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30만통의 사랑편지로 바꾼 오아볼로

“10년만 해보자. 안 되면 그때 죽자, 했지요”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8-26 1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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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러지고 다시 붙고 부러지고 또 붙는 제 몸의 뼈를 수습하며 50여년을 산 사내가 있다.
    • 1m도 안 되는 작은 키, 7년째 집안에 갇혀 사는 신세. 이름 오규근. 그러나 고통에 이력이 난 이 남자의 표정은 불가사의할 만큼 환했다. 그의 웃음은 온 동네를 감염시키는 전염병이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30만통의 사랑편지로 바꾼 오아볼로
    서울 응암동은 사랑의 동네다. 오거리 약국 안 골목은 사랑의 골목이다. 수박가게 아저씨는 괜히 벙긋벙긋 웃는다. 이불집 아줌마는 모르는 사람에게 연신 활활 부채질을 해준다. 옆집에 손님이 오면 신이 나서 냉커피를 타들고 달려가는 할머니도 있다. 그 골목 안 깊숙이 ‘사랑의 전도사’ 오아볼로씨가 산다. 방 둘, 부엌 겸 거실 하나와 화장실이 있는 열 평짜리 다세대 주택. 여기가 바로 사랑의 진원지다. 웃음과 기쁨이 넘쳐나 점점 번져나가는 진앙은 아블로씨의 안방이다. 동네 애기들이 찾아와 아블로씨 침대 곁에서 깔깔 웃고, 퇴근한 가장도 이 집 윗목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하루의 피로를 풀어낸다.

    오아볼로씨는 7년째 방안에만 갇혀 산다. 아니 ‘갇혀’라고 말하는 건 틀리다. 외출하지 못하지만 갇혀 있는 건 아니다. 외려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날마다 그는 백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최근에는 우표값이 없어 쉰 사람으로 줄였지만 지금껏 30만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받은 이들이 다시 아블로씨에게 답장을 하니 그가 방안에 갇혀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서울 은평구 응암3동 351-21번지. 오아볼로 전도사에게 배달되는 편지는 매일 수북한 더미를 이룬다. 인쇄된 글씨체가 범람하는 시대에 손으로 쓴 펜글씨 자체가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 봉투 더미에서 나는 재미난 구절 하나를 발견했다. 재미? 아니 눈시울이 시큰하다는 편이 옳겠다. 주소가 청송군 진보면 사서함인 걸 보면 아마 거기 보호감호소에 머무는 인가 보다. 응암동 좁은 골목은 비가 오면 미끄럽다. 겉봉에 “우체부 아저씨, 빗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라고 서툰 글씨로 쓰여 있다.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말, 이런 간절한 마음을 멀리 청송까지 전염시킨 ‘주범’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오아볼로씨일 것이다.

    그가 받은 답장은 온갖 종류의 고민이 다 모인 근심 백화점이다. 취직을 못해 자살을 꾀하는 청년, 주변사람에게 원망이 가득 찬 말기 암환자, 이혼 위기를 맞은 부부, 과도한 체중으로 고민하는 여고생, 이유 없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부, 감옥에 갇힌 재소자, 탈영을 꿈꾸던 군인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인생을 전환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저는 오늘 운동시간에 햇볕을 쬐며 평소에는 못 느끼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느꼈어요. 삶의 작은 것에서 영감을 느끼지 못하면 변화할 수 없다는 전도사님의 말씀을 생각했어요. 마음을 낮추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들여다보니 방안의 거미나 모기에게서도 생동감과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졌어요.”(아까 ‘빗길 조심하라’고 쓴, 보호감호중인 소년)



    “저 같은 죄인에게 편지 주셔서 감사해요. 사람이란 마음 쓰기에 따라 하는 말과 쓰는 글이 달라진다는 말씀 잘 들었어요. 저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면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예쁜 꽃도 피우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재소자)

    “항상 남의 불행을 보고서야 나의 행복을 확인하는 어리석음과, 사지 멀쩡함에도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이 많았던 내 자신을 반성합니다.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우표를 보냅니다.”(우울증 주부)

    “저는 자신도 속이고 전세계 사람을 다 속였어요. 제 인생을 진짜로 밑바닥까지 떨어뜨릴 수 있어요. 기도하면서도 만날 울어요. 도와주세요. 그렇다고 제가 사람을 죽인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어느 귀여운 사춘기 소녀)

    벙실벙실 눈부신 웃음

    그는 올해 쉰셋의 남자다. 걷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한다. 태어난 지 사흘만에 이름도 모르는 병을 얻었다. 뼈가 이유 없이 툭툭 부러지는 병이다. 그러니 고통은 그만두고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다. 키가 1m도 채 안 된다. 부러지고 다시 붙고 부러지고 또 붙고 하는 제 몸의 뼈를 수습하며 50년 이상 견뎌왔다.

