 퇴근은 저녁 모임도 많고 스케줄이 늘 달라지기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한다. 그는 “지하철로 출근해보니까 참 좋다”면서 “승용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아무래도 불편하겠지만 막상 타고 다니다 보면 참 편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그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초파일을 기념하는 연등행사가 일요일인 5월4일 종로 일대에서 열렸다. 통행량이 많은 시간대가 아닌 데도 도심 교통은 마비되다시피했다. 교통이 한산한 일요일을 골라 민노총이 종로에서 집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전에 실제로 평일에 교통을 차단해보는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컴퓨터로 실제 상황처럼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지금은 전쟁도 사전에 시뮬레이션을 해봅니다. 하지만 시민이 움직이는 것은 시뮬레이션 과정과 다를 수가 있습니다.

    초파일 연등행사나 민노총 일요일 집회 때 차가 막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온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죠. 모르고 나왔는데 행사가 있으니 막히는 것입니다. 청계고가도로가 7월1일부터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알면 대비를 하게 됩니다.”

    청계천은 건천(乾川)이다. 가물 때는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러니 청계천에서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하루 9만여 t의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인근 지하철역에서 배출되는 지하수 2만2000t과 중랑하수처리장에서 정수한 물 7만t을 모터 펌프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김대중 정부는 DJ의 노벨상 수상을 전후해 햇볕정책에 모든 행정 역량을 집중하는 인상을 주다 보니 다른 민생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시장이 청계천만 중점적으로 챙기다 보니 다른 부분에 소홀하다는 보도가 있던데요.

    “시정 4개년 계획에 20대 과제가 있습니다. 청계천 복원은 20대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조직이 일을 하는 것이지 시장 혼자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청계천 복원은 청계천사업본부가 맡고 있습니다. 이 공사에 소요되는 3600억원을 별도 예산으로 뽑아오지 않고 예산 절감해서 남은 돈으로 하겠다는 것도 역사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다른 일에도 굉장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감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당에서도 청계천 복원사업을 걱정스런 눈길로 보고 있더군요. 한나라당 당적을 가진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 공사로 상시 교통대란을 불러일으키면 내년 총선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죠. 이시장의 정치 생명과 연관돼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잘 되면 덕을 보겠지만….

    “이 일은 장구한 미래를 내다보고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정치적 관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나라당에서는 서울 지역 국회의원이 아니고 지방의 국회의원이 불평을 하더군요.”

    현대건설과 수의계약설

    -청계천 교통체계 개선 용역을 현대건설과 45억원에 수의계약했다가 말썽이 날 기미가 보이자 취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3개 공구로 나누어 컨소시엄 경쟁입찰 방식으로 한다지만 이시장의 친정이 현대건설이다 보니 이상한 소문도 돕니다.

    “못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대건설에 교통전문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현대건설은 옛날 정주영 회장이 하던 회사가 아니고 은행관리기업이 됐습니다. 일종의 공기업입니다.”

    인구 1000만명이 사는 수도 서울의 행정에는 민생과 관련된 현안이 많다. 전임 고건 시장은 남산에 있던 국정원 건물에 소방본부를 입주시킬 계획이었다. 이시장은 이 계획을 바꾸어 유스호스텔과 공원 등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독재정권 시대에 ‘남산’이 갖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물론 남한의 적화통일을 기도하던 간첩들을 일망타진하는 수사를 했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던 수많은 학생과 교수·종교인·언론인·정치인들이 끌려가 고생하던 곳이기도 하잖아요.

    “나도 중정 지하실 갔다온 사람이에요.”

    1980년 초 신군부가 3김을 타도하기 위해 현대그룹의 금고와 장부를 샅샅이 뒤졌다. 3김의 자금줄을 캐내려는 목적이었지만 3김에게 정치자금 대주면 혼난다는 협박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시장은 현대건설 사장 시절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 정주영 회장이 3김에게 얼마씩 주었는지 불라는 요구에 시달리며 치도곤을 당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서대문 독립공원 같은 의미를 지닌 장소인데 후대에 민주주의 기념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석이라도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표석을 세우려면 원 본부인 이문동에 세워야지요. 남산은 서울시 지부였으니 남산에 세우면 안 되고….”

