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문화판 욕쟁이’ 바탕골예술관 대표 박의순

“벗으면 될걸 고백하면 될걸 왜 복잡하게 사나”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1-29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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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판 욕쟁이’ 바탕골예술관 대표 박의순
    양평 바탕골예술관 박의순 대표는 한때 사람을 만나면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톨릭 신부에게도 묻고 개신교 목사에게도 물었다. 유명한 시인에게도 묻고 이름난 학자에게도 묻고 나라 살림을 맡은 높으신 어르신에게도 물었다. 빠른 말씨로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지옥이 정말 있어요?”

    반응은 천태만상이었다. 신성모독이라는 듯 화를 내는 이도 있고, 빙그레 웃는 이도 종종 만났고, 말없이 고개를 흔드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구상 선생이 이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고 공부의 경계가 까마득히 높다고 소문난 정양모 신부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얼른 그 앞에다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얼른 여기다 사인하세요.” 그는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노상 즐기면서 살아왔다. 종교인이되 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굳이 모아보고 싶은 것은, 쓸데없이 ‘목에 깁스한 사람들’을 눈 뜨고 못 봐주는 박 대표의 기질이었다. 격정에 차서 위선과 상식을 통렬하게 비웃어주는 판을 기획했고, 온갖 시련을 견뎌내며 그런 마당을 쉬지 않고 펼쳤다.

    “한때는 예수님 장가 보내자고 지랄하고 다녔어요. 아니 예수님도 불알 달고 나왔으면 장가를 가야 할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런 말을 하면서 깔깔 웃는 박의순씨는 뻔뻔스럽거나 저돌적이거나 거칠기는커녕, 여리고 곱고 유순하기 짝이 없다. 얼굴빛과 골상과 이목구비를 흐르는 윤곽선에서 험한 말, 험한 꼴을 당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귀티가 해말갛게 흐른다. 눈이 맑다. 예순일곱의 초보할머니인데 얼굴에는 어린애 같은 호기심과 장난끼가 넘쳐난다.

    종횡무진 욕으로 안기부 제압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을 그대로 옮겨담으면 대중매체에 올리기 어려울 만큼 강도가 높지만 실제의 울림은 전혀 다르다. 나오는 말이 파격적일수록, 주변을 둘러봐야 할 만큼 욕설의 단위가 커질수록 나는 유쾌, 상쾌, 통쾌한 웃음이 뱃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거짓말에 까만 거짓말, 하얀 거짓말이 있다더니 욕에도 그런 색깔이 있다면 박의순 대표의 욕은 단연 ‘하얀’ 욕이다.

    “내가 신부님을 만나면 막 떠들어요. 솔직하게 말해보자고요. 하느님이 잘 하라고 달아준 불알을 멍청하게 썩히는 예수라면 그거 고발해야 된다고요. 우리, 예수님 장가 보내드립시다. 이러고 나서면 신부님들이 못 말리겠다 싶은지 하하 웃어요.”

    거드름부리거나 엄숙주의에 파묻혀 있거나 위선적인 기운이 느껴지면 그의 욕은 종횡무진, 천의무봉으로 퍼부어진다. 용솟음치는 그의 기운을 억누르는 세력이 행여 나타나면 그의 기운은 화산처럼 폭발한다. 이런 그에게 사건이 넘쳐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바탕골소극장, 우리나라 소극장 문화의 출발점, 미술관과 극장과 커피숍과 아틀리에를 한 건물에 가지고 맹렬하게 문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살아온 박의순씨를 새로 옮긴 양평의 바탕골에서 만났다. 눈에 띄게 흰 피부에 윤곽선이 섬세한 얼굴, 나는 내심 그 소문난 욕이 언제쯤 시작되려나 흥미진진하게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굴에 웃음을 담고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간 동숭동 바탕골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박종철 추모식 사건부터 터져나왔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 죽었잖아요. ‘턱’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스쳐갔어요. 당장 연극하는 기국서씨를 불렀지. 그래서 ‘물고문’이라는 퍼포먼스극이 만들어진 거야. 현수막 대신 바탕골 전면에 검은 만장을 내걸었지. 그런데 ‘동아일보’가 바탕골에서 박종철 추모식이 열린다고 써서 난리가 났지. 어느날 안기부라며 전화가 왔어요. 대뜸 ‘당신 죽고 싶어, 살고 싶어?’ 하는 거야. 나는 안기부가 뭔지 몰랐어요. 중앙정보부라고 했지 어디 안기부라고 했어야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뭐가 뭔지 모르니 겁날 게 없지. 안기부를 나는 안건사라고 들었거든. 왜 그 의자 만드는 안건사 있잖아. 나도 참 무식하지. ‘남이야 죽고 싶던 살고 싶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의자나 잘 만들면서 처박혀 있어라 이 나쁜 놈아’ 그랬지. 그랬더니 그쪽에서 되레 이 여자가 뭘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큰소리 치는구나 싶었던 모양이야. 찔끔하더니 끊어버리데.”

