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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 글: 이이화 역사학자 history13@hanmail.net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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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역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문벌자랑을 하는 선비들에게 ‘조상 뼈다귀를 우려먹는다’고 호통을 치셨다. 貴賤이나 嫡庶를 가리지 않고 능력과 인품을 중시하신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평등주의자였다.
일본 경찰 뺨 후려치던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이이화

나의 아버지 야산 이달(也山 李達 : 왼쪽에서 두 번째) 선생 주변은 주역에 통달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붐볐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나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는 어김없이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 무엇보다도 내 아버지의 행적이 주변에 많이 알려진 탓일 게다.

우선 당신의 제자들이 대구 대전 서울 등지에 퍼져 살면서 스승에게서 배운 ‘주역’을 강의했다. 그 가운데 한 분인 대산 김석진 옹이 아버지의 학문과 행적을 담은 ‘스승의 길, 주역의 길’(한길사)이란 책을 펴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고 조용운 교수는 아버지의 기행(奇行) 같은 행적을 담은 글을 신문에 연재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생애는 ‘신비스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분명히 나의 아버지 야산(也山) 이 달(李達)(감히 객관적으로 기술할 요량으로 존칭을 생략)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물론 그랬기에 아들의 삶에 적지않은 고통을 떠안겼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재야사학자나 민중사학자라고 부르고 한문에 해박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영향 탓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한 시기도 있고 심각한 갈등관계였던 적도 있다. 또 한때는 아버지를 한없이 원망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는 내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식으로 돈벌어 ‘이상촌’ 건설

자, 지금부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나는 열다섯 살에 가출하였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다. 그때 야산선생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옥가실이란 곳에서 삼일학원을 개설하고 한문과 주역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아버지한테 배우던 한문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가출을 결심하였다.

초봄 어느 날, 나는 배우던 한문책을 싸들고 부여장터에 놀러 가는 척하면서 아버지 곁을 떠났다. 마을 어귀 작은 고개를 넘으면서 삼일학원을 바라보고 꾸벅 절하는 것으로 하직 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입 속으로 ‘배반’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눈물을 삼킨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쯤에서 아버지가 살아온 역정을 간단히 더듬어보자. 아버지는 1889년 지례 원터(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에서 몰락한 향반(鄕班)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한문을 배울 때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장해서는 독학으로 주역을 독파하였다고 한다. 3·1운동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김천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잡혀 취조를 받기도 하였다. 당시 아버지를 둘러싸고 ‘주역 읽다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탓인지 아버지는 이내 풀려났으나 그때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40대 들어 대구로 나온 아버지는 엉뚱하게도 ‘기미(期米, 주식 형태의 투기)’에 손을 댔다. 주역에 통달했다는 소문 탓인지 아버지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나는 이 무렵 태어났다. 아무튼 아버지는 기미로 꽤 큰돈을 벌었으나 집안 생활비는 거의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집에서는 아버지가 혼수 자금이라도 보내줄까 기다렸으나 끝내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혼례를 이틀 앞두고 무명 두 필 들고 와서 큰형수에게 던져준 것이 아버지가 한 일의 전부였다고 한다.

대신 아버지는 기미로 번 자금으로 철원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20여호를 데리고 이주하였다. 고대 정전법(井田法)에 따라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실천하는 이상촌을 만들어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 2년 만에 집단농장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동료를 통해 백정들의 인권운동단체인 형평사에 자금을 보내주고 만주로 독립자금을 보내주었다고도 한다.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전시체제 아래에서는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참배나 동방요배(東方遙拜), 또는 묵도(默禱)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화를 소개해보기로 하자.

대전역 광장을 지날 때 마침 묵도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렸다. 순간 모든 사람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묵도를 하였다. 그러나 야산선생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태연히 걸어갔다. 그러자 역전 주재소의 순사가 이 광경을 보고 일행을 불러 세운 뒤 왜 묵도를 하지 않느냐고 힐문(詰問)하였다. 그러자 야산선생은 느닷없이 그 순사의 뺨을 후려치며 “너야말로 묵도는 하지 않고 길가는 사람들을 눈뜨고 쳐다보고 있었으니 혼 좀 나야겠다”고 소리친 뒤 유유히 걸어갔다고 한다.

“당신 ‘羅가’요, 나가!”

그 뒤 아버지는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해방 무렵에는 가족을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 둔 채 전국을 분주하게 유랑했던 것 같다. 또 해방 후에는 가족마저 대둔산 아래 수락리에 옮겨두고 당신은 대둔산 석천암에 자리잡은 채 주역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찾아와서 불쑥 이렇게 내뱉었다.

“야산선생이 도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산속으로 들어오다가 성을 잃어버렸소. 내 성을 좀 찾아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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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이화 역사학자 histor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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