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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奇人·名人 ②

여행가 정란|청노새 타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여행가 정란|청노새 타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조선 최초의 전문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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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란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현실도피적이었다기보다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긍정했다. 그는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의 욕망으로 끓어 넘쳤다. 우선 정란의 성격이 그랬다. 정란은 성품이 오만하여 남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기를 잘했다. 세상이 정한 예법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그에게 온갖 제한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조선의 현실이 성에 찰 리 없다. 자연스럽게 그는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남경희(南景曦, 1748∼1812)는 ‘정창해전(鄭滄海傳)’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선생은 생김새가 깡마르고 기이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성품은 뻣뻣하고 오만하였으며, 다리를 쭉 펴고 앉기를 좋아하는 등 예법에 구애되지 않았다. 문예에 일찍 숙달하였으나 머리를 굽혀 과거 공부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약관 나이에 청천 신유한의 문하에서 배워 문장의 큰 취지를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하며 “대장부가 해동에서 태어나 비록 사마천처럼 천하를 유람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동의 명산대천을 두루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며 노새 한 마리를 장만하여 홀연히 혼자 길을 떠났다.》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하여 살기를 거부했다. 대신 여행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당시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이었다. 서른의 나이에 그는 과감히 여행길에 올랐다.

《사람들은 제 둥지만 돌아보는 새와 같이 / 떠나려다가도 다시 망설이며 빙빙 돌건만 / 그대는 절세(絶世)의 용맹함 지녀서 /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 끊고 벗어났네.》



정란을 가장 잘 이해한 문인 이용휴가 백두산으로 떠나는 정란을 배웅하며 써준 시의 일부다. 부귀와 공명을 위해 주어진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조선조 선비의 길이었지만 정란의 인생목표는 달랐다. 그래서 단칼에 세상에 묶인 그물을 끊을 수 있었다.

정란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채제공(蔡濟恭)은 여행에 몰두한 정란을 두고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의 즐거움과 바꿀 수 없다”고 부러워했다. 여행의 즐거움! 그것이 처자를 버리고, 벼슬도 버린 채 전국을 주유(周遊)한 동기였다. 정란의 친구 강식준(姜式儁)은 정란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람은 숭상하는 것이 같지 않고 제각각 자기 취미를 완성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창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창해 역시 세상 사람이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창해에 대해 나 혼자만이 아는 사실이 있으니, 창해는 세상일을 버리고 산수를 즐기는 고질병이 깊다. 대자연의 원기를 호흡하며 세상 밖을 자유로이 노니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즐거움이라 여겨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지치지 않았다.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여 영화로움과 쇠잔함, 얻음과 잃음에 마음을 쓰는 세인들과는 만만 배나 다르다. 육체조차 누가 된다고 여기는 창해이니 그밖의 것이야 또 말해 무엇 하랴.(소은선생문집 권2 ‘증창해정유관란서 : 贈滄海鄭幼觀瀾序’)》

그랬다. 정란은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이라 여기며, 평범하고 구태의연한 일상의 유혹에 지지 않았다. 정란은 산수에 고질병이 너무 깊고, 여행이 즐겁기 때문에 그 길을 갔을 뿐이다. 그는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그는 왜 공부를 포기한 것일까. 정란이 여행에 뜻을 둔 사실을 눈치채고 그의 친구 신국빈(申國賓, 1724∼99)이 다음과 같은 충고를 적은 서찰을 보냈다.

그대가 송(宋) 이하의 책은 보기를 즐겨하지 않고 그저 양한(兩漢) 시대의 문장만 읽고 사마천이 천하를 장쾌하게 노닌 일을 사모하여 “천지의 큼과 조화의 무궁함은 그저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산천을 노닐어 온갖 변화와 괴상한 구경거리를 마음껏 하여 심장과 눈을 웅장하게 하려고 하였소. 그대는 참으로 주자(朱子)가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으며 끝을 알 수 없이 유구한 공적을 이 방문 안에서 이루었음을 모르오. 그대의 의지는 참으로 웅장하다고 하겠으나 그 학문은 잘못되었소. 대저 학문이란 그 근본을 고요함에 두고 천지에 참여하여 교화를 촉진시켜 만물을 기르는 것이니 이 고요함을 버리고서 무엇에 근본을 두겠소?(태을암문집 권4 ‘여정창해유관란 : 與鄭滄海幼觀瀾’)

신국빈은 당시 경상도 출신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자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알았기에 정란의 여행벽이 못마땅했다. 비판의 핵심은 학문의 근간을 주자학에 두지 않고 문장공부 한답시고 여행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학문의 근본을 정(靜)에 두었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직접 발로 밟지 않고 방 안에 앉아서 침잠하여 성찰해도 대자연의 비밀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신국빈의 말 가운데 주자의 위대한 학문이 이 방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그런데 정란은 천하를 여행하여 직접 대자연을 호흡함으로써 온갖 변화를 목도하고 괴상한 구경거리를 함으로써 오히려 순수하지 못한 사악한 것에 물들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동(動)으로 인한 폐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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