    그러나 국내 정치를 사찰하고 민주화 인사를 고문했던 곳이 남산이다. 중정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도 남산이다. 표석을 세우려면 남산에 세워야 한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를 충청권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해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서울시와 시의회는 결사 반대했습니다. 한나라당에서는 집값 떨어진다며 서울 민심을 자극하는 전략을 썼지요. 이시장도 강력한 반대발언을 계속하다가 민주당에 의해 고발당하기도 한 걸로 아는데….

    “중앙선관위에 질의를 해봤죠. 서울시장이 선거 기간에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것이 법에 위반되느냐고요. 그랬더니 해당 시도지사는 발언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이 있었습니다. 서울시장과 충청남북도지사·대전시장은 선거기간 중이라도 행정수도 이전에 관해 발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선거법 위반이라며 나를 고발했다가 선거 끝난 뒤 취하했습니다.”

    청계천 복원사업 시작한 이명박 서울시장

    대담중인 이명박 시장(왼쪽)과 황호택 논설위원

    -선거 때는 수도 이전 반대 목소리를 높이다가 요새 그 얘기가 쑥 들어간 것 같아요.

    “쑥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쑥 들어가니까 내가 혼자 떠들 필요가 없어진 거죠.”

    -지금도 반대하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나는 사실 반대할 이유도 없습니다. 행정수도 이전 계획에는 2011년 이후에 1차적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8년 후 이야기잖아요. 막연한 계획일 뿐 실제로 얼마나 더 늦어질지 알 수 없지요. 나는 행정수도를 미래지향적으로 검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가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수도 옮기는 데 몇십조원이 들잖아요. 2011년 이후에 투자를 하다가 20년 후 통일이 된다면 충청권의 행정수도를 그대로 쓸 것입니까. 독일이 본에 임시수도를 두었다가 통일된 후 베를린으로 옮기니까 본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16개 정부조직 중 6개 부서를 본에 남겨두고 있어요.

    지역이 발전하려면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찾아봐야 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지방분권 시책을 펴기 때문에 지방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600년 수도를 지방으로 가져갔다가 통일이 되면 그 다음에 또 어떻게 할 겁니까. 나는 이 정권이 치밀하고 심각하게 검토하리라고 봅니다. 소리 내 반대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게 낫겠지요.”

    대선 앞두고 조사 시작한 검찰

    이시장의 앞길에는 선거법 위반 재판이라는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이시장의 측근인 신아무개씨는 선거법 위반으로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신씨는 이시장의 저서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정가 9000원)를 중앙당과 서울시 지구당에 5000권 기증했고 ㅅ교회 교인들에게 5400원씩 2770권을 제공했으며 출판기념회 홍보 유인물 9만1000장을 뿌린 것이 문제가 됐다.

    신씨는 1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는데 이시장에게 적용된 죄목은 더 무겁다. 신씨와 같은 혐의사실 외에 측근 2명에게 선거운동 대가로 매달 200여 만원씩 2361만원을 준 혐의가 덧붙여진 것이다.

    이시장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도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선거비용 한도초과로 벌금 400만원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었다. 이번에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으나 벌금 100만원 이상의 유죄판결이 확정된다면 청계천 복원공사 준공식에 서울시장 자격으로는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선거법 위반 사건을 설명하는 이시장의 표정도 밝아 보이지 않았다.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

    “선거법 위반 사건은 중앙선관위나 상대당 후보 등 대개 고발 당사자가 있는데 이 사건은 검찰이 인지수사를 한 거예요. 신씨를 홍보유인물 뿌린 혐의로 기소할 때 나를 함께 조사하지 않고있다가 갑자기 대통령선거 앞두고 조사를 시작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내가 행정수도 이전에 강하게 반대하고 한나라당 후원회에 참석해 ‘이 시대에 대통령 될 사람은 이회창 후보밖에 없다’고 말하니까 대통령선거에서 서울시장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으려고 그랬겠지요. 검찰 내부에서도 반대를 했다는데 한 검찰간부가 기소를 고집했다고 해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내가 조사받으러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여당에 유리할 거 아니에요. 배후세력이 누구라는 것을 대충 알지만 이야기 할 수는 없죠.”

