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영화계 ‘至尊’ 입증한 흥행감독 강제규

“한국영화, 소재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4-03-29 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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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계 ‘至尊’ 입증한 흥행감독 강제규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할리우드 영화를 너끈히 제압하고 관객 1000만 시대를 개막했다. 대한민국 국민 네 사람에 한 명꼴로 두 영화를 본 셈이다. 가히 사회적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주 앞서 개봉된 ‘실미도’가 세운 기록을 빠르게 경신중이다. 배급사는 1200만 관객을 예상하고 있다. 순제작비만 149억원이 투입됐다. 관객 550만~600만명이 들어야 본전을 건질 수 있는 투자 규모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더라면 제작사인 ‘강제규필름’은 물론이고 한국영화에 재앙이 됐을 것이라고 강 감독은 말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면 결코 위험한 도박만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강 감독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기획단계에서 최종 제작까지 2∼3년씩 공들이는 과작(寡作)의 감독이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해 ‘쉬리’(1999) 그리고 이번에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고작 세 편을 연출했다. 그러나 세 영화 모두 작품성을 인정받고 흥행에 성공해 강 감독을 한국영화의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강제규필름은 서울 양재동 3층짜리 아담한 건물에 세들어 있다. 강 감독이 미국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급을 협의하고 귀국한 다음날 오후 2시에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강 감독은 약속시간보다 10분 가량 늦게 도착했다.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단다. 그는 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근 중국집에서 배달해온 자장면을 먹었다.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는 강 감독을 보고 동행한 사진기자가 “영화재벌이 자장면을 먹는군” 하고 말했다.

    자장면 먹는 ‘영화재벌’



    감독실에서 자장면 그릇이 나간 뒤 청바지에 양가죽점퍼 차림의 강 감독과 마주앉았다. 책상 뒤에는 각종 상패와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요즘 TV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 출연하는 탤런트 박성미(42)씨가 그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는 큰아들 윤원(10)만 보이고 늦둥이 지완(2)은 빠져 있다.

    강 감독은 방 주인이 앉는 큰 소파 대신 작은 의자를 골라 앉았다. 인터뷰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예의를 차리는 것일까.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비결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사회적·심리적 분석은 단서를 끄집어내는 끈은 될 수 있지만 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관객이 영화관을 찾는 것은 영화에서 만족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재미있고, 영화에서 강력한 떨림을 받고,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그 무엇이 충족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것이죠. 그것이 만족지수로 표시됩니다. 맥스무비 조사에 따르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객 만족지수는 94%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84%대입니다. 작품명을 거론할 순 없지만 만족지수가 낮은 어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영화외적 요소의 영향 때문이죠. 영화 주변에 조성된 환경이 관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것을 꼭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필자는 ‘만족지수가 낮은 데도 영화외적 요소의 영향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뭘까 하고 궁리하다 어림짐작으로 때려잡았다. 필자의 추측이 맞았던지 강 감독이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그 영화의 제목을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후에 필자의 집으로 전화를 해 같은 부탁을 했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강 감독과의 약속을 지킨다.

    “과거 ‘쉬리’의 만족지수가 92%였어요. 그때 가장 높은 만족지수를 올린 영화였습니다. 당시 ‘타이타닉’ 만족지수는 87~88%였습니다. 만족지수와 관객 수는 정확히 비례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라는 매개를 통했기 때문에 크게 어필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기획할 때는 모두 ‘올드한 소재’라며 말렸습니다. 잘되고 나니까 이렇게저렇게 사후해석을 하는 거죠.

    일본에서도 상업성에선 부정적으로 봤어요. 강 감독이 ‘쉬리’하고 나더니 감각이 퇴보했는지,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말이 나왔죠. 그래서 일본 쪽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성들이 영화 선택권을 쥐고 있습니다. 여성의 80~90%가 전쟁영화를 싫어합니다. ‘블랙 호크 다운’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관객의 70%가 남성이었습니다. 여성이 기피하는 영화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올드 테마에 제작비 148억원을 투입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시각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죠.

    우리는 소재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소재는 된다, 저러한 소재는 안 된다는 사고가 굳어 있습니다. 감독이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요.”

    -영화 ‘실미도’가 관객 1000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돼 강우석 감독 쪽에서 싫어하지는 않았습니까.

    “촬영할 때부터 개봉일자를 협의했습니다. ‘실미도’가 12월14일 개봉하고 3주 뒤 ‘태극기 휘날리며’를 개봉하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실미도’ 제작진은 관객을 300만 정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3주 뒤에 개봉하면 ‘실미도’가 시장의 파이를 충분히 가져갈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태극기 휘날리며’ 개봉이 예정보다 3주 가량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6주가 벌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실미도’ 관객이 좀 떨어질 때쯤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돼 ‘실미도’가 더 탄력을 받았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가장 큰 수혜자가 ‘실미도’입니다.”