    고통에 이력이 난 사람의 표정은 예상과 달리 불가사의할 만큼 환했다. 그의 삶을 이야기하려는 지금 나는 자꾸만 쑥스럽고 무색하다. 악수를 나눈 직후 그는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일부러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척 봐도 안다.

    부족함이 없다고? 세상 사람의 80퍼센트는 그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가졌을 텐데 나는 그보다 만족한 웃음을 띠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들 힘겹고 괴롭고 억울하고 마땅찮다고 불만족을 호소할 때 어쩌자고 양다리가 다 망가져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이 불만이 없다고 고백하는가. 그의 얼굴에 가득 찬 벙실벙실한 웃음이 눈부셔 나는 한동안 쩔쩔맸다.

    그는 감자 한 알을 앞에 두고 세상 최고의 음식인 듯 오랫동안 감사기도를 했다. 태도와 표정이 감자 한 알을 하늘에 올릴 듯 열렬했다. 기도가 끝나면 감자는 이미 감자가 아닐지도 몰랐다. 눈앞의 음식을 우주의 정기가 다 모인 귀한 음식으로 변화시키는 기도였다. 보고 있는 사이 크리스천이 아닌 내게까지 절로 기도의 힘이 느껴졌다. ‘정성이 하늘에 닿는다’는 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기도였다. 기도가 끝난 후 그는 “정말 맛있어요” 하며 황홀한 표정으로 감자를 먹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 나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황홀하게 감자를 먹은 후엔 그를 큰 아빠라고 부르는 옆집 아기 예진과 장난치며 놀았다. 호박같이 생긴 길쭉한 오줌통에 예진이 몰래 오줌을 누느라 그는 내내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오아볼로의 집을 슬프고 소외된 장애인의 집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동정해서 모여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왠지 편하고 좋아서 사람들은 자꾸만 이 집에 모여든다. 와서는 제 삶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절로 배워간다. 오아볼로씨가 따로 무슨 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벙싯벙싯 웃기만 한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도 빼놓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로 얻지 못하는 깨달음을 얻어서 돌아간다. 그리고는 그 깨달음을 제 생활에서 실천한다.

    그래서 응암동 골목 안은 여느 골목과 다르다. 땀 흘리는 남을 위해 부채질 해주는 일이 자연스럽고, 내 발로 땅을 디딜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축복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세상에 이런 큰 스승이 또 어디 있으랴.

    그는 혼자가 아니다. 아내가 있다. 얼굴이 해맑고 마음씨 곱고 웃음이 수줍고 키가 남보다 조금 작은 윤선자씨는 남편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 어린 아내는 얼굴을 씻겨주고 밥을 차려주고 물을 떠주고 편지를 부쳐주면서 그를 돌본다.

    어느 날 문득 그의 배필이 되려 시골에서 찾아온 하느님의 현현(顯現) 같은 그 아내를 맞아 둘은 15년 동안 한 번도 다툰 일 없이 살아왔다. 도무지 의견이 대립될 일이 없다. 고맙고 안타깝고 소중하고 장하고 그런 눈으로만 서로를 바라본다. 지금 곁에 있어주는 것, 그 외엔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서로를 아무 끈으로도 묶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둘은 자꾸 웃는다. 햇살 같은 웃음이다. 보는 사람을 눈부시게 만든다.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마주보는 부부를 난 참 오랜만에 만났다. 수많은 부부가 눈을 맞바라보기는커녕 상대를 향해 이를 가는 경우가 흔한데, 꼼짝 못하고 자리보전한 남편과 구루병 걸려 키가 나지막해진 아내는 서로 물결같이 은은하게 마주 웃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희한한 수수께끼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부정탄 아이

