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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奇人·名人 ②

여행가 정란|청노새 타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여행가 정란|청노새 타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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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 오름은 배움길과 같아서 큰 고생 뒤엔 반드시 큰 즐거움 있다. 오직 하늘만 오르지 못할 뿐 나머지 땅은 내 발이 밟으리라. 이용휴의 ‘백두산을 찾아가고 그 김에 동방 명산을 두루 여행하는 정란을 배웅하며’ 중 제7수.
여행가 정란|청노새 타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호흡하기만 해도 현대인은 행복감을 느낀다. 가까운 자연을 벗어나 더 먼 나라, 더 광대한 대륙을 밟는 낯선 세계에 대한 여행이라면 더구나 일상으로부터의 탈주일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인식과 존재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여행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수세기 전 여행이란 비용이나 시간, 노력에서 말할 수 없는 투자를 요구했다.

그렇기에 먼 옛날 탐험가 혹은 여행가의 역할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대륙을 넘어 다른 문명세계를 넘나든 마테오 리치나 이븐 바투타, 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와 아프리카,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항해한 정화(鄭和), 중국 대륙 구석구석을 뒤진 서하객(徐霞客), 그리고 신라시대 승려 혜초의 행적을 보면 여행의 참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금강산 열풍이 불었고 많은 이들이 명산을 탐방하는 멋을 즐겼다. 특히 18세기 이후 문인들은 남다른 여행 체험을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그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여행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 잠시 즐긴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연 그 시대에 여행 그 자체에 생의 의미를 둔 전문여행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고전 공부에 열중한 청년기

고전을 들추다 보면 시대를 앞서가는 특이한 사람 한둘쯤은 꼭 마주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명산대천을 누빈 전문여행가도 분명히 있었다. 오늘날의 여행가라는 개념에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어도 여행에 대한 열정이라든가 발로 걷고 당나귀를 타는 등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다다르는 여행가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말이다.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91)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던 것. 그는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으로,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 1605∼78) 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 경상도 출신 사대부가 전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정란도 처음에는 다른 사대부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었다. 서얼에다가 경상도 출신인 신유한은 문과에 장원급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조선 후기에 서얼이 문과에 장원급제한 일도 없었을 뿐더러 더구나 경상도 출신이 그러한 영광을 누린 예도 없다. 신유한은 신분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정란은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말을 빌려 타고 금오산에서 200리나 되는 길을 달려 가야산 밑에 머물고 있는 신유한을 찾아갔다. 신유한이 정란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정란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세간에서 이롭다고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온갖 것을 살펴보았지만 한 가지도 좋아할 것이 없고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옛사람의 문장입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공부했으나 장성해서도 알 수 없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문수보살에게 내 병통을 묻고, 유마힐거사에게 설법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유한은 정란의 문수보살이나 유마힐거사가 되기를 거부했다. 고문(古文)이 시서(詩書)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온갖 세상사람들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분분히 모여드니 그들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낫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던 것.

정란은 발끈했으나 이내 다시 학문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졸랐다. 그제야 신유한은 이 당돌하고 기백 넘치는 젊은이에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공부하라는 뜻을 담아 ‘정란에게 주는 글(贈鄭幼觀瀾序)’을 써준다. 이 글은 신유한의 문집 ‘청천집(靑泉集)’에 실려 있다. 한동안 정란은 신유한의 문인(門人)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서른, 세상에 묶인 그물을 끊고

나이 서른에 접어든 정란은 공부를 접고 여행을 떠났다. 경전을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는 사대부의 길 대신 여행이란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잠시 현실을 벗어나 산수와 자연을 탐방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권장할 일이지만, 여행 자체를 즐겨 전문적으로 여행하는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로 여겨졌다. 더구나 조선시대 선비에게 있어 이러한 현실방기는 절대적 금기의 하나였다. 그래서 여행에 몰두한 선비들은 대부분 현실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탈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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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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