    박종철 추모제 이후 바탕골은 ‘9일장’ 사건으로 다시 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박의순을 말하려면 일단 9일장 이야기부터 풀어놓는 게 낫겠다. 그의 감각과 순발력과 에너지와 추진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들이 거기 다 들어 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동숭동에 바탕골예술관 문을 연 것은 1986년 4월이었다. 개관 이래 연일 화제만발이었다. 매일 무용을 공연했고 기발한 퍼포먼스를 벌였으며 사람들을 불러모아 시낭송을 했다.

    ‘문화판 욕쟁이’ 바탕골예술관 대표 박의순
    이듬해 7월, ‘바탕골’이란 이름이 문화계 전반에 커다랗게 돋을새김되기 시작할 무렵, 공연하기로 했던 연극이 갑자기 펑크가 났다. 9일 정도 극장이 비게 생겼다. 박 대표의 머릿속으로 전광석화처럼 아이디어가 지나갔다. 굿을 하자! 내가 무당이 되어 굿 한판 벌여보는 거야!

    진작부터 굿에 관심이 있었다. 개관 기념으로 만신 김금화를 불러 걸진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종합예술이다, 뭐다 이전에 그저 한바탕 시끌벅적한 판을 벌이는 것이 좋았다. 그는 기질적으로 타고난 무당인지도 모른다.

    당장 대규모 행위예술 마당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아니,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즉흥의 대가다.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주먹구구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대신 ‘무당답게’ 번뜩이는 영감이 있었다. 세상을 향해 아무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마음을 열어놓을 줄을 알았다.

    1987년이었다. 6월항쟁이 막 지나고 서슬퍼런 독재가 한풀 꺾일 즈음이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 목숨들이 수두룩했다. 원한을 풀어줘야 할 혼령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해 1월엔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을 받다 죽었다. 6월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도중 최루탄을 맞고 친구 어깨에 기대어서 죽었다. 그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하니 박 대표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큰 굿을 한판 벌이고 싶었다.

    “내가 젠장 정치를 알어? 민주투사이길 해? 애국심은 무슨 개뿔…. 그냥 한바탕 큰소리 치면서 지랄 떨고 놀고 싶었던 거지.”

    시작은 단순했다. 바탕골을 열면서 마당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그 나무가 뿌리를 못 내리고 비실거렸다. 비싼 나무이기도 했지만 푸른 잎이 누렇게 변해가는 꼴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기가 싫었다. 광목으로 그 나무를 감싸보면 어떨까 싶었다. 광목을 감싸는 뜻은 환생을 비는 마음이었다.

    나무를 감쌀 생각을 하다 보니까 건물 전체를 모조리 광목으로 두르고 싶어졌다. 3층 건물을 흰 천으로 친친 동이자니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광목이 필요했다. 서울시내 광목을 모조리 사들였다. 1000마의 광목을 사는 데 그때 돈 200만원이 들었다.

    극장 입구에는 탄생을 상징하는 금줄을 걸었다. 죽음은 탄생과 맞물리는 절차 아니랴, 하다보니 죽음뿐 아니라 부활까지도 염두에 두게 됐다. 현관 원통형 홀에는 검은 종이로 신주를 만들어 모셨다. 사자밥도 짓고 문 앞에 짚신도 준비하고 넋전도 만들고 사람 형상을 크게 오려 삼층 꼭대기에서 아래로 늘어뜨렸다. 극장 앞에 있던 돌조각에도 흰 광목을 감쌌다. 조각의 허리에 새끼줄을 둘렀더니 음산하고 기괴해졌다. 죽음의 분위기가 물씬 났다. 검은 상복을 입은 박 대표가 모든 의식을 주관했음은 물론이다. 사실 눈물도 철철 흘러넘쳤다. 예술관 전체가 영락없는 초상집이었다.

    청와대와 안기부와 경찰은 물론이고 구청과 동사무소까지 이 초상집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공연계획은 극비에 부쳐졌고 찾아오는 기자들도 쫓아냈다. 그러나 소문이 새나가 바탕골 주변을 빙빙 돌면서 감시하는 눈길들이 늘어났다.