    그와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와 나는 아블로씨에게 전화를 했다. 아까는 차마 묻기가 민망했던 질문이다. “병원에 가 봤어요?” “아니요….”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에요?” “서울 올라오고 나서. 딱 한 번. 그냥 병명이라도 알고 싶어서.” “뭐라고 해요?” “여기 ○○병원에 갔는데. 그냥 희귀난치병이라고 하데요…. 고치는 방법을 모르는 게 희귀병이라고….” 그는 자기병을 지금도 희귀병이라고만 알고 있다. 어디서도 정확한 병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서울 온 게 서른여덟 살 때인데 그때서야 처음 병원에 갔다니 아픔에 대처하는 방식이 어땠는지 알 만하다. 뼈가 부러지면 놀라고 통증이 오면 참고 뼈가 붙기를 마냥 기다리고, 그것의 반복을 그저 신화화한 운명으로 묵묵히 받아들였으리라. 그런 방식을 나무라는 건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1950∼60년대 농촌에서, 끼닛거리 마련하는 것이 오로지 문제였던 가난 속에서, 언감생심 병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단련되는 신비한 존재이다. 통증과 불구가 그의 심신을 지지고 바쉈지만 아블로씨는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병은 그의 키를 납작하게 줄이는 대신 정신의 키를 까마득하게 키웠다. 모조리 다 잃는 계산법은 이 세상에 없다. 잃어버리는 자리에 반드시 뭔가가 채워지는 신비가 작동한다. 그게 우주의 법칙이다. 그래서 아블로씨는 자꾸만 ‘불가사의한 웃음’을 벙싯벙싯 웃는다.

    그는 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났다.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홍원리. 아버지는 남의 논을 부쳐 먹고 사는 농부였고 그는 5남2녀 중 셋째였다. 가난이야 불 보듯 뻔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이웃집에 초상이 났다. 그래 그랬을까. 그는 지금도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리송하다. 초상집에 갔다 온 동네아이가 금줄 쳐놓은 그의 집안에 들어왔다. 산방의 문을 열고 산모와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찬바람이 들어왔겠지. 놀라기도 했겠지. 신생아는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산모가 아기를 안자 아기의 물같이 여린 몸에서 자그맣게 뚜둑거리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더욱 맹렬하게 울었다. 그리고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뼈 부러지는 인생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지요. 하하.”

    가난과 통증. 그게 그의 삶의 조건이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라고 사람들은 곧잘 최대치의 아픔을 비유하지만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뼈가 이유 없이 부러지는 병을 그는 달고 태어났다. 고통은 사흘째부터 시작되었다. 울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아팠지만 아무도 그 고통을 대신할 수가 없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는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알았으면 죽었을 것, 이라고 그는 느긋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30만통의 사랑편지로 바꾼 오아볼로

    오아블로씨와 윤선자씨 부부. 이 부부는 15년 동안 단 한 번 싸우지 않으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있다.

    “뼈가 부러지기는 하지만 내가 바보는 아니거든요. 머리뼈는 그대로 있거든요. ‘차라리 바보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언제나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아무래도 바보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바보라면 편지도 쓸 수 없었을 거 아닙니까? 하하.”

    그는 웃지 않아야 할 지점에서도 늘 웃는다. 울음 대신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옛일을 흡사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려는 버릇이 있다. 과장하지도 흥분하지도 비감에 빠지지도 않으려는 결벽일 것이다.

    본인은 여태 이름을 모른다지만 그가 앓는 병의 이름은 ‘골형성부전증’이다. 희귀병이라지만 요즘은 그리 희귀하지도 않다. 환자수가 늘어난 건 아니고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런 걸로 해석된다. 이 병은 선천적으로 뼈가 약해 작은 충격에도 뼈가 쉽게 부러지는 병이다. 아니 충격 없이도 뼈가 부러진다. 오아볼로씨도 사춘기까지 늘 그랬다. 해마다 꽃샘바람이 불면 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꽃샘바람에도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합니까? 먹고 죽는 약을 누가 줬다면 당연히 먹었을 겁니다. 실제로 부모가 약을 구해다 먹이는 경우도 봤어요.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런 짓을 했겠어요? 누굴 나무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지금 나는 그때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역시 살려놓는 게 좋은 일인 건 확실하겠지요?”

    인터넷 세상에는 다행히도 골형성부전증을 앓는 이들의 커뮤니티가 마련되어 있다. 서로 만나 놀기도 하고 정보와 관심을 나누기도 하는 모양인데, 아블로씨는 지금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건 아니다.

