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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 글: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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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평생 조흥은행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셨다. 어쩌다 집에서 쉬는 날이면 우리와 놀아주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어릴 적에 배우셨다는 한문을 소리내어 읊으시곤 했다.
  • 그러한 아버지는 신비롭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으로 느껴졌다.
  •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어렵게 부탁의 말씀을 꺼내셨다….
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솔베이지의 노래’와 ‘모닝 무드’를 작곡한 그리그의 고향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방문한 이인호 이사장과 부모님 그리고 동생(오른쪽부터). 젊은 시절 이 이사장은 아버지와 영어로 쓴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 아버지가 내 방엘 찾아오셨다. 우리집에 와 계실 때에도 없던 일이었다. “오늘은 네게 특별히 부탁할 일이 있다.” 마치 어려운 청탁이라도 하시려는 듯 하도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셔서 나도 좀 긴장이 되었다. “우체국 취미우표 창구에서 나를 도와준 아가씨들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했으면 좋겠는데 화장품이든 뭐든 간단한 선물 세 개만 연말 전에 준비해줄 수 있겠니?” “그럼요. 27일까지는 준비해드릴게요.” 너무도 하잘것없는 일을 그처럼 어렵사리 부탁하시는 아버지께 쉽게 대답을 드렸지만 결국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6일 아침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독서습관 길들여준 아버지의 책 선물

우리세대 딸들이 대체로 그렇듯 아버지는 내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존재이셨다. 증조부모님까지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던 우리의 대가족 구조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재롱을 즐기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르신들의 특전이었지 젊은 부모들의 몫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주로 증조할머님이나 어머니를 통해 들으셨다. 이따금 빙그레 웃으실 뿐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시한다거나 공부를 잘하라느니 어쩌니 하는 교훈조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늘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야 귀가하셨고 어쩌다가 집에서 쉬는 날에는 우리들과 놀아주는 대신 눈을 감고 앉아 어릴 적에 배우셨다는 한문을 소리내어 읊으셔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약간은 신비롭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으로 비치기도 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퇴근 시간에 가까운 친구이신 정진숙 선생님의 을유문화사에 들러서 새로 나온 아동문학 책을 한아름씩 가지고 들어오시는 일이었다. 해방 후라 한글로 된 좋은 책이 아주 드물던 시절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하는 소파 방정환의 동화집과 아동 문학, 세계명작을 소재로 한 만화책들은 정말 가뭄의 단비 같았다. 6남매 중 맏이인 나와 바로 아래 두 남동생은 서로 먼저 보겠다고 싸우느라 책을 찢기 일쑤였고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또 새 책을 가져다주시곤 하셨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기 시작한 책에 대한 내 갈증은 무엇이든 한글로 된 것이면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독서잡식의 습관이 되어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는 소설이나 야사(野史)류의 책, ‘신천지(新天地)’ 같은 잡지 뒷부분에 실린 연재소설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집어삼키고 드디어 동네 만화가게의 그리 신통치 않은 책들까지 넘보게 되었다. 서울사대부중 입학식 때 아버지께서 내 손을 잡고 데려다주셨는데 입학 선물로 ‘이차돈의 사’를 주셨다. 그런데 내가 그 책을 이미 읽었다는 것을 아시고는 조금 놀라시던 기억이 새롭다.

평생 한 직장에 봉직한 宗孫

이제 생각해 보면 해방을 맞이하던 당시(초등학교 3학년) 유창하게 했던 일본어로 책 읽는 능력을 계속 키웠다면 독서에 대한 내 갈증이 조금쯤은 체계잡힌 독서로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풍미하고 있던 반일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해방 전부터 한글을 익혀 해방되면서 곧바로 우리말로 된 책을 읽을 수 있던 몇 안되는 학생이었다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꼈던 한편 초등학교 교과과정의 수준을 뛰어넘는 어른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눈을 피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학교 공부를 떠나서 독서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배운 ‘황국신민선서’를 집에 와서 자랑스럽게 외웠을 때 어른들께서 신통해 하면서도 무엇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던 일, 전쟁에 져 황급히 한국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헐값으로 살림을 처분하니 제발 사달라고 우리 집엘 찾아왔을 때 내가 그처럼 소원하던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자 아버지께서 “적산은 손 대는 법이 아니다”며 한마디로 거절하시던 일 등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적 반일주의에 빠져들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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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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