    “퍼포먼스라는데, 공연예술이라는데, 더구나 주인이 입만 열면 욕을 바가지로 퍼부어대는데 잡아죽일 수도 없고 말야, 하하하….” 그러나 견제와 압력은 여러 통로로 들어왔다. 아까 말한 안기부 전화도 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가 최고의 존경을 바치는 구상 선생을 통해 공연을 막으라는 압박이 있었다. “내가 그 영감님이라면 깜빡 죽지. 학식도 외모도 인품도 신앙도 시(詩)도 완벽에 가까운 분이거든.” 그래서 한 발 양보했다. 상청에 박종철, 이한열의 위패를 걸려던 것을 취소했다. 대신 그림과 시를 내걸었다. 시는 산골소녀 김옥진의 것이었다. ‘조금 아픈 것은 참 고마운 아픔’이란, 생명과 삶에 감사하는 눈물겨운 내용이었다.

    “우리 모두가 박 여사의 원숭이네”

    구상 선생의 코치로 검은 무명을 사와 아홉 개의 고(묶음)를 만들었다. 9일장이니까 하루에 한 개씩 그 매듭을 풀기로 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시낭송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했다. 타의에 의해 파괴되는 생명과 그 분노를 담은 기국서의 행위예술 ‘방관’, 이를 춤으로 표현한 임경숙의 ‘우리의 아벨’, 판소리 심청가를 행위예술로 각색한 ‘청의 죽음’, 춤과 행위예술의 결합공연인 신영성의 ‘아굴의 기도’, 무세중의 ‘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

    이런 흐드러진 육체언어의 난장을 끝낸 후 마지막날엔 광목을 벗겨 태우고 지신밟기와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 바깥 포장마차에다 맥주와 땅콩, 막걸리와 부침개를 푸짐하게 늘어놓아 행인들에게 마구 나눠줬다. 이런 진정한 의미의 축제를 벌이면서 그는 살맛이 이글이글 솟는 것을 느꼈다.

    예술관 실내 곳곳에는 50개의 비디오 화면이 설치됐다. “당시만 해도 비디오가 어디 흔했나. 외국기자가 광주사태를 찍어놓은 화면을 수녀들이 치마폭에 숨겨다니면서 성당 안에서 몰래 틀곤 했거든. 그걸 바탕골 곳곳에 잔뜩 비출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취소했다.

    ‘문화판 욕쟁이’ 바탕골예술관 대표 박의순

    양평 바탕골예술관을 찾은 이들에게 도자기에 대해 설명하는 박의순씨.

    그 과정에서 박 대표의 욕 실력은 엄청나게 늘었다. 안기부 직원이 왔다 가면 뒤에 대고 주먹쥐고 감자를 먹였다. 그의 이 동작은 남들과는 반대다. 오른손을 왼손이 만든 구멍 속에 쑥 집어넣어 감자를 먹이는 대신 구멍 밖으로 힘차게 빼내는 방식이다.

    “이웃에 살던 샘터의 김재순씨가 그걸 보고 무슨 짓이냐고 물어요. 그 양반 점잖은 분이잖아요. 아니 ‘X할 놈’이라 그러면 그게 뭔 욕이에요? 되레 좋은 거잖아. 그래서 ‘X도 못할 놈’이라고 이렇게 빼내는 거라 했지. 그랬더니 그분이 막 웃어.”

    그러나 나중에 팔도 욕을 모은 욕파티를 준비하면서 욕의 어원과 본질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흔하게 쓰는 ‘X할 놈’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됐다. 그 후부터 박 대표의 욕이 달라졌다.

    “그 말 앞에 ‘제애미’라는 말이 생략되었다잖아? 제 에미하고 붙어먹는 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 큰 욕이 되나봐. 그거 지독한 악담이잖아. 나는 욕을 해도 악담은 안 해요. 우라질 놈, 오살할 년, 염병할 놈. 서울 욕에 그런 게 많아요. 지독한 욕이지. 나는 그런 거는 싫어.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욕을 바꿨어요. 씨팔 좃팔 대신에 좀 길기는 해도 ‘제에미 밑구멍으로 다시 밀어넣을 놈’이러지. 하하하… 김재순씨가 ‘무슨 그런 욕이 있어?’ 하데. ‘아니 얼마나 좋아요. 본향으로 다시 보내주겠다는 거 아녜요’ 했지.”

    그의 욕은 아닌게아니라 거칠기보다는 애교스럽다. 이를 악물고 상대를 악담하고 씹어뱉는 게 아니라 마음을 크게 열고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어 헤치는 욕이다. 그래 듣는 사람 속까지 확 터지게 해준다.