    ‘골형성부전증’은 인체 내 콜라겐 생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결손으로 생긴다고 한다. 콜라겐은 인체 내 결체조직 중에서 매우 중요한 단백질로 건축구조물의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골형성부전증은 출생 때 혹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잦은 골절이 주요 증상이다. 우리 몸의 뼈는 태중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만들어지고 한편으로는 흡수된다. 뼈는 골모세포라는 세포가 만드는데, 먼저 골기질이라고 하는 물질을 만들어서 세포 밖으로 배출하면 그 물질이 세포를 둘러싸게 된다. 이러한 골기질에 핏속을 돌아다니던 칼슘 성분이 침착하여서 딱딱한 뼈가 되는 것이란다.

    그런데 골형성부전증에서는 골모세포가 만드는 골기질의 절대량이 적고 그 성분도 비정상적이어서 형성된 뼈가 매우 약하다. 이를테면 모래가 많이 섞인 벽돌로 집을 지은 형국인데 그나마 벽돌이 모자라서 벽이 얇기조차 하다. 그러니 쉽게 부러질 수밖에. 아블로씨의 어린 시절은 이런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물론 알아도 별달리 처방할 방법도 없었겠지만. 다만 아버지가 침술을 배워 뼈가 부러지면 침을 놔 주셨다. 덕분에 아무는 건 빨랐다. 그런 세월이 자꾸만 흘러갔다.

    “어느 날 동생에게 취학통지서가 날아오고 동생이 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생겼어요. 형도 학교에 다녔지만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동생이 학교에 가게 되니 기분이 말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괜히 수치심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내가 아픈 사람임이 비로소 확인이 되고…. 뼈가 부러지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고통이더라구요. 기가 막히데요. 책을 가져왔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알록달록하고 향긋하고…. 동생이 없을 때 교과서를 보면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수치심이 들어요. 그리고 왠지 치사해져서 오래 들여다볼 수도 없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눈치를 채셨는지 연필과 공책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그러던 중 글을 배울 계기가 생겼다. 큰형이 만화책을 자주 빌려왔다. 형제가 많으니 집에 놀러오는 아이도 많았다. 아이들이 만화책을 읽으며 둘러앉은 사이에서 그도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한 아이가 말했다. “규근이, 너는 글씨도 모르면서 책장을 넘기냐?” 형이 두둔하며 나섰다. “아니야. 얘도 글 다 알아.”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면 규근이 니가 이 만화 한번 설명해봐라.” 그를 둘러싼 아이들 앞에서 ‘실은 글을 못 읽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림을 보며 대충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타고난 상상력이 있었나 보다. 아이들은 어-어- 하며 그가 글씨를 읽을 줄 아는 것을 믿어줬다. “알고 보니 그때 거기 있던 애들이 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거예요.”

    아이들은 학교도 안 다니면서 책을 읽을 줄 아는 규근이를 더 이상 우습게 보지 않았다. 병신 어쩌구 하는 놀림도 잠잠해졌다. 책을 읽을 줄 아는 힘! 그것이 개안(開眼)하게 된 기회였다. 글공부를 혼자 했다. 도구는 만화였다. 글 읽기는 알고 보니 식은 죽 먹기였다. 나중에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됐다.

    “아버지가 집 둘레에 과일나무를 심어놨어요. 포도, 대추, 밤 같은 걸 주겠다고 하면 애들이 빌린 만화책을 내게 갖다 줘요. 어느 날 동화책이란 걸 봤어요. 그림도 없는데 이건 만화보다 더 재밌는 거예요. 홍원초등학교 책을 다 빌려 읽고 나중에는 중학생들에게 부탁해서 인근 안중중학교 도서관 책도 내가 다 갖다 읽었어요.”

    그렇게 사춘기를 맞았다. 뼈는 여전히 부러졌고 그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하도 답답해서 안수기도 하는 곳에 아들을 데리고 갔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안수 목사가 “일어서서 걸으라”고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그의 다리에 거짓말처럼 힘이 주어졌다. 벌떡 일어섰다. 출입문 앞까지 목발 없이 걸었다. 그날 이후 아블로씨의 뼈는 부러지는 걸 멈췄다. 열여덟 살이었다.

    골형성부전증은 사춘기가 지나면 뼈 손상이 멈추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게 기도의 힘인지 병의 일반적 성질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지고 아물고 하는 반복되는 고통이 사라지니 우선 살 것 같았다. 공밥을 축내며 집안에 들어앉았기가 부모님께 죄송한 건 여전했지만.

    “바늘구멍만한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난 뭐를 해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몸이 이 모양이니 도무지 할 게 있어야지요.”