    이시장이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했다면 검찰의 기소가 잘못됐다고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검찰에는 ‘캐비닛 기소’라는 것도 있다. 캐비닛에 넣어두었다가 마음에 안 들면 끄집어내 기소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은 대통령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후원회에서 ‘이 시대에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이회창 후보밖에 없다’고 말한 건 중립을 지키지 않은 처신이지요.

    “아, 아니죠. 이 시대에 대통령 할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다고 한 건 아니고…. 내가 한나라당 당적을 가진 사람인데 당연히 그런 데 안 갈 수가 없잖아요. 안 갈 수 없으니 가서 그 말도…. 그 말이 선거법 위반이라 기소된 건 아니에요. 그 말과 내가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한 것은 기소감이 아니에요.

    관련된 사람 기소할 때 함께 부르지 않고 한참 있다가 대선 앞두고 나오라고 했어요. 악의적입니다. 배후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권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엉뚱한 곳에 있던 사람인데…. 난 그걸 좀 섭섭하게 생각하는 거지요. 재판 결과야 판사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현재 서울시 화장률이 60%에 가깝습니다. 벽제시립공원묘지가 가득 찼고 하루 화장 용량이 60기인데 수요는 130기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렵게 터를 잡은 원지동화장장 규모를 축소하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서울시에서 발표만 했지 땅 한 평 산 게 있습니까. 그린벨트 해제하고 도면만 그려놓았어요. 된 게 없어요. 새로운 시작이지요.

    나는 대한민국의 모든 화장시설을 정부가 지어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형병원에서 3일 동안 장례를 치르는 데 1000만원을 쓴 부자들이 시립화장장에서는 1만5000원을 내고 화장을 합니다. 대형 병원에도 고급 화장시설을 한두 기 설치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쳐야 합니다. 대형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돈을 좀더 내고라도 화장을 해 납골을 하든지 매립을 하든지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부자들까지 보조해서 화장해줄 필요는 없는 겁니다. 대형 병원에 1기씩만 건설하면 20개 병원에서 20기의 화장장이 마련되지요. 최신 시설은 냄새도 나지 않고 매연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안 보이게 지하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벽제화장터는 시설을 전부 바꿔 성능이 좋아졌습니다. 1기 용량이 하루 5구에서 8구로 늘어났거든요. 성남 화장장엔 5기가 설치돼 있었는데 강남·송파·서초구 사람을 받기 위해 16기로 증축했습니다. 강남 사람이 안 가면 거기는 텅텅 빕니다. 그 쪽에서는 5기 정도 더 설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원지동 주민들이 (화장장 설립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반대합니다. 그래도 내가 원지동을 고집하는 것은 행정의 일관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래 계획대로 20기 건설은 어려울 것 같아요. 고건 시장이 못 하고 갔듯이 나도 못 하고 가서는 안 되겠지요.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다음 시장으로 넘겨버려서는 안되지요. 20기에서 15기로, 더 줄여 14기면 가능할지 설득하고 타협해야 합니다.

    납골당 문제도 정부 혼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단체도 할 수 있지요. 이제는 한 단계 넘어 산골(散骨)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화장했으면 강이나 산이나 바다에 뿌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지금같이 15만원 받고 30년 동안 유골을 보관해주다 보면 서울시내 아파트 숫자보다도 납골당이 더 많아집니다. 홍콩에서는 5년 동안 납골했다가 버립니다.

    용미리납골당 옆에 산골할 수 있는 공원이 있는데 상당히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화장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욕을 했습니다만 앞으로 5~10년 후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집 안에 모시기도 하지요.

    “일본 사람도 그렇죠.”

    -이시장 스스로는 화장 매장 중에서 장차 어느 것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까.