    전국의 스크린 수는 1200개 가량.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때 520개 스크린에서 상영됐다.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스크린 12개짜리 멀티플렉스에서는 ‘태극기 휘날리며’ 필름이 5개 스크린에서 동시에 돌아가기도 했다.

    ‘사마리아’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계 큰손들의 스크린 독식 현상을 비난했다. 영화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항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반지의 제왕’이 450개 스크린을 가져갔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한국영화가 인기를 끄니까 그런 말을 하네요. 씁쓸합니다. 동양그룹 계열의 배급사인 쇼박스가 어떤 극장에 태극기를 휘날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면 문제가 되겠죠.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 반대였거든요.”

    전주의 한 멀티플렉스는 공정거래위원회에 공정거래신고서를 접수했다. 전주에서 가장 큰 멀티플렉스에 필름 ‘태극기 휘날리며’를 주지 않고 다른 영화관에만 준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제는 배급사에서 이의를 제기한 극장에 필름을 공급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한 영화가 스크린을 독식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연구를 해볼 필요는 있겠지요. 선진국 사례도 조사해봐야겠지만 신중히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사마리아’는 4억8000만원을 들여 만든 저예산 영화다. 15일 동안 11번 촬영해 완성했다.

    “한 나라의 문화가 성숙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나도 소위 인디영화(독립영화)를 찍어봤습니다. 사회가 성숙할수록 관객의 기호가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게 마련이죠. ‘사마리아’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지금보다 더 두터워질 거라고 봅니다.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자기 세계를 펼쳐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극장표 판매금액에서 떼던 문예진흥기금이 부활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영화관객이 연간 1억명을 넘기 때문에 1∼2%만 떼도 100억원 이상의 재원이 마련되거든요. 그런 돈으로 인디영화나 저예산 아트무비의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지원해야 합니다.”

    “영화는 10, 20권짜리 대하소설 아니다”

    -영화제목이 반공을 주제로 한 초등학생 작문제목 같아요. 보수우익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영화가 뜨기 전에 “저 제목 갖고 성공하겠어”라고 회의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영화제목 짓기가 참 힘들어요. ‘쉬리’ 때도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죠. ‘영화 찍고 영원히 쉬리’하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란 제목도 주위에서 90% 정도가 반대했습니다. 내가 좀 고집을 피웠어요.”

    -‘태극기 휘날리며’가 전체적으로 반공영화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우익적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은 남쪽 군인들이 비무장 북한군 포로를 사살하는 장면과 보도연맹 가담자를 학살하는 대목을 문제삼더군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런 문제 제기가 있을 것이라 예견했죠. 늘 하는 얘기지만 한 편의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10, 20권짜리 대하소설이 아니니까요. 한국전쟁을 사실대로 그리자면 아마 100편의 영화로도 모자랄 겁니다. 보도연맹 이야기만으로도 좋은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이어졌던 한국전쟁의 방대한 스토리 중에서 과연 어떤 조각들을 영화에 넣을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거든요.

    한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 중에 절반이 넘는 숫자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두 당사자가 누구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학 교수가 일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40명 클래스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본상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대학생이 두세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나 인접국의 젊은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진 전쟁입니다. 따라서 심층적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전쟁의 전체 맥락을 짚어주는 것이 오히려 영화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계 ‘至尊’ 입증한 흥행감독 강제규

    ‘태극기 휘날리며’의 성공으로 또 한 번 흥행감독임을 입증한 강제규 감독.

    1960∼70년대에 초중고교를 다닌 사람들은 읍내 극장에서 국책 반공영화를 단체관람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북한 괴뢰군은 언제나 ‘뿔 달린 악마’로 등장했다. 공산주의자들도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우리처럼 똥을 싸는 인간이라고 그릴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1960년대식 반공영화로는 관객을 설득할 수 없는 시대다.

    소설가 박경리가 최일남과의 인터뷰에서 분단의 현실을 다루는 문학의 접근방식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용공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를 광대로만 그리면 리얼리티도 없고 신빙성도 없다. 그것은 작가가 독자나 시청자를 수준 이하로 보는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인간적 고뇌를 그리면서, 안으로는 그의 신념을 인정해주는 척하면서도 바깥에서 그걸 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설득력이 있다.’