    스무 살이 됐다. 신체검사통지서가 나왔다. 그는 몹시 기뻤다. 국가가 자신을 한 사람의 남자로 인정을 해준다는 것이 통쾌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아버지가 내 이름을 면에다 올려놓지 않은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면에 내 이름이 버젓이 올라있다는 걸 안 거지요.” 그의 기쁨과는 달리 아버지는 걱정이 많았다. “이런 게 나왔으니 골치깨나 아프게 생겼다”고 하셨다. 장애가 있다는 말로만은 안 되고 본인을 데리고 경찰서까지 나와 확인을 받으라는 통고가 왔다. 걸을 수는 없고 먼 길을 업고 갈 수도 없어 아버지가 이웃집에서 짐자전거 한 대를 빌려왔다. 그 뒤에 아블로씨를 태웠다. 그의 첫 외출이었다. 슬프고도 설레었다.

    세상은 어떤 곳일까. 도시 사람들은 어떨까. 15리를 자전거 짐칸에 올라앉아 안중까지 갔다. 거기서 평택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비온 다음이라 길은 진흙탕이었다. 자전거를 끄느라 아버지 몸은 땀범벅이었고 진흙이 튀어 아들 몸은 흙범벅이었다. 간신히 경찰서에 닿았다. 아버지 등에 업혀 담당자를 찾아갔다. 담당자는 딱 한마디만 했다. “뭐하러 이런 사람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 기가 막혔다.

    “얼이 빠져 서 있으니 경찰서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날 쳐다봐요. 결국 나는 남의 눈요깃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외출이었어요”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신기한 그를 자꾸만 쳐다봤다. 시골서는 한 사람이 볼 걸 도시에서는 열 사람이 쳐다본다 싶으니 동경하던 도시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날 경찰은 몸이 자그맣고 아버지에게 업혀온 그에게 반말을 했다. 얘, 쟤하며 숫제 아이 취급이었다. 몹시 기분이 상해 그도 반말로 응대했다.

    “그제서야 알아챘는지 존댓말을 하데요. 그렇지만 그게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다. 소용없는 일일 뿐이다. 좌절의 외출이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아버지는 그를 업고 빵집에 갔다. 빵을 사줬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본 빵집. 그렇지만 처음 보는 달콤한 빵이 모래 씹는 맛이었다. 거기서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노려봤어요. 끝까지 노려봤더니 슬금슬금 눈길을 피하데요. 세상 살면서 처음으로 남들을 그렇게 노려봤을 겁니다.”

    “10년만 더 살아보자”

    돌아오는 차안에서의 절망은 지금도 생생하다. 죽는 것만이 길이라고 생각했다. 갖가지 방법을 속으로 연구했다.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몸에서 눈물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 이상하게 한번만 살아보고 싶어졌다. 10년 동안만 글을 쓰자, 소설가가 되어 내가 당한 수모를 기록하자. 설움을 하소연할 길조차 없는 장애인의 대변자가 되자. 10년 동안만 해보자. 안 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글을 쓰려면 신문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세상 소식을 아니까. 그런데 신문 볼 돈이 있어야지요. 그때 신문 값이 한달에 250원이었어요. 내게는 어마어마한 돈이죠. 궁리를 하다 집 문간방에 구멍가게를 열었어요. 하루 연필 한 자루를 팔 때도 있고 아예 못 팔 때도 있고. 그래도 돈을 모으고 있다는 희망은 있었어요. 폐품도 주웠어요. 목발을 짚고 다니며 고물을 주웠지요. 재수 좋을 때는 일주일에 15원도 벌고 나쁠 때는 5원도 벌고. 그렇게 모으니 6개월 만에 1800원이 모아지데요. 나로선 상상도 못하는 큰돈이었어요. 당장 신문을 신청했죠.”

    그리고 남은 돈을 어떻게 보관할까 고민하다 땅속에 묻기로 한다. 동화책에서 배운 수법이었다. 헌 깡통에 돈을 넣고 산에 가서 땅을 파고 묻었다. 하루 몇 차례 거기 가봤다. 눌러보고 만져봤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돈이 없어져버린다. 그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다. 혼자인 그, 탈출구가 없는 그, 희망을 만드는 그의 안타깝고 외로운 이야기다.

    돈을 잃고 맥이 빠져 잠이 들었다. 당연히 꿈을 꾼다. 꿈은 그를 구원해줬다. 그때 처음 그는 꿈의 마술을 경험한다. 꿈에 돈을 찾는 장면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돈을 찾는다. 아블로씨의 인생에 꿈은 오아시스다. 목이 말라 쓰러질 만하면 꿈이 와서 목을 축여줬다. 꿀벌이 날아오는 꿈을 꾸면 실제로 벌이 날아왔다. 약초책과 꿀벌책을 한창 감미롭게 읽을 무렵, 꿀벌 한통이 소원일 때의 일이었다.