    청와대, 안기부, 시청, 구청 또 누구누구 기억도 나지 않는 여러 사람과 승강이를 벌이면서도 9일장은 성황리에 치러졌다. 관객들은 입장료 대신 굿에 쓰인 소품들을 돈 내고 샀다. 그 행위예술판에 온몸으로 동참했던 한 사람은 지금도 당시 공연을 엄청나게 신선하고 놀라웠던 경험으로 기억한다. 많은 비용을 들여 설치한 모니터로는 광주사태 현장을 찍은 비디오 대신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틀었다. 아무리 새매 같은 박 대표라도 물러설 때는 물러설 줄을 았았던 것이다.

    죽음에 대해,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아픔과 인류의 아픔에 대해 극명하게 말해줄 ‘광주’ 대신 엉뚱하게도 찰리 채플린이 나와 온종일 흑백으로 돌아다니는 화면 앞에서 박 대표는 헛웃음을 웃었다. 허탈하게. 크게. 검은 상복을 입은 채로. 무당 같은 신명을 잠시 멈추고서. 그걸 보고 구상 선생은 말했다. “우리 모두가 박 여사의 원숭이네.” 이상하게 박 대표는 그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연극 ‘매춘’ 소동

    이듬해 봄 바탕골은 다시 사건에 휘말렸다. 바탕골이 준비한 ‘매춘1’ 공연이 공연윤리위원회 대본심의에 걸려 ‘원고 부분수정’ 판결을 받은 것이다. 박 대표는 이 판정에 불복하고 공연을 강행했다. 서울시는 공연법에 의거하여 극장을 관할경찰서에 고발조치했다. 이에 박 대표는 변호사를 사서 맞섰다. 공연윤리위원회와 소극장 대표가 본격적인 법정싸움에 돌입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사설로 다뤘다. 사전심의제도 자체가 없어진 오늘, 격세지감을 주는 이 기사를 다시 읽어보자(당시 표기법 그대로 옮겼다).

    극단 ‘바탕골’이 지난 4일부터 공연하고 있는 연극 ‘賣春’이 공연법위반 및 외설시비로 물의를 빚고 있다. 극단 ‘바탕골’은 동숭동 대학가에 있는 200석 규모의 연극전문 소극장인데 방학을 맞은 청소년 관객들로 연일 초만원을 이루고 있고 또 지난 5일에는 주부 20여명이 ‘퇴폐공연중지’를 주장하며 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초 이 시비는 공연윤리위원회의 대본심의에서 내용 중 외설 음란부분에 대한 부분개작판정을 받은 것을 극단이 이에 불복, 공연을 강행한 데서 비롯됐다. 公演法에는 대본에 대한 公倫의 사전심의를 거쳐 당해 시도에 공연신고를 하는 법적 절차를 받도록 돼 있다. 이를 위반하면 시도는 공연중지 혹은 공연장 폐쇄조치를 할 수 있다. 서울시가 관할경찰서에 이를 고발 조치한 것은 바로 이 公演法에 근거한 것이다.

    지난해 여름 이후 각계의 자율화 물결을 타고 문화예술의 창작의 자유도 그 폭이 많이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우선 수십년간 묶여 있던 대중가요의 금지곡이 대량으로 풀렸고 禁書의 해제도 대폭 이루어졌다. 공륜서 관장하고 있는 영화 연극 가요 무용 등 공연예술분야의 사전대본심의 중에서 영화의 대본심의도 풀렸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연극대본이나 노랫말의 사전심사는 현행공연법의 개정 없이는 철폐할 수 없는 것인데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이의 재발에 대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새 공화국 새 국회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예술 창작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는 원천적으로 천부적인 것이며 이를 인위적으로 제약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부당하다. 그러나 이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지켜나가는 데에는 품위와 책임을 바탕으로 한 인격이 전제되어야 한다. 창작표현의 자유나 예술의 형상화를 빙자한 지나친 음란 퇴폐, 혹은 폭력을 남용하는 상업주의는 사회순화나 교육적 차원에서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지금 국내외에서 만연되고 있는 오락영화의 폭력과 음란을 앞세운 과도한 상업주의화가 식자층의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 같은 창작표현의 자유와 책임의 한계를 전제로 이번에 말썽이 된 연극 ‘賣春’의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우선 창녀를 소재로 한 세태 및 역사적 부조리의 고발이라는 作意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륜이 지적한 음란부분이 과연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이하 생략~, 연극 ‘매춘’의 시비, 동아일보 1988년 1월8일자 사설)