    “내가 죽을 때쯤이면 100% 화장할 거라고 봅니다.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위성도시보다는 강북 개발

    고건 전임시장(현 국무총리)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의 고향이 전북이어서 호남출신으로 분류된다. 이시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부모와 함께 귀국해 포항에서 성장했다. 부친의 고향도 포항이다. 고시장 시절에는 서울시 본청 국과장 중에 호남 출신 비율이 30% 가량이었다.

    -서울시청 국·과장의 출신지역에 따른 비율이 전임 시장 시절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가 있습니까.

    “서울시 직장협의회 사람들도 내가 부임한 후에 인사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전례가 없었던 일입니다. 영남이니 호남이니 구분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 업무를 어떤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계속 바뀔 것입니다.”

    -호남 출신 시장 때는 호남 출신이 인사상 우대를 받다가 영남 출신 시장이 취임하고 나서 몰락했다는 소문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대를 받았나요? 나는 통계를 안 뽑아봐 모르겠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겠지요. 나는 서울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기업에 있을 때도 부사장 승진자 중에 호남 사람이 셋이나 돼 내 원 고향이 호남이라는 소문이 난 적도 있어요.”

    -강남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세 곳의 뉴타운 개발과 함께 공연장을 비롯해 문화시설이 강북 쪽에 주로 건설됩니다. 뚝섬 녹지대 등 공원이 강북을 중심으로 조성됩니다. 특목고도 강북 위주로 설립하려고 합니다.

    강남의 투기를 막으려면 경기도에 위성도시를 만드는 것보다 강북의 주거 및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경기도에 위성도시를 만든다고 강남 사람이 거기 가겠습니까. 정부가 신도시를 만드는 비용의 3분의 1만 강북에 도와주면 효과가 훨씬 크리라고 봅니다. 강북에 우수한 교육 시설과 친환경적 공간이 들어서 발전함으로써 균형 개발도 이루고 장기적으로 강남의 투기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타운을 개발하면 실제 달동네에 거주하는 주민들보다는 투기꾼들에게 개발이익이 돌아가지 않을까요.

    “젊은 시절 달동네를 헤매고 다녀 달동네를 잘 이해하는 편입니다. 가난한 달동네에 태어난 사람은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강남에 사는 사람은 20년 후 재건축으로 점점 더 부유해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달동네에는 5~6평씩 깔고 앉은 사람들이 수천 명 모여 있어, 국유지를 공동으로 불하받을 수 없기 때문에 계속 가난하게 살게 됩니다. 뉴타운 개발은 강남북 균형개발이라는 목적 외에도 서민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강북 뉴타운이 들어설 곳은 건교부가 5년 동안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고 구청과 합동으로 위장전입자 실태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개발 후에도 정착할 수 있도록 재개발 사업기간을 단축하고 지역주민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합니다.”

    준비해온 질문 항목의 반도 못 물었는데 이시장이 청와대 만찬에 가야 할 시간이 됐다.

    이틀 뒤 같은 장소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시장은 이번에도 30분 가량 늦었다. 필자도 바쁘다면 바쁜 사람인데 두 번씩이나 기다리자니 기분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쪼개 쓰는 서울시장이 미진한 인터뷰를 위해 한 번 더 시간을 내준 성의는 인정할 만하다.

    기다리는 동안 벽에 걸린 역대 서울시장 사진을 둘러보았다. 윤보선(3대) 이기붕(4대) 허정(8대) 윤치영(13대) 김현옥(14대) 고건(22, 31대) 조순(30대) 시장 등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역대 31명 시장 중에 김상철씨(26대)는 그린벨트내 주택 논란으로 일주일 만에 물러났고 우명규씨(28대)는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바람에 20일 만에 퇴임했다.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민선 3기인데 서울시에서는 아직 재선 시장이 나오지 않았다. 민선 1기 조순씨는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대통령 출마에 나섰고(나중 후보 사퇴) 2기 고건씨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았다. 3기 서울시장의 임기는 3년 뒤인 2006년 6월까지.