    어려운 고비마다 꿈이 그를 구원했다. 절대자의 손길이 그의 주변을 포근하게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해마다 소설을 써서 신문사에 보냈지만 소식은 없었다. 사실 소설이 무언지도 몰랐다.

    “사람들 참 무심해요. 누가 그때 내가 보낸 원고를 보고 소설은 이런 게 아니다란 말 한마디만 해줬어도….”

    집에는 고물 라디오가 있었다. 장애인 대상 프로가 딱 하나 있어 그걸 자주 들었다. 기독교방송의 ‘찬양의 꽃다발’. 신문사에서는 통 소식이 없으니 거기라도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외로운 사연을 모두 썼다. 장애인 펜팔을 주선해주기도 하는 프로였기에 친구를 간절히 원한다는 말도 썼다.

    “평택 사는 바울로라는 형제가 편지를 보냈어요. 건축일을 하다 떨어져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이죠. 나는 완전히 마비가 돼 움직일 수도 없는데 당신은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당장 평택으로 올라오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종이 되는 길이 있다는 거예요.”

    그 제안은 두려웠다. “하느님, 30여년 살아온 이 방에서 이대로 죽을 줄만 알았는데 난 이제 어떻게 하지요?” 기도하다 잠이 들었다. 다시 꿈이 꾸였다. “뒷문으로 나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지팡이 끝이 3분의 1쯤 돌 위에 박히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 글씨가 나타나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꿈에 용기를 얻어 평택의 바울로씨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입영통지서 사건 이후 십수 년이 흘러갔고 두 번째 외출이었다. 키는 그대로였지만 그새 정신은 독서와 고독의 담금질로 부쩍 성숙해 있었다.

    “드디어 천국에 왔나보다 했어요”

    바울로씨가 제안한 일은 편지사역이었다. 지금 오아볼로씨가 맹렬히 진행하는 바로 그 일이다. 갇혀 있는 재소자, 희망 없는 장애인, 중병 앓는 환자,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애정을 듬뿍 담아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기본 메시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독교적 틀이지만 거기 담는 사연은 얼마든지 자유로웠다. 그는 편지를 아주 잘 썼다. 하긴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었으니. 바울로씨가 그를 선택해서 ‘편지사역’을 권한 것도 그의 달란트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바울로 형제에게서 ‘아블로’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성경에 나오는 전도사 이름이래요. 편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니 그 이름이 좋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그는 ‘규근’을 버리고 ‘아블로’가 되었다. 편지사역은 쉽지 않았다. 편지 쓰는 건 얼마라도 쓰겠는데 우표값이 문제였다. 아니 우표값은 답장 속에 몇 장씩 넣어 보내주는 걸로 충당하면 그럭저럭 되겠는데 먹고 사는 게 문제였다.

    “단칸방 하나만 있었으면 그 일을 만족하게 계속했을텐데.” 바울로씨야 늘 아블로의 편이었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겨울이 닥쳤고 날이 추워졌다. 다함께 가난한 시절이었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아블로의 방에 초저녁부터 연탄불이 꺼졌다. 몸은 부실한데 점점 뼈가 얼어왔다.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추위였다. 숱한 통증을 참아온 그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심을 했다. ‘아무리 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이 기회에 죽어버리자. 기도하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니 기도하면서 죽자.’ 그리고 맥을 놔버렸다. 그런데 차츰 몸이 풀리면서 편안해졌다. 몸이 따뜻해졌다.

    “난 내가 드디어 천국에 왔나보다 했어요. 하도 아늑하고 편해서. 바울로의 아버지가 새벽에 우연히 마당에 나오셨다 내 방에 불이 없는 걸 보고 연탄불을 넣어주신 거였어요. 날 살리려고 그날 나타나신 하느님이죠.”

    그런 위기는 파도같이 주기적으로 왔다. 지원 없이 편지 쓰는 일은 늘 위태로웠다. 최소한 거처할 방 한 칸과 한달 쌀값과 우표값, 한겨울 연탄값은 필요했다. 집에 있을 때는 몰랐던 필요였다. 신문을 보기 위한 문화비를 여투는 것은 지나친 사치였다. 게다가 다시 뼈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괴로웠다. 기도를 하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바울로씨의 집을 나오기로 했다. 바울로 혼자만도 힘겨운데 거기 얹혀살자니 식구들의 눈치가 보여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디 좋은 곳에 취직한 줄 알고 있는데 돌아갈 수야 없죠. 그리고 돌아간들 뭐합니까. 배운 일이 편지사역이니 방만 있으면 어딜 가든 그걸 하고 싶었어요.”