    욕쟁이에서 문화계 걸물로

    박 대표는 팔을 걷어붙였다.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지랄같이 연극대본을 국가가 고쳐라 마라 간섭하는 게 말이나 돼요? 그때 커피숍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강영훈씨가 찾아왔어요. 같이 아래로 내려가보자 해서 따라갔더니 알 만한 어떤 목사님이 성경책을 딱 펼쳐놓고 앉아 있어. 나를 위해 안수기도를 해주겠다나 어쨌다나. 내게 악마가 들렸으니 그걸 쫓아내겠다는 소린가봐. 꾹 참고 있다가 막 욕을 해줬지. 애가 셋 있다니 당신 적어도 세 번은 올라 탔겠네? 아니 세 번만 탔겠어? 셋에 열곱은 올라갔잖아? 외설이 뭐가 외설이라는 거야? 그렇게 막 나갔어요. 연극을 저지하려는 측이 주부들을 앞세워 극장 앞에서 데모도 하고 그랬다고요. 제목이 품위 없고 저질·퇴폐장면이 너무 많다나? 겉으로 고상 떠는 것들이 원래 밑구녕을 까발리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구리거든. 가짜로 치장하고 남들 앞에 제 구린 것을 감추느라 모가지를 빳빳이 세운 것들에게 똥바가지를 씌워보자 작정을 했던 거지. 아이고 저 여자 상종 못할 인간이네 하면서 내빼버리데. 이영희 공륜위원장에게도 막 해댔어. (속시원하지만 차마 옮길 수 없어서 생략). 변호사를 샀다고 하니까 동아일보 홍찬식 기자가 와서 약을 올려요. ‘에이, 그거 돈 많이 드는 일인데 하시겠어요?’ 내 목숨 걸어놓고 하겠다고 말했어.”

    재미있는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박완서 선생은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 실신지경일 무렵이었다. 거의 사색이 다 된 그분 앞에 평소 답답하던 울화를 욕으로 풀어냈다. 우아 떠는 꼴을 차마 못 봐주겠던 몇몇 여성인사들을 향해 걸쭉한 육담을 퍼부었더니 기운없던 그분 안색이 순간 반짝 하고 빛을 냈다.

    “그걸 내가 봤다니깐. 뭐라고 말을 한건 아니지만 알아챘지. 저 인간이 가짜는 아니구나 싶었던지 일어서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시데. 아무도 말 못하고 있는 걸 내가 했으니 속이 시원하셨던 게지.”

    “이곳은 세상 속풀이하는 곳”

    연극 ‘매춘’의 파란에는 당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었던(지금도 안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이 집약돼 있었다. 불합리한 제도가 있었고,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집이 있었고, 무작정 밀고 나가려는 억압이 있었고,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고, 그 시위에 대한 사주설까지 구색맞춰 두루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한편의 코미디라고나 할까. 사건이 고법에 계류중일 때 공연사전심사제도 자체가 없어졌다. 공연법의 틀이 바뀐 것이다.

    박 대표는 변호사비 4000여만원을 공중에 날렸다. 그렇지만 그 소동이 끝나고 나자 그는 대학로의 ‘욕쟁이’에서 우리 문화계의 ‘걸물’로 격상돼 있었다. 뒤에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가졌다는 소문도 났다. 무슨 장관의 여동생이라거니 하는 그의 말마따나 ‘별 미친년 널뛰는 소리들’이 따라다녔다.

    물론 그도 원래부터 욕쟁이는 아니었다. 기질이 다혈질이고 솔직하고 적극적이었을 뿐. 그런데 바탕골 집을 짓고 허가를 받고 턱없는 송사를 치르고 하는 과정에서 하도 울분이 쌓여 그걸 풀 방법을 찾다 욕을 발견해냈다. 어느 날 장사하는 여인네들의 걸진 욕이 귀에 꽂혔다. 시원스럽게 한판 퍼붓는 걸 듣고 있자니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잘 들어두었다가 밤에 혼자서 연습을 했다. 빈 전화통을 잡고 제일 흔한 ‘이 씹할 새끼야’부터 연습했다. 절로 얼굴이 화끈했지만 속은 몹시 시원했다. 어린 딸이 잠이 깨서 “우리 엄마 미쳤다”며 울고 매달린 날도 있었다. 한밤중에 빈 전화기를 들고 욕을 연습하는 귀골의 중년여자. 바탕골이란 문화공간을 주도해서 혼자 힘으로 일으키기가 얼마나 힘겨웠던가를 짐작케 해주는 풍경이다.