    과연 강 감독은 어떤 의식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을까. 자칫 보수진영으로부터 공격받을 수도 있는 소재를 과감히 드러낸 의도는 무엇일까. 다소 지루하더라도 강 감독이 갖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인식에 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1960∼70년대에 좌우익 개념이 극대화된 부작용으로 어떤 쪽은 그런 것에 철저하게 무관심해 있습니다. 다른 쪽은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끌어안고 지금도 아파하고 있지요.

    21세기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서 대립의 구조를 계속 가져가야 합니까. 아니면 화해와 용서의 마당으로 끌어내야 합니까. 6·25의 시작과 끝을 남침과 북침이란 잣대로만 재서는 대화가 안 되죠. 6·25전쟁 3년 동안에 우리가 얼마만큼 아파했고 그 아픔이 지금까지 어떻게 연결돼왔는가를 생각하며 서로가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실마리가 풀립니다. ‘너 잘못 했다’ ‘나 잘했다’ 식으로 6·25를 들여다봐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분단을 가져온 전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범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영화가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베꼈다는 건 어불성설”

    -국방부에서 장비 협조를 안 해줘 제작비가 20억 더 들었다지요.

    “시나리오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군인들이 대로를 막고 젊은이들을 붙잡아가는 강제징집 장면을 고쳐야 장비를 지원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협상이 안 됐죠.”

    -강제징집은 고증이 된 건가요.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대부분 문건자료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군사 역사 사회 전공 교수들에게 시나리오 자문을 하는 등 철저히 고증했습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학도병으로 참전해 스물네 번 주인이 바뀐 백마고지 전투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 이러한 생존자 인터뷰가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영화 제작 지원 여부를 판단하는 군 관계자들에게 관객의 정서를 읽는 성숙된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이 아쉽습니다.”

    -제작비가 엄청났는데 흥행 실패가 두렵지 않았습니까.

    “세부 상황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 있죠. 한국영화의 범주 또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이지요. 내수만 하는 기업도 있고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쉬리’를 통해 영화수출을 알게 됐습니다. ‘쉬리’는 35개국에 수출됐습니다.

    일본시장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큽니다. 해외 매출의 50%를 넘어요. 어떻게 하면 아시아 관객을 끌어들일까 하고 고민하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었습니다. ‘쉬리’ 정도의 제작비와 완성도로 해외시장에서 성공했으므로 ‘태극기 휘날리며’로 다가가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국내에서 관객이 200만명만 들어도 해외수출을 합해 브레이크이븐(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거라고 본거죠. ‘쉬리’의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했기 때문에 절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작비 148억원은 강제규필름이 40%, 동양그룹 계열의 쇼박스가 40%, 나머지 20%는 창투사들이 출자했다. 강 감독은 관객 숫자가 늘어날수록 더 받는 러닝개런티로 계약했다. 구체적인 액수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테크닉을 여러 군데서 차용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편협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쓴 개각도(開角度) 촬영과 이미지 셰이킹(Image shaking)은 전쟁영화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법입니다. 개각도 촬영을 하면 동작에 분절감(分節感)이 생겨요. 파편이 튈 때 입자 하나하나가 팍팍 살아서 튀는 느낌을 주지요.

    이미지 셰이킹은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흔드는 장비를 사용하는 기법입니다. 이미지 셰이킹 기계에 카메라를 얹어서 촬영하면 생동감이 살아나지요. 어깨에 메고 찍는 기법만으로는 전쟁의 긴박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어요.

    이미지 셰이킹 장비를 할리우드에서 4주 이상 빌려주지 않겠다고 해서 한국기술로 직접 제작해 사용했습니다. 최근의 전쟁영화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법인 줄도 모르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베꼈다고 하면 안 되지요. 한국에 소개된 전쟁영화 중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많이 남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과작(寡作)은 결벽증”

    -지금까지 영화를 세 편 찍었더군요. 왜 이렇게 과작입니까.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시나리오작가협회가 주는 상을 받았을 때 선배작가가 소주를 한잔 하며 들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시나리오를 80여편 쓴 작가지요. 아들이 하루는 친구로부터 놀림을 받아 너무 화가 난다고 하더래요.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해서 시나리오 작가라고 했답니다. 뭘 썼느냐고 물어 10여편의 제목을 이야기했는데도 친구가 하나도 모르더라며 아들이 그게 무슨 시나리오 작가야 그러더래요. 80여편을 쓴 작가가 대표작 하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 됐습니까. 그래서 한 편을 하고 죽더라도 제대로 된 걸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영화를 만드는 재주도 부족해요. 몇 년 동안 공들여야 겨우 하나 만들 수 있어요. 내가 영화를 2년마다 한 편씩 만들려면 시나리오를 쓰고 기획까지 하는 버릇부터 버려야 합니다. 결벽증입니다.”