    이시장은 두 번째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정치 이야기도 씁니까” 하고 새삼스레 물었다. 필자가 “서울시정도 중요하지만 정치 이야기를 섞어야 재밌다”고 말하자 “노무현 대통령 욕하게 만들려고 그러지” 하며 웃었다. 필자가 “서울시장이 노대통령을 비판하면 독자들의 관심이 많을 겁니다. 한번 해보지요”라고 말하자 “(노무현 정부가) 경험이 부족하다. 이제 겨우 100일 되긴 했지만…” 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본격적인 비판은 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민선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할 의사가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계획이라도….

    “지금으로서는 재선에 도전할 생각이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임을 강조하면 내가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요.”

    -레임덕이 올 수도 있고….

    “나는 레임덕에는 관심이 없어요. 현대에 있을 때도 최장수 사장을 지냈지만 늘 금년에는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했습니다.”

    -‘신동아’ 독자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으니 정치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정치를 재미있어 한다고…. 욕하면서도.”

    -이시장이 당선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했지 않았습니까. 수도권에선 전승하다시피 휩쓸었지요. 그런데 불과 6개월 뒤 대선에서는 참담하게 패배했습니다. 그 원인은 뭐라고 봅니까.

    “상대 후보가 훨씬 나아서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나라당이 시대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어떤 변화요.

    “합리적이고 냉정하게 투표권이 행사됐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다고 봐요. 아무도 예측 못했던 촛불시위가 반미시위로 연결되면서 한 쪽은 덕을 좀 봤고 또 정몽준 파동이 일어나고…. 이회창 후보와 주변 사람들이 그런 격동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대세론에 안주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에 공개된 작년 재산이 모두 186억원이더군요. 재산이 많아서 선거 때마다 상대후보들로부터 공격을 받던데요. 평생 공무원 한 사람이 186억원 갖고 있다고 하면 도둑놈 소리 듣지요. 이시장은 CEO 출신이니까 좀 다르지만….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못 밝힐 이유도 없습니다. 현대 입사 이후 떠날 때까지 재산 관리를 회사에서 해줬어요. 대한민국이니까 그 정도지 외국 같으면 더 갖고 있어야 합니다. 현대그룹 1년 매출이 8억원일 때 입사해 50조원으로 키웠거든요. 종업원이 100명 미만에서 16만명으로 늘어나 것을 보고 나왔으니까 재산 186억원이 너무 많다고는 할 수 없죠. YS가 집권해 재산 많은 공직자를 막 몰아낼 때 내가 SBS에 나가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깨끗하게 돈을 벌어 부자 되기를 희망하고 남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부정한 돈은 받지 않았다. 가난하고 깨끗하게 살겠다는 것이 어떻게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그건 현실에 안 맞는 거다.’

    깨끗한 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목표가 돼야 합니다. 깨끗하고 가난하게 살라는 것은 옛날 얘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안 맞는 생각이지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호화빌라 3채와 관련 있다는 설이 있었는데 소상하게 해명해주시지요.

    “그건 뭐 민주당에서 한마디 한 걸 가지고….”

    1996년 4월 총선에서 종로는 전국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선거구였다. 4선의 이종찬 의원(국민회의)과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어낸 이명박 의원(신한국당) 그리고 청문회스타 노무현 후보(민주당)의 3파전이었다. 선거결과는 이명박 40.5%, 이종찬 33%, 노무현 17%. 이종찬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표를 합하면 50%에 이르니까 이시장은 야권표 분열의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96년 총선에선 노무현 이겨

    -어찌됐거나 그 선거에서 3등을 했던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 돼 있으니 참 묘하네요. 그리고 이시장이 의원직을 상실한 뒤 노대통령은 그 선거구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두 번째로 금배지를 달았지요.

    “내가 그만두고 이종찬씨도 국정원장이라 출마하지 않았으니 노대통령은 혼자 나와 된 거나 마찬가지지요. 1996년 선거에서 이종찬씨의 공격에 대해서는 답변을 했지만 노무현 후보의 공격에 대해서는 대응을 하지 않았어요..”

    -경쟁 상대가 아니라서 무시한 건가요.

    “무시를 했다고 할 수 있어요.”

    -노무현 대통령도 꼬마 민주당 간판으로 17% 얻었으면 괜찮은 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종찬 의원의 반도 안 되잖아요.”