    동숭동에 땅을 산 건 1974년이었다. 서울대학이 이전하면서 학교부지를 택지로 분양한다기에 살림집을 지을 요량으로 132평을 미리 사두었다. 비싸게 샀다고 남편에게 핀잔을 받은 후 그냥 잊은 듯 내버려뒀다. 거기 미술관을 짓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당시 박 대표에게는 양평의 차도 안 들어가는 산골짝에 제법 큰 농장이 있었다(1999년 7월 이곳에 양평바탕골예술관 설립). 서울땅 100평 살 돈으로 양평 야산 5만평을 사두고 개간을 하는 중이었다. 작은 집을 짓고 뜰에 성모상을 모셨다. 그 앞에서 친구처럼 이야기하고 기도했다. 사과나무를 기르고 사슴을 키우는 그 농장엔 크고 작은 일이 수시로 생겼다. 전기공사하던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도 벌어졌다. 그 사람의 유족을 사칭한 이가 사법당국에 고발을 하기도 했다.

    일이 하도 꼬이기에 하루는 성모상 앞에 가서 실컷 화풀이를 했다. 삿대질도 했다. “당신이 도대체 성모야, 뭐야? 사랑의 성모가 뭐 이따위야?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날마다 바치던 내 기도 다 내놔! 사람을 이렇게 짓밟을 수가 있는 거야?” 그래놓고 시간이 지나니까 슬그머니 켕겼다. 성모상 앞에 바로 서지는 못하고 슬쩍 지나가면서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수. 용서하슈.”

    그러면서 퍼뜩 머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이렇게 시원하게 속풀이할 장소가 있다면, 지랄발광할 수 있는 마당이 있다면. 그런 마당을 답답한 사람들 앞에 펼쳐놔주고 싶었다. 동숭동 땅, 거기다 소극장을 짓자! 행위예술을 해보자! 전시장도 만들고 차도 마시고…. 머릿속에서 파일이 착착착 돌아갔다.

    “교황님 사인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단 결재를 받아야할 상관이 하나 있었다. 남편 김영식씨. 당시 황지에서 함태탄광을 맡아하던 남편은 예술관 건립을 반대했다. 단칼에 거절하면서 농담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안 돼. 교황님 사인이라도 받아온다면 모를까.”

    교황님의 사인? 교황님의 사인이라고? 다혈질에 적극적이다 못해 저돌적인 박의순은 그 말 한마디를 신주처럼 품에 안고 당장 로마 교황청으로 날아갔다. 교황을 알현하러 온 세계각국 사람들이 구름 같았다. 군중 속에서 펄펄 뛰며 손을 흔들었다. 교황이 가까이 온순간 번개같이 옷자락을 잡아 낚아챘다. “어떤 동양여자가 노루처럼 뛰면서 교황님을 막아서더라”고 당시 교황청에 있던 장익 신부님은 요즘도 고개를 내저으며 그날 풍경을 회상하곤 한다. 결국 사인을 받아냈다. 꿈은 이루어졌다. 그걸 모셔들고 남편 앞에 날아왔다. “교황님의 사인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내밀었다.

    그렇게 예술관 공사는 시작됐다. 하지만 넘어야 할 고개가 또 첩첩이었다. 욕을 배울 필요가 절실했던 때가 아마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대학로 욕쟁이’란 별명이 절로 생겼다. ‘봉순이’란 별명도 통용됐다.

    그의 시아버지는 안동군 교육감을 지낸 김한묵씨다. 콧대 높은 양반집에 시집가서 사랑에 인사 드리러 나가 큰절을 올리다가 날라리 새신부 박의순은 뒤로 벌렁 자빠졌다. 안채에서 신부가 불안해 마음 졸이고 있던 새신랑이 뛰쳐나왔다. 그럴 때 벌떡 일어서는 것은 박의순의 스타일이 아니다. 가만히 멀뚱멀뚱 누워서 신랑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그때 신랑으로부터 얻은 별명이 ‘뻔순이’다. 그걸 김재순씨가 프랑스식 발음으로 ‘노블하게’ 봉순이라고 바꿔 불러준 것이다.

    대학로엔 이미 입성해 있는 ‘늙은이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흥사단 이사장 서영훈, 샘터 사장 김재순, 극작가 차범석, 야당 정치인 신도환, 존경해온 시인 구상, 아카데미하우스의 강원룡 목사들과 동네 사람 자격으로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매사 솔직하게 비판하고, 위선을 보면 거침없이 공격하고, 예의랍시고 둘러쓴 허위의식을 단칼에 까발기고, 에두르지 않고 직선적으로 공격하는 박 대표를 다들 통쾌해했다. 좋아하면서 한편 겁도 냈다. 구상 선생과 가깝던 걸레스님 중광은 바탕골 욕쟁이 봉순이가 과부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미친 놈이 그런 소리를 했대잖아요. 중광은 기인이긴 한데 이중섭이 진짜라면 그는 격이 조금 처졌지.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데. 개관하는 날 의도적으로 우리 영감한테 크림색 양복을 멋지게 해 입히고 ‘여보, 여봉’ 해가며 애교를 떨고 다녔지. 영감은 이 여편네가 갑자기 돌았나 그러고…. 하하. 지금 생각하면 다 유치한 짓이지 뭐.”

