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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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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수씨를 아차산에 ‘미친’ 재야사학자로 만든 것은 조그마한 돌무지였다.
  • 줄을 이은 돌무지는 아차산이 바로 고대 삼국이 그토록 차지하려고 애쓴 요충지였으며, 고구려 장수 온달이 전사한 곳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품고 있었다.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아차산 산신령이 아차산성 앞에 섰다. 산신령다운 체구에 산신령다운 표정에 산신령다운 음성이다. 잡다한 췌사(군더더기 말)는 빼기로 하자. 시간이란 게 뭐며 더구나 1000년의 시간이 나와 당신에게 얼마나 아득한 추상인지는 논외로 치기로 하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나고 죽었으며, 여기 엄연하고 오롯하게 남은 돌더미들 위로 인간의 이야기가 어떻게 켜를 이루며 쌓였을지, 거기 새삼 무슨 감상을 덧붙이지도 말기로 하자.

재야사학자라 불리는 김민수(56) 선생은 아차산의 석성을 맨처음 발견한 후 고향도 아니고 친분도 없던 아차산에 그의 인생 후반부를 완전히 투척하고 몰입해버린 사람이다. 산불을 끄러 민방위대원 자격으로 아차산에 올랐던 1989년 이후 그는 지금껏 아차산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날마다, 밤낮 없이, 아차산을 종횡무진 누빈다. 직업을 버리고 돈벌이도 포기했다. 명예 따위를 염두에 둔 건 더구나 아니었다. 사회 일반이 쫓는 성취의 기준을 외면하고 한 곳에만 몰두하는 이들을 흔히 ‘미쳤다’고 하는데, 그는 말하자면 아차산에 ‘미친’ 사람이다. 아차산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지고 두드리는 그의 모습을 이 동네 사람들은 산신령의 출몰로 이해한다. 산신령이란 게 뭔가. 산신령이란 본질적으로 이야기꾼이 아닌가. 폴 오스터의 말대로 이야기란 인간 운명의 증언이고 그게 모이면 곧 역사가 된다. 오랜 세월 그 인간 운명의 추이를 지켜봐온 산신령은 최상의 역사 증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선 그 산신령의 증언부터 듣기로 하자

“이게 아차산성의 서북벽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걸 15년 전 산불 끄러 올라왔다가 내가 처음 발견했습니다. 돌덩이가 자그마하지요? 고려나 조선에 오면 성벽의 돌이 커집니다. 성을 부수는 표차라는 무기가 생겼는데 그걸 막으려니 커졌던 거지요. 이곳이 이성계가 쌓은 조선성이라는 건 그래서 말이 안됩니다. 성벽 아래로는 층계처럼 돌을 쌓았지요? 뒷물림 쌓기라고도 하는 이 보축성은 고구려 양식입니다. 고구려는 구조물을 만드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나라였어요. 국내성도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쌓은 걸 확인했습니다. 지금까지 백제의 성이라는 설이 유력했는데 발굴하다 보니 백제 것은 없고 신라로 추정되는 유물만 잔뜩 나왔어요. 아차산성은 신라가 고구려 양식을 배워서 쌓은 석성입니다. 구리시 문화재 대장에 보면 아직도 토석 혼축성이라고 나와 있어요. 처음 발견 당시 돌 위에 흙더미가 무너져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던 거지요. 하지만 보세요, 완벽한 석성 아닙니까. 석성은 건설장비가 상당히 발달하지 않고서는 쌓을 수가 없습니다. 토성이 오막살이라면 석성은 맨션아파트지요. 석성을 쌓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졌다는 것은 서양의 폴리스에 해당하는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북한산’이라고 쓰인 명문기와가 다량 발굴되었습니다. 신라의 북한산은 바로 아차산이었다고 내가 전부터 주장해왔는데 유물발굴로 그게 증명된 거지요. 현재의 북한산은 조선 때까지 줄곧 삼각산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아차산은 신라의 북한산성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온다. 지금껏 우리 역사학계는 그의 발로 뛴 연구를 기본기도 못갖춘 아마추어의 헛소리라고 외면해왔다. 그러나 차츰 아차산 산신령의 울끈불끈한 듯 보이는 가설이, 면밀한 사료검토와 치열한 필드워크를 거친 과학적인 주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유물에서, 혹은 옛 문헌에서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섬세한 실마리들이 드러나 그 끝을 파헤쳐 가면 언제나 김민수 선생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곤 했다. 그가 시도한 역사적 고찰 중 대표적인 것으로 온달의 전사지를 밝혀내는 작업이 있다.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 바로 이 아차산성이라는 주장인데, 이젠 학계에서도 대체로 그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아차산이 신라의 북한산성이라는 것이 인정되면 지금껏 해명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게 됩니다. 삼국의 지도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영양왕은 온달의 처남이었어요. 삼국사기 열전편에 보면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장군이 한북의 옛 땅을 찾아오겠다며 남하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달이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전쟁터로 달려와 어루만지자 비로소 움직였다는 얘기도 있지요. 고구려는 신라와 몇 번 큰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영양왕 때의 전투는 딱 한번뿐이었어요. 이때 신라 진평왕은 한강 하류의 거점인 북한산성을 지키기 위해 손수 1만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와 고구려를 대패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본기에 나옵니다. 그때 고구려의 고승장군이 전사했다고 하거든요.

역사상 온달이란 이름은 많습니다. 전국적으로 온달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만도 25군데나 되지요. 널리 알려져 있는 것만 살펴봐도 단양에 온달산성이 있고 영월에 온달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터가 있으며 익산 미륵사지에 온달이 갖고 놀았다는 공깃돌이 있고 이천에 또 온달의 싸움터가 있거든요. 溫은 ‘옛’이란 의미이고 達은 多와 같이 ‘땅’이란 의미의 차음문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옛 땅을 찾은 장군은 모두 온달로 불려졌다고 유추해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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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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