    힘겨울 때마다 꿈을 꿨다. 꿈은 늘 그에게 희망이었다. 하얀 두루마리가 좍 펼쳐지면 그가 그걸 씹어먹었다.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루마리였다. 잠을 깨고 나면 다시 새 희망의 정수리를 부여잡은 듯 기운이 생겼다. 그 역시 이름대로 ‘전도사 아블로’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를 고통스럽지만 살려두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

    부여에서 3년을 살았다. 괴로운 시절이었다. 아프면 진통제를 먹었다. 처음엔 한 주일에 한 알, 중간엔 하루 한 알, 나중엔 하루 3알을 먹어야 했다. 진통제 없이는 몸이 덜덜 떨렸다. 결국엔 진통제를 먹어도 떨렸다. 하느님이 실제로는 없는데 내가 이 고생을 왜 하나 싶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편지는 날마다 썼다. 은혜를 받았다는 답장도 늘 왔다. 세상 어딘가에는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따뜻한 손길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니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 미끄러졌다. 뼈가 안 부러질 리 없었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맥을 놓고 누워있었다. 통증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꿈인 듯 현실인 듯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아비집을 떠나 네 친척집에 가리라. 그 목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누님과 매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을 따라 그길로 서울로 올라왔다. 1988년이었다.

    서울은 올림픽 준비로 한창이었다. 키 작은 한 사내의 입성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누님은 응암동에 600만 원짜리 지하전세방을 얻어줬다. 편지는 계속 썼다. ‘문서가정복음’이라고 이름 지은 책자 형태의 회지도 만들었다. 교회에서 작지만 지원을 해줬고 차츰 후원을 원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어떤 이는 편지에 감동했다면서 우표 몇백 장을 넣어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는 1000원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값졌다. 한달에 1000원을 봉투에 넣어 보내는 사람이 1만명이 되는 것이 예전의 꿈이었고 지금도 그건 여전히 꿈이다.

    어느 날 ‘문서가정복음’이란 소책자의 표지를 뭘로 할까 망설이다 자신의 얼굴 사진을 넣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못생겼다고 거울도 한번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표지에 사진을 턱 넣었다니깐요”하며 여태도 수줍어한다. 그는 온갖 환난을 거치는 중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내면에서 비치는 환한 빛이 얼굴에 가득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교회에 간증도 다녔고 그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다. 편지는 날마다 100여통씩 썼다. 이제 우표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여리고 고운 손님이었다.

    아블로씨 사진이 나온 책표지를 받아들고 윤선자씨는 ‘이 사람이다! 너는 이 사람에게 가라! 그의 곁에서 그를 돌보라!’는 명을 들었다. 처음엔 외면했다. ‘왜 그 사람이에요? 내가 왜 그런 일을 합니까? 말도 안 돼요!’하며 저항했다. 둘은 진작부터 편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핑크빛 사연은 전혀 아니었고 고통을 견디는 법,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는 법, 좋아하는 성경귀절에 관한 얘기들을 나누는 사이였다. 윤선자씨는 뼈가 부러지는 대신 휘어지는 구루병이었다.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 조숙해진 소녀였다. 성장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휘어진 뼈를 수술해야 하고 통증도 심했다. 때문에 아블로씨의 소외감과 두려움, 신의 목소리를 듣는 기쁨들을 손에 잡을 듯 환하게 이해했다. 그 윤선자씨가 하느님의 소리에 항복하고 아블로씨를 찾아 서울로 온 것이다.

    둘은 기쁨으로 살림을 합쳤다. 밥 한 공기, 김치 한 보시기만으로 충분히 달고 기꺼웠다.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병 때문에 둘 다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서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됐다. 둘은 “고통은 정신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명약”이란 해석에 동감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기쁘게 살자”는 인생관에 합의했다. 텔레비전, 라디오에서 그들을 취재해갔다. 이웃사람들이 그들의 고운 모습을 보러 찾아왔다. 그들은 웃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일상을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부부의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감동하곤 했다. 아내가 생긴 후 그가 쓰는 편지는 더욱 다정하고 다채로웠다. 아블로씨는 이렇게 말해서 나를 웃겼다.