    그후 17년 동안 대학로 바탕골은 퍼포먼스 전문 공연장, 설치미술 전문 전시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바탕골 이름은 남편 고향인 경북 상주 함창면 무향리에서 따왔다. 속명이 바탕골인 산골이다. 그는 9남매의 맏며느리다. 호랑이라고 소문난 시아버지는 ‘지랄 같은’ 며느리와 희한하게 코드가 잘 맞았다. 권위도 가식도 없이 고삐풀린 말같이 뛰노는 며느리를 사랑하셨다. 어떤 실수도 무사통과였다.

    “내가 복이 많아서 끼리끼리 딱 만났어. 우리 영감은 위선 덩어리인데 아버님은 날라리셨지. 서양여자 누드를 놓고 ‘아가야, 왜 여기가 노랗냐?’ 물으셔. 그러면 내가 ‘어버님, 머리칼이 노라니 거기도 노랗습니다. 그러곤 했지, 하하. 둘이 이야기하는 걸 누가 듣고 ‘딸이야 며느리야?’ 물으면 우리 아버님은 ‘아니 며느리하고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가?’ 하셨지.”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화가라는 걸 몹시 만족해한 어른이셨다. 그림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웬일인지 몹시 수줍어하지만 이날 이때까지 한시도 붓을 놓은 적이 없다. 새댁 시절 부뚜막을 아틀리에 삼아 그림을 그리면 시아버지는 흐뭇해서 기웃이 넘겨다보시곤 했다.

    그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박문여고 시절부터 미술반에 처박혀 그림만 그렸다. “원래는 탁구선수였는데 미술반 담당 수녀님이 날 그리 끌어갔지….”

    그는 고운 소녀였다. 그가 어린 시절 친구 하나를 말하면서 “분홍, 그것도 흰 물감통에 분홍 물감 단 한 방울만 떨어뜨린 그런 연한, 연한 분홍”이라고 표현했듯이 내 보기엔 박 대표 자신도 한때 그런 분홍 계열의 아이였던 것 같다. 물론 내부에는 온통 빨간 물감 같은 열정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으레 그가 수녀가 될 줄로 믿었다. 야단치는 내용이 “너는 그래서 어찌 수녀원에 가겠니?”였을 정도니까. 홍익대에 진학했더니 수화 김환기 선생이 계셨다.

    “키가 크고 찢어진 바지를 입은 그분을 나는 처음에 수위아저씨인 줄 알았어. 하도 멋져서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따라다녔지. 비오는 날은 우산도 같이 쓰고. 날 아주 예뻐하셨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이 교수라는 거야. 그후부터 일부러 피했지 뭐. 하루는 날 찾으셔서 그분 방에 갔더니 그리던 그림을 이렇게 돌려놓으시데. 왜 그러냐고, 좀 보여달라고 졸랐더니 의순이 니가 부끄러워서 그런다, 이러시잖어. 아이고 참. 그게 늘 안 잊혀.”

    거침 없는 인생, 예술가의 기질

    그는 대학졸업 후 3년을 실제 수도원에서 지냈다. 수도원에서는 아무 생각없이 그림만 그렸다. 그는 태생적으로 종교성을 타고난 사람 같다. 유난히 진지하게 신과 인간의 존재를 고민했다. 한때는 속리산 수정암에 혼자 보따리를 싸들고 들어간 적도 있다. 비록 달밤에 수정암을 향해 혼자 걸으면서 절집 진입로에 즐비한 나무들이 잘생긴 남자들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제사 때 굳이 절을 안 하는 크리스찬 아랫동서에게 그는 이렇게 꾸짖는다. “제사는 행위기도야. 제사만큼 진지한 기도가 없어. 그런데 예수가 제사를 지내면 안 되고 절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불알을 떼버릴 일이지. 하느님을 눈앞에 모셔올 수 없으니까 대신 조상에게 기도하는 거 아냐. 절을 안 하면 기도의 핵심이 빠져버리는 거야” 그러면 아랫동서는 “아이고 형님~” 하면서 신성모독을 감당치 못해 쩔쩔맨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위로 언니 하나가 있었다. 남자 형제들이 둘 있었으나 어려서 잃었고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나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어미없는 손녀라 귀하게 호호 불며 길러졌다.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금 어린시절은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승의 일인 듯 잡히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거는 생각 나. 당시는 이부자리 고운 거 해서 쌓아두는 게 큰 장식이었거든. 여자들 취미고. 우리 어머니는 싱거 미싱을 가지셨고 고운 헝겊이 많았어. 늘 그걸 가지고 놀았는데 하루는 어머니 장롱속 색동이불이 보이는거야. 눈독을 들이다가 마침내 가위로 잘라냈어. 하도 이뻐서. 다른 건 생각이 안 나고 가위 들고 색동이불 조각을 베어내던 기억은 나. 그게 죄가 되는 일인 줄은 다 잘라놓고 나서야 보이는 거지.”