    이시장은 민선 1기 때 YS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고집해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맞붙었다가 패하고 3기에서 당선됐으니 8년 만에 집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5년간 미국 체류를 끝내고 돌아와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평당원으로 입당원서를 냈다. 그때 정치인들 중에는 그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치인과 정치권 주변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홍사덕씨와 붙으면 당신이 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시장 상인이나 식당 종업원을 만나면 ‘당신이 홍사덕씨 정도는 가볍게 누를 수 있다’는 거예요. 경선 막판에 여론조사를 했는데 내가 15%를 앞서 홍의원이 기권했어요. 나는 5년 객지생활을 하고 돌아왔고 그는 현직 국회부의장에 5선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말 잘하고 잘생겼지, 글도 잘 쓰지….”

    정치인들이 보지 못하는 바닥 민심, 바닥의 인기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신화를 만든 사람에게서 서민들은 동일시의 대상을 찾는다고나 할까.

    “내가 200억원대 부잔데 지지자는 전부 서민입니다. 종로에서 이종찬·노무현씨하고 붙었을 때 가난한 창신동 숭인동 사람들이 다 나를 찍은 걸로 나타나자 이종찬씨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부자동네인 삼청동에서부터 개표를 해오다가 마지막으로 청계천 일대 투표함을 열어 개표했습니다. 내가 몇 천표 뒤진 상황에서 남아 있는 건 달동네투표함뿐이고 달동네엔 국민회의 지지층인 호남출신이 40% 정도니까 이씨는 다 이긴 걸로 판단한거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노무현 후보도 내 재산이 200억원이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월급쟁이가 어떻게 200억을 모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죠. 그렇게 공격을 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전부 나를 찍었습니다.”

    -대북 비밀송금에 대해서 특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몸담았던 사람으로 정주영 회장이 열정을 쏟은 대북사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정주영 회장은 연세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 2세(정몽헌)가 주도했습니다. 2세와 주변 사람들이 기업과 정치를 철저히 분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기업이 정치와 밀착하면 잠시는 좋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좋지 않다는 건 역사적으로 증명이 돼 있습니다. 현대는 YS 때 서운해했다가 DJ정권이 들어서자 북한사업에 사운을 걸었습니다. 북한사업을 독점하고 싶은 현대가 햇볕정책의 행동대로 나섰다가 나쁜 결과를 가져온 거죠.”

    청계천 복원사업 시작한 이명박 서울시장

    청계천 복원사업의 추진을 위해 이명박 서울시장 등 관계 공무원과 외부 전문가들이 복개된 청계천에서 현장점검을 하고 있다(청계천 옛 광교다리부근. 2002년 7월 11일)

    이시장은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 ‘정주영 회장이 1980년대에 신군부하고 갈등을 겪으면서 정치에 대해 환멸과 동경이라는 모순된 정서를 갖게 됐다’며 정회장이 정치에 뛰어든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같은 논리를 이시장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관급공사를 따내느라 부패한 정치권과 관료들의 행태를 보게 되고 신군부에 시달리면서 이시장도 정치에 대한 환멸과 동경이라는 모순된 정서를 품게 된 게 아닐까.

    이시장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1964년 한일회담 반대 6·3 사태에 연루돼 내란선동 혐의로 5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4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때 함께 학생운동을 하거나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박정훈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6·3세대 대다수가 나중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연유를 설명해주겠습니까.

    “6·3 세대 중에 내가 유일하게 경제계에 들어갔죠. 물론 학생 때 정치성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한국이 제대로 되려면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 경제가 한 단계 더 올라서자면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씨의 정치 참여에는 반대했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가진 기업주가 권력까지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현대 쪽에서는 사장 하던 사람들이 국민당의 중앙당 간부나 지구당 위원장 맡아서 열심히 뛰었는데 이시장 혼자만 신한국당으로 가니까 ‘배신자’라는 이야기도 나왔지요.