    “저는 편지를 쓰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한 줄 알았어요. 정말 그랬어요. 뼈가 부러지지 않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병이 없어도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요. 알고 보니 건강한 사람이 행복해지기가 더 어렵더라고요, 장애인은 금방 포기할 줄 아니까 차라리 행복해지기가 더 쉽거든요.”

    지상의 방 한 칸을 위한 기도

    아내가 생긴 후 아블로씨의 기도제목이 달라졌다. 지상의 방 한 칸을 용납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들의 지하방보다 엄청나게 비싼 2000만원짜리 방이 있긴 했다. 다행히 집주인은 신심이 깊은 권사 할머니였다. 모자라는 돈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모아졌다. 아블로씨에 대한 기사를 본 부자들이 방값에 보태라고 난생 처음 보는 1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선뜻 내놓고 가는 거짓말 같은 일도 생겼다. 그때 아블로씨의 꿈에 다시 하느님이 나타나 ‘들에 핀 백합을 보라’는 성경구절을 말씀하셨다. 그게 지금 열 평 집이다. 이사온 지 하마 10년이 흘렀다. 이제 아블로씨 집은 동네의 중심이다. 적어도 이 골목 안에 그를 장애인이라고 불쾌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가 탄 휠체어가 어느 날 교회계단을 굴러내리는 사고가 생겼다. 목발에 의지해 실내에서 움직이는 정도는 됐는데 이 사고로 완전히 다리를 못 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휠체어를 밀던 자원봉사자가 방심하여 손잡이를 놓쳐버린 거였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2년을 버텼다. 수술도 불가능했고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일도 아블로씨의 얼굴을 어둡게 하지는 못했다. 아내 윤선자씨도 마찬가지. 남편의 시중거리가 훨씬 많아졌지만 불편이라고 여긴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이 아직도 상처받는 건 사람들이 무심코 보내는 손가락질이다.

    “그렇게 많은 일을 당해도 무심코 던지는 ‘병신이 육갑하네’ 같은 말을 들으면 아픔이 굉장히 오래가요. 사람들은 장애인이야 뭐 그런 말을 인이 배기도록 들어 둔감할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아, 보통사람들도 멍든 데를 더 때려 보세요. 더 아프지 어디 멍들었다고 덜 아픕니까? 하하.”

    이제 그는 상처를 내보일 때에도 유쾌함에 포장해서 말할 줄 알게 됐다. 하루 쉰 통 편지를 쓰고 책을 읽고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일상 중에 아블로씨가 빼놓지 않고 꼭 하는 일은 운동이다. 제자리에 앉아만 있는 사람이 무슨 운동을? 목과 손가락 발가락의 모든 관절을 조금씩 조심스럽게 하루 40분 이상 움직이는 운동을 그는 매일 하고 있다. “전도사님이 하는 걸 보면서 저게 운동이 될까 했는데 어느 날 텔레비전 대체의학 프로그램을 보니 똑같은 운동을 소개하던걸요.” 옆에서 윤선자씨가 슬쩍 남편 자랑을 했다.

    외출이 원천봉쇄 됐으니 둘의 하루는 남들보다 훨씬 밀도가 높다. “방안에만 있으니 시간을 아주 알뜰하게 낭비 없이 쓸 수가 있어요.” 최근엔 자신의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희망을 푸는 두레박’이라고, 제목도 미리 정해뒀다.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한탄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책읽고 기도하고 글쓰고 이웃과 이야기하기에 하루는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딱 알맞은 길이 아닌가요?”

    그는 우표가 필요한 사람이다. 우표가 넉넉해야 아블로씨는 행복해진다. 190원짜리 우표 다섯 장이면(열장이면 물론 더 좋다!) 그를 감동시킬 수 있다. 괴롭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손을 내미는 게 그가 세상에서 맡은 사명이고, 그 사명은 우표가 있어야만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장, 혹은 열 장의 우표를 아블로씨에게 보내자. 너무 많이 보내면 그가 겁을 낸다. 당신 대신 아블로씨가 힘겨운 삶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려줄 것이다. 그 격려는 돌고 돌아 결국 내게로 올 것이다. 아블로씨 전화는 307-8278. 이메일 주소는 oablo@hanmail.net. 메일을 받으면 그는 금방 답장을 보내준다. 답장 쓰는데 걸리는 시간에서도 그는 챔피언감이다. 둘째가라면 좀 서러울 진짜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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