    남다른 기질은 어릴 적 에피소드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좌고우면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추진력과 맹목성은 예술가 기질의 한 바탕이리라. 귀한 이불에 거침없이 가위질을 하는 어린 박의순의 모습에서 오늘의 바탕골 주인의 모습이 절로 겹쳐지는 것은 인생의 진진한 묘미다.

    바탕골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는 독일로 뒤늦은 유학을 떠난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딸, 건축설계를 전공한 아들이 어머니의 오랜 꿈을 알고 등을 떠밀었다. 유학지는 지인이 살고 있는 독일 함부르크로 정했다. 그곳에서 작업실을 얻어 두문불출했다.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는 날이 많았다.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 “그 무렵 아들이 배낭여행 도중 화실에 들렀어요. 하도 외롭던 터라 나도 너 따라 서울 갈래 했더니 이녀석이 어머니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는 거야.” 그 만류가 대견해서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8개월간 정신없이 그린 그림을 모아보니 1500점이 넘었다. 그걸 싸안고 돌아와 자신의 바탕골에 풀어놓았다. 첫 개인전 팸플릿에 그는 이렇게 쓴다. “40년간 뱃속에 키워왔던 생명체들을 한꺼번에 쏟아낸 것같이 시원하고도 허탈하다. 처녀가 애를 낳은 듯 부끄럽기도 하고… 미쳐서 살다가 성해지면 죽는 것이 삶이다. 나는 위선적인 사제보다 솔직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눈길을 준 예수를 좋아한다. …벗으면 될걸 고백하면 될걸, 왜 복잡하게 사나. 나처럼 뻔순이로 살면 어떨까. …진실은 딴곳에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아이들 어릴 때는 누드 크로키나 남자 성기를 500여개 화면에 흩뿌리는 그림을 그리던 그가 독일에서는 한지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 “난 빨리 마르는 아크릴이 좋아.” 직선적인 그의 기질이 결국 아크릴을 찾게 된 모양이다. 모티프는 꽃과 새와 나무, 번짐과 여백을 한껏 활용한 서정 추상이었다. 화려한 색상과 유희적 붓놀림이 아름답다고 평론가들이 그의 그림 앞에서 박수를 쳤다.

    그림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금세 수줍은 소녀처럼 “아이, 보지 마” 하면서 얼른 화폭을 가린다. 그 옛날 김환기 선생님이 그러셨듯이. “난 멀쩡한 종이에는 미안해서 그림을 못 그리겠어.” 5만평 부지의 양평 바탕골예술관 주인이 궁색하게도 케이크 상자나 내의 포장지같이 빳빳한 종이만 보면 물감을 묻히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 그건 그림에 대한 순결성과 엄숙주의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순결성이 그의 얼굴을 해맑게 만든다.

    나는 그와 꼬박 이틀을 얘기했다. 그에게선 세상 잡다한 욕망을 한꺼풀 벗은 일종의 해탈이 느껴진다. 거친 욕설을 마구 퍼붓는 순간에도 입가에 웃음기가 감돈다. “이번 생에서 난 서방이 셋이야. 하하하. 하나는 종교고 하나는 그림이지. 다른 하나는 뭐냐고? 그야 지금도 집에서 내가 밥 차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영감이지 하하.”



    그는 지난해 어렵게 꾸려오던 대학로 바탕골을 처분했다. 그후론 대학로 근처에 얼씬도 안한다. 너무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지금은 양평에 도자기공방, 금속공방에 극장과 갤러리와 식당, 아트숍과 펜션까지 갖춘 훨씬 큰 규모의 복합문화공간 바탕골 예술관을 운영중이다. 교황님께 받은 사인을 그곳에다 옮겨놓았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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