    강 감독은 1985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합동영화사에서 시행한 영화감독 공채 모집시험에 합격해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영화사들은 외화수입 쿼터를 따기 위해 한국영화를 찍었다. 그는 이런 영화계에 끊임없이 회의를 느꼈다.

    조감독 시절 한 편을 연출하고 150만원을 받아 다섯 명이 나눠 썼다. 생활이 안 됐다. 먹고 살기 위해 홍보영화와 CF를 닥치는 대로 찍었다. 1994년에는 삼성물산의 드림박스와 손잡고 ‘공포특급’이라는 비디오용 영화를 찍었다. 그는 조감독 시절 고생한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하자 “구질구질해서 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때는 영화를 한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봤어요. 한국영화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제로였지요. 공부 잘하고 반듯하고 똑똑한 사람은 방송이나 CF 쪽에서 활동하고, 무능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영화계로 간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영화계는 춥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희망이 없었습니다. 정말 영화가 좋고, 영화를 통해 뭔가 성취해내기 위해 영화를 하는데 영화 하는 사람을 폄하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가 견디기 어려웠어요. 젊으니까 가난과 배고픔은 견딜 수 있었지만 ‘대학 나와 고작 영화를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모멸감에 얼굴이 화끈거렸죠.”

    -상전벽해가 됐어요. 지금은 대학 영화학과에 들어가려면 수능 성적이 상위권이어야 하니까….

    “지금 얘기죠. 내가 다닐 때는 전국에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 서울예술전문대에서만 영화를 가르쳤어요. 대학 다닐 때 단편영화를 계속 찍었거든요. 영화 찍는 돈 마련하느라 전세방이 월세방으로 바뀌고 나중에 졸업할 때는 방에 일자로 누워서 못 자고 대각선으로 누워야 발을 뻗을 수 있는 작은 방으로 줄어들었어요.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방인데 조감독 해서 받는 돈으로 방값을 낼 수가 없었지요.

    한국영화를 해서 돈 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우가 어땠겠어요. 영화사 사무실이라고 해야 지금 내 방만한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를 붙들어준 것은 시나리오 집필이었다. 그는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며 감독의 꿈을 키웠다. ‘장미의 나날’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가 영화화됐고 1994년엔 ‘게임의 법칙’으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받았다. 강 감독이 찍은 영화 세 편도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시나리오는 영화를 만드는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문학의 한 유형으로 봐야죠. 어릴 때 썩 훌륭한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춘기때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도움이 됐죠. 나는 전업작가는 아니었습니다. 연출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나리오를 썼지요. 다른 감독을 위해 써준 시나리오는 한두 편뿐입니다.”

    영화계 ‘至尊’ 입증한 흥행감독 강제규
    -저질의 대명사이던 한국영화가 도약한 계기는 언제입니까.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미국 영화사들이 한국시장에 직배를 시작했어요. 그것이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가져온 기폭제가 됐지요. 직배 이전의 영화사들은 한국영화는 대충 찍고 외화를 수입해 호구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가 실시되면서 한국영화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옛날처럼 제작해서는 관객들이 봐주질 않는 상황이 된 거죠.”

    그 무렵 관객몰이에 성공한 영화가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1992),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1993),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 등이다.

    “이런 작품들이 나오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영화도 볼만하네, 재미있네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거죠. 제작 자율화도 한국영화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영화사 설립이 허가제에 묶여 20개 영화사만 영화를 찍을 수 있었죠. 젊은 사람들이 창의적으로 새로운 기획을 하고 싶어도 영화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영화법이 개정돼 영화사 설립이 등록제로 바뀌었습니다. 허가 없이 누구든지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거죠. 정부 정책에 따라 문화가 달라질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닥터 지바고’ 보고 영화감독 꿈꿔

    -영화찍기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던 시점의 어느날, 지금은 없어진 마산 신일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 봤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라는 매체가 이렇게 크게 다가오고,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인가. 도대체 영화라는 게 뭐길래 이렇게 감각을 마비시키고 쇼크를 주는가. 영화에 나오는 사랑이 너무 애달프고 간절해 혼자서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때부터 영화관련 서적을 보면서 할 수만 있다면 영화를 해야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러시아혁명을 무대로 한 ‘닥터 지바고’(1965)가 한국에서 뛰어난 영화감독 하나를 만들어낸 셈이다. 필자도 ‘감명깊게 본 영화’를 적어넣으라는 이력서 문건에 반드시 ‘닥터 지바고’를 써넣는다. 중학교 다닐 때 처음 봤고 지금까지 아마 다섯 번 이상 봤을 것이다. 필자는 영화인들을 만날 때마다 왜 가벼운 코미디류가 판을 치고 ‘닥터 지바고’ 같은 명작을 못 만드느냐는 불만을 말했다.