    “정주영 회장과 나, 두 사람의 관계는 (정회장) 아들이나 형제들도 잘 몰라요. 나머지 사장들은 이야기 상대가 안 되니까…. 정회장도 내가 그만둔 뒤에 나에 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고 나도 정회장에 대한 발언을 자제했습니다. 그때 주간지, 월간지들이 둘의 관계를 취재하려고 한 달 동안 뛰어다녔지만 정회장 입에서 내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기념관은 박정희 고향에

    -국민당 창당할 때 안 따라가 정회장과 서먹한 기간이 꽤 오래 계속됐는데 언제 화해했습니까.

    “화해라는 용어는 맞지 않아요. 헤어질 때야 섭섭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너와 월급쟁이 전문경영인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었어요.

    정주영 회장은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에서 공동 1위 가라면 몰라도 2등 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확고한 위치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정주영 회장을 존경하는 거고 정회장도 나를 인정했죠. 중간에 그분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찾아가 뵈었습니다. 그분 돌아가셨을 때도 내가 가장 먼저 빈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굽히지 않을 건 굽히지 않았습니다. 별것은 아니지만 1만원 짜리 내기골프할 때도 퍼팅에서 기브를 인심 좋게 드리지 않았어요. 정회장이 기브를 달라고 하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캐디들이 깜짝 놀라더군요.

    내기 끝나봐야 10여 만원 왔다갔다 하는 정도이지만 정회장이나 나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요. 남들은 그런 관계를 잘 모르죠. 그런 관계에서는 헤어짐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어요. 정회장은 나를 신입사원 때부터 키운 사람 아닙니까. 나를 면접 본 분이죠. 현대 사이즈만큼 나도 큰 거예요.

    봉급생활자들에겐 누구에게나 자신은 상사의 지시에 꼼짝못하고 쩔쩔매도 누군가는 당당해지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어요. 나는 전문경영인 1세대로서 많은 직장인들로부터 그런 기대를 받고 살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나를 다시 데려가려고 하니까 현대에 남아 있는 사장들이 밤에 찾아와 혹시 (이명박이) 다시 오면 우리의 희망이 깨진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하더군요.”

    현대건설은 한때 기술력으로 한국에서 짓는 원자력발전소 수의계약을 독점했다. 그러나 영광원자력발전소는 정치권과 관료들의 견제로 두 번 낙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신화는 없다’에는 ‘영광원자력발전소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겠지만 정부에서 발주한 거대 공사를 수주하면서 정치자금이 한 푼도 지출되지 않은 최초의 공사’라고 회고한 대목이 나온다. 거꾸로 해석하면 영광 3, 4호기 이전에는 대규모 공사마다 정치자금을 줬다는 얘기다. 관급공사와 관련한 정부여당의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해 현대건설 전 사장의 증언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박정희 정권 때 정치자금을 공개적으로 받았어요. 원래 조달청이 물품 구매만 하다가 박정희 정권 중반쯤부터 건설공사 계약까지 도맡았습니다. 조달청에서 한 계약은 공식적으로 ‘정치자금 얼마’ 하는 식으로 세금 내듯이 정해졌어요.”

    -대개 공사금액의 몇 %나 냈습니까.

    “나는 모르죠. 오너들이 했으니까. 그렇게 공개적으로 하다가 전두환 정권 이후에 비밀리에 하는 걸로 바뀌었어요.”

    -이건 서울시 행정에 관한 사항이기도 하지만 역사관·시대관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상암동에 건립하려는 박정희 기념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박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곁들여 말을 해주시지요.

    “박 전 대통령을 경제인 입장에서 평한다면 아주 뛰어난 지도자입니다. 학창시절에는 반(反)박정희를 외쳤는데 재계에서 일하면서 ‘이 사람이 이 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어요.

    그러나 정부예산으로 기념관을 짓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예산지원을 하기로 했다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박 전 대통령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고향 땅에 세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한 것은 영남의 표심을 잡기 위한 동진(東進) 전략의 일환이었지요.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나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큰 인물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지 않겠습니까.

    “노벨상 받기 위해 일본과 관계 개선하고 북한과도 화해할 때였으니까요. 그렇더라도 정부에서 기념관 짓는 데 몇백억 주겠다고 한 것은 이해가 안 돼요.”

