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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기행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50년 롱런 선거 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내 작품”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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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여순반란사건 때는 7일간 돌무덤에서 물 한 방울 못 마시며 숨어 지냈고, 자유당 치하에서는 민주당 선거운동을 하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간발의 차이로 피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1980년 신군부 집권 때는 ‘사형수 DJ’의 구명탄원서를 써줬다가 직장을 잃었다.
  • 그가 지내온 하루하루가 곧 살아 있는 한국현대사다.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호당(湖當) 신영길(辛永吉·78) 박사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어떠한 상황을 이야기할 때도 “일천구백육십오년,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씨는∼” 하는 식으로 정확하게 했다. 혹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수십 년 전 일기장을 꺼내 확인했는데, 일기장에는 50년 전부터 적어온 하루하루의 일과가 빽빽했다. 그는 사소한 일도 빠짐없이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신영길 박사는 한국장서가협회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현재는 명예회장). 지난해 광운대에 거의 다 기증했지만 한때 그가 소장한 책은 무려 5만5000여권에 이른다. 2.5t 트럭 14대가 넘는 분량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신 박사의 생애는 그가 수집한 장서보다 더 방대하고 역동적이며 다채롭다. 정치인, 경제관료, 금융인, 연구자로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현장에서 만나온 그는 최근 자신의 삶을 꼼꼼하게 정리한 회고록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현장’을 냈다. “한 개인의 삶이 아닌, 신영길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한 세대의 역사”라는 그의 말처럼 회고록에는 여순반란사건, 3·15부정선거, 군사정권 치하 증권파동, ‘사형수 김대중’ 구명활동 등 한국 현대사를 대표할 만한 사건이 가득했다.

신영길 박사는 1926년 전남 광양의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입학 후 아버지를 따라 간 쌍계사에서 우연히 태극 문양을 보았다.

“아버지는 ‘저 그림이 우리나라 태극기에 있는 태극’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태극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일본에 합방되기 전 우리의 국기라고 하시더군. 얼마 후 학교 미술시간에 태극을 그리고 그 옆에 ‘태극기’라고 한글로 적어 제출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주재소에 가자고 하더군. 11살밖에 안 된 나를 불도 없는 캄캄한 유치장에 그냥 가두었어요. 밤새 울면서 덜덜 떨었지.”

그의 조부가 동학군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데다가 ‘태극기 사건’까지 겹쳐 그는 광복이 올 때까지 ‘불온분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혔다.

보통학교 졸업 후 신 박사는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길 원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고 여수의 철도국에서 일했지만 그는 보통문관고시를 목표로 법전을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그는 곧바로 철도국에 사표를 내고 여수 건국준비위원회 서기로 봉직하면서 여운형, 송진우, 조병옥과 같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거물정객들을 만난다. 그러던 중 광복 한 달 후인 9월15일 시내 곳곳에 나붙은 경찰관 모집광고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광복 후 첫 경찰관 공채였어요. 합격했고 한 달 후 여수 서정파출소에 순사로 근무하게 됐지요. 당시 경찰서 직원은 세 파로 나뉘어 있었어요. 일제시대 경찰관, 치안대에서 들어온 경찰관 그리고 나처럼 공채로 들어온 경찰관. 세 파벌 사이에서 갈등도 많았지.

1946년 서울에 콜레라가 퍼져 전국 경찰청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난 김구 선생이 계신 서울 경교장으로 파견됐어요. 아다시피 그곳은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아지트였어. 당시는 이승만 박사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설을 해 이에 대한 임정요인들의 성토가 하늘을 찌를 때였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당시 유명한 임정요인인 김구, 김규식, 이시영 선생 등을 다 만나보았지. 이들은 훗날 내가 자유당 치하에서 야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도록 이끌어줬지요.”

파견근무가 끝난 후 그는 여수로 돌아왔고 2년여가 흘렀다. 그 사이에 미군정청 법무국에서 시행하는 조선변호사 예비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본시험이 경찰교육을 받는 시기와 겹쳐 응시하지 못했다.

여순반란사건의 참상

1948년 10월19일 그 처참한 여순반란사건을 그는 현장에서 직접 겪었다. 그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정복을 입고 출근하던 그는 여기저기서 들리는 ‘인민군 만세’라는 고함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한복으로 갈아입고 건너편 야산으로 도망쳤다.

“돌무더기가 쌓인 길가에 돌무덤을 쌓아 은신할 만한 공간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6박7일간 물 한 방울 못 마시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지요. 대소변 한번 못 봤어요. 시내 쪽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은신처 옆을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이들에게서 나는 담배냄새, 땀냄새, 음식냄새를 맡으니 왈칵 배가 고프더라고요. 그래서 돌담을 헐고 나가 근처 밭으로 들어가 생고구마를 캐 먹고 7일 만에 처음으로 소변을 보았지요. 시내로 나갔더니 반란은 진압되었고 군경이 눈에 불을 켜고 반란군과 협력자를 색출하고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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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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