    “‘닥터 지바고’ 같은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극장에 잘 안 갑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는 영화계의 가벼운 흐름을 바꾸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한 겁니다. 세계 영화시장의 메인 타깃이 10대 중반에서 25세 사이입니다. 시장구조가 그러니까 그 연령대가 좋아하는 성향의 영화 기획을 주로 합니다.

    일본에는 40대, 50대 영화 관객이 꽤 있거든요. 미국만 하더라도 메인 타킷은 13~25세지만 작품만 좋으면 항상 극장 갈 준비가 돼 있는 40대, 50대가 서브 타깃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우리도 20대 후반부터 30, 40, 50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이들을 극장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직접 감독한 영화는 매번 대박을 터뜨렸는데 강제규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는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블루’ ‘베사메무초’ ‘오버 더 레인보우’….

    “간단히 요약하면 감독이 중심축인 회사의 한계점입니다. 제작자 또는 기획자로서 영화를 성공시키는 것도 힘든 일인데 쉽게 생각한 거죠. 감독을 할 때는 총력을 기울이다가 제작이나 기획을 할 때는 덜 노력한 거 같아요. 그래서 향후 강제규필름을 내가 직접 연출하는 영화를 주로 만드는 회사로 축소하려 합니다. 더 부지런히 작품을 해야겠지요.”

    -‘쉬리’ 찍고 나서 5년이나 쉬었군요. 공백이 너무 길었던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쉬리’라는 제목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영화를 5편 제작했습니다. 아까 얘기했다시피 그 중 크게 성공한 것은 ‘몽정기’ 한 편입니다. 다 실패한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 ‘베사메무초’와 ‘오버 더 레인보우’는 브레이크이븐을 했어요. ‘몽정기’는 예산을 크게 들이지 않고도 250만 관객을 동원해 비교적 성공을 거뒀습니다. ‘블루’는 지오엔터테인먼트와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인데 반응은 좋았으나 마케팅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쳐 실패했습니다.”

    강제규필름은 ‘공동경비구역 JSA’ ‘바람난 가족’을 만든 명필름과 함께 상장사인 세신버펄로와 4월9일 합병한다. 강 감독은 합병한 회사에서 지분 10% 정도를 소유하게 된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본에 어떤 조건으로 나갑니까.

    “일본은 가장 기대하는 시장입니다. ‘쉬리’ 때 보니 어차피 잘 될 경우엔 미니멈 개런티는 의미가 없어요. 오히려 흥행에 성공했을 때 분배조건을 유리하게 해놓아야 수입이 훨씬 더 많아지는 거죠.

    ‘쉬리’의 경험에 비추어 ‘태극기 휘날리며’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안고 싶지 않으니까 미니멈 개런티를 많이 받으려 했지만 결국 내 뜻대로 계약했어요. 나중에 개봉하고 나서 정산하는 시점에 모든 걸 다 공개하려 합니다. 당시 왜 이런 조건으로 계약했고 그 결과 우리한테 어떠한 어드밴티지가 돌아왔는지 밝힐 겁니다.”

    -흥행에 성공하면 해외 수입만 갖고도 제작비를 다 뽑을 수 있겠군요.

    “가능합니다. 일본에서 만약 관객이 300만명만 들면 우리나라에서 1000만명 동원한 것과 같습니다. 일본시장에서 가장 히트한 아시아 영화는 얼마 전 장이모(張藝謀) 감독이 만든 ‘영웅’입니다. 305만명이 봤습니다. 그전까지는 ‘쉬리’가 흥행기록을 갖고 있었어요. ‘쉬리’는 일본에서 130만 관객을 모았습니다.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인데 이데올로기적 관심입니까. 아니면 첩보액션물 또는 전쟁영화 장르로서의 관심입니까.

    “두 가지가 다 결합돼 있습니다. 1994년 ‘은행나무 침대’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중국 칭화대 외국인 기숙사에서 3개월 가량 유숙했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북한 유학생들을 만나 친해졌지요. 나는 이산가족도 아니고 그런 쪽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만한 집안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칭화대에서의 체험이 분단, 이데올로기, 이산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때 남북문제와 관련된 작품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관심과 개인적 장르 취향이 결합해 두 영화를 만들어낸 거지요.”