    -전임 고시장에 대해 관가에서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서울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고시장이 해놓은 시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평가해보시지요.

    “평가를 솔직하게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재미로 쓰려고 하는군요.

    고시장은 전체 평균 공직자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분으로 봐야지요. 그러나 사업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시장은 뚝섬을 개발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공원과 숲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시대적 변화죠. 지금은 개발에서 오는 이익보다는 환경을 복원해 숲을 만드는 것이 백년, 천년을 봐서 더 좋죠. 고시장이 일을 잘했다 못했다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시장 재임 때 화장터를 많이 짓겠다고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납골만 해서는 안 되고 산골을 하자는 운동을 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시장은 가난한 집안의 3남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둘째형은 한나라당 4선의원(포항남 울릉)으로 원내총무를 지낸 이상득 의원. 형제 중에서는 이상득 의원이 단연 공부를 잘했다. 포항 동지상고에서 줄곧 1등을 하다가 서울상대에 들어갔다.

    이시장의 저서에서 형제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이상득 의원이 서울상대에 진학하면서 모든 형제자매가 이의원을 위해 희생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와 노점상을 시작했고 이시장은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가 은사들의 노력으로 겨우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했다.

    -어릴 때 둘째형에 대한 시샘이랄까 콤플렉스가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시샘을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컸어요. 형이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으니 상대가 안 되잖아요. 그리고 형이 서울 올라갔을 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고 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상득이 형이 공부를 잘하고 나는 어렸으니까 집안에서는 형 하나만 공부시키자고 한 거지요. 나는 야간학교에서 3년 내리 1등을 하는 바람에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지만 머리가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원래 그 학교가 그렇게 형편없었거든요.”

    -대기업체 사장은 형보다 먼저 하지 않았습니까.

    “한참 먼저 했지요. 갈등은 없어요. 가난한 집안이지만 우애가 남달랐어요. 어머니 기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형제들이 모입니다.”

    이시장은 형제간 경쟁의식(Brethren rivalry)의 심리학을 부인하지만 어쨌거나 공부 잘하고 똑똑한 형의 모습이 동생의 분발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28세에 현대건설 이사

    ‘신화는 없다’에는 이시장의 얼굴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시장이 어렸을 때 ‘집안 형제 중에 명박이가 제일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는 것이다. 보상심리에서인지 정주영회장이 소개하는 여자도 마다하고 미모의 이화여대 출신과 결혼했다. ‘신화는 없다’에는 부인이 이대 메이퀸 출신이라고 나와 있으나 실제 메이퀸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모는 메이퀸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28세에 현대건설 이사가 돼 주간지에 미스코리아, 탤런트들하고 기사가 함께 나왔어요. 그러니까 보상심리에 의해 결혼한다면 미스코리아하고도 할 수 있었겠지요. 나와 딸을 혼인시키려고 찾아온 부모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보상심리로 결혼한 건 아닙니다. 집사람의 오빠가 내가 다녔던 야간고등학교 선생님하고 친구예요.”

    여섯 살 연하인 부인 김윤옥씨(56)와 사이에 3녀1남을 두었다. 첫딸을 낳은 후 2년마다 딸을 보태 딸 셋을 둔 후 막내아들(25)을 얻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데서도 집념이 엿보인다.

    -하루 스케줄은 어떻게 짜여집니까.

    “4시45분경이면 기계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날 회의할 기록을 좀 보고 나면 1시간이 지나가죠. 운동 좀 하다가 7시에 출근준비를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시장실에 도착하면 7시30분입니다. 그리고 30분 단위로 일을 합니다.

    저녁에는 거의 날마다 약속이 있죠. 서울시장은 국제행사에서 호스트를 해야 돼요.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밤 11시 이전에 귀가하는 편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녹음기를 끄자 이시장은 “이번 인터뷰도 다음번에 책으로 묶어내느냐”고 묻고 “책이 많이 팔리려면 인터뷰 기사를 잘 써야겠다”고 말했다. 걱정해주는 듯하면서도 다의성(多義性)을 지닌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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