    -한국영화의 국제화를 위해 역할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던데요.

    “무엇이든 고여 있거나 정체돼 있으면 썩잖아요.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영화를 좋아해주고 한국영화를 봐주는 온실 속에 오래 갇혀 있으면 결국 죽고맙니다.

    우리 영화가 국내 시장뿐만 아니고 해외 관객들로부터도 똑같이 관심을 끌어내고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장과 영화 페스티벌을 통해 꾸준히 알려야지요. 영화제나 페스티벌을 통해서 알리는 것은 잘하고 있습니다. 여러 감독이 상을 받았고…. 그런데 시장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싸움이 힘들고 어려운 거죠. 내가 해야 할 일이죠.”

    “할리우드에서 감독 하게 될 것”

    -할리우드에서 감독을 해보고 싶은 희망이 있다지요.

    “때가 되면 분명히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유럽 감독들이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을 많이 했죠. 과거에는 할리우드에 가서 감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명예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영화시장에서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와 비주류가 병행하는 상황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예측가능한 시장과 중국이라는 잠재시장을 합하면 미국보다 더 큰 시장입니다. 이제 아시아 감독이 미국 가서 감독하는 것이 할리우드 진출이 아닙니다. 힘을 결합해 미국시장을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새로운 할리우드 진출법이 될 겁니다.”

    -한국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으려면 언어문제 때문에 애로가 있지 않겠습니까.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영화가 말로서 모든 걸 설명하는 건 아니거든요. 언어의 뉘앙스에서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부분은 적다고 생각해요. 어떤 장르를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죠. 정말로 그 사회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코미디는 어렵겠죠. 우위썬(吳宇森) 감독도 코미디는 안 하잖아요.”

    우위썬 감독은 홍콩에서 할리우드로 진출해 스케일이 크고 시원한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감독으로 성공했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된 ‘페이첵’이 우위썬 감독 작품이다.

    아내의 독설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까.

    “시나리오를 써놓은 게 두 편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와 서구 쪽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소재나 테마에 관심이 있죠.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강 감독은 부인과 중앙대 연극영화과 81학번 동기생이다. 나이도 1962년생 동갑. 대학교 2학년때 워크숍 작품을 함께하면서 가까워졌다. 8년 동안 연애하다 1989년에 결혼했다.

    “옛날에는 아내의 코멘트를 의식했는데 요즘은 그다지 의식하지 않아요. 하도 독설을 해서. 평론가들은 좋은 말을 한참 하다 끝에 가서 ‘그러나’ 하면서 부정적인 것을 건드립니다. 그런데 아내는 시작부터 끝까지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고….”

    영화계 ‘至尊’ 입증한 흥행감독 강제규

    아시아와 서구 쪽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소재와 테마에 관심이 있다는 강제규 감독.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서는 어떤 독설을 퍼부었습니까.

    “비슷해요. 투덜대고….”

    -영화가 성공해서 요즘은 쑥 들어갔겠네요.

    “흥행과도 별로 관계 없어요. 하도 그러기에 한 번 더 보고 그래도 같은 생각이 들면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자기 친정식구들과 또 봤대요. 그리곤 좋은 점을 얘기하더라고요. 내 영화를 편하게 못보고 어디 잘못된 것만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안 좋은 것들만 보이죠.”

    -두 살짜리 늦둥이를 둔 걸 보면 금실이좋은 모양입니다. 계획출산입니까. 실수한 겁니까.

    “이 나이에 실수하겠습니까.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더군요. 철이 드는 거 같았어요. 그전에는 너무 가파르게 살아온 거 같아요. 가족과 부모 형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 배려하거나 신경 써주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보람있는 삶은 무엇인가. 이런 걸 생각하다 늦둥이가 태어난 거지요.”

    -옐로페이퍼 루머에는 박성미씨가 강 감독이 혹시 바람 피울까봐 붙잡아 두려고 늦둥이를 만들었다고….

    “내가 낳자고 했어요. 자식도 하나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조금 더 늦어지면 불가능하니까. 사실은 힘든 결정이었죠. 산모 나이도 있고….”

    -지금까지 써본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장동건 원빈 외에 출연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남자배우가 있다면….

    “나는 연기자들을 중심축으로 해서 영화를 구상하지 않습니다.”

    그의 뒤편에 붙어 있는 ‘쉬리’ 포스터 두 개가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가 나오는 포스터이고 다른 하나는 김윤진이 권총을 들고 있는 사진이다. 김윤진은 입술에 루즈를 짙게 칠하고 가슴이 거의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 섹시한 여배우다.

    -‘쉬리’때만 해도 송강호가 지금처럼 뜨지 않았죠. 배역도 조연이었고. 송강호가 갑자기 뜬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갑자기 뜬 게 아니죠. 연극계에서 오래 활동했고 눈물 흐르는 시절을 겪었습니다. 영화계에 와서도 바로 주인공을 맡은 건 아니었습니다. 산전수전 치르고 나서 그 위치에 오른 겁니다. 의지도 강하고 체력도 있고 영화적 순발력이 뛰어난 좋은 배우죠.”

    -박성미씨가 나오는 드라마는 자주 보는 편입니까.

    “자주 못 봅니다.”

    -아내의 연기평을 해보세요. 독하게.

    “연기인들은 스테레오타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집사람은 워낙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기하는 상황에 젖어 또 다른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할까요.”

    -연기를 위한 연기라는 말인가요.

    “그렇죠. 남들이 보고 굉장히 잘한다고 평가할 때 그 부분이 또 다른 전형성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강 감독의 영화에 박성미씨를 한번 써보면 어때요. 주연은 아니더라도 조연으로라도. 화제가 될 거예요.

    “맞는 게 있으면 시키겠습니다. 일부러 넣으려고 하면 안 되거든요. 박성미 시키면 잘하겠다는 역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박성미씨가 한 인터뷰에서 ‘요새 남편한테 스캔들이 있지만 나는 남편을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지요.

    “옛날 얘기겠죠. 3, 4년 전에. 쉬리 끝나고 나서…. 나는 그런 것에 대해 한번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아주 어릴 때도 동네 처녀하고 스캔들이 난 적이 있죠. 동료, 친구 관계가 확대돼 얘기되는 것이라서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남자가 연애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여자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남자도 살면서 연애도 하고, 그런 거잖아요. 그게 사람 사는 거지. 자기 감정을 속이고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그러다가 다가오지 말아야 할 상황이 올 때는 거기서 슬기롭게 극복할 수도 있고…. 여러 경우가 있겠죠. 몇 년 전의 일은 얘기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내가 한번도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는데 둘이서 호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소문이 나더라고요.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배우인데. 나도 처음에는 조금 힘들더군요. 너무 완벽하게 얘기를 만드니까. 기자들은 모두 사실로 믿는데 나 혼자만 오리발을 내미는 걸로 분위기가 돌아가니까요.”

    -어쩔 수 없는 유명세라고 생각해야죠.

    “‘태극기 휘날리며’가 끝나면 무슨 유혹을 받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제는….”

    -스크린쿼터제 폐지에 반대하면서 삭발한 적이 있지요. 그런데 한국영화가 ‘반지의 제왕’을 무참히 꺾어버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제를 없애도 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국내 영화시장의 작은 파이를 지키려다 자칫하면 수출 주력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영화인들이 욕심을 부린다는 이야기가 경제계에서 나오고 있어요.

    “미국영화의 한국시장 점유율이 40% 밖에 안 되는 상황이에요. 한국영화가 선전(善戰)하기 전에는 미국영화가 65%의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었어요. 방화 의무상영일수가 실제 106일입니다. 나머지 259일은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거죠.

    할리우드 영화가 경쟁력이 있으면 현행 스크린쿼터제가 유지된다 하더라도 70% 이상 관객을 가져갈 수 있는 거죠. 쿼터제가 없어져도 ‘살인의 추억’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작품은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인디영화는 갈곳이 없어져요.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데 음지를 보완하는 제도나 법적 장치가 먼저 만들어져야 합니다.”

    -현재처럼 한국영화에 손님이 몰리는 상황에서는 스크린쿼터제의 실제적 의미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장 점유율 45~50%를 가져가는 영화는 6, 7편에 불과합니다. 한해 60~70편 영화가 제작되고 있거든요. 나머지 50편을 만든 제작자들은 대부분 적자를 냅니다. 우리가 숫자로 50% 점유한다고 해서 확실한 시장 장악력과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솥집 아들’의 사춘기

    -1000만 관객 시대가 영화계로선 큰 경사이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늘이 있어요.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이 책임질 문제는 아니지만. 출판도 불황이 심각하고 다른 공연장에는 손님이 들지 않거든요. 너무 가벼운 걸 추구하는 경박한 풍조를 개탄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그거 참 재미있는 현상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처음 영화할 때 방송국에 근무하거나 CF를 하는 친구들, 그리고 가요 쪽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영화인들은 라면도 제대로 못먹고 있을 때 그 친구들은 좋은 차 타고 좋은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관객의 정서를 읽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 전략과 노력이 맞아떨어진 소산입니다. 물론 영상시대가 되면서 읽는 문화가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과연 지금 독자들은 어떤 형태의 읽을거리를 원하고 있는지 연구를 해야겠지요. 불법복제가 문제가 되고 있는 음반시장도 다른 매체와 결합을 시도해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독자층을 붙잡기 위한 연구 개발 대신에 세태만 한탄하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거죠. 자기 분발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다소 주눅들어 죽은 시장 같지만 노력의 결과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반전될 수 있거든요.”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1950년대 종로의 시장거리가 무대로 등장한다. 진태와 진석의 어머니는 시장 한켠에서 영신과 함께 국수를 판다. 진태는 종로 거리의 구두닦이다. 시장 상인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묘사된다. 장터는 강 감독이 어린시절을 보낸 원체험의 무대다. 강 감독의 아버지는 마산 부림시장에서 주물장사를 했다. 시장 사람들은 그를 ‘솥집 아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장돌뱅이예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어요. 공장을 하다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침에 시장에 나갔다 저녁에 오시니까 나도 시장에 가서 놀던 기억밖에 없어요.”

    그는 마산중학교에 다닐 때 전교 1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강 감독은 경남의 명문학교인 마산고가 평준화되기 직전인 1978년에 입학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심하게 치르며 공부와 멀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수업이 끝나면 아버지가 사준 니콘F 카메라를 들고 경남 일대 농어촌을 누비고 다녔다. ‘돝섬’이라는 문학서클에 들어가 시를 썼다. 대학입시 같은 것은 시시하게 보이고 인간이 뭘까, 우주는 뭘까 하는 거창한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했다.

    “내가 공부를 왜 하지? 공부를 해서 뭘 어쩌자고? 공부를 잘한다고 인간답게 살아지나? 그런 고민을 너무 세게 했어요. 그러니까 공부가 안 되죠. 공부는 안하고 시를 쓰고 사진 찍으러 다니고….”

    그는 영화에서 상징을 잘 쓴다. ‘은행나무 침대’의 은행나무, ‘쉬리’의 토종물고기,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군화와 만년필…. 고교때 익힌 시의 함축성과 상징성이 시나리오에 반영되고 있는 걸까.

    -그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문학 작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생텍쥐페리와 리처드 버크를 좋아했습니다.”

    -시인 중에서는….

    “고은 시인의 시를 즐겨 읽었습니다.”

    지난달에 만난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도 고은 시인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우연의 일치겠지만 고은 시인이 알면 퍽 좋아할 것 같다.

    “고은 시인뿐만 아니라 박목월 시인도 좋아했고 대학 다닐 때는 황지우 시인의 시를 애송했어요.”

    지금 하고 싶은 건 요가

    그의 책상 뒤에는 캘러웨이 빅버사 골프채 일습이 있었다.

    “10년 전에 시작한 골픈데 지금까지 연습장에 딱 세 번 갔어요. 타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왼손잡이입니다. 4년 된 채가 깨끗합니다. 하도 골프를 안 치니까 누가 ‘채를 사주면 치겠지’ 하고 사줬는데 짬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필드는 몇 번 나갔는데 골프보다 잔디 위의 대화를 더 즐깁니다.”

    -술은 어느 정도 마십니까.

    “30대에는 참 많이 먹었어요. 3년 전에 병원에 갔더니 혈압이 높대요. 그래서 담배를 끊고 술을 줄였어요. 건강이 신경 쓰여서.”

    -영화배우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어요. 일단 얼굴 생긴 게 영화배우 되기는 틀렸죠. 어릴 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탔어요. 남들 앞에 잘 나서지도 못하고. 대학에서 실습작품 찍을 때 출연해봤는데 내 모습을 화면으로 보니까 영 이상해요. 나한테 배우는 안 맞아요. 내가 직접 제작하는 거, 매체를 통해 기획하는 거, 카메라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나하고 잘 맞는 거 같습니다.”

    그는 영화감독은 ‘노가다(막일꾼)’ 중에서도 ‘상 노가다’라고 말했다.

    “작품을 할 때는 개인적인 시간이 없어요.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하니까 책을 읽는 게 부담스럽지요. 좋아하는 음악도 못 들어요. ‘태극기 휘날리며’ 하느라 다른 걸 못했어요. 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좀 읽어야지요.”

    ‘태극기 휘날리며’는 시나리오 집필 기획 촬영에 3년이 걸렸다. 3년 동안 오로지 한 영화에만 매달렸다. 강제규 영화에서 관객 만족지수가 높게 나오는 비밀은 바로 오랫동안 한 영화에 푹 빠져 구상하고 수